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은 왜 그렇게 높게 평가받는 것일까? 정부를 향한 민초들의 반란 한국 민란사 5부 최종화

역사돋보기
152 팔로워
채널에 가입하여 혜택을 누려보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vsJc7Xq0m_TdSs-YGfPg1Q/join
한국 민란사 5부. 동학농민운동과 다른 민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동학농민운동
#민란
#반란
#부정부패
#한국사
#역사
#역사이야기
#역사다큐멘터리
도서 리뷰 및 기타 협업 제의 있으신 분 연락 주세요.
[email protected]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보기 있니다 한국
밀란의 역사 최종화 부입니다 마지막
영상에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밀란이 있던 어쩌면 한국사이
밀란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되는 통학
농민운동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9세기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역사에서 왜 그렇게 동학 농민운동을
중요하게 강조하는지 동학 농민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지
살펴보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우선 동학이 무엇인지
던 서양의 천주교에 대항하여 탄생한
우리나라의 토착 종교입니다 1860년
도학 풍속 학 민간 종교 등에
통달했다 몰락 양방 출신의 최제우가
경북 일대에서 창시하였다 서학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내석 왔지만 사람이
곧 하늘이다 명분으로 신분제를 타파한
공평한 세상 그리고 후천 개벽 등의
사상에서는 천주교와 거의 동일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만인이 공평하다는
동학의 사상은 서학과 달리 한국 토종
종교라는 이유로 별 거부감 없이
민중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가 습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동학 또한
성리학의 사상과 반한다며 사이비
종교를 규정하고 혹세 무민의 죄로
1864년 최제우를 처하자 최제우가
사용되자 그의 수제자였던 최시형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어 한반도
남부와 중부 전체로 동학을
퍼트렸습니다 이모 군란 갑신정변 등
조선이 개한 이후로 서양 세력과
문물이 물밑 듯 들어오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라도 동학은
더 빠르게 퍼져 나갔죠 최시형은 그
많은 전국의 신도수를 전부 관리할
수가 없어서 포접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입니다 포접제 교주인 최시형은 충북
보훈을 주요 본진으로 삼고 각
지역별로 접주 두어 담당 지역의
신도를 관리하는 형태였죠 그래서 접주
별로 같은 동학을 두고도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시형 등의
온건파는 동학을 오직 종교로 간주했고
강경파는 동학을 통해 민중들과 봉기를
일으켜 정치 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온건파 동학도
주로 최시형이 있는 충청북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고 강경파 동학도은
전라북도에 주로 분포 있어서 동학의
온건파를 북접 강경파를 남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강경파 남자의 리더는
서장옥 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강경파를
지휘하는 자는 서장옥 제자였던
전봉준이
있죠 전라도 정읍에
고부라져 그가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가렴주구를 일삼자 고부의
민중들은 분노의 치를 떨었습니다 이때
남자의 실질적 대장이었던 전봉준이
바로 정읍에 있었는데요 전주는 탐관
놀이 조병갑을 몰아내자 1894년
1월 농민 1천여명을 데리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접수하고 관하라
습격해 점령합니다 조병갑은 도망가고이
사건이 동학 농민 운동의 시발점인
고부 밀란 있니다 조선에는 밀란이
일어나면이 밀란 세력과 중재하여
밀란을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막는
안핵사 아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고부
밀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조정은이
용태를 안핵사 임명해 고부로
파견하였습니다 넥사 이용태 밀란
세력과 중재하는 커녕 고부 사람들
자체 체가 문제라며 죄없는 사람들까지
그냥 닥치는 대로 고문하고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전봉주 김개남 손화중 등
더 많은 접주 불러모아 1894년
