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순삭] 일본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5부

역사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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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총정리 5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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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생국 후
시대의 최종 승자라고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세 번째
막부 시대에도 막부의 역사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쿠가와 이스가 수립한
에도막부는 센고쿠 시대의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를 거쳐서 그
토대 위에 형성된 시대이기에
에도막부의 앞서 오다노부 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일본
문화상을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토미
히데요시 시절의 일본 분화를 아즈치
모모야마 문화라고 부릅니다 아저 치가
오다노부나가 시절에 모모야마가쿠인
히데요시 시절에 일본 문화를 가리키죠
생고 쿠 시대의 역사 부적 시리즈를
보시고 오신 분들이라면 다 아시겠지만
오다노부나가 시절의 아즈치 문화는
기존의 불교 문화의 입지가 쇠퇴하고
유럽 문화 등 다체로운 문화가
화려하게 공존했던 시대이면서
적극적으로 해상 무역과 상업을
부추겼다 두투미 히데요시의 모모야마
시대는 다른 듯 같은데요 두투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 달리
천주교의 우호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럽의 서양문화 수입에
있어서는 그다지 폐쇄적이지 않았죠
그리고 오다노부나가 시절에 아저씨
문화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는
지속되었습니다 모모야마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의 다도 문화가
비약적으로 완숙해진 겁니다 일본은
고대 시절부터 다도 문화가 이어져
내려왔지만이 다도 문화의 취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도자이 있습니다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그다지 우수하지
않았는데 임진 혜란을 통해 조선의
유능한 도공들이 대거 포로로 일본에
들어와 도자 문화의 선진 기술를
전파했습니다 가장 유명한 조선인 포로
도공은 23평인테리어
정착 해 도자 제작 기술을 전파해
주었고 일본에서는 이평을 도자 제작의
시조라는 뜻에서 도조라운지
아리타는 일본 도자의 본 고장이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성리학이 일본에
전래된 것도 임진 혜란을 통해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포로로 일본에
넘어가면서였습니다 대표적인 학자가
강황 있데 이황의 학파를 이은 이황의
제자 강황은 임진란 당시 남원에서
의병을 일으키다가 이순 신에게로
합류하러 내려가는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강황을 만난 일본의 유학자들 예컨데
후지와라 세이카 요시다 소준 등이
강황을 통해 일본의 성리학을
전파합니다 강황 덕에 일본의 성리학을
정착시킨 후지와라 세이카는 일본
사상사에서 성리학의 아버지로 손꼽히고
있답니다 자 그렇다면 이어지는
에도막부는 어떤 일본 사회를
[음악]
형성했을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제 독보적인 권력을 구축했습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덴노를
터 쇼군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본의 세 번째 막부에도 막부가
시작하였습니다 도쿠가와 이의 영지가
김의 도쿄 즉에도 있죠 160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쇼군 지여 자진
사퇴하고 세 번째 아들 도쿠가와 히데
타다를 2대 쇼군으로 옹립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상황 느낌으로
물러났고 나중에는 태정 대신으로
임명되는 등 실질적인 실세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있습니다 167년 도쿠가와
이스는 조선에게 임지에 대한 깊은
