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순삭] 일본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4부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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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총정리 4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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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포입니다 센고쿠
시대의 역사 부입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의 서쪽 원종을 앞두고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있던 아케치 미스
이대가 돌연 오다 노부나가를 패신
혼노지의 변 사건을 일으키며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했습니다 아케치 미스
이대는 혼노지의 사변을 터뜨리고는
곧바로 교토에 있는 오다노부나가의
아들 오다노부 타다를 치러 갔습니다
오다 노브 타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아즈치성이 아닌 니조성 들어갔죠
그러나 니조성 들어간 건 오다
노부타다
실책이었는가 지성보다 함락시키기
쉬었거든요 아지 치성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됐을 거라 짐짓 겁을 먹은
오다노부 타다가 니 조성으로 향했던
거죠 아기침 미대는 곧바로 니
조성으로 들어가 니 조성을 불태워
버립니다 오다노부 타다는 항전하다
활복 있고요 아케치 미스 데는 교토
장 악후 교토의 오다 노부나가의
측근들을 수색하여 처형하였다 선까지
들어온 아케치 미스 이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재산을 전부 탈취했고
일부는 가신과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죠
그 사이 도쿠가와 이스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도쿠가와 이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아니라 동맹 다
였기에 작금의 소요를 오다 가문의
내부적인 일로만 치부하고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다만 도쿠가와는
관동 지방의 눈독을 들리며 한때 관동
삼국지라고 불렸던 멸문 tha
다케다가의 영지 시나노 가이를
점거하고 호조 가문과는 혼인 동맹을
맺습니다 우쓰기 가문은 에치고의
숨죽이고
[음악]
있었죠 한편 일본의 서쪽 주고쿠
지방에서 모리 가문과 대치하던
노부나가의 가신 하시바 히데요시는
죽은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모리
가문과 확진을 맺은 뒤 교토로 회군
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사카
부근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오다 노브 타카와 합류합니다 하시바
히데요시의 부대와 아케치 미스 이대의
부대는 야마자키 ES 맞붙었는데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는 3만 가량
아케치 미스 이대의 부대는 1만
아케치 미스 이대는 충분히 더 많은
병력을 모을 수 있었지만 그간 본인이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던 다른 가신들과
동맹 다이묘들이 아케치 미스 대의
출병 요청에 모두 묵묵부답이었던
야마자키 전투에서는 아케치 미스 대가
패퇴하고 아케치 미스 이대는
도망쳤습니다 아케치 미대의 최후에
대해서는 루이스 프로이스 이렇게
기록해 놨는데요 불쌍한 아케치는 숨어
다니면서 백성들에게 금 막대를 줄
테니 자신을 사카모토 성으로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금을 받고 나서 도검도 갖고 싶다는
욕심에 빠져 그를 찔러 죽이고 목을
베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케치의 목을
바칠 용기가 없자 어느 한 남자가
아케치의 목을 바쳤다 그리고 목요일에
노부나가의 명예를 위하여 아케치가
노부나가를 죽인 장소이자 다른 적들의
수급이 놓인 장소에 아케치의 몸과
목이 놓여졌다 아케치 미스 이대는
대신으로 주군을 살해할 수는 있어도
그 주군의 과업을 이어받을 감량은
아니었던 겁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야마자키 전투로 주은 오다 노부나가의
복수를 맞쳤습니다 이제 세간의 화두는
누가 오다노부나가의 뒤를 이을
것인가였다 기요스 회의가 열립니다
당연하게도 오다노부나가의 아들들 중
한 명이 오다 가문의 당주를
이어받아야 했는데 장남 오다 노브
타다는 죽었잖아요 그렇다면 둘째 오다
노브 카츠와 셋째 오더 노브 타카 둘
중 한 명이 가문을 승계해야 했는데
하시바 히리오시는 느닷없이 새로운
후보를 들이 밀었습니다 하시바 히데오
씨는 두 아들이 아닌 죽은 장남의
아들 즉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를
후기로 밀었어 어린아이를 후기로들이
민다는게 너무 속 보이잖아요 딱 봐도
오다 가문을 꼭두각 실어 두고 본인이
실권을 휘두르려는 하시바 히데 우시의
검은 속내 셋째 오다 노브 타카가
하시바 히데오 씨를 노골적으로
비난하자 하시바 히데오 시가 선공을
쳐서 오다 노브 타카를 항복시
오다노부나가의 오른팔이자 오다 가문의
2인자였던 시바타 카츠 이에가 하시바
히데요시를 토벌하려고 했으나 하필
폭솔 인해 오다 노부타카 도우러 오지
못합니다 오다 노부타카 몇 번이고
저항하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할복하다 오다 노부타카 죽자 오다
노부나가의 오른팔 돌격의 시바타 카츠
이에도 하시바 히데요시와 시즈타니
전투에서 전면전을 버리다 패배하고
할복하다 카츠의 아내가 오다노부나가의
여동생이었다 부분은 같이 할복 있고
둘 사이에 나은 딸들은 성밖으로
내보냈는데이 딸들 중에 하나가 하시바
히데오 시의 첩이 됩니다이 첩 꼭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둘째 오다 노브
카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로
[음악]
도망쳤고 그간 오다가문 내의 일이라
개입하려고 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있지만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가문의 사람들을 물리치는
상황만큼은 좌시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하시바
히데요시가 붙는데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마키 산에 진을치고
하시바 히데요시와 장기간 대치하였다
불안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별동대를
꾸려 몰래 고마키 산을 우회해
도쿠가와 이의 본거지인 미카와 곧장
공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미카를
진격하던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는
나가쿠테 도쿠가와 군대의 매복에 걸려