3월 고부 밀란 때보다네 배에 달하는
4,000명으로 거하니이 사건이
103 분기입니다 전봉주 그들의
동학군을 동학 창의군이라고 불렀죠
넥사 이용태도 도주하였고 동학
농민군은 고부를 넘어 부안 고창 태인
금주 등을 장악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
이전 조선시대 최대의 밀란이 있던
세도 정치기 임술 농민 본기는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밀란이는 했지만 각
년별로 파팽 족으로 일어난 밀란이
있을 뿐이었던 반면 동학 농민 운동은
동학군이 아는 하나의 세력이도 전체를
장악한 조선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규모였고 밀란이도 단위로
퍼지자 전라 도지사 급에 해당하는
전라 감사 김문현이 진압에 나섰으나
황토현 전투에서 오히려 동학군에
패배합니다 조정에서는 부랴부랴
진압군을 편성한 뒤 전라도로
보냈습니다 홍기훈이 이끄는 광구는
독일제 소총과 미국제 야포 그리고
개틀링 원까지 보유하고 있었지만
전라도 장성의 황 황촌 전투에서 또
동학군에
패배했고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질렀고 반대로 조선 관군의 사기는 뚝
떨어지자 당시 전라 도지사 김무녀는
전라 도청이 있던 전주성을 버리고
주행을칩니다 이렇게 전봉준의 동학군은
전주성의 무혈 입성합니다 전주성에
도청 있었다는 건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도시였다는 것이고이 전주성을
함락했다 건 사실상 전라도 전체가
군에게 넘어갔다는
[음악]
뜻이었죠 군이 동학군을 전혀 진압하지
못하고 전라도 전체를 밀란에게 빼앗겨
버리자 조장은 난리가납니다 500년
역사상도 전체를 밀란 세력에게 빼앗긴
적은 없었거든요 결국 고종과
명성왕후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청나라의 진압 지원 요청을 내린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조정의 신하들
대부분은 외국군이 들어올 경우 그
국가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청나라의 지원 요청을 반대했습니다
이때 고종과 명성 항우의 총회를 받던
미영 희는 밀란을 일으킨 백성들에게
국가가 무너지는 것보다 차라리 외국이
게 휘둘리는게 낫다며 고종을 설득했고
결국 청나라는 고종의 요청에 따라
1894년 5월 3,000명의 청나라
군을 조선으로 파병했다 조선의
주도권을 두고 청나라와 경쟁하던
일본도 청나라 군이 군대를 보내면
우리도 보내겠다며 8,000명의
일본군을 조선으로 파병했다 청나라
군은 전라도에 있던 동학군을
진압하겠다고 충남 아산에 상륙합니다
그런데 일본군은 뜬금없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해 버렸는데요 일본측의
돌발 행동에 동학 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모두 당황합니다 서로 가 원치
않는 상황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철수를
위해 조선 정부와 동학 농민군은
적절한 합의점을 봐 화약을 맺은 뒤
조선 정부는 동학군의 요구안을 수용해
주는 대가로 동학군은 자체 해산하기로
합니다 1894년 5월 8일 전봉준은
정부에서 파견한 홍기훈게 동학군이
원하는 강화내용 12가지 조건을
제시했고 홍기훈은 모두 받아들이기로
합니다이 12가지를 폐정 개혁
관이라고 하고 폐정 개혁안이 조선
정부에게 수용된이 사건을 전주 화약이
하죠 패전 개혁안 12 가지란 첫째
동학에 대한 불법화 조치를 처리한다
둘째 탐과 노래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척결한다 셋째 부정하게 불을 축제하고
돈을 남용하는 부호들을 처벌한다 넷째
불량한 유림과 양반들을 처리한다
다섯째 노비 문서를 불태워 신분제를
폐지한다 여섯째 천한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도록 노력한다 일곱 번째
과부의 재혼을 허가한다 여덟 번째
쓰잘데기 없는 잡 세금들 없앤다 아홉
번째 관리를 채용할 때는 지연 풍조를
없애도록 노력한다 열 번째 친을 파을
모두 몰아내라 번째 백성들에게 짊어진
채무 전부 다 없앤다 12번째 토지
제도를 개혁하여 모든 농민들에게
일정양의 토지를 지급하여 소작농으로
없앤다 하나같이 파격적인 정치
기억들이 모든 개혁가들이 그간
조선이라는 사회와 지배 이념을
지탱하던 봉건적 질서 혹은 그러한
질서 위해서 누적되어 던
패단부 개혁안을 이행하기 위해 정부는
정부대로 교정청이란 기구를 신설하고
동학군은 동학군 대로 민간 백성들이
직접 개어 관을 실행할 수 있는기구
집강소를 주방 곳곳에 약 50여개를
세웁니다 비로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거였죠 고종과 조선의 조정은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 치에 이제
밀란이 모후
진압되었으나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명분이 사라진 일본군이였던 일본군은
그대로 한양으로 진격해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정과 명성학
납치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조정이
동학군을 약속했던 교정청 폐지해
버렸고 친일 대신들을 위주로 내각을
