한국사에서 두 명의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왕비, 우씨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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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두 명의 왕을 남편으로 둔 유일한 왕비, 우씨왕후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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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최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고구려시대를 다룬 우시왕후가
공개되었죠.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삼국시대 배경의 사극이고
또 심지어 한 번도 다룬 적 없던 구대왕 고국천왕 때의 시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종서 지창욱 김우열 등 톱스타들의 여련과
많지 않은 고구려 초창기 시대를 그린 사극이라는 희소성 있는 드라마
인데요.
드라마 우시왕후의 실제 역사 배경 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우선 배우 지창욱님이 맡은 고 남무 라는 캐릭터는
삼국석의 기록에는 고국천왕을 키가 아홉 척이고 모습과 자태가
훌륭하며 힘은 소틀 들어 올릴 만큼 세었다.
일의 임에서는 경청하여 결단하고 관대함과 예리함을 적당히 지켰다
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고국천왕은 고구려 초기 역사에서 본격적인 중앙집권화를 시작시킨
왕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구려라는 나라는 중홍이 이끌고 온 부여 유의민 세력이 졸번의 토착
세력과 연합해서 만든 계로부라는 부족을 필두로
이렇게 5개의 부족이 연합해서 만든 연합국가로 시작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왕은 계로부에서 배출 하기는 하였으나 다른 4개의 부족
들도 고구려를 이루는 부족으로 각 부족의 부족장들의 권력이 절대적
이었고 설령 고구려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부족연합이라는 체제
에서 부족장들의 존재감을 압도하지 못했던 게 고구려 초기 역사였습니다.
각 부족의 부족장들을 고추가 혹은 상가라고 불렀는데 이런 부족장
들을 처음으로 굴복시켰던 왕이 다름 아닌 구대왕 고국천왕이었습니다.
고국천왕은 계로부 연노부 전노부 관노부 순노부 총 5개의 부족을
더 이상 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로 하며 부족명 사용을 금지하고
각각 중앙 서부 북부 남부 동부 등 방위명으로 개편하였습니다.
오래도록 써왔던 부족명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았고 완벽하게 방위명
으로 자리잡는 데는 더 시간이 걸리 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방위명
을 전환한 국왕은 고국천왕이었던 거죠.
아 물론 고국천왕은 고추가 상가 등 나머지 네 부족의 부족장들을
부족장이 아닌 귀족관료로 받아들 이며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완전한 중앙집권화는 아니었 지만 고구려라는 나라가 부족연합
으로서 성격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고국천왕의 과감한 개혁이었죠.
고국천왕이 이처럼 부족장들의 세력을 국왕 밑으로 행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할 수 있게 했던 배경 이 있었습니다.
구대왕 고국천왕은 팔대왕 신대 왕의 차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장남이 반발 할 수밖에 없겠죠.
고국천왕의 아버지였던 팔대왕 신대왕은 죽으면서 유언으로
마다델은 어질지 못하다고 하여 둘째 아들 고국천왕에게 양의하였
죠.
신대왕의 장남이자 고국천왕의 친형의 이름은 발기 눌리지 마세요
자신이 아닌 동생이 고구려의 왕 이 된 것에 불만을 품은 발기는
한나라 세력이었던 요동태수 공손강과 고구려 부족연합 가운데 연모부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이 직접 날쌔고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싸워 물리쳤는데 베어진 적의 벌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합니다.
고구려를 구성하는 부족 가운데 계류부를 언제나 괴롭혔던 부족
이 바로 연모부였습니다.
고구려 부족들 가운데 왕을 배출 하는 계류부에 이어 넘버2 부족
이 연모부로 이 연모부에서는 왕비 를 배출했습니다.
고구려 초창기 왕들은 이 연모부 의 견제에 왕권 강화를 주고 실패
하곤 했으며 고구려 초기 역사는 계류부와 연모부
사이의 경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죠.
즉 중앙집권화 왕권 강화를 하고 싶다면 연모부를 굴복시키는
게 우선시 되어야만 했습니다.
고국천왕의 아내 드라마에서 전종서 배우가 맡은 왕후 우씨 역시 고국천왕
이 가장 경계하던 연모부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연모부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고국천왕 제위 초기에 전행을 일삼 던 연모부의 사람들이 있었는데요
삼국사기 기록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중예대부 패자 어비료와 평자 좌 가련은 모두 왕후 우씨의 친척으로
서 나라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재들이 모두 그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자녀를 겁탈하고 토지와 주택을 빼앗으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붕괴하였다.
점차 어비료와 좌가련의 횡포가 심해지자 고국천왕은 노하여 어비료
와 좌가련을 처형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어비료와 좌가련은 연모부 병력들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
는데 무려 수도 국내성의 궁성까지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에 고국천왕이 병마를 징발하여 직접 전투에 나서 연모부의 반란
을 평정하였습니다.
연모부의 반란 실패는 연모부에게 있어서 결정적이었는데요
반란에 실패했기 때문에 연모부 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지만
그 막강했던 부족의 힘이 매우 약화 되었으며 고국천왕 이후로는
왕비도 연모부가 아닌 전모부나 관모부에서 배출하였습니다.
연모부가 이토록 힘이 약해지니 고국천왕은 부족연합적 성격의
체제를 개혁하여 고대의 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중앙집권화 개혁
을 도모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어비료 좌가련의 연모부 반란 평정 이후 고국천왕은 청거를 받아
을파소를 재상으로 임하였습니다.
