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독립운동사(플라시 전투 ~ 제2차 세계대전)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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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 전투 이후 인도의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본 영상은 AI기반 자막프로그램인 vrew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인도 독립운동에 대한 위키백과의
설명입니다 한국어로 번역해서 보면요
여기는 요약 내용이고요 위키백과는
인도 독립 운동에 앞서서 영국 식민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패권은 17세기 초에 사라지고 후발
주자였던 그리고 동시에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그중에서 인도의
인도 아대륙 자리를 잡은 것은 영국이
그요 그 과정을 다음 지도로 말씀을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면 대항의
시대 이전의 지도입니다 신앙으로 개척
이전에 동방 무역로 해서 로마에서
이집트 나일강을 따라서 홍해로 나와서
인도양으로 와서 인도 서부에 도착하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흘러가서 몰라카
해협을 따라서 가는 그런데
1453년에 비잔티움이 우스만
제국에게
무너지면서이 무역로가 막히게 됩니다
그러니까 포르투갈이 렇게 슝 돌아가서
인도양으로 오는 것이죠 그리고
네덜란드 와 영국이 보기에 어 이거
돈 되네 나도 해야지 하고 뛰어듭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가
바로 포르투갈은 동방 개척을 국가가
직접한 거고요 네덜란드와 영국은
회사를 만들어서 민간이 한 거죠
동인도 회사 회사를 만들었던 이유는
제가 저스티스 채널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탐험 실패에 따른 각종
책임을 국가가지기 싫었기 때문 입니다
태풍을 만나서 배가 뒤집히기도 하고
해적을 만나서 교역품을 몽땅다 약탈
당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원주민을
몰살 하는 상황도 생기고 기타 등등
해상에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에
독점적으로 무역권 징세권 전쟁 선포권
조약 체결권 등을 줘서 걔네들
책임으로 하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국가는 은 상황에 책임지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탐험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포르투갈이 선두였다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영국이 역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죠 동인도 회사의 유연함
이런 것들은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진짜 역사는 이런데
있죠 그래서 포르투갈이 동방 무역로
개척에서 나가 떨어진 후에 네덜란드와
영국이 붙었는데 어디서 붙었냐 하면
당시에 향신료가 가장 많이 나왔던
몰라카 해협에 있는 섬들에서
붙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몰루카제도
같은 곳이 향신료 무역의 핵심
지었거늘 차지하려고 네덜란드와 영국이
싸우다가 네덜란드가 이깁니다 그래서
영국이 밀려난 곳이 바로 인도 동북부
있니다 요쪽 뱅골 지방이라고 하죠
바로 여깁니다 그래서 골에서 벌어진
전투가 바로 플라시 전투입니다 자
다시 돌아가서요이 플라시 전투
1757년에 뱅골 나와브 프랑스
동맹군을 상대로 거은 결정적인
승리였다 여기서 나와브 지방
통치자라는 인도 말입니다이 전투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가 승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영국이 인도에서 수타를
시작하는 겁니다 유명한 그림이죠
역사에 어느 정도 관 있으신 분들은
다들 한 번씩 보셨을 것입니다 그
전투 후에 미르 자파르 함께 있는
로버트 클라이브 영국 장군입니다 미르
자파르 영국이 임명한 첫 고봉
나와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요
사람이죠 그래서 사실상 이때부터 바로
뱅골 지방에는 이미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 그 설명드립니다 비슷한 설명이기
때문에 쭉쭉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반란 지도자 누구누구 뭐 이거 다
그렇습니다 반란 지도자 누구누구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쭉쭉 내리면 그러다가
두 번째 변곡점이 생깁니다 바로
1857년 반란인요 이게 바로 세포의
항쟁 있니다 인도
독립운동사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이때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이 세포라고
하면 영국 동인도 회사 군대 속된
인도인 병사를 말합니다 세포이
그런데이 영국 동인도 회사가 얘네들을
개돼지 취급을 합니다 월급도 터무니
없이 낮게 주고 승진 제한의 인종
차별까지 말 그대로 개차반 취급을 한
겁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당시 영국이 신형 엠필드
소총 라이프를 도입을 했는데 소총과
같이 보급되는 총알과 화약이 하나로
결합한 채로 종이 포장지 즉
카트리지에 쌓여서 제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이 소총을 장전을 하려면 그
카트리지 포장물을 입으로 물어 뜯어야
하는데 그 카트리지에 바로 소와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었던 것이었죠
영국군으로서도 방수 그리고 또 쉽게
찢어지면 안 되니까 내구성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거기까지는