전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요
장수들도 다 전사해 버렸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수적으로 도쿠가와 부대가
달렸기 때문에 별동대 격파 후에도
도쿠가와는 전면전에 나서지 않고
지난한 대치점은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오다 노부카츠
있습니다이 마땅한 결론이 나질 않자
도쿠가와 이스를 의심한 오다 노브
카츠는 하시바 히데유 시에게 항복을
해 버린 거죠 비록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있지만 오대 노부카츠 하시바게 투항을
해버린 시점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가문을 부흥시키다 전쟁의 명분을
잃어버렸죠 하시바 히데요시도 도쿠가와
이스를 상대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여 두 세력은 강화를
맺고 전투를 중단하였습니다 토쿠가와
이야스 하시바 히데요시의 여동생
아사히 히메와 혼인 하였고 토쿠가와
이야스 형식적이나마 하시바 히데요시를
모시겠다고 선언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의
충성가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지 치성을 따라가겠다며
아즈치성 은 이미 알 수 없는 이유로
불타 없어졌고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사카의 제 2의 아즈치 성을 만드니
바로 오사카
[음악]
성이었습니다 아직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하지 못했던 지방 다이묘들이 덜어
있었죠 우선 가장 가까이 시코쿠 섬에
초속의 가문이 있었습니다 1585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직접 출전하지는
않고 새 방면에서 시코쿠 3에
상륙시켜 후 시코쿠 3을 정벌
있습니다 초소카베 당주 있던 초소카베
모토 치카는 바로 항복하고 아들의
인질로 오사카에 보내 만 했죠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에 활약했던
장수들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도도
아스토라 우케타 히데이에 등 훗날
임진한 테 투입되는 장수들 있니다
1586년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부
원래 노부나가가 받으려던 직위 태정
대신 겸 관백 임명되었습니다 최강
존재로 거듭나자 영예롭게 못한 하시바
성을 버리고 도요토미 성을 바꿉니다
하시바 히데요시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유 씨였던 겁니다 주고 후의
대다이 있던 모리 가문은 일찍이
히데요시와 화친을 맺고 히데요시의
권력 장학과 전국 통일의 일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1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히데요시와 싸우기보다는 나머지
절반까지 장악할 수 있도록 히데요시를
도우는 쪽을 선택한 거죠 히데유 시의
시코쿠 원정 때도 병력을 지원해
주었습니다이 고바야카와 다크하게 바로
모리가문 출신입니다 1587년 이번엔
규슈 원정에 나섰습니다 규슈 섬에는
시마지 가문이대 다이묘를 군림하고
있었는데요 시마지 가문의 당시 당주
있던 시마즈 요시 이사가 대항하려고
했지만 규슈 섬도 워낙 넓은 땅이라이
규슈섬 대한 심하지 가문의 지배력이
공고하지 못했습니다이 네분을 이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규슈섬 일부
영지를 시마즈 가문에게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시마즈 가문의 항복을
얻어냈습니다 서쪽을 완전히 평정한
도토미 히데요시는 아직 완전하게
복수했다 할 수 없는 관동 지방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동쪽에선 아무래도
도쿠가와 이의 낌이 가장 강력했던
도쿠가와 이스는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서어 냈잖아요 남은 건 호조 가문과
우에스기 가문 정도였는데 우에스기
가문은 일찍이 히데요시가 아직
도쿠가와 이스를 복귀시키기 전에 직접
우기 가문을 찾아가 강화를 맺고
우호적 관계를 수립해 두었어 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딱 하나 호조
가문이었던 1590년 오다와라선
공방전을 끝으로 호조 가문을
복속시키는 성공합니다 호조가문 복속
후 도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단히 굴욕적인 처사를
강요하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기존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 미카 와에서
쫓아내고 호조 가문의 영지였다는
강제로 보내버립니다 도쿠가와 가신다는
매우 붕괴했고 그가 이스는 아직은
도요토미 히데유 시에게 반기를 될
때가 아니라며 묵묵히 사가미 넘어갔고
기존 도쿠가와 이스가 차지하고 고
있던 미카와 시작해 과거 다케다
가문의 영지였다는 가위까지 도토미
히데요시가 차지합니다 이로써 임지혜는
고작 2년 전 돌토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합니다 여담으로 사가미를 넘어간
도쿠가와 야스는 더 동쪽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지역에 대한
개발을 도모했습니다 일본내 유일하게
넓은 평의지 대지만 당시로서는 갈대
밤만 무성해이 지역의 가치를 잘
모르던 시대였는데 사가로 넘어간
도쿠가와 야스는이 평야지대의 장점이라
활용해 보자며 개관에 힘썼는데 이곳이
바로 도쿄 있습니다 루이스 프로이스
no 도요토미 히데유 씨에 대해
이렇게 글을 남겼습니다 히데유 씨는
오아리 출신으로 가난한 백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바아 생계를 꾸었다 그 일은
지금까지도 비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아주 가난할 때 낡은 돗자리
이외에 몸을 덮을 것이 없었다고
수련한다 그러나 그는 용감하고 창렬이
뛰어났다 그리하여 그런 천한 일를
그만두고 전사로서 봉사하기 시작해
점점 출세하여 오다 노부나가에게
주목을 받아 전쟁할 때 발탁 되게
이르렀다 노부나가는 미 호 정복이
끝나자 히데오 씨가 뛰어난 전사이자
기사임을 인정하고 복록을 늘려주어
오다 가문 안에서도 평판도 높아졌다
그러나 원래 미천한 소생이라 중요
무장들과 말을 타고 이동할 때 그는
말에서 내려 다른 귀족들은 그대로
말을 타고 갔다 그는 키가 잡고
추악한 용모를 지녔으며 한 손은
손가락이 여섯 개였다 눈은 튀어나오고
중국인처럼 턱수염이 적었으며 빈틈없는
책략가 있다 그리고 이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원정 및 명나라
원정에 나서죠 1582년 혼노지의 변
사건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후
만인 1590년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있던 돌티미 히데유 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했습니다 흔히들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다 차려놓은 법상에
도요토미 히데유 씨가 숫가락만
