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제국(금나라)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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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비디오 조회수·2024. 11. 1.
몽골계 거란에 이어 북중국을 정복한 퉁구스계 여진(금나라)제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연의 맹으로 거란이 한화되어 야성이 사라지자 그 틈을 타서 여진이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고 새롭게 동북아의 맹주가 되는 과정과, 몽골의 성장으로 쇠퇴하는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지도는 현 고등교과서를 기준으로 할 수 밖에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문헌)
-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김호동
- 대송제국쇠망사. 자오이.
- 고등 동아시아사. 금성출판사.
- 위키백과.
00:00 인트로
00:05 서론
00:26 1. 여진 등장(거란 멸망)
03:21 2. 중원 정복(북송 멸망)
04:52 3. 여진 남하(남송 건국)
06:12 4. 여진 쇠퇴(몽골 드장)
07:08 5. 여진 멸망
10:25 아웃트로
안녕하세요 정스티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거란제국에 이어서 여진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영상 역시 지난 유목제국사 개관, 금나라, 정강의 변 등
세 편의 금나라 영상을 바탕으로 흐름이 끊기지 않는 선에서
중첩되는 내용은 최대한 생략하고 보다 심층적으로 말씀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1004년 전연의 맹약 이후 거란은 차츰 한인에게 길들여지며
한화된 몽골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2세기가 되자 거란은 속나라에게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은 나라가 되었지요.
그렇게 거란의 붕괴는 이미 전연의 맹약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거란이 한화되며 시간이 흘러 1100년 휘종이 즉위하였고
속나라의 위정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거란에게 빼앗긴 북경과 대동을
탈환할 계획을 현실화하고 싶어졌습니다.
중국은 예로부터 EEJ 또는 원교 근공이라는 외교 전략으로
이민족을 다루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속나라는 이번에도 자신들이 야만인이라 치부했던 여진족을 이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속나라는 거란에게 막혀 한세기 동안이나
만주 동북부의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판단은 속나라를 돌이킬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리게 되죠.
12세기 당시 여진은 완안부 출신의 아쿠타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타난 시기였습니다.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의 저자 르네그루스에 따르면
완안이라는 말은 단지 중국어 왕을 퉁구스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완안부의 아쿠타는 흩어진 여진족의 힘을 하나로 모아
야성을 잃어버린 거란의 지배를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1114년에는 영강, 1116년에는 요양, 1120년에는 거란의 북경 임왕까지
주요 거점을 빼앗는 데 성공하며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죠.
이를 정확히 모른 채 속나라와 여진이 체결한 맹약이 바로 1121년의 해상의 맹입니다.
해상의 맹은 간단히 말하면 여진과 속나라가 함께 거란을 협공하되
장성 이북은 여진이, 장성 이남은 속나라가 공격하기로 한 합의입니다.
따라서 장성 이남인 영경은 속나라가 공격하고 거란을 제압한 후 영경은 속나라가 가지기로 되어 있었죠.
해상의 맹약 이후 여진은 1121년부터 1123년까지 거란의 대다수 영토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속나라는 협약 이후에도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죠.
그러다가 여진이 거란을 연달아 물리치면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비로소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속나라는 이마저도 거란에게 패배하여 결국 여진이 영경을 함락하는 상황이 펼쳐졌고
여진은 오만한 태도로 가혹한 세패를 관철한 끝에 영경을 속나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전쟁은 이렇게 거란이 멸망하며 일단락되었지만 속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의 문제는
한화되어 비교적 다루기 쉬웠던 거란이라는 나라가 여전히 야만적 기질을 가진 여진으로 대체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속나라는 이제 거란 대신 여진을 선택한 그 오판의 대가를 톡톡히 치려야만 했습니다.
해상의 맹 이후 거란과의 전쟁 중에 장각 사건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금에 투항하여 금나라 장수가 된 요나라 출신의 장각이
다시 한번 속나라에게 자신의 땅을 내놓고 항복했을 때 해상의 맹약을 어기고 속나라가 그 항복을 받아준 것이었는데요.
이는 거란의 멸망 이후 금나라가 속나라를 공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아울러 아쿠타가 사망하고 새롭게 직위한 동생 오걸매는 형보다도 더욱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북경 북방지역의 영유권 문제로 다툼을 벌이며 도발해 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결국 금나라와 속나라는 다시 한번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금나라는 1125년 26년에 걸쳐 북경을 비롯하여 하북의 평원을 차지했고 이어 태원을 비롯한 섬서지역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개봉으로 진군하여 북송의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아 그들을 폐위시켜버렸는데 이것이 바로 정강의 변입니다.
한인 전통의 외교법인 이의제를 통해서 거란을 잡고 어부지리로 북경을 탈환하고자 했던 속나라의 판단착오는 결국 북송 멸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속나라의 입장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휘종의 아홉째 아들 강황 조구가 개봉이 없어서 화를 면했고
1127년 그가 임한으로 내려가 남송에 고종이 되면서 나라의 명맥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 뿐이었습니다.
속나라를 남쪽으로 쫓아낸 금나라는 아직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채 속나라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북중국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여 중원공략을 끝마쳤고 이제 남중국을 향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1129년 장수 전물갈이 지휘하는 금군은 회수와 양자강 사이 지역을 정복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양자강 남쪽 방어선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렇게 건주까지 밀고 내려가 남쪽의 한계선까지 도착하였는데 이는 다음 세기의 몽골의 진격 속도보다도 빠른 것이었죠.
