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멸망한 후 왕족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이 벌인 끔찍한 학살 고려 왕실 후손들의 마지막 삶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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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멸망한 후 왕족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이 벌인 끔찍한 학살
고려 왕실 후손들의 마지막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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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 입니다. 우리는 늘 승자의 역사만 배웁니다.
승자는 자신의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패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감추기 마련인데, 조선 권국에 대해 누구나 다 알지만 고려 왕족들이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해피엔딩은 그렇게 많지 않은데, 조선 권국 후 고려 왕족들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는지 그 비극적인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고려의 34대 왕이자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었습니다.
공양왕은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세운 꼭두각시 왕으로 정몽주와 함께 이성계와 정도전 일파에 반격을 준비했으나, 공양왕을 보호해주던 정몽주가 철태를 맞아 죽으면서 공양왕을 지켜줄 보호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공양왕은 그럼에도 끝까지 고려 왕시를 지켜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발악을 하는데요, 공양왕은 이성계와 동맹관계를 체결하겠다는 교서를 작성합니다.
아니 왕과 신하 사이에 동맹이 어디 있습니까?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윤리적 프레임을 씌워 감히 왕을 폐위시키지 못하도록 말 같지도 않은 조서를 만들어낸 겁니다.
어떻게든 왕에서 폐위되지 않으려는 공양왕의 발악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무리들은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정비안씨를 찾아갑니다.
정비안씨는 공민왕의 후궁으로 당시로 왕실 지위가 가장 높은 대비였고, 조선 건국파 신하들에게 압박을 받아 공양왕 폐위 조서를 작성했습니다.
공양왕도 차라리 왕위에서 물러나는 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1392년 7월 12일 공식적으로 퇴위를 선언했습니다.
고려왕조의 호흡기를 뗀 정비안씨는 비록 조선정부에 의해 노후를 보장받았지만, 본인의 손으로 고려왕조를 절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늘 수뢰만 의존하다가 세종대왕 제위 10년에 사망합니다.
엄청 오래 산거죠. 참고로 이 정비안씨가 굉장히 예뻤답니다.
그리고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당하고 원주에서 노후를 보장받습니다.
뻥입니다. 공양왕은 그 끝이 좋지 못했습니다.
태조이성계가 하기 힘든 꺼림칙한 일들을 해결해준 해결사는 바로 정도전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정도전은 조선권국을 반대하고 정몽주를 따르던 56명을 유배보냈고,
급진파와 가장 대립하고 정몽주의 최측근들이었던 8명에 대해서는 권장 백대형이 떨어졌죠. 8명 전원 사망합니다.
참고로 권장 백대형은 이성계의 허락 없이 정도전이 자의적으로 진행시켰으며,
사실을 알게된 태조이성계는 당황한 기색을 나타냈으나 쉬쉬 묻어버렸습니다.
그 다음 칼은 고려 왕씨 왕족들에게 향하게 되는데요.
태조이성계가 보위에 오르고 바로 이틀 후 정도전은 고려 왕씨의 왕족들을 전부 찾아내어 강화도와 거제도로 보낸 섬에서 살기 했습니다.
지금에야 강화도나 거제도나 바다경치가 예쁜 관광지이지, 그 당시에 그 섬들은 정말 살기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1393년 태조이성계는 공양왕의 동생을 불러들여 골프도 치면서,
자기는 결코 고려 왕씨들에게 해코지를 할 생각이 없다며 섬에 있는 고려 왕씨들이 다시 육지에서 살 수 있게 선처를 해주었죠.
자 그런데 과연 조선개국 후 고려 왕씨의 보기운동이 없었을까요?
조선이 건국되고 2년 후였던 1394년 김강행과 박중질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경남 밀양에서 맹인 점쟁이 이홍무를 찾아가 조선의 이씨와 고려의 왕씨 운명에 대해 점을 봤다고 합니다.
이 맹인 점쟁이가 패해된 공양왕에게 더이상 희망이 없고,
대신 옛 고려 왕신의 종친이었던 왕화 왕거에게 왕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점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밝아게 됩니다.
저 먼 경남 땅에서 김강행, 박중질 등이 왕화 왕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정도전의 정보망에 걸렸다는 것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전국적으로 고려 왕씨와 타인의 접촉에 대해 극도를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아마 곳곳에 정보원들을 파견하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합니다.
정도전의 치밀함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김강행, 박중질 왕화 왕과 사이는 수원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결국 참수되었습니다.
솔직히 왕화 왕군은 점쟁이 입에서 거론된 죄밖에 없는데...
여하튼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자 형조와 사험부, 사건원 그리고 숱한 조정 대신들이
군골 문밖에서 고려 왕씨들에 대한 처벌과 공양왕의 사형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버젓이 살아있으니 고려 왕씨 보기 운동이 일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디 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겠습니까? 분명히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었겠죠?
태조 이성계가 대신들을 뒤에서 움직이게 사주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제 갓 한 국가의 일대왕이 된 태조 이성계가 독단적으로 전 왕실에 대해 무자비한 숙청을 주도해서는 안됐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만 했죠.