바로 드라마에서는 김무열이 맡은 역할이죠.
을파소는 고구려 이대왕이었던 유리왕을 보필했던 재상
을소의 후손으로 성질이 강직하고 굳으며 지혜롭고 사로깊었다고 합니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만나보니 그의 해안은 크게 간복하여 을파소를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는데 을파소 에 대한 고국천왕의 총애가 남다르다
보니 이를 시기에 질투한 신하들이 고국천왕에게 을파소를 모함하고
욕보였다고 합니다.
이에 고국천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만약 을파소를 따르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멸하리라 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로 을파소에 대한 고국천왕 의 신임은 절대적이었죠.
3국사기에는 을파소가 지성으로 나라를 받들어 정교를 밝히고 상벌
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들이 편안 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을파소의 가장 유명한 정책은 한국사 최초의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진대법이겠죠.
1년 중 곡식이 가장 부족할 시기 인 봄부터 가을까지 만약 농사가
제대로 안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있으면 백성들의 식구 수에 따라
곡식을 일정 비율로 빌려주었다가 가을에 수확철이 다 끝난 뒤에
하지만 모든 정책들이 다 그러하듯 복지정책을 시행하려면 예산이
필요합니다.
고국천왕은 어비류 좌가루의 연로부 반란을 평정하면서 그간 어비류와
좌가루가 부정적으로 축제해왔던 그 수많은 재산을 몰수하였고 그
덕에 국구가 풍부해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복지정책도 가능했던
겁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아내였던 왕후우시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던 겁니다.
별 수 없이 고국천왕의 동생들 중 한 명이 차기 왕위를 이어야만
했습니다.
왕후우시는 자신의 출신 부족이었던 연로부가 박살이 나버리면서 본인의
입지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자신과 고국천왕 사이에 아들이 없는 것이 오히려 왕후우시
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습니다.
고굴에는 형사취수제라는 결혼 풍습이 있었습니다.
형이 사망하면 형의 남동생이 형의 아내인 형수와 재혼을 하는 풍습
입니다.
즉 고국천왕이 아들 없이 병사하게 생겼기 때문에 왕후우시는 고국천왕
이 죽으면 그 뒤를 이을 동생들 중 한 사람과 혼인을 할 수 있는데
왕후우시는 어쨌든 왕비이기에 그녀와 결혼하기로 한 동생이 구광
으로 직위할 수 있다는 명분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고국천왕이 죽자마자 아내 우시 왕후는 고국천왕의 동생 발기를
찾아갑니다.
드라마에서 이수혁 배우가 맡은 역할이죠.
우시 왕후는 고국천왕의 죽음을 숨기면서 발기에게 뒤를 이으라며
혼인을 제안했으나 발기는 형이 죽은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늘의
운명은 돌아가는 곳이 있으므로 가볍게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부인으로서 밤에 행차는 것이 어찌 예절에 맞는다 하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습니다.
우시 왕후는 수치스러워하며 고국천왕의 또 다른 동생인 연우를 찾아갔습니다.
우시 왕후는 연우에게 대왕이 돌아 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맞동생으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저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사납고 거만
하며 무례하여서 숙부님을 배려 온 것입니다.
라고 하자 이번엔 연우가 수락하 였습니다.
드라마에서 강형석 배우가 연기 한 연우는 우시 왕후에게 고기를
내오고자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늦췄는데 우시 왕후가 연우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며 밤이 깊어 위험 하으니 저를 궁까지 데려가달라
라는 플러팅을 했습니다.
연우는 우시 왕후와 손꼭 잡고 궁 으로 들어간 뒤 다음 날 일찍 직위식을
갖고 십대왕 산상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자신이 속았다고 여긴 발기는 분노 하여 요동태수 공손도를 찾아가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고구려 로 향했으나 산상왕이 보낸 고구려
군의 발기와 공손도의 한나라 군은 대패를 해버립니다.
산상왕은 형 발기를 살려주려고 했으나 발기는 후회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결합니다.
고발기의 반란이 고국천왕 직위 와 말기에 중첩되어 있죠 이건 동명
이인이 아니라 분명히 한 사람이었 으나 이것이 두가지 버전으로 고려
시대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결을 지필한 김부식은 어느 것이 맞는건지 몰라 두가지 버전
다 기록한 것이며 현재의 학자들은 고발기의 반란 하나만은 고국천왕
말기 때의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시왕후는 산상왕의 아내 가 되어 왕비를 두번이나 했습니다.
다만 역시 산상왕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왕비에게서
아이를 낳지 못하면 구강은 다른 여인이라도 만나 후사를 낳아야
하는데 고구려의 신하들은 우시 왕후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걸 보면 나름 우시왕후도 산상왕 직위 이후에는 존재감이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오직 을파소만이 산상왕에게 새로 혼인하라고 간원했고 산상왕
우시왕후는 동천왕의 어린 시절 부터 그를 매우 괴롭혔다고 하죠
우시왕후는 죽으면서 동천왕에게 자신을 고국천왕의 무덤이 아닌
산상왕의 무덤에 합장해달라고 부탁했으나 동천왕은 한 무당의
예언을 듣고는 산상왕이 아닌 고국 천왕의 무덤에 우시왕후를 매장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