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남중국 통치과정(부제 : 색목인이 한화되면 큰일난다)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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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디오 조회수·2024. 5. 15.
우구데이 시절부터 쿠빌라이 시기까지 몽골제국이 남중국을 통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본 영상의 자막은 AI기반 자막프로그램인 vrew의 도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참고서적)
1. 대원제국. 혜안출판사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3.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4. 위키백과. 나무위키
00:00 인트로
00:05 서론
01:05 1. 행정조직
02:26 2. 색목인
04:40 3. 한인과 남인을 차별한 이유(자발적 투항)
06:41 4. 예외(한인 예외 : 야율주와 사천택)
08:02 5. 남중국 통치(강압통치)
안녕하세요 저스티스 있니다 지난
시간에 몽골이 북중국을 통치하는
과정을 말씀드렸는데요 간단히 요약해
보면 처음에는 한인 새우를 통해서
간접 통치하다 경험을 쌓고 화북의
사정을 익힌 후에는 세법을 만들고
호구 조사도 하면서 직접 지배로
변경했다 단 우구데이 직접 지배 이후
야율 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땅을
봉하여 재우에게 나눠 로서 중국식
중앙집권적 주현제 정착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몽골이
1234년에 금을 정복하면서 화북을
차지했고 남송이 1979년에 멸망하니
남송은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약
45년 간이나 몽골의 공격을 받으며
버티게 되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몽골이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정
조직을
편성했지만 이과 한인 남인을 어떻게
등용 여 통치에 사용하였는지 맨파워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대 이후로 중국의
대표적인 행정 제도는 주현제 있습니다
주현제 지방 행정의 최소 조직인 현이
있고 그 위에이를 통합하는 주를
설치하여 주에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조정과 소통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중앙 집권적 통치 제도입니다
세법을 정한 재상 야율 소재는 대한을
설득하여 몽골 제국의 중국식 주현제
도입하려 했지만 우구데이 끝내 분봉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은 우구데이 몽골을
중화하기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며 동시에 중국 대륙을 분할
통치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실제로
훗날 쿠빌라이 대칸이 조직한 대원의
행정 조직을 보면 중앙 정부인
중서성이 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을
지하라고 그 외에 중국 대륙을 하남
강북 섬서 감수 강절 강서 호광 운남
등 여덟 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지방
정부인 행중서성 설치했습니다 중국
대륙을 임의로 구획하고 각각 반
독립적인 자치를 시행하는 몽골식 통치
방법은 주 현제에 기초한 중국의
전통적인 통일 정치와는 확실히 다른
것으로 중앙 집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화되고 싶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지배 자체가
급선무였던 몽골은 봉건제를 선택하였고
중앙 집권은 차후에 옵션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군사적인 우의를 바탕으로
중국을 정복한 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 대륙을 지배한
이민족을 정보 왕조라고 부릅니다 미국
역사학자 카를 비트포겔이 처음 사용한
용어인데요 대원 제국은 요금 천과
더불어 대표적인 정복 왕조로 몽골인
생모인 한인 남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정보 강조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다민족
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
민족으로 국가가 형성된 것이 특이할
것은 없습니다 다만 요나라와 금나라에
없었던 생무 인이 추가되었다는 것은
몽골 제국만 의 독특한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목이 몽골이 화북을
지배할 때에도 당연히 활약했지만
남송을 정복하고 더 많은 지배 인력이
필요할 때 특히 중용 되었습니다
생목이 몽골 서쪽에 존재했던 사람들로
몽골이 금나라를 정복하기 전에 이미
항복했던 사람들이 주를 이룹니다 웅구
티베트 탕구트 나이만 위구루 카를룩
이란인 인도인 아랍인 러시아인 유대인
아지 포함하며 비록 항복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유럽인들도 프랑크를 통치하면서
생모인 포함했습니다 생모인이 한인
남인과 구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눈동자의 색깔이 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생모인이 한종 문화에 융화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지배자가 지배자다
100배나 많은 상황에서 제삼자인
생모인 지배 세력으로 확보하려 한
것은 지극히 정략적인 것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인은
거란인 여진인 고려인 그리고 화북의
한족 가지를 포괄하는 칭호로 금나라
치아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남인은 남성의 유민을
말합니다 이들 신부는 각각 고유의
언어 풍속 관습의 차이로 다른
신부들과
구별되었습니다 몽골이 서로 다름을
인정한 채 살아가도록 용인했다는
점입니다 다만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갈
자유를 허용한 것일뿐 서로 균등한
지위를 허락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백관의 우두머리는 몽골인을
한다는 통치 원칙하에 몽골인 중에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생 인으로
한다고 했으므로 생모인이 몽골인의
다음 가는 신분이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이 한인이 마지막
계층이 남인이
있습니다 몽골이 한인과 남인을
차별적으로 대한 기본적인 이유는
자발적으로 투항했다 있니다 이것은
몽골이 적에게 먼저 사신을 보내서
