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이야기) 24강 대한민국 건국의 걸림돌 1 - 좌우합작 1st #이승만,
인도태평양전략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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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군련대단을 상정상 세계관으로 밟고 전하는
대한혁당 운영원의 한국군련대단 바로하기의 특강입니다.
건국의 걸림돌 첫 번째 이야기 좌우합작
이번 시간부터는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3년 동안
대한민국 건국의 걸림돌이었던 좌우합작, 공산주의
그리고 공산주의 폭동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이야기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한
좌우합작이 무엇인지 공부해 보겠습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이 폐망하고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완성하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한반도는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이미 조선왕조는 막을 내렸고 나라를 일본에 넘겨준 이시왕조가
다시 한반도를 통치한다는 것은 이제 가능한 일이 아니었죠.
그런 상황에서 한반도에 어떤 정체성을 가진 나라가 들어설 것인가는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 예전처럼 살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한반도에는 건국의 방향성을 놓고 다투는
좌와 우의 대립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국과정에서 좌우합작이라는 변수가 등장하여
건국의 발목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좌우합작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좌파 우파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선 좌파와 우파의 의미부터 알아볼까요?
좌파와 우파의 기원은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프랑스의 국회였던 국민공예에서 의장석을 기준으로
급진파 즉 혁명파는 왼쪽 온건파 즉 왕당파는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이것이 급진파는 좌파로 온건파를 우파로 부르게 된 시작입니다.
그러나 누가 좌파고 누가 우파인지 시대에 따라 나라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좌파와 우파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한반도의 좌파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지지자들이었고
우파는 자유민주주의 지지자와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좌우합작이라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전혀 정체성이 맞지 않는 두 집단이 합작하자는 이야기인데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었죠.
이 좌우합작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꿈과 사명을 감당할
하나님의 말씀대로 통치되는 거룩한 나라
대한민국 건국의 발목을 잡는 사단의 방해공작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 왜 좌우합작이 건국의 걸림돌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1917년 볼실비키 혁명 이후로 전세계는 공산주의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해방할 당시에도 공산주의 열풍은 계속되고 있었죠.
공산주의 사상은 마치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였습니다.
왕정제도와 신분제도의 굴레 속에 고통받던 조선 백성은
일제의 나라를 빼앗긴 36년 동안에도 여전히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조선의 백성들에게 들려온 공산주의자들의 말은 너무나 획기적이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이 나눠 가지는 평등한 세상을 공산주의가 만들어 준다니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가난과 신분제도로 고통받던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의 말은 듣기만 해도 마음을 맺힌 무엇인가가 쑥 빠져나가고 위로와 감동이 넘쳐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방 후 한반도에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모른 채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1946년 미 군정청의 조사에 따르면 38선 이남에 사는 사람들의 78%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지한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니
그 당시 공산주의 열풍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건국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명목상으로는 일본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한반도를 공산화하려는 속셈이었죠.
소련 군대가 북한으로 들어왔을 때 소련의 속마음을 몰랐던 사람들은 일본을 물리쳐줄 군대가 들어온다는 말에 소련 군대를 환영했습니다.
앞으로 소련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상상도 못하고 소련군을 환영한 것이죠.
하지만 소련 군대가 북한에 들어올 즘 이미 일본은 망해가고 있었습니다.
45년 3월 10일 미국이 도쿄에 어마어마한 양의 네이팜탄을 쏟아 부어 도쿄를 초토화 시켰고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을 투하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그러니 소련은 이미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것 뿐이었죠.
이런 상황에서 조선총독부는 이랑의 항복이 공식화되면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비책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사람들이 신뢰할 만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 사람에게 치안권을 이항하여 일본인이 안전하게 빠져나갈 동안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수를 생각해냈죠.
조선총독부가 국립 끝에 낙점한 사람은 여운영이었습니다.
여운영은 배제학당 출신으로 승동교회에 출석하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집 노비를 송량하고 독립운동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여운영은 1920년 8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결성에 참여했고 이루크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3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임시정부의 개조 또는 해산을 목표로 한 국민 대표 대회 소집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공산주의 ABC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우리말로 번역했고
1929년 일본에 체포되어 3년 복역 후 석방된 후 국내에서 활동하며
1945년 가을부터 김일성에게 포섭되어 비밀리에 북한을 왕래하며
김일성 및 소련 군정의 지시를 받아 활동했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가 좋은 줄로만 알았던 때라서
여운영은 조선을 위해 일본과 싸우고 조선 사람을 사랑하는 정의롭고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일본은 하필 그 여운영에게 조선의 치안권을 넘겨줄 테니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제안한 것입니다.
여운영은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받고 서울의 은신에 있던 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일본의 제의에 어떻게 대응할지 상의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정말 기쁜 소식이었죠.
이제 일본이 떠나면 새롭게 나라를 건국해야 하는데 공산주의자들은 그 나라가 당연히 공산주의 체제의 나라가 되길 바랬죠.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 치안권을 맡아달라고 했으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요?
그들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치안권을 접수하고 민족통일전선체를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민족통일전선체는 공산주의자들이 쓰는 주요 전략 중 하나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적이나 아군을 가리지 않고 연합하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실제로 힘을 합하는 것은 아니고 그런 척 하는 것입니다.