상과를 하며 조선과 국교를 회복합니다
아직 오사카 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실 요도도노 그녀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있었는데요
1615년 20만 명을 동원한
도쿠가와 이스가 사가성 마저
함락시켰고 두투미 히데요리의 어머니
요도도노 함께 할복하다 이로써 길고도
길었던 전국 시대 즉 생국 후 시대가
끝이 났죠 자 이제 분열 시대가
끝이났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제 막부 권력으로 일본을 일어나
하고 중앙 집권하는 것이 다음
과제였습니다 진시왕의 천하를 통일하고
가장 먼저 했던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제 갓 통일에기에 얼마든지 다시
분열이 될 수 있어서 각 지방의
성벽을 전부 허물었습니다 성벽을
허물면 필연적으로 내전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장기적으로 봤을 땐 인정
물적 교류가 손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통일 의식이 생기거든요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6년 각
지방의 본성을 제외한 모든 지성들을
파괴하도록 했습니다 하나의 지방엔 단
하나의 성만 허용했던이는 지방
다이묘들에게 너희들의 위상은 보장해
주지만 실질적인 입은 차단시키는
취지인 겁니다 그리고 무가제법도 아고
다이묘들의 성각 수리 영진의 사법권
사치 범위 등이 다이묘의 권한과
일상적인 생활까지 일일히 제안하고
규정하는 법령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1616년 독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망을 하니 그간 이대수 군이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비로서 제대로
에도막부의 실권자가 됩니다 도쿠가와
히데타다 게는 일종의 흑역사가
있었는데요 인지하라 직후 도쿠가와
이스가 도토미 히데요시의 잔당들과
버린 최후의 전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구원병을 이끌고
도착을 해야 하는데 도착을 안
하더라는 겁니다 알고 보니 에먼
드에서 싸우다가 길을 잃었다고 하죠
비록 세키가하라 전투는 승리하였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 제때 도착해 주질
않아서이 세키가하라 전투 초반에는
도쿠가와 쪽이 매우 분리하였고
에도막부는 도쿠 와 이에야스 때부터
천주교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 씨보다
훨씬 더 강도높게 박해했다 가와
히데타다 아버지 이에야스 럼 천주교를
박해했다 에도막부는 천주교를 아예
금지시켰고 1622년 55명의
선교사와 신도들이 차용했습니다 비록
천주교 바퀴뿐 아니라 에도막부는 해상
무역의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오로지 중국과 조선에게
허용해 주었고 그간 일본이 적극적으로
교류하던 서양에 대해서도 문호를
닫아버리고 오로지 나가사키에서 그것도
네덜란드 딱 한 국가와 교류를
했습니다이 대슈 은 도쿠가와 히데타다
아버지처럼 1623년 아들 도쿠가와
이에 미스에 쇼군 직을 선유하 본인은
상황으로 물러납니다 1632년
도쿠가와 히데타다 죽자 3대 쇼군이
있던 도쿠가와 이애미가 제대로 친정을
시작했죠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애미는
에도막부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큰
역할을 한 쇼군으로 유명한데요에도
막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명한
제도죠 바로 산킨고타이 제도입니다이
산킨고타이 제도는 각 지방의 다이묘가
1년 단위로 자신의 영지와 수도
애도를 교 대로 거주해야 하며
다이묘의 가족들은 에도에 상주하도록
하는 제도인데요 우리나라로 비유하자면
상수리 제도 기인 제도와 비슷한
제도입니다이 산킨고타이 제도를
실시한게 삼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
미스였다 이면은 쇼군 제도화에
수직적으로 편입이 되었는데요에도 막부
시대 다이묘의 영지를 번이라고 불렀고
이로써 쇼군이 통치하는 직할지 막부와
각 지방의 번으로 구성된 막부 번체자
수립되었습니다 막부 번체자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일본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배경 지식이 되니깐 꼭 아셔야 하는
겁니다 센고쿠 시대 통일 후
수립된에도 학부는 오늘 날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이 중요한데요
이명환 박사님은이 에도막부가 현재
일본의 직접적인 근간이 되었다고도