형성한 뒤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와주겠다는 명분으로 개혁기구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는 갑보 개혁을
실시했습니다 일본군의 일방적인 행위에
청나라에서는 더 많은 병력을 조선으로
파병했다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오던
청나라 군함을 일본군이 기습
공격하면서 청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에 의해 전주 화약이
무효화되지 분노한 전봉주 다시
동학군을 모아 제 2차 동학 농민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제 2차 동학
농민 운동은 외세 세력과 싸우는
전투였던만큼 1차 동학농민 운동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북적도 참여하기로
합니다 북접의 손병희는 스승 최시형의
허락을 받아 전봉준의 남접 합류하여
수도 한영으로 진격합니다 이에
일본군이 직접 동학군 진압에 나섰고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북상하던 동학군을
충청도 공주에서 맡기로 합니다
일본군은 조성 관군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1894년 10월에서
11월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개틀린 건에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 없는 피해를
받으며 패배했습니다 약 일주일간
40에서 50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4만의 동학군 중 3 천명만 살아서
도주합니다 11월 27일 전봉주
전주성으로 가기 위해 태인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렸지만 무참히 패배했던
전봉준은 순천에 숨어 있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부하가 신고하여 전봉준을
체포되었고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동학농민 운동은 왜
그렇게 그 정치적 역사적 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규모가 컸던
밀란이 해답은 전주 화약 당시 동학
농민군이 요구했던 폐정 개혁 안에
있습니다 비록 일본의 방해로
무산됐지만 전주 화약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밀란을 일으킨
세력들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고
조정이 그것을 받아들인 밀란이
있습니다 세도 정치기 때의 밀란이
있던 임술농민 본기 때는 요구하지
않았느냐고 개혁을 요구하긴 했지만
임술농민 본기는 각 지역별 산발적인
밀란이 있을뿐이 밀란을 아우르 그나
통합된 목소리로 조정의 백성들의
필요를 요구하는 조직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학농민 운동의 정치적 요구는
다른 밀란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임술 국민 봉기 이후
박규수의 적극적인 권위로 철종은 삼정
이정청 만들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안동
김 씨가 장악하고 했던 삼정 이정청
이었기에 어떤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삼정 이정청 세금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뒤 흥선 대원군은
세금 제도를 파격적으로 개혁했다 조선
민중들의 삶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후 급진 개혁파들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해 주겠다며 갑신 정변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백성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협력했다는
것도 컸지만 갑신정변 당시 급진
개화파의 개혁도 결국은 세금 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동학농민군의 패전 개혁 하는요 세금
제도에 대한 내용도 있었지만 그들은
더 근본적인 토지 제도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농업 경제였다 사회에서
세금은 결국 토지에서 비롯합니다 토지
제도 개혁이 없다면 세금 제도를 백날
개혁해 봤자 원 상태로 돌아오게 되는
법이죠 조선 역사 500년이 그걸
증명하고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를
지급해 주어 소작농을 없애자는 개혁은
일본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50년
뒤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농지
개혁을 실시했고 끝내 동학 농민군이
요구했던 토지제도 개혁은 이루어졌죠
한국
밀레사우나 그럼 역사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