올려놓아 전국 통일을 완수했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유 씨도 8년간 통일 전쟁을
해가는 와중에 통일 정책들을 수립해
갔습니다 우선 도요토미 히드 유시는
토지를 측량하는 기준과 도량형을
통일해서 대대적인 토지 조사 실시 후
토지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각 토지
등급별로 곡식 수확량을 계산하는
고쿠다카 이름바 석 고지를
시행했습니다 이러니 합리적인 조세
제도로 막대한 세금을 거을 수가 있고
토지 대장도 철저하게 작성했습니다이는
단순히 세수 확보만의 목적이
아니었는데요 일본이 다이묘로 쪼개진
견 근본적으로 토지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각 토지의 농민들은
자기네 영주 다이묘에게 자의적인
기준으로 바치던 세금을 중앙정부가
정해 놓은 정책에 따라 다이묘가 아닌
중앙정부에 납부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면 다이묘의 토지 지배력을
약화시킬 수 있겠죠 더불어 각
지방마다 분포했던 각 지역의 키들이
키들로 여관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었죠
더불어 사찰 세력도 있잖아요 예전
오다노부나가의 정복전을 살펴보면 오다
노부나가도 키들 사찰 세력들에게 몇
번 에고 공격을 받았었죠 1588년
도토미 히데요시는 도검 몰수형을
내려서 농민들과 사찰에서 보유하고
있는 모든 도검을 몰수해 버렸습니다
1591년 통일 이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유 시가 병농분리 이을 내려서
사무라이 즉 무사 계층을 하나의
직업으로 간주 절대 무사가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는 철제 도구는
도검 년 농기구나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무사는
농민이 되지 못하고 농민은 무사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죠이 역시
통일된 일본이 다시 쪼개지지 않도록
지방 세력들이 권기하 못하도록
근본적으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음악]
조치였습니다 그리고 1592년 돌토
히데요시는 임진 외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에서는 임진 외란이 일어났던 당시
일본의 연호를 따와 블로크의 원정
그리고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당시
일본의 연호를 따와 개 2초의 원정
앞에서 블로 쿠 게이초 원정이라
부르는데요 다 아시겠지만 돌트 히디
우시는 조선만의 목적이 아니라 명나라
대륙까지 진출하는 것이 목표였고
조선은 명나라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
정도로 적혔습니다 도트 히디 씨가
조선에게 바라는 건 조선 멸망과
조선의 직접적인 지배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보다는 도요토미 히드 시가
간접 지배를 해서 조선을 기반으로
하여 만주의 여진 족까 끌어들여서
명나라를 압박하는 것이었을 거예요
여태 계속 일본 내부적으로 전쟁을
버리다가 이제 겨우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통일된 일본을 유지해 가는
것이 더 중요하던 시점에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누가 봐도 대회 전쟁이 전혀
도요토미 히데유 시에게 도움될게 없어
보이는데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유
시가 임진 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존재합니다
첫째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이 있다는 설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자신감 뿜뿜하던 도요토미
히데유 씨가 마치 알렉산더 대왕에
나폴레옹처럼 정복력 차올라서 앞뒤
상황 재지 않고 무작정 조선과
명나라로 진출했다는 설입니다 뭐 물론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유팀 히드 씨는
교환하고 가하다는 평가를 봤습니다
교화한 것도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빠르고 판단력이 좋아야 하잖아요
도토미 히드 씨가 무작정 무대포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다른
실리적인 목적을 염두해 두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이제 막
통일 전쟁을 완수했습니다 여전히
다이묘들의 재기를 두려워해 그들의
힘을 빼내게 하기 위해 전쟁에 보내
버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뭐이 점도
분명 작용했을 겁니다 어 실제로
임진한의 패전으로 임진란 테 투입된
다이묘들이 세력을 크게 잃었죠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신들 대거
투입되었기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세력도 임주 내란으로 피해를
크게 받습니다 셋째 쌀 때문이라는 설
일본이 쌀을 보충하기 위해 거듭
조선과 한국을 침략한 건 만성적
있니다 산지로 가득차 있는 일본은
절대적으로 평야와 쌀이 부족합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항상 쌀 부족
현상에 시달렸어요 근대 시대 때도
마찬가지고요 기존 센고쿠 시대처럼 각
지역지역 단위로 자생하며 모를까
전국을 통치하게는 도토미 히드
입장에서는 쌀을 많이 가져와야만 했고
조선만 한 땅이 없었죠 조선은 나름
쌀 생산량이 풍부하거나 훗날 일제
강정 때도 일본이 자국의 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을 탈탈
털었던 걸 보면이 학설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단 쌀
하나 때문은 아니었을 겁니다네 번째
학설은 도요토미 히데 시가 조선을
먹고 대륙으로 진출하고자함은 명나라
전체를 멸망시키기 보다는 만주와
명나라 동남 해안에 대한 교역의
활로를 열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기존의
일본의 막부와 명나라는 감한 무역이
아는 공무역으로 무역이 이루어졌으나
생고 쿠 시대 개정과 더불어 감한
무역은 폐지되고 명나라는 철전 해금
정책을 통해 명 1 그사 사이에서는
그 어떤 무력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먹으면 북방으로
만주로 서해안을 통해서는 중국과 쉽게
교육하고 무역망 확충할 수가 있잖아요
무역망 이처럼 대폭 넓혀 놓으면 쌀뿐
아니라 정말 여러 가지 일본의 경제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다 해결될 수가
있죠 확실한 건 당시 시대상을 기록해
놓은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록에는 조유
투미 히데요시는 통일 전부터 조선과
명나라 진출에 대한 욕심을 계속
언급했었다 겁니다 그렇다면 임진희는
당시 일본군 구성과 지휘관 다이묘들의
스펙을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일본군
육군은 개군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병력은 도합 15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먼저 선봉대 역할을 맡았던