말합니다 이명환 박사님은 에도막부가
중앙 집권에 된 시기가 아니라 그간
어지럽게 난리 파던 일본의 본건
체제가 번이라는 이름하에 안정화되었다
말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다르게 아주 오래도록 중앙
집권화된 하나의 통일된 왕조가
없었습니다 중앙 건화가 된 건 메이지
유신 이후이니 그 역사가 매우 짧은
거죠 그저 천년간 각 지방별 봉건제가
유지되었기 분열이 되어도 다시 통일
왕조로 돌아오는 중국과 한국과는 큰
차이가 있죠 천년간 봉건제가 이어진
일본의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현재
일본의 풍속과 문화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부분적으로 이해하실 수가
있지 않나요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면이 봉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 어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봉건제는 필연적으로 분열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니깐요 에도막부가
그래서 독특한게 지방 분권적 성향의
봉건제가 유지는 되는데 지방 분야가
내전을 극도로 제도적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산킨고타이
제도가 있는 것처럼요 다이묘들의 번
영유권을 인정해 줄 테니 쇼군에 대한
수직적인 계급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도록
제도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통일
왕조를 여러 번 거쳤던 중국과
한국보다 안정적인 봉건제를 구축한에도
막부를 거치며 일본인들은 중국인이나
한국인보다 훨씬 더 수직적이고 예의를
차리고 윗사람의 충성을 절대적으로
바치고 윗사람에게 대들지 않고 침묵
하는 것을 예의로 여기는이 계급적
문화가 더 자리를 잡은 겁니다
확실하게 자리 잡은 지방 분권적
봉건제는 에도막부 일본인들의 사회상과
경제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첫 영향으로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본인들의 영지를 개발하고
또에도 막포 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이
다이묘들의 영지은 행정 도시 겸 상업
도시로 거듭납니다 이러한 도시 형태를
갖춘 다이묘들의 영지를 조카마치
불렀습니다 이러한 조카마치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 역시 쇼군이
머무르는에도 덴노가 머무는 교토
그리고 도토미 히데시 거점 도시로
성장했던 오사카 이렇게 3대
도시였습니다이 중에서도 역시 실권자
쇼군이 머무는 교토가 정치의
핵심지이자 가장 규모가 컸던 도시였고
덴노가 머무는 교토의 경우 워낙
역사가 깊은 도시이다 보니까 일본
문화 특유의 그 장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수공원 및 예술의 도시였고
오사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물자들이
집산 아고 거쳐가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3대 도시 외에도 각 지방에는
조카마치 아는 도시들이 번역하였는데이
에도막부 시대는 독특한게 각 조카마치
내에는 신분별 거주지를 구분하기
다이묘가 사는 곳 사무라이들이 사는
곳 상인들이 사는 곳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곳 승려들이 사는 사찰 구역 뭐
이렇게 말이죠 또 에도막부는 도요토미
히디 시의 방침이었던이 농민은
사무라이가 될 수가 없고 사무라이는
농민이 될 수 없다는 분리 정책을
그대로 이어갔습니다 이렇게 확연하게
구분은 하니까 아무리 에도막부가 봉건
시대였어요 그 시대처럼이 내전으로
치닫지 않을 수가 있던 겁니다 또
자영농 몰락을 막기 위해 지배층들이이
분지 제한령을 내리고 조선의 오가 작
과 같은 제도인 고인 구미 제도를
실시합니다 이처럼 에도막부가 다이묘
들이든 농민 공동체든 그들의 권위는
보장해 주면서 또 동시에 그들의 성장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버렸죠
에도막부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미스
제임 시절 1643년 막대한 대기근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해상
무역의 폐쇄적이었던 에도막부는
이전보다 훨씬 더 농업에 집중하며
농업을 진행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농업이 크게 진행하니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여 상권이 형성되었고
시간이 지나면 아예 내다 팔 목적으로