용인이 되었는데 그걸 세포이 테
입으로 물어 뜨더라고 강요했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소와 돼지의 기름 즉 지방을
먹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힌두교도 무슬림 모두에게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반란이
시작되는 거죠요 망갈
판데이이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개이면서
시작된 겁니다이 사람 이제 당시에
서행 gold 지방의 세포이 있는데
물 으라는 영국 장교의 말을 거역하고
대들다가 처형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불길이 확 솟 솟았던 거죠
지금 보시는요 지도가 반란 당시의
지도인데요 별 크게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뭐 핵심만 말하면 여기
검정색 부분이 그 핵심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기타는 뭐 읽어
보면 뭐 중립지 있고 영국 편을
들었던 군대도 있고 뭐 이런 지도이
이제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세포의
항쟁이 텅텅 비어져 있는 곳이 있죠
인도 아대륙 전체를 휘감은 운동은
아니었다라는 점이 더 의미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리고 밑에 잔시의 라인인
미바이 반란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이렇게 설명하는 그림이고요
잔시 그 유럽으로 따지면 작은 공국
백국 같은 개념이고 라니는 인도의
여성 통치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잔시
이라는 지방에 있는 소국의 여성 여왕
락슈미 바이가 되는 거죠 처음에
영국은 그 세포의 항장의 잘 대응하지
못하다가 결국 무력으로 대응해서
1858년에 락슈미 바이도 사망하고
반란은 어 진압되었고 세포의 항쟁의
의미는 그 항쟁 자체보다는 영국이 아
이제 더 이상 회사 수준으로는 인도를
경영할 수가 없구나 하고 깨달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1858년에 에 인도 정부법 만들어서
동인도 회사의 영토가 모두 영국
정부로 이전되면서 인도의 총독이
파견됩니다 이제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된 것이죠 그래서 이때부터 인도의
이름이 예전에 명목상 무굴 제국에서
인도령 인도제국 이제 브리티시 라지가
됩니다 그 인도 여왕이이 빅토리아
여왕이 되는 거죠 빅토리아 여왕 나와
아네 요렇게요 할머니 그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안 좋은 영향만 있었냐
그것은 아닙니다 좋은 영향도
있었습니다 바로
1885년에 72명의 인도 대표가
처음으로 인도 국민 회의를 창립한
것입니다이 사람들 대부분이 다
서양에서 공부하다가 들어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득권
[박수]
층이었다 보다는 영국에게 협조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그런 단체로
출발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이
1905년에 인도를 효과적으로
통치한다는 명목으로 디바이드 룰
정책을 펼칩니다 바로 뱅골 분할령
있데요 다음 지도로 보시겠습니다 어
여기가 뱅골 지방인데 동뱅크 UN
이슬람이 많고 서벤 18은 힌두교가
많으니까 서로 나눠서 고를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고를 분할해서 커져가는 인도
민족주의의 힘을 약화시키다
목적이었습니다 이때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해서 벌어진게 바로
스와데시 스와라지 운동입니다 스와라지
이제 자치 운동이고 스와데시 국산품
사용이 그런 운동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1911년에 뱅골 분할이 철
입니다 그리고 쪽팔려 영국이 수도를
동부 캘거타 이것도 다음 지도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부의 원래 캘거타
있었거든요 수도가 여기서 서북부에
뉴델리로 옮깁니다이 캘거타 영어식
발음이고 현재는 콜카타 하죠 델리는
그 구 도시죠 역사적인 곳이고요 델리
남부에 뉴 델리가 있습니다 영국이
당시에 새로 수도로 삼으려고 한 곳이
바로 뉴델리 이제 겉으로는 그 수도
이전에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캘거타
너무 동부에 치중되어 있어서 수도로서
기능하기 어렵다거나 당시에 영국이
러시아와 한창 그레이트 게임을 하던
시기기 때문에 수도를 서북부로 옮길
이유도 있었고요 하지만 그 뱅골
분할령이 실패해서 체면을 구겨서
옮겼다는 것도 상당 부분 그 이유를
차지합니다
어쨌든 그 수도 이전을 기화로 해서
인도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집니다
돌아와서요 특히 제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당시에 자 요런 뭐 사건들은 이렇게
짜잘한 사건들은 이제 보시면 되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면서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인도인에게
자치를 약속하면서 전쟁 참여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인도인 수십만
명이 전쟁에 실제로 참여하는데요 물론
전쟁이 끝난 뒤에 중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쟁이
발생하니까 관리 감독이 느슨해졌고
그틈을 타서 인도 국내외에서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이죠
그중에서 대표적인 운동이 힌도 독일
의무인데 요거는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제 1차 대전이 영국이랑
독일이 싸운 건데 인도가 영국
식민지가 독일이 영국의 대항하려는
인도를 지원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되고요 밑에 가다르 발라는 미국 국나