1,700명의 제 1군 사랑관 고니시
유키나가 있니다 제 1군은 가장 먼저
한양을 점령한 후 평안도 방면으로
나아가 평양성을 점거하고 있다가 조명
연합군의 등장으로 밀려 났죠 고니시
유키나가는 누구보다 임진 혜란의
반대했던 다였습니다 계속 휴전 협정을
도모하다가 도요토미 히드 유시를
속이면서까지 휴전을 체결하려 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왜 이렇게 인진
내란을 싫어했을까 고니시 유키나가의
고니시 가문은 원래 다이묘는 아니었고
오더 노부나가의 상업 지능 책에 따라
성장한 상인 가문이었다 가문이었다
자주 왕래하며 그래서 일찍이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아직 오더
도브 나가가 살아 있을 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시와요 씨였던 시절
서쪽에 모리 가문을 정벌하러 떠났을
때이 고니시 유키 나가를 처음 만나고
그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훗날
도요토미 히데 씨는 고니시 유키
나가를 규슈 3의 구마모토 형제를
분봉에 주며 다이묘로 삼았습니다 규슈
섬에서 세력을 형성해 가는 고니시
유키나가 는 대마도 도주했던 소요시
토시를 사위로 삼고 대마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대마도 경제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이 살려줍니다
대마도에 대한 일본 본토의 차별이
있고 대마도는 조선으로부터 쌀을
수입해 왔기 때문에 조선이 전장이
되면 당연히 대마도는 안정적으로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얻을 수가 없어요
더군다나 일본군이 조선으로 침략할
때이 대마도를 한 번씩 다 들러 갔다
가는데이 많은 병력을 대마도가 다
수용할 수가 없었기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에 반대했던 겁니다 2
2800여명 명의 제 2군 사령관은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와가는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었죠
오죽 사이가 안 좋았으면 인근 부하
장수들 주 업무가 두 사람 싸움
말리는 거였다고 하며 조선과 명
나라에서도 두 사람 사이가 안 좋은
걸 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제 2구는 고니시의 이어
한양 점령 후 함경도 방면으로
진출했는데 함경도의 화이트 울프이
정문부 북관 대첩으로 제 2군이 탈탈
털린게 유명하죠 가토 기요마사 원래
대면은 아니었고 대장장이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어머니와 도요토미 히드 어머니가 사촌
지간이 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 럼이
신부님 2천원 출신으로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 된 도트 히리오시는 가토 기오
마사를 발탁해 자기 가신으로 삼아
주었고 가토 기호 마사는 오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마수리아 싸운
나가시노 전투 그리고 오다노부나가
사후 최후에 가신을 두고 조유미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스가 싸운 시즈
카타케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특히 시즈
카타케 전투에서 활약한 일곱 장수들이
있었는데이 일곱 장수들을 시즈 카타케
7본 창이라고 하며이 가토 기어
마사가 바로이 7본창 중에
하나였습니다 1만 천여명의 제 3군
세관은 구로다 나가마사 구로다
나가마사는 임진 재란 당시 황해도
방만을 주둔하고 있었는데 평양성의 제
1군 고니시 유키 나가를 지원하러
가던 도중 황해도의 연안성 전투에서
패전한게 유명하죠 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가이 오다노부나가의 가신이
있다가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됩니다 그렇게
구로다 나감 마서도 자연스럽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셨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전쟁 이후론 구로다
나가 마사와 그 아버지는 후쿠오카의
다이묘로 임명됩니다 1
4,000여명의 제 4군 사 과는
모리 카츠노부 1번 생고 시대 서쪽
주고쿠 지방의 대다이 있던 모리
가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도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있습니다 임진년은
당시에는 강원도 전선을 담당했습니다
25,000명의 제 5군 사령관은
후쿠시마 마사노리 시즈 카타케 7본
잔 중에 하나입니다 후쿠시마 마사
노래도 신분이 미천한 출신으로
어릴적부터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돌토
히드 유시를 모셨다고 합니다 임진란
당시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경상 북도를
담당하였습니다 1,700여명의 제
6군 사가는 고바야카와 다각 게
임진한 당시 전라도 방만을 담당했는데
이순신이 남해 안에 재해권을 장악하자
내륙에서 전라도를 공격하라는 임무를
맡았다가 금산 전투로 되돌아왔다
장소였으며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
전사시킨 일본군 장소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일본 서부 주고쿠 지방의대
다모였다 모리가문 출신입니다
고바야카와 가문이 모리 가문의 반계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고쿠 정벌에서
모리 가문과 대치했을 때 노부나가
사후 모리 가문은 곧바로 도요토미
히데시 동맹을 맺으며 고바야카와
다크하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해
싸웠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코쿠
3 원정에도 참여했었고 3만의 제
7군 사업가는 모리 데루모토대 다이묘
모리 가문의 당주 있습니다 출신만
따지고 보면 도토미 히데유 시보다
훨씬 더 존귀한 사람인데 노부나가
서후 도토미 히데요시와 연합하기 하고
임진한 때도 군세를 보내 주었습니다
주로 경상남도 후방에 있었다고 하죠
1만 명의 제 8군 사령관은 우키타
히데이에 일본군 지휘관들 중 가장
나이가 어렸지만 그래도 아홉명의
지휘관을 거느리는 엄연이 임진란
총사령관이었던 경기도 방면을
담당했습니다 우키타 히데이에 아버지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있으며 같은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조율 토미 히데
씨와 친했다고 합니다 우키타 히데이에
아버지가 죽을 때 도요토미 히데오
씨에게 자기 아들에 자 좀 부탁한다고
하자 도요토미 히데오 씨는 우키타
히데이에 양자로 삼았죠 1만
1500여명의 제 국군 사람과는
도요토미 히데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입니다 하지만
임진 대란 터지고 얼마 안 돼서
거제도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다음은