농사를 짓는 상품 작물들이 유행하기도
하면서 상업을 부추겼습니다 또
에도막부는 지방 영지 간 교류도
활성화되다 보니 상업이 크게
촉진되었다 역사 5부에서 소개해드린
삼킨 부타이 제도에서도 다이묘들이
수도 에도를 방문할 때 정말 엄청난
규모의 원이 여러 곳을 두루 거치다가
에도로 도착한다 말이죠 인파가 많고
여러 곳을 지나치니 자연 설의 장사가
활성화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에
따라 에도막부 시절에는 신흥 상인
층이
부상하였고 이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상인 조합을 나카마 라고 불렀습니다
에도막부는 나카마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차라리 나카마 상대로 일정
수익을 세금을 받는 조건으로 그들의
상업권 보장해
[음악]
주었죠 이렇듯 에도막부 초 중계
때까지만 해도 에도막부의 경제는 점점
고도화되고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임진
내란 이후로 조선의 도자 문화와
성리학 문화까지 전래되면서 일본의
문화까지 한층 발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술이라는게 돈 많은 사람들에
의해 더 커지는 법이잖아요 에도막부는
지배층뿐 아니라 돈 많은 신흥 상인들
조인이 있었기에 더 다양한 방면에서
일본의 문화가 지원을 받으며
발달합니다 문학적으로는 일본 문학사의
정향 운문 시를 일컫는 과거 와카와
렌가 전통이 비로소 에도막부 때
하이쿠로 발전을 하고요 회화에서는 그
유명한 우키요에가 바로 에도막부 때
탄생했습니다 우키오 kan 민중들의
풍속을 의미합니다 우키오 판화가 당대
매우 유행하였고이는 네덜란드
서양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퍼져 많은
유럽인들이 일본의 우키요에 빠졌죠
대표적으로 반고흐가 있죠 반고흐는
일본의 우키오 그림을 보고 큰 충격에
먹었다고 하고 그 이후로 반고의
화풍이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반고의 작품들이
반고가 우키 유해를 접한 이후의
그림이랍니다 가장 유명한 우키 유에는
역시 가나가와의 파도 그림이겠죠
더불러 그동안 내려오던 일본 전통연극
노에이어서 가부키 에도막부 때
만들어졌습니다 노는 가면을 쏘고
가부키는 화장을 지나게 하는 차이가
있죠 그리고 노는 사무라이들이 즐기던
연극이고 가부키는 상인들이 즐기던
연극이었고 이렇게 보니 현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전통 문화들 대부분이
에도막부 때 형성된 겁니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들은 아까도 말씀드렸듯
상인들 즉 조인의 지원들이 풍성해졌고
에도막부 시기의 문화를 조인 문화라고
부르며 에도막부시기 중 가장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가 오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 제위 시절인데
도쿠가와 츠나요시 때 연호가 갤로
후여서 에도막부 중 17세기의 문화를
갤로프 문화라고 부른답니다 또 약간
비주류로 폐쇄적인 무형을 지향했던
에도막부는 오로지 나가사키에서 오로지
네덜란드와 교류를 했다고 말씀드렸죠
일본인들은 네덜란드를 통해 유럽
문화를
그래서 에도막부 시절 서양 학을 난
학이라는 난은 네덜란드를
[음악]
의미하죠 상인들에 의한 조니 문화가
에도막부의 주류가 되니 점점
사무라이들이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조유
투이 히데요시의 정책 이후로
사무라이들은 생기를 벌어들일 수 있는
정상적인 직업이 없으니 경제적으로
도태될 수밖에 없고 에도막부는
사무라이의 일상생활까지 제안하고 귀제
아니 사무라이라는 낭인의 가까운 골로
전락하는 사무라이들이 매우 많아집니다
또 에도막부는 무 들 내도 급을
등급화하여이 무사의 등급 상승을
억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국내외적으로
딱히 전쟁이 없잖아요 사무라이들의
위상이 추락할 수밖에 없죠 사무라이
정신에 그초록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일본이었다 이이들의 체면이 마리안
이게 된 겁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으니 사무라이들은 상인들에게
빚을지는 경우도 허다 있다고 합니다
그나마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의 상류
사무라이들은 실정이 좀 나았지만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우 대부분이 채무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농민들의 경우 신부는
사무라이나 귀족들에 비해 낮지만이
경제적으로 한건을에서 성공하는
경우들이 꽤 있었고 갤로프 문화과
민중 문화라는 과에서도 알 수 있듯