여은영과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우파와 손잡는 척하면서 뒤로는 공산주의 나라를 건국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8월 12일 여은영은 형식적으로 우파와 중도진영의 사람들을 만납니다.
여은영이 만난 사람은 중도진영의 안재홍과 우익진영의 송진우였습니다.
여은영은 두 사람을 만나 조선총독부가 치안권을 넘겨주기로 한 것과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어 건국을 준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중도의 안재홍은 좌우합작으로 건국을 준비하자는 의견에 동의하지만 우익의 송진우는 반대했습니다.
송진우는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데 왜 여은영이 일본으로부터 치안권을 인수받는지,
더구나 일본의 항복이 코앞에 있는데 왜 망한 일본과 그런 협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우익에 반대해도 여은영은 1945년 8월 15일 아침 일본에게 치안권을 인계받고 그날 밤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합니다.
이후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건준으로 지칭하겠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건준 발족식을 마친 여은영의 속마음은 이랬습니다.
일본이 패전했으므로 일본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는 것이 당연하다.
일본과 투쟁했던 공산주의자들이 그 정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
조선총독부가 나에게 치안권을 넘겨주었고 곧 소련이 내려와 한반도를 공산국가로 만들 것이고
이제 감옥에 있던 우리 공산주의자 동지들이 석방되어 좌익에 힘을 보탤 것이니 그 전 단계로 잠시 합작을 하다가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인민정권을 수립하고 우리가 원하는 계급없는 세상 프로레타리아가 다스리는 공산주의 나라를 세우면 된다.
여은영이 꿈꾼 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공산주의 국가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좌우 합작은 진정한 연합이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속임수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건준이 결성되었을 무렵 골수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등장합니다.
일본의 눈을 피해 숨어있던 박헌영은 해방 후 서울에 나타나 자신이 소련에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 재건 책임자이며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게다가 건준의 주도권도 박헌영에게 넘어가게 되었죠.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중도의 안재홍은 건준의 실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렇게 9월 초 중도파 안재홍도 건준과 결별을 선언합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건준은 공산주의자들을 위한 건국준비위원회였다는 것과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 건국의 걸림돌이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가 건국준비위원회를 대한민국 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더 비참하게 만듭니다.
박헌영은 여운영에게 건준의 재건파 공산주의자들을 더 많이 참여시키겠다고 통보하고
건준 창설 멤버 중 일제 말기에 일본에 맞서 투쟁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를 건준의 요직에서 배제시켰습니다.
여운영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죠.
이제 건준은 박헌영의 뜻대로 움직이는 더 확실한 공산주의자들만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박헌영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본색을 감추지 않고 공산주의 나라 건국을 시도합니다.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하 인공이라 지칭하겠습니다.
1945년 9월 6일 밤 박헌영과 재건파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소수의 경인지역 노동자들은
경기여고 강당에 모여 우리는 3천만 조선인의 총위에 입각한 정부다 라고 주장하며
한반도의 공산주의의 정부 인공을 선포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억지였습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의 빠른 움직임에 혼란스러워진 남한의 상황을 지켜보던 미군정사령관 하지장군은
정부인 것처럼 행세하는 정치단체의 활동은 어떤 것이든지 모두 불법으로 취급할 것이다 라고 선포하고
건준과 인공을 불법 정치단체로 규정했습니다.
한반도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8월 9일 북한의 주둔에 있던 소련은
해방 후 열흘 만인 1945년 8월 24일부터 25일 38선을 봉쇄하고
남북의 통행과 통상도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9월 6일에는 통신과 우편의 왕래도 차단해 한반도를 완전히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9월 8일 뒤늦게 미국이 남한에 주둔을 시작한 것입니다.
1945년 10월 16일 드디어 자유대한민국의 건국을 책임질 이승만 박사가
33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제 남한은 본격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나라를 건국하려는
자유민주주의, 반공, 반소 세력과 공산주의, 좌우합작 세력이 팽팽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남한이 공산세력과 반공세력, 거기에 좌우합작까지 더해져 혼란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북한은 이미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공산화가 진행되는 중이었습니다.
북한은 우리나라의 행정부에 준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공산주의 건국을 벌써 완성한 셈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스탈린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스탈린은 소련 주변 나라들을 공산국가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한반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이렇게 주변 나라들을 차근차근 공산화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공산주의의 악랄한 실체를 모른 채 공산주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좌우합작 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위해 스탈린과 손을 잡고 소련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해주는 어리석은 자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소련에 지원한 군수물자는 항공기 14,834대, 전차 13,000대, 트럭 42만 7천 대, 지프 5만 대, 철강 200만 톤, 상선 95척, 양곡 899만 톤이나 됩니다.
미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련의 공산화 자금을 물심양면 지원한 것입니다.
한반도 내의 좌우합작 시도만으로도 남한은 혼란 속에 빠져 있던 그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미국마저 좌우합작이라는 미혹에 빠져 우리나라 독립의 발목을 붙잡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시간은 건국의 걸림돌 첫 번째 이야기로 좌우합작에 대한 개관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 건국의 걸림돌 두 번째 이야기 좌우합작의 결과인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이야기로 이어가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