수군을 보겠습니다 수근 사람과는 구키
요시타카 해적 출신이며 오다노부나 를
섬기면서 원래 오다 노부나가의 수군
담당자였던 여섯 척으로 모리 가문의
600점을 깨부순 키즈 가와 구치
해전의 주역이자 노부나가 서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며 사실상
일본에서 유일무의한 최고 수훈
사령관이었던 이러한 국기 요시타카
이순신 장 군에겐 맥을 못 추입니다
또 다른 수근 지간 도도 다카도라는
오다 노부나가 군에 소속되었던 계
보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전투에서 활약하며 가신으로 거듭났고
이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따랐죠
아마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일본 수군 지휘관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있죠 와키자카 야스 아루도도 7본 창
중에 하나였습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원래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한 아케치
미스 이대의 가신이 있는데 혼노지의
변 직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케치
미스 이대가 아닌 조유미 히데요시를
모셨다고 합니다 와케 자카 야스하루는
시즈 카타케 전투에서도 활약을 하고
도요토미 히드 시의 규슈 3의 다이묘
시마즈 감원을 토벌하는 전투에서
수군을 담당했다고 합니다이 와키자카
야스로 당시 이름 날리던 맹장 중의
맹장이 있습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된통 당하지만
호기롭게 시작한 인지란 이었지만 전쟁
7년 차였던 1598년 조트 히리오
씨는 갑자기 건강에 악화되더니
죽습니다 뭐 먹은게 잘못되었다고도
하는데 매독이 병이었다 설도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디 시의 정확한 사이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두투미 히디 씨는
모이어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다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에 꿈이로다라는
실을 남기고 사망합니다 이렇게 임진
대란도 급하게 마무리됐는데 두투미
히드 씨가 그놈의 후계 문제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해서 일본 다이묘들의
쟁탈전이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번엔 스케일이 많이 다릅니다 각
지역 다이묘들이 각 축전을 버리는
것과 통일이 한번 되고 나서 1본
전국의 패권을 두고 다이끼 다투는
것은 다르죠 센고쿠 시대를 종결지는
마지막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 두투미
히드 시가 후기를 제대로 매듭짓지
않았기에이는 불라의 씨앗이 되었고이
불라의 씨앗은 산고쿠 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최후의 전투로 역사를 인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두투미 히토시의
후계가 어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은 네네 있니다 네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고향인
오아리 ES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안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럼 아시가루
즉 일계 졸병 보병이 있습니다
오케하자마 전투하고 오다 노부나가가
매우 적은 숫자로 오케하자마 협곡에서
오와리를 침략한 스루가 다니며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처치한 전투가
있었습니다이 이후에 네네와 도토미
히데요시가 결혼했다고 합니다 점점
전장에서 두각을 보인 조투 히데요시는
오다노부나가의 측근 가신이 되었고
내내는 내조의 이바지한 조각 광 지처
있다고 합니다 네네가 인재 추천도
해주고 정치적 조언도 해주었다고 하죠
다만 두 사람 사이에서 끝까지 아이를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조투 히드
유씨는 유독 본인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을 양자로 많이 받아주었고
내내도 그런 양자들의 친아들처럼 잘
대해 주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임진한
당시 총사령관 겸 제 8군
지휘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 양자까는
아니지만 어린 시절 아들처럼 기운 제
2군 사령관 카톡이 없어서 제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제 3군
지휘관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있죠 제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어머니도 원래 네네를 모시던 신하였다
노부나가도 네네의 인품을 높이 샀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조유미 히드 시와
네네의 부부싸움을 중재해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키치 미스 이대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도브
나가를 죽이고 교토를 장악했을 때
죽고 그 원정에 떠나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대피한 사람도 내내요 결국 조토민
히리시는 아케치 미스 이대를 토벌하고
오다 노부나가 사 후 노부나가의
후계를 결정짓는 가신들 간의 싸움에서
두투미 히디 시와 시바타 가츠의
사이에서 시즈 카타키 전 투가
벌어졌습니다 시즈 카타케 전투는
도토미 히드 우시의 승리였고 자신의
성에서 아내와 함께 회복하였고 기
전에 새 딸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합니다 도트 히드 씨가 시바타 가스의
새 딸들을 거두는데 세상에나 새 딸
모두 절세가 있는 미녀인데 그
중에서도 첫째 딸이 입이 딱 벌어지는
미인이었다 합니다 원래 그녀들의
어머니 그러니까 시바타 가스의 아내도
미모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고
하는데이 아내가 오이치 바로 오다
도부나다
여동생이었다 치는 도요토미 히디 씨가
짝사랑했던 여자라고 하는데요 세 자매
중 첫째가 어머니 오이치 판박이로
똑같아서 도요토미 히리오 씨는 세
자매 중 첫째를 특실로 드리니이
여자가 바로 요도도노 있니다 두투미
히드 시의 컴플렉스 중 하나가 아들이
없었다는 거였죠 1589년 히데오
시의 전국 통일 1년 전 요도 도노가
히데요시의 첫 아들 도요토미 치루
마치를 덜커덕 출산하다 경사 중에
경사였다 하지만 약 3년 후
1991년 임주란 1년 전 도요토미
치수로 마치는 요전 아니다 도요토미
히드 씨의 상실감은 엄청났고 이제
아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거라
낙담했다 도요의 히데요시는 언제고
후기를 미룰 수 없기 때문에 어
누나의 아들 즉 조카 도요토미 히드
치구를 임진의 직전 후계자로