민중 의식이 매우 각성합니다 지방
영지의 다이묘들이 나 막부에서
농민들을 상대로 과하게 과세를 하면
곧바로 농민들은 생고 쿠 시대 종료
이후로 없어진 줄 알았던 각 지역별
농민들의 작연 공동체인 이키를
조직해서 본기를 일으키기 일수였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농민 본기가
없는 시대가 어디 있겠냐만 일본
사에서 키들의 농민 본기가 가장 많던
시대가이 에도막부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에도막부는 사회 경제가
빠르게 격변하고 있는데 지배 층이나
피지배 층이나 바뀐 사회 경제 구조에
아직 적극 못하면서 사회가 번영하는
동시에 어지러운 과독이었습니다 막부
정권에서는 정책적으로 뭔가이 제도를
구축해야만 했는데요 이때 개혁을
시행한 쇼군이 등장하니 바로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모이었습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경제 개혁에
들어가는데 8대 수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개혁을 교호 개혁이라고
합니다 우선 도쿠가와 요시무네 몰락한
지배층들이 작은 관직이 받아 일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고
1724년에 대대적으로 검약을 내려
에도막부 문인들의 과도한 지출을 억제
시키려고 했습니다 산킨고타이 제도에
따라 지방 다이묘들이 1년간 애도에
머물러야 하는 기간을 반으로 줄려
주는 대신 다이묘들에게 직접적으로
과세를 하고 개간지를 장려하면 조세를
감소해 주는 등 특혜를 베풀었고 팔트
6은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지휘할
때까지만 해도 에도막부는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렸는데 교호 개혁으로
적자를 상당수 메꾸며 물가도 많이
안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
요시의 교호 개혁은 적자에 시달리던
상황을 타개한 것일뿐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은 부제 했고 여전히
농민들과 상인들은 쇼군의 막부와
다이묘들의 번에 불만 한가득이었고
하급 사무라이들은 구제되지 못하고
있었죠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나중에
가서 결국 막부 타도와 메이지
유신이라는 근대화 운동의 간접적인
배경이 되는데요에도 막부는 어떻게
메이지 유신으로 아지
이어질까요 17세기 에도막부의 경제적
부흥은 어느 순간부터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여 물가가 요동쳤고 급변하는
경제 구조에서 도태되는 하급
사무라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8대 쇼군이 있던 도쿠가와 요시의
교호 개혁으로 물가를 안정화하는데
크게 일조했지만 근본적인 사회 경제
구조의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었죠
1745년 도쿠가와 이해 시계가 구대
쇼군이 되었습니다 도쿠가와 이해 시계
때부터 쇼군보드 더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던 비선실세가 등장하는데요 바로
다누마 오키스 그였습니다 다누마
오키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구대 쇼군이 있던 도쿠가와 이해
시계가 다누마 총애하여 그를 중용했고
다우마는 9대 쇼군 도쿠가와 이해
시계와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해
하루 재임기에 막부의 권신이 사실상
모든 정사를 다우마가 좌지
유지했습니다 다우마가 권력을 잡은게
1767년 그리고 그가 탄핵된게
1787년이 20년을 다루마의
시대라고도 부를 정도입니다 다우마
오키스 그는 적극적인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상인 조합인 나카마로
지원해 주며 그 규모를 대풍 늘리게
해주었고 광선을 개발하여 구리 생산의
열을 올렸고 팔티 속은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재정 긴축으로 적절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과 달리 다우마는
화폐를 더 늘리는 통화량 확대로
적자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다누마
오키스 는 서양에 대해서도 대단히
흥미가 많았는데 그로 인해 지난 6부
영상에서 소개해 드린 에도막부의
난하이 크게 발달하기도 합니다
다누만의 중상주의 정책들로 에도막부의
상업이 더 자극되고 발달하기도
하였지만 사회의 빈부격차 문제와
인플레이션 문제들이 겹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다누마 오키스 그는
어쨌든 권신이 온갖 비리와 뇌물