항복을 강요하고 항복한 경우에는
봐주고 항복하지 않으며 초토화시키는
정복 정책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한인 세우는 모두
자발적으로 몽골에 항복한 후 몽골로
터 일정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몽골 제국의
일원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성에서 거주하던 한인들은
금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반 세계에
걸쳐서 끝까지 저항하다가 항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자는 몽골에 대한
협력자이자 강제로 예속된 자입니다
이것이 양자간 대우의 차이가 만들어진
기본적인 이유입니다 크게 볼 때
생모인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몽골은
한인을 정복하기 전에 옹구스 티베트
탕구트 나이만 등 서방 계통 생모인
먼저 정복했을 한인보 먼저 항복해서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신분상 한인보 우위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모인 이용해서
한인과 남인을 통치한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생모인이라 할지라도
만약 하나될 경우 그 생모인 관료는
더 이상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거한 족이나 여진족 등 이민
족이 조금만 방심하면 모두가 한 족에
동화되는 판에 생모인이라고 동화되지
말라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몽골
제국은 미리 대응책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었죠 몽골인들은 생각보다 매우
스마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때
생모인이 화북에 동화되었다 대한 판단
기준은 생모인 관습법이 있습니다
생모인이 자신의 민족이 지켜야 할
관습법을 지키지 않고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다 판단되면 생모인의 대우가
정지됨 동시에 징벌로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몽골 제국은 한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몽골이 가장 대표적인 정부 강조나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민족적 신분
규정을 초월하는 예외는 없었을까요
있었습니다 중앙행정 기관인 중서성
우승상이라는 최고 간지까지 올라간
한인 야율이나 천택이 그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야율 2는 지난 시간에
몽골이 목초지로 변하는 것을 막아낸
인물로 소개해드린 하나된 거란인
야율초재 아들입니다 아울러 사천 택은
재빨리 몽골에 투항한 후 많은 군사
업적을 쌓은 대표적인 한인 새우입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면 사천 택은
쿠빌라이 심복으로 대우 받던 중신이
있는데 그의 증손 사요가 복권 행성의
장관인 평장 정사로 임명될 때 사요는
본인이 한인이 장관 자격이 없다고
부임을 거절했습니다 그틈을 타서
쿠빌라이 대한의 신하들도 장관은
몽골인이 차지해야 할 관 안이라고
간언했다 쿠빌라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대위를 한인으로 보는
것은 가당치 않다 그렇다면 그의
손자도 국인 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은 특수한 경우가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읽은 책에 따르면 한인 중에서도
특히 금나라 유미는 생모인 럼 중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은 채 몽골에
복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야유 씨나
사촌 씨처럼 등용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인에는 그런 기회 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몽골은 이렇게 간접의 직접
통치로 이전하면서 무난하게 화북을
통지할 수 있었는데 남성을 멸망시키고
강남마 병합되지 기존 체제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강남은
화북보건지소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선진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몽골은
화복 체제의 경험으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강남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한
체제를 구현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강남의 관리들이 민중은 몽골에 대한
위화감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 컸습니다
자기들보다 저급한 사람들에게 통치
받아야 한다는 자괴감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쌓인 반항심이
크고 작은 반란으로 표출되고
소극적으로는 제국의 정책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저항하였다 gold 제국은
이러한 강남의 반응에 대해서 오히려
한인과 제휴를 강화하고 남인을
억제하여 문제를 돌파하려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는 과거제를 아예
폐지해서 남인이 중앙정부에 진출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습니다 대신
이원 세공재료 통해서 간단한 시험을
치르고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하급
관리에 머무르도록 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몽골 제국에 항복한
남송의 정규군을 이용하지 않고 한인
천호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제국이 강남과의 관계를 이렇게
설정하다 보니 한인의 중요성이 커지고
반대로 막부에 살고 있는 내국인
관료들의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아
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한지로 이동해서
귀족한우 gold 인과 막북
중앙정치에 관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몽골인 사이에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불만
즉 내지와 한지의 괴리감은 새로운
칸을 옹립할 때 항상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었다 사회가 더디게 발전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