임명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드 치구는
인망이 두터웠고 어딜 가도 사랑받는
성격이었으며 임진란도 부정적으로 여긴
인물이었다고 하죠 두팀이 히데요시는
유능하지만 포악하여 가신단 다이묘들은
히데요시 사후 그의 뒤를 이을
도요토미 희대 치구의 선정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어 그 그런데 임진
란이 한창이었던 1593년 요도
도노가 히데요시의 친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또 출산하다 당연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친아들을 후기로
지명하고 싶었지만 그간 조카 히드
치구가 쌓아 나온 것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주춤이 히디 우시는
고민하다가 1595년 히디 우시는
이상한 죄목을 억지로 갖다 붙여 조카
희대 치구를 할복하다 그 일과
가족들을 모조리 처형시키는
다이묘들에게 앞으로 친아들 히드
유리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서약을
받았죠 그저 그런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히드 씨가 막 부릴 수 있었
있었지만대 다이묘들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함부로 할 수 없단 말이죠
자기 아들 히디 유리는 어리고 히디
유리가 안정적으로 후계를 계승하기
위해선대 다이묘들을 포섭할 필요가
있었고 조유 2미 히드시는 당시 최대
다이며 다섯 가문의 다섯 당주를고
다이로 임명한 후 조유이 히드 유리를
보조하도록 약속을 받았습니다 고다
이로는 도쿠가와 이아스 서쪽에데
다이며 모리 데루모토 한때 관동의
대다모였던 우에스기 카게카츠 모리
가문에서 파생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임진 내란의 총선을 간 우키타
히데이에 다 노부나가의 가시부
함께해왔던 마에다 토시에 등을
가리킵니다
자 그렇다면 임진란 기가 도쿠가와
이스는 뭘 하고 있었을까요 임진
내란을 일으킨 이유 중 하나로
거른다는 해석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망 다이묘들의
힘을 조선에 가서 빼놓게 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소개해드렸죠 그런
목적도 있었더라면 가장 먼저 조선에
보내야 하는 다이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있니다 두투미 히데와
도쿠가와 이스의 관계는 둘이 싸우면
결론이 안 나고 서로 피해만 보는
서로 죽는 싸움이 되기에 안 싸우고
도쿠가와 야스가 그냥 형식상 조유미
히데요시의 지배를 인정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조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스의
영지였다는
시나노 가이를 모두 내놓고 사가미
지역으로 추방하라 했을 때도 아무
불만 없이 도쿠가와 야스는 사가미를
간 거죠 뭐 대신 더 동쪽에에도 지역
즉 도쿄를 개발했지만 실제 도토미
히리오시는 도쿠가와 이스에 임진
내란에 참여하라고 했으나 도쿠가와
이스는 관동 지역의 반란을 평정해
되는 명분으로 임진 내란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임진 해란이 일본에게
불리하게 진행될수록 키리 우시는
이에야스에게 임진란 참여로 독촉했으나
존보 있습니다 두툼이 히데유 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힘이 비등비등
했음에도 그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유 시가 하라는 것 다 따라 줬기
때문에 히데요시도 억지로 야스의
임진이 참전을 무작정 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했다 시의
후기를 이을 도요토미 히드 유리는
이제겨우 다섯살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친모 요도 도노는 이틈을 타 타지방에
머들 특히 도쿠가와 이스가 반란을
일으킬까 봐 극도의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니나 다리가 도쿠가와 이스는 덴노를
부추겨 당장 임진 하란을 중단시키려고
주청 있고 오사카 성에서도 요도
도노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인 겸
고다 이로 중 하나였던 마이다 토시
이에는 히데요시 없이 임진 내란을
계속하는 것은 무리임을 깨닫고 조선에
있던 전 일본군 병력 철수 명령을
내립니다 히데오이라는 커다란 기둥이
사라지니 세간의 집중은 도쿠가와
야스가 어떻게 나올지 있습니다 마이다
토시 이에가 도쿠가와 야스를 여러
만나며 달래고 중재하면서 도쿠가와
이스를
억제했다 토시 이에도 사망하면서
도쿠가와 이스를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도쿠가와 이스를 자극하는 사람이
[음악]
있었죠 그 사람은 이시다 미스나
이였습니다 이시다 미스나 이도
도요토미 히드 시의 가신으로 마야다
토시 이에가 사망하면서 요도도노 아들
도요토미 히요리는 이시다 미스나
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다 미스나면 마이다 토시와
비교했을 때 감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할 수 있는 깜냥이 아니었습니다
튜이 히드 유시 때 고다 이로에 이어
고부 그라고이 도요토미 히드 시의
가신들 중 다섯 명을 국가의 사법
행정 토목 재정 종교 각 분야의
장관으로 임명하여 총괄하도록 하였는데
이시다 미스나이가 행정부의 고부
그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스는 이시다
미스나이를 압박하여이 고부에서
퇴임하고 했고 힘이 없던 이시다
미스나인 고불 그에서 물러납니다
이시다 미스나이는 이을 바득바득
갈았는데요 이시다 미스나이는 다른대
다이묘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겨
고다이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 더
동쪽에 있는 한때 관동 삼국지 중 한
가문이었던 우에스기 가문의 우에스기
카게카츠 그리고 서쪽의대 다이모 있던
모리 가문의 모리 데루모토
끌어들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완전히 포기하려는 거죠 그렇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만히 있을 리
없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마이다 토시
이에가 살아 있을 적부터 한때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셨던
측근 가시 및 다이묘들을 포섭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임진의 때
투입되었던 장수들 있데 임진란 당시에
일본군 지휘관들 사이가 안 좋았다라는
거는 많이들 들어보셨죠 원래도 이들
사이가 끈끈하지 못했는데 임진 혜란을
통해서 갈등이 노골화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악연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어 마사 아아 임진란 이후이 일본군
장소들 양측이 한쪽은 이시다 미스나
이에게 한쪽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포섭합니다 이시다 미스나 편해 들었던