스캔들에 시달렸고 막부 조정이 부장
부패가 만연한 곳으로 전락합니다
다누마 오키 스구 실각에 결정적인
신호탄이 되었던 사건이 있습니다
1782년에 텐메이 대기근이 있죠
그리고 17 1883년에는 아사마
산이 폭발하게 했습니다 가뜩이나
단마의 그간 중상주의 정책으로 인해
빈부격차와 인플레이션이 문제가
심했는데 대규모 자연재해와 기근을
겪으니 상황은 더 처참해 있는
겁니다이 모든 사회 경제적 문제들이
다우마 때문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1786년 11대의 쇼군으로 주기한
도쿠가와 이에 나리는 선대 쇼군처럼
다루마를 중용하지 않자 1787년
다누마 오키스 그는 실각하고
말았습니다 다우마는 실각 1년 후였던
1788년
사망하자
다누마 오키스 그의 빈 제리를 꿰찬
건 또 다른 권신 마스다이라 사다노부
있습니다 마스다이라 사다 도보는 이전
다누마 정책들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개혁을 선포합니다 그의 개혁을 간세이
개혁이라고 부르는데요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높아진 물가를 잡는
일이었습니다 우선 다우마가 확대해
놓았던 상인 조합 나카마 규모를 다시
축소시키고 화폐 통화량을 극도로
제한하였습니다대 기금과 자연 재우를
피해받는 백성들을 지원하고자 상업보험
장려하고 채무자가 된 가신들이 하급
사무라이들을 구제해 주기도 했죠 각
지방별로 지방 기금의 70% 저축하라
7부 접근법을 시작했고 전반적으로
사치를 억제하는 풍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조선 통신사 규모로
축소시킨 것도 마스다이라 사던 노부의
간세이 개혁의 일환이었습니다
1811년에 끝으로 조선 통신사는 더
이상 일본을 방문하지 않습니다
1812년 마스다의 사드 노브는
은퇴를 선언합니다 하지만 만성적인
사회적 혼란 중 하나인 지방 다이묘의
영지 번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계속
겪고 있었습니다 지방의 번들은 번정
개혁이라고 자기들 나라면 경제 개혁과
다양한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제기할
방법을 찾아보지만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가 공존하던 그 과도기에
시대에 적응하는 일이 여관 어려운게
아니었죠 1787년 11t 쇼군
도쿠가와 나리는 쇼군 직을 아들에게
넘겨주고 본인은 상황 느낌의 오고
쇼로 물러납니다 실권은 쇼군보드 상황
고시로 물러난 도쿠가와 이에나리게
있었죠 도쿠가와 이에나리 사회 경제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수적
가치를 더 강화하기로 합니다 전통적인
농업 중심의 국가로 돌아가자며
1841년부터 새로운 개혁의 착
수이이를 덴포 개혁이라고 합니다
개혁의 방향은 간세이 개혁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농업 장려 새치
풍조 업제 부정부패 척결 상업 억제
등이었죠 하지만에도 막부는 자꾸만
상업을 억제시키는 시대를 역행하는
개혁들을 내놓으니 막부 정권의 정책과
시대 상이 맞질 않아서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댐퍼 개혁은 오히려
농민과 상인들이 막부 정권의 무능함을
실망하는 계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죠
아니 그런데 자꾸만 막부 정권에서는
사치 문화를 억제한다 억제한다고
하는데 대체 당시 일본 문화는
어땠을까요
지난 사무라이 역사 6부에서 갤로프
문화 라고해 상인들 즉 조인에 의해
전개되었던 17세기 에도막부의 문화를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이쿠
우키요에 가부키가 만들어졌던 시대죠
19세기 에도막부의 문화를 가세이
문화라고 합니다 가세이 문화도 갤로
문화와 같은 양상의 문화 패러다임이
있는데 갤로프 문화보다 훨씬 더
오락성이 짙어지고 향락적이고 다소
퇴폐적이고 뭐 좋은 말로 하면
자유분방한 사고가 깔려 있었답니다
가세이 문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국학이 민중들의 대중문화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그만큼 민중 의식이
더 각성되는 뜻이겠죠 민중들을
대상으로 한 해학 통속 소설들이
열풍을 불러일으켰는데 19세기에도
막부를 상징하는 소설가가 짓펜샤
이쿠와 다키자와 바킨 등이 있습니다
19세기 에도막부의 출판량이 18세기
다 배 이상이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회화 방면에서는 풍속화가
유행하였습니다 가스시 호쿠사이 후지산
그림과 기타가와 우타마로 분여 인상
식품 등의 그림은 아마 여러분들도
자주 보셨을 것 같습니다
막부의 의미없는 정책과 다르게 각
지방의 번들이 자체적으로 번전 기역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그 가운데