파족지세의 금나라는 남경을 곧 함락했지만 고종은 또다시 영파와 온주 등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아울러 남쪽 깊숙이 침투한 금나라에게도 문제가 발생하였으니 금군은 완전히 기병으로 고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중국에 범람하는 땅과 서로 얽히는 강들 논과 운하 우밀조밀한 인구가 언제든지 자신들을 기습하고 포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금나라는 결국 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남송 고종은 1130년 언제라도 바닷길을 통해서 쉽게 도망칠 수 있는 이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이만은 몽골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남송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1135년 태종 오걸매가 죽고 뒤를 이어 그의 사촌 함랄이 제3대 희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하지만 몽골 초원에서 몽골이 새롭게 카불칸의 영도하에 연합체를 형성하여 금나라의 배후인 동부 고비지역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금나라는 많은 국경지역을 양도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금나라의 희종은 북방으로부터의 위협 때문에 송나라와의 화친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하여 회수의 선을 따라 국경이 정해졌고 황하와 위수지역은 금나라에게 한수유역은 남송에 속하며 남쪽의 국경이 결정되었습니다.
이렇게 1135년 이만을 수도로 하는 남송과 하울빈에서 가까운 회령을 수도로 하는 금나라로 중국이 분할된 것인데
유목민이 타국과의 국경을 확정하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버렸다는 것은 이제 쇠퇴할 일만 남았다는 것을 의미했죠.
몽골을 통일한 칭기스칸이 최초로 공격한 정주문명은 금나라가 아니라 감숙 오르도스 지역에서 건설된 티벳계열의 서하였습니다.
그들은 송나라의 문화를 흡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발전한 나라였는데
몽골은 금나라보다 약한 서하를 먼저 공격함으로써 자신들이 정주문명을 공격해서 성공할 수 있는지를 시험한 것이었죠.
몽골인들은 넓은 평원에서 공격하는 것은 훌륭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요새화된 거점을 공략하는 것에는 익숙치 않았기 때문에 서하를 점령하는 데 많은 고충이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칭기스칸은 결국 힘겹게 서하를 복속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제 이 경험을 바탕으로 풍족한 땅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칼라를 동남쪽의 금나라로 정조준하였습니다.
하지만 몽골은 여전히 성체를 빼앗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공격에 성공하고도 결국 공성을 완성하지는 못하였고 언제나 전리품만 가지고 철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면 금나라는 몽골이 철수한 사이에 성벽을 보수하였으며 다시 돌아온 몽골은 한번 공격했던 곳을 두번 세번 다시 공격해야만 했죠.
그런데 이렇게 몽골의 금나라 정벌이 시작되었을 때 북경의 옛 주인이었던 거란인들 중에서 야율씨의 후손인 야율유가라는 인물이 1212년 6화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칭기스칸은 야율유가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고 제베의 친척 제베누야니 지휘하는 구원군을 야율유가에게 보냈습니다.
거란인들은 몽골계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몽골과 연합하여 툰구스계 여진에게 대항한 일종의 종족적 결속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죠.
그렇게 1213년 제베누야는 야율유가가 금나라로부터 요양을 빼앗고 거란인의 땅에서 몽골을 종주로 인정하며 스스로 요왕으로 칭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금나라에게 남은 것은 북경이었는데 칭기스칸은 북경을 점령하기 위해서 북경의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 이 시기에 금나라 조정에서는 영재가 장군 홀사오에게 암살당하고 홀사오가 영재의 조카 오도보를 죽이시키는 정변이 있었죠.
칭기스칸은 전공법에 의한 공성전을 수행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금나라는 불안정한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양국은 휴전협상을 시작하였고
금위 칭기스칸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전리품을 주는 것을 합의한 후 몽골은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오도보는 몽골이 떠나자 곧 개봉으로 천도하였는데 칭기스칸은 이것을 금위 나라를 정비하여 다시 한번 전쟁을 일으킬 계략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먼저 화의를 파기하면서 선수를 쳤습니다.
1215년 칭기스칸은 다시 한번 북경을 점령하였고 도시 전역을 불살라버렸죠.
금나라는 이제 개봉을 중심으로 섬서성 일부와 하남성 지역 정도를 가진 것이 되었는데 남으로는 송나라 북으로는 몽골에 포위된 형국이 되면서 이때 이미 사실상 그 수명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1234년 송몽 연합군에게 체주성이 함락되면서 금나라는 멸망한 것입니다.
여러분 유목민은 자신들이 점령한 정주문명의 대도시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10세기의 거라는 몰라도 최소한 12세기의 여지는 최소한의 사륙만으로 곧바로 전 왕조를 계승하였고 그 뒤에는 그들의 재산이 될 만한 것은 대체로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몽골은 북경을 두번째 점령한 후 한달간이나 약탈을 지속하며 모든 지역을 불태워버렸죠.
그렇게 볼 때 적어도 초창기 몽골은 자신들의 권력 확대를 위하여 대도시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념은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 대체로 비슷한 유목민의 역사들이 각각 모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듯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행동양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