다이묘 및 가신들은대 다이묘 있던
관동의 우스기 가문과 서쪽 주고쿠
모리가문 을 포함해 규슈 3의 다이묘
시마즈 가문의 시마지 의시 이로
스코크 3의 다이묘 초소카베 가문의
초소카베 모리츠카 임진란 제 1군
사령관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란
총사령관 겸 고다이 중 하나인 우키다
히데이에 등이 있었고 이들을 서군이
불렀습니다 이시다 미스나이는 사무라이
보다는 문관이 있고 상업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이시
유키나가 같은 상업을 중시하는
다이묘들이 대거시다 미스에 붙었습니다
그렇다면 도쿠가와 이스가 포섭한
다이묘들은 누가 있을까요 후카이도
바로 밑에 일본 본토 3의 최북단
도호쿠 지방의 다였던 다테마사무네
모가 요시아키가 있었고 무엇보다
임진란 당시 제 2군 지휘관이었던
가토기요마사 제 3군 지휘관 구로다
나가마사 제 5군 지휘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 있었습니다 가토 구로다
후쿠시마 모두 어릴적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거두어져 왔던 이들인데
도쿠가 이게 붙은 거는 그들은
사무라이 즉 무장들의 대한 신성시하는
경향이 커서 사무라이도 아니면서
상업을 장려하는 저 2시대 미스나이를
매우 싫어했고 히데시 통을 잊는다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인지란 도중에도
가토 구르다 후쿠시마는 이시다와
개인적으로도 사사 건건 부딪혔었다
도쿠가와 측 병력을 동군이 불렀습니다
도쿠가와 동군은 오사카 성으로 향하고
이시다 미스리 서구는을 맞고자
출전했습니다 동군과 서군이 만난 곳은
세키가 알라 방원 서군 병력 13만
동군 병력 8만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전투 세키가 아라 전투는 어떻게
끝날까요 동군과 서군의 격도 은
이시다 미스나 요청에 따라 관동
지역의대 다이며 우에스기 가문이 먼저
움직임에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는 우에스기 카게카츠
우스의 겐신의 양아들 있니다 우스게
가문의 추적은 북부 도호쿠 지방에
다이며 다테 마사무네 였는데요
도쿠가와 이야스 다테 마사무네가
동맹하는 껄끄러워 여긴 우에스기 카게
카츠도 서군에 동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려고 했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우선 우에스기 가문을 치러
출전합니다 우스기 가문을 치러가는
도쿠가와 이스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오사카성에 있던 이시다 미스나이는
주고쿠 지방의대 다이묘 모리 가문과
연합하여 전투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모리 가문의 당주는 모리
데루모토 서군의 총괄자인 이시다
미스나이는 군사 지위에는 자신이
없어서 서군의 총사령 관직을 모리
데루모토게 부탁합니다 모리 데루모토
서군의 다이묘 및 가신들을 전부
오사카성 인근으로 소환합니다 서군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금의
우에스기 카게 카츠가 문제가 아니라며
군대의 방향을 돌려 오사카로
진군하였다 동 군이었다 일본 북부
도호쿠 지방의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게 우에스기 가문을 막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 북쪽에서는
우스기 카게 카치대 다테 마사의
모가미 요시아키의 싸움이 먼저
시작했죠 한편 도쿠가와 이스의 동군
연합이 오사카로 내려오자 서군의
이시다 미스나 이와 모리 데루모토
오사카성에 싸우면 오사카성에 너무 큰
피해를 줄 것 같다며 성을 나와
야전에서 동군을 막기로 합니다
1600년 9월 동군과 서군이
맞닥뜨린 곳이 바로 세키 가라 있죠
서군 병력 13만 동군 병력 팔만
서군의 규모가 더 많죠 아무래도
서구에는 대다모 가문들이 껴 있어서
처음에는 병력 차이가났습니다 병력이
더 많으면 포위하는게 제일이죠 동군이
강을 따라 진군을 하는데 이미 서군
측에서 새키 가라에 도착해 유리한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의 동근이 새키 가아라를 지나치려는
서군이 포진에 있는 산 기술과
골짜기를 지나쳐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뚫겠습니다 그렇다고 안 뚫을 수도
없죠 뚫어야 하는 양쪽의 산이 템만
산과 사사오 산이었습니다 도구 가와
이스가 템만 3과 사사우사 사이를
지나갈 수는 없으니 부대를 갈라
한쪽은 템만 3에 다른 한쪽은 사사우
산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템만
3에서 먼저 전투가 벌어졌는데이 템만
3에서 동군을 이끌던 장수는 임진란
당시 제 5군 사령관이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쿠가와 4천왕 중 하나였던
붉은 귀신이 나오마사 있습니다 반면
템만 3에 있던 서군 지휘관은 임진
네란 당시 제 8군 사령관이
총사령관이었던 우키다 히데이에
있습니다 막상 마카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서군이 미리 대기시켜 놓은
병력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템만 산
바로 옆에 마츠오 산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에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석운
지원 병력이 있었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임무는 템만 산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마치오 산에서 나와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나서질 않습니다
상황을 보다가 유리한 편에 붙으려고
관망하 시간이 흐르자 동군의 측면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동군 편으로 배신합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부대 인근에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a 병력도
있었습니다 서군 소속으로 출전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동군 편으로 배신하자이
와키자카 야사로 동군 편에 가담합니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사르
배신으로 오히려 서군의 측면이
노려지고 되었죠 한편 사사우 산
쪽으로 가볼까요이 사사우 산의 공격을
맡은 동군 축다 이면은 임진란 당시
제 3군 사령관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
있습니다 그리고 사사우사 방어를
맡았던 서군 쪽에는 용장
시마사콘이었습니다 시마사콘 워낙
맹에서 구로다 나가마사의 병사들이
전투가 다 끝나고도 한참 동안
시마사콘 외침이 귀에 아른 거리는
PTSD 시달렸다고 할정도 였다죠
시마사콘이 굉장히 잘 싸워줬다 앞에서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사사우
3 방면에서도 구로다 나가 마사가 확
밀고 있었죠 사사오 산에는 이시다
미스나이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공포감이 어마어마하게 들이닥쳤을