사스마와리 aber 소개해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스마리 규슈 가고시마
조슈번의 오느날 규슈와 붙어 있는
혼슈섬 끝자락의 야마구치 있니다
가고시마와 야마구치의 지리적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바다와 붙어 있습니다
바다와 붙어 있으면 해상 무역을
작년에서 막대한 수익을 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에도막부는 해상
무역에서 대단히 폐쇄적이었던 그래서
사스마와리 1에서는 이 막부의
폐쇄적인 무역 정책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스마 대규모 채무자가 된
사무라이들을 어떻게든 구제해 주려고
했고 지금의 오키나와인 리쿠와 무역을
적극적으로 부추입니다 그리고
에도막부가 서양에 대해 대단히
폐쇄적이 쿠를 통해서 서양식 무기와
문물을 대거 수입합니다 조슈번의 경우
번뇌 물자의 유통과 상업 지능을 위해
전매하는 품목을 완화하고 채무자들을
구제해 주고 운수업과 금융업 상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스마가 조슈번이 성공적인 번정 기억의
사례로 들고 있답니다
그간 서양에 대해 폐쇄적이었던
에도막부 중국 청나라에서 앞편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에도막부는 더
철저하게 폐쇄적인 외교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사단이
터지죠 1853년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남 내적이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미국의 13대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문호 개방을
강요하며 대답을 들여라 1년 후 다시
오겠다고 하고 철수합니다 이때 페리
제독이 이끌던 미국 군함이 검은색
증기선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은 저 미국 국의 군함을 쿠루
훈라이프 훈회 사건이라고 부르며
우리로 비유하자면 운유 사건 같은
겁니다 에도막부는 미국의 개한 강요에
별달리 선택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1854년 페리가 다시 아홉 척
군함을 이끌고 와서는 무력으로
시위하며 개항을 강요했습니다 당시
13대 쇼군이 있던 도쿠가와 이해
사자는 병약했던 그의 가신들과 유력
다이묘들이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앞편 전쟁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 그들도 두
눈으로 서양식 구남의 위력을 받기에
반강제적으로 개을 수락 하고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며 에도막부는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개강합니다 미국이 성공적으로
일반을 개시키 러시아와 영국도 군함을
이끌고 와서 강제로 일본과 수교했다
이렇게 군함 몰고 와서 계양을
강요하고 위협하는 외교를 포함
외교라고 하며 미국에게 당한 일본은
똑같은 방식 그대로 훗날 조선을
개항시기 하지만 일본의 문노 개방에
대단히 부정적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덴노 있습니다 그리고 지방
다이묘들의 개방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은 서양 세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양 이론을 펼치면서
에도막부가 너무 무능하다 이제는
덴노의 친정을 시작하자며 조항로 같이
주장합니다 그간 유능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는 에도막부는 반 막부 운동을
강경하게 진압하려고 하는데 덴노를
지지하는 반 막부 다이어는 점점 더
생겨납니다 막부 타도 운동의 주
세력이 사스마와리 이번이 있습니다
1868년부터 1869년 결국 막부
조정과 막부 타도 세력 사이에 보신
전쟁이라는 내전이 발생했고 승자는
막부 타도바 1868년 에도막부의
마지막 쇼군이 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 봉환 즉 조정의 모든
권력을 덴노에게 다시 돌려준다고 선언
이로써 애도 막부는 끝이 났고 당시
덴노였던 메이지 덴노는 거처를
교토에서에도 즉 도쿄로 옮깁니다
그리고 메이지 덴노는 막부의 역사가
끝났으며 앞으로 덴노의 친정의 시작할
거라는 왕정복고 대호령 발표하고
근대적 중앙집권화 개혁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합니다 그럼 역서
도박이었다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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