그리고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본인인 줄을 정확하게 알았던 정도전은 1인자의 손에 결코 피를 묻히게 하지 않았죠.
이래서 2인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태조 이성계는 딱 이런 말만 합니다.
대소신뢰들이 그토록 요구하니 그 청을 물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구나.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을 포함 고려 왕실의 왕씨들을 전원 강화도 거제도 그리고 지금의 강원도 삼척으로 다시 유배보냅니다.
이 중 공양왕 아니 공양군은 삼척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양군을 삼척까지 후송하는 임무를 맡은 중추원보사 정남진은 공양군이 삼척에 도착했을 때 공양군과 그의 아들들은 목졸라 죽였습니다.
강화도 쪽 후송 임무를 맡은 형조 전선 윤방경은 지금의 김포시에서 강화도로 넘어가기 직전에 받아 강화나루의 왕씨들을 던져 죽였으며
거제도 쪽 후송 임무를 맡은 손흥중도 거제도로 가던 중 배에서 왕씨들을 바닷가에 던져 죽여버렸습니다.
강화도와 거제도 앞바다에선 익사당한 고려 왕씨들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겁니다.
유력하다고 판대되는 왕씨들은 아마 전부 바닷가에 빠져 죽었을 것이며 조선정보편을 들어야하는 조선왕족실록에서조차 왕씨들이 바닷가에서 빠져 죽었다는 기사를 실을 정도이니 실제로는 꽤 많은 수가 희생당했을 겁니다.
그리고 1394년 4월 20일 조선왕족실록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적혀 있습니다.
중앙과 지방이 명령하여 왕씨의 남은 자손을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이들을 모두 목베였다.
왕씨 색출 작업은 이날 한 번 하고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왕씨가 발견되기만 하면 적법한 절차 없이 곧바로 교살형이었죠.
살아남은 왕씨들은 어떻게든 살고자 발악해야 했을 것이며 그 중엔 성 이 왕자에다가 점 하나를 붙여 옥시로 성을 계칭한다던지 혹은 양옆에 선을 붙여 이 전시로 성을 계칭하여 겨우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으며 왕씨를 유지한다고 해도 근근히 겨우겨우 세상의 본인의 존재 자체를 숨기며 살아남아야만 했습니다.
지금도 전주희씨가 대한민국에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약 500년을 조속했던 고려도 전주희씨 못지않게 전국적으로 많았을 거라고요.
그리고 지금 전주희씨도 다 같은 조선왕실 로얄패밀리가 아니듯 조선권국초에도 왕씨는 왕씨이지만 로얄패밀리 대여를 전혀 받지 못하는 고려 왕실과는 하등 상관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계국초 조선정부는 왕씨들에 대해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 후 1413년 태종이방원의 즉위하고도 13년이 되던 해 태종이방원은 고려 왕씨에 대한 색출 및 처형 작업을 중단하겠다는 교서를 공식적으로 번포합니다.
그 말은 그전까지 계속해서 고려 왕씨의 색출이 진행되었다는 뜻이니 20년간이나 왕씨들은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겁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전주희씨는 고사하고 경주김씨도 그렇게나 많은데 이 개성왕씨만 유독 적은 이유는
물론 전주희씨나 경주김씨는 조선 후기의 족보 위조가 성행했기 때문에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그 20년간 너무 많은 왕씨들이 희생당하거나 성실을 숨기고 살다 보니까 지금의 왕씨가 별로 없는 겁니다.
태종이방원때 고려의 개성왕씨들도 겨우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고 조선의 오대왕 문종때에 이르러 문종이 고려 왕실 조상들에 대한 제사도 허용해주면서
역사에는 훈훈한 해피엔딩을 찾기가 썩 쉬운 일만은 아니랍니다.
조선의 개국은 고려의 캐캐 묵은 귀족 사회를 와해하고 실력 중심의 성리화 국가로 넘어간다는 거창한 역사적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결코 예쁠 수만은 없는 추악하고 인간미 없는 음지의 일들도 수도 없이 많이 자행되었답니다.
참고로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에 만들어졌으나 그 무덤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로 이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이 진짜 공양왕릉이라고 믿기도 한답니다.
정봉주 제자 중에 야은길제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워낙 영특했다고 하는데 조선공국 후 태조이성계는 길제에게 관증을 제수하려고 했으나 길제는 조선정보 참여를 거절한 채 낙현해서 제자들을 조야해서 길러냅니다.
야은길제는 정부와 세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길제의 제자, 그 제자의 제자, 또 그 제자의 제자들이 이어지다가 조선중기 9대왕인 성종대에 비로소 대거 중앙정부에 등용되니 이들이 바로 살인파들입니다.
살인파들은 나중에 계곡공신들의 후손들을 밀어내고 조선정부를 이끄는 이들이 되었고
계곡공신들의 후손인 훈구파들조차 살인화되어가면서 완전히 소멸되니
모근이색, 포은정봉주, 야은길제, 그리고 고려왕실들의 그 원한이 종국에는 복수를 제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면 결국 이들의 제자들이 조선정부에 참여했으니 끝까지 고려에 대한 조선정부의 승리였을까요?
그럼 역사독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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