겁니다 한편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에 그을 처단하러 서군에 오타니
요시 치구가 싸우러 갑니다 오타니
요시 치구가 고바야카와 히데아 를
막는데 오타니 요시 치구가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다이묘와
가신들이 동군 쪽으로 배신하는 바람에
오타니 요시 치구의 부대도 전멸하고
그는 스스로 할복하다 완전히 동군
쪽으로 기세가 기울고 있었습니다 서군
쪽에서 대기시켜 놓은 마지막 병력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강 넘어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다가 동군의 배후를 습격해
동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것이
임무였던이 병력은 총 사용간 모리
데루모토 양아들 모리 히데모토 키카와
히로 이의 부대였던 키카와 히로이에
상황 돌아가는 판을 있겠다며
병사들에게 도시락 먹이겠다는 핑계로
진군을 하지 않았고 키카와 히로이
이에가 안 움직이자 겁을 먹은 모리
히데의 모터도 움직이질 않습니다 몇
번이고이 동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수 있는 서군의 병력들이 포지션이
되어 있었는데 이들의 배신으로
도루묵이 되었죠 나름 남아 있는 서군
측에서 전력을 다 싸웠습니다이
과정에서 도쿠가와 사천왕 중 센고쿠
시대의 장비라고 불렸던 혼다 타다
가치가 낙마하는 사건도 있었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서군이 동군을 상대로
역부족이었고 태만 산에서 서군 축
우키다 히데이에 군대는 전멸합니다
고니시 유키 나가도 서구에서 싸우다가
도망칩니다 사사우 산 쪽에서도 부대가
전멸하게 시작했고 이시다 미스나 이의
본대와 그 본대를 호위하던 규슈 3의
다이묘 집안 시마지 가문의 병력이
있었는데요 심하지 가면은 정해 병으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문제는이 정해
병력들을 중요한 곳에 비치 안 하고
총대장 호위하는데만 있었다는 거죠
시마지 가무도 후퇴를 해야 하는데
뒤를 보이고 철수한다면 배후로 공격
뻗을 것 같아서 아예 동군의 진영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로질러 철수하는
이른바 시마즈의 퇴각 전수를 펼칩니다
시마지 요시의 백력 1500여명이
동군의 진영을 가로 질러 100명이
안 되는 인원이 살아서 도주합니다
서은 축의 총대장 이시다 미스나이는
전정에서 도주하지만 친구에게 붙잡혀
도쿠가와 이에게 압송되었고 도망친
고니시 유캐 나가도 체포되어 둘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넓은
의미에서 일본 전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우선 북부 지방에서는 우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싸우고 있잖아 초반에
우기 가문이 승세를 보였으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우스 가문이 계속
밀리더니 결국 우스기 카게 카츠는
도쿠가와 이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서쪽이 규슈 섬에서도 임진란 당시 제
2군 지휘관이자 고니시 유키나가의
앙숙이었던 가토 기요마사가 고니시
유키 나가를 포함한 서군의 다이묘
영지를 다 부수고 다녔습니다 가투
기요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아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정면 승부를 버리진 않았죠 세키 가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아스 군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일본 전역은
도쿠가와 이스의 것이 되었고
1603년 덴노 그부 도쿠가와 이스가
쇼군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막부 정권이
수립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의 영지가
지금의 도쿄 즉
도였던 막부 시대를에도
막부고교생 이게 인진 내란에 대해
깊은 성과를 하며 조선과 국교를
회복합니다 아직 오사카 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
그녀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었으나 뭐 마이다 토시 에도 이시다
미스나 이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도쿠가와 야스는 둘의 끝장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 이보다는 사실
타이밍과 명분이 생길 때까지 좀네
타이밍을 봤던 거 같아요 그러던 중
1614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호코지
아는 거대한 사체를 중수하였다 새로
만든 범종에 국가 항강 군신
풍락이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가와 강을
합쳐서 러로 발음하면 이에야스에 또
신풍 일어로 거꾸로 읽으면 도요토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걸 생트집을 잡
오사카상 전령을 지시합니다 도쿠가와
이스는 무려 20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래도 오사카 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시래 막대한 대산이 쌓여 있어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어떻게든 군사를
모으고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패정 병들을 보아 결사항전을
전개합니다 물론 도토미 히데요리의
깜냥이 한참 안 되지만 오사카성은
아주 견고한 요새였습니다 해자 덕에
꽤 버텨냅니다 도쿠가와 이스는
대포까지 동원하지만 오사카성을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죠 그러나 심리적
압박감에 불안함을 느낀 요도 도노는
도토미 히두리 위험하다며 전투 지위를
못하게 막았고 제멋대로 강화 협상을
체결합니다 전투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는 정도로
강화를 합성했는데 생각해 보니 아직
오사카성의 병력들이 있는 한 도쿠가와
이해에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었어요
도쿠가와 이스는 당장 무장 해제하고
오사카에 있는 전 병력 오사카성에서
다 나가라는 무리한 요구를 했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협상제 안에
전쟁이 제게 시코쿠 3에 다이며
초소카베 모리 치카가 잘 싸우기는
하지만 대세를 수 없었고 1615년
여름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조유미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 함께
회복합니다 이로써 길고도 길었던 생쿠
시대가 도쿠가와 이어스의 최종 승리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럼 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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