캐나다 싱가포르처럼
해외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싱가포르가 당시 인도
식민지였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인도 병사들이이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고 공개 처형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반란이
계속되니까 영국이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하기 위해서 1917년부터
인도에 대한
통치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영국의 개혁
영국 본토의 인도부 국무 장관이었던
에드윈 몬타규요 사람입니다이 에드윈
몬테규 y 선언인데 어떤 선언이
men 인도인의 연합을 확대하고 자치
기관을 점진적으로 개발해서 인도인들의
책임 있는 정부를
실현하겠다라고 역사적인 구라를칩니다이
선언이 1919년 인도 정부 법으로
연결되면서 일정부분 인도에게 참정권을
허용했지만 정작 중요했던 재정 과세
법질서 유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여전히 영국에 의해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불만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간디가 등장하는
것인데요 간디는 원래 유학 영국
유학파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도인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인도로 들어와서 인도
사람들에게 영국을 도와주면 자치권을
확대할 수 있다고 호소하던 사람이었죠
그러니까 포인트는 간디는 처음부터
독립을 주장한 사람이 아니었다라는
거죠 그런데 영국이 보니까
1918년에 전쟁이 자국의 승리로
끝날 것처럼 보이니까 불가 1년 전에
자치권을 약속 했 몽태 선언을 바로
모른척 해버리고 입장을 바꿔서 룰렛
위원회라는 감시기구를 만들어서
인도인을 통지합니다 바로이
사람입니다이 사람이 시드니 롤렛
이고요 어떤 책에서는 뭐 라울라 또
어떤 책에서는 롤렛 이런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데요 라울라 룰렛 다
똑같은 겁니다 이제 발언만 조금씩
다를 뿐이고요 그래서
1919년에이 룰렛이 발표되면서
재판없이
을 구금하고 영장 없이 체포하고
하면서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반대운동이 펼쳐졌고 그거를
진압하는 와중에 1914년 4월에
펀잡주 암리차르라는 곳에서 암리차르
학살이 벌어집니다 자리안 왈라 바그의
순교자 우물 학살 사건이라고 되어
있는데요이 리안 왈라 바그 공원이라는
뜻입니다 그 타러가요 거기로 그래서
자리안 왈라 아는이 공원에서 있는
우물에 새겨진 비문에 따르면이
우물에서 129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 영국군이
자리안 왈라 바그 그 공원에서
무장하고 있지 않은 제로 모여 있던
인도인 군중 약 15,000 명에게
무자비로 발포를 한 거죠 그래서 이제
1천명 넘게 다치고 죽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인도인들은 아 이제는
자치하는 것이 허망한 꿈 꿈이었구나
것을 알게 되고 드디어 비협력 운동을
시작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러면 뭘
비협력냐 하면 예를 들어서 영국
교육기관과 법원을 보이콧하고
영국정부에 고용이 되어 있으면
사임하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고 영국
직함과 영예는 포기하는 것이죠 이렇게
해서 비협력 운동은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1922년에 비협력 운동이 폭력
운동으로
변질되면서 간디가 체포되서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이게 우리
차오라 사건 이런 것들이 이제 그
폭력 사건으로 변질된 건데요 여기
있습니다 1922년에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2년 복역하고
풀려났다 그러다가 1930년에 간디가
소금 행진을 시작하는 것이죠 근데이
이 그 소금을 저항의 수단으로 간디가
선택한 이유는
1880년대부터 이미 영국이 소금법
만들어서 당시에 인도인들은 그 소금을
바다에서 채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소금은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든
필수품이었던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간디가 판단한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시는
그림이 소금 행진 그 경로인데 기간은
1930년 그 3월 11일부터 약
4월 5일 6일 때까지 한 24일
25일간 계속 되었고요 출발점은 인도
서부의 여기 사바르마티 아쉬람이라는
곳입니다 여깁니다 여기 여기서
출발해서 24일 동안 남쪽으로 걸어서
어 4월 5일에 단디라이프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바닷가에서
소금법 어기고 간디가 소금 한 줌을
쥐는 퍼포먼스를 하죠 바로이
사진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그래서
간디의 운동 결과 소금 행진으로
독립운동에 불이 붙고 영국의 점령의
중대한 압력을 가하니 영국이 일단
발등의 불을 끄고 보자라고 한게 바로
간디 어윈 정입니다 자 여기 있네요
간어 어 협정이 어윈이 그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에 영국 정부를 두는
대신에 지방의 일정부분 자치권을
줬습니다 하지만이 정도를 가지고 그
독립운동의 불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인도 국민 회의도 당연히
반대했고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세력이 더 등장합니다 왜 인도 아대륙
대표하는게 인도 국민 회의만 하는
것이냐 하는 거죠 당시에 소외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무슬림 연맹이 우리도
있다라고 하면서 튀어나왔습니다 그 그
대표가 바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이고요 간디 옆에서 있는이 사람입니다
그래서이 사람이 주도에서 1940년
3월에 전인도 무슬림 연맹 총회를
열고 라호르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또
지도를 보시면이 지도를 보시면 훗날
파키스탄과 인도 분할 지도인데요 인도
내에서 무슬림이 다수를 이르는 북서부
동북부에 자치권을 가진 이슬람 독립
국가가 따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인도에는 이슬람 국가 그리고
힌두교 국가 이렇게 두 개의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죠 그게 나중에
결국
1947년에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되는 단초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니까 원래 인도 국민회의가 최초로
출발할 때는 힌두 교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슬림도 불만이
없었다 가 시간이 가면서 점차 그
지도부가 힌두교 중심이 되면서
무슬림이 소외되는 그런 결과로
이어져서 감정이
쌓였었다
결의안이이 채택된 이후로는이 두
단체의 갈등이 심해지게 됩니다 그런데
라우르 결의안이
1940년이 이때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자
여기네요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영국이 자기 멋대로 영국령
인도군은
참전시키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그러니까 간디가 퀵 인디아 운동을
시작하는 겁니다 영국은 인도를 떠나라
그겁니다이 퀴이 그만두다 뜻도 있지만
떠나라라는 뜻도 있거든요 그래서 그
유명한 메시지 두월 다이를 시전한
거죠 행동하거나 아니면 그냥 죽어라
하고 아주 강력한 비폭력 프로파간다를
걸고 저항해서 영국의 통치를 끝내
버리자라고 했습니다이 사진이 퀸
인디아 운동 무브먼트 사진이죠
영국은이 운동이 발생하자 곧장 관대를
비롯한 지도자들 대부분을 빠르게
체포하고 위을 진압했고 때문에
단기적으로 보면 퀸 인디아 운동은 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그
1947년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독립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공한 운동 그러니까 혁명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영국
입장에서는 이제 제차 세계 대전이
끝나서 특히 자국의 피해를 복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도인들이 계속 그 퀸
인디아 실패 이후에도 그 대규모
시위가 줄어들지 않는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이
대규모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죠
미국이나 소련 같은 국가들도 계속해서
반식민지 주의를 주장하면서 영국을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인도 내에서
힌두교와 무슬림의 극한 대립 상황에
더 이상 영국이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어렵다라고 판단하면서 인도에서
빠져나오려고 한 것이죠 그래서
1947년 6월에 당시 마지막
총독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이 영국령
인도를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할한다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물론 꼼수 는 숨어 있습니다
바로 디바이드 룰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죠 제일차 세계대전에서 오수만
제국을 갈기갈기 찢어버린거나 아니면
제 2차 세계 대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를 내 조각낸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참 꼼꼼한 놈들입니다이
영국 놈들은 그 인도 아대륙이 또
특히 땅덩어리가 크니까 하나로 뭉쳐
있으면 언제든지 통합해서 다시 우리를
위협할지 모른다라는 두려움 이런 숨어
있는 이유까지 다 합쳐서 인도는 19
47년에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된 겁니다 자 이게 그 힌두스탄
타임즈 있니다 인디아 인디팬던트
브리티시 루스 엔 해 가지고 인도가
독립했다 브리티쉬의 통치는 끝났다
이렇게 되어 있는 거죠 그리고 또이
지도를 보시면 공교롭게도 북동부와
북서부 이슬람이 많으니까이 양쪽을
동파키스탄 서파키스탄 해서 한 나라로
묶어 버린 겁니다 생활 문화가 다른데
언어부터 동 파키스탄은 뱅고어 썼고서
파키스탄은 주로 펀잡어 비롯한 다른
지방 언어들을 썼거든요 경제적으로도
당시는 동 파키스탄이 월등이 앞섰고
그런데 혜택은서 파키스탄이 다
가져가니까 동 파키스탄은 싫었죠
그래서 언어 문제를 비롯한 여러 문화
차이가 결국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고
군사 충돌까지 벌어지면서 동파
파키스탄 독립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인도는 당연히 파키스탄이
나눠져 가지고 세 나라로 쪼개지면 또
국력이 약해지니까 당연히 동
파키스탄의 독립을 지지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에
1971년 12월 달에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는 것이죠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여러분들 오랜만에
좋아요 구걸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이 유익하셨다면 한 번씩 꼭
좋아요 좀 부탁드리고 응원 댓글도
많이 달아 주셔서 영상 다른 분들도
보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