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분열 한국성리학의 계보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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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리학의 계보 7부.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분열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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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국 성리학의 계보 7부입니다.
조선 중기 조선의 조정과 성리학계 는 학풍에 따라 영남지방의 영남학파
와 그리고 비영남권 지역의 기호학파 가 각각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
을 만들며 붕당정치가 시작하였습니다.
붕당정치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성리학계까지도 영향을 주던 파벌
이었죠.
이 중 정통 성리학 계보임을 자부 하던 영남학파의 동인은 퇴기이왕
각각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죠 .
임진완은 직후 권력을 잡은 북인 은 광해군이 질기하며 집권여당
에 되어 독주했지만 서인들의 인조 반정으로 북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비영남권 지역의 기호학파였던 그동안 계속 권력의 주도권에는
있지 못했던 서인이 완전히 조정 을 장악했고 야당 역할로 남인만
남게 되었죠.
그렇다면 집권당이 된 서인의 경우 그 내부적으로 파벌이 또 나뉘지는
않았을까요
인조 반정을 주도한건 서인이 맞았고 또 그 덕에 이후 오래도록 서인의
정권이 이어졌지만 모든 서인들이 인조 반정에 참여한건 아니었습니다.
반정을 주도했던 서인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은 서인들도 있었죠.
서인의 정권이라 하면 모든 서인들의 정권이 아니라 인조 반정을 주도
한 서인들의 정권이었습니다.
그렇게 서인은 인조 반정에 주도 적으로 참여했느냐 그렇지 않았
느냐를 두고 공서파와 청서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공서파의 공은 공신이란 뜻으로 인조 반정을 성공시킨 덕에 공신
으로 착붙된 서인들을 의미하죠 .
대표적으로 이귀 김유 최명길 심기원 김자점 등이 있었죠.
이 공서파 서인들은 우선 장점부터 말하자면 현실적이었습니다.
이들은 학자보다는 정치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반정이란 부정적인 방법으로 정권 을 장악했다 보니까 혹시나 이 정권
이 불안정해질까봐 언제나 현실 정치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서파의 최명길 같은 경우 나중에는 외교적으로도 철저하게
현실적으로 접근해 명분보다는 청나라와의 강화를 주장했던 겁니다.
단 공서파의 단점은 불안정한 서인의 정권을 지킨다는 핑계로 그들끼리
도 권력투쟁을 일삼았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이괄의 난이 있었죠 .
사실 인조 제위 초기 정치파는 공 서파들끼리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안정적이지 못했죠.
공서파들 하는 짓들이 꼴사나웠 고 이들의 권력도 공신으로 측봉
된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옛날의 훈급화나 다름없었습니다.
서인 내에서 인조반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청서파의 경우
이런 공서파들의 꼴사나운 짓을 안좋은 시선으로 바라봤습니다.
청서파들은 스스로 권력의 때가 묻지 않은 자들이라 하여 말글
청자를 썼던거죠 대표적으로 김상원 이 있죠.
이들은 부도덕한 공서파들의 권력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서인임에도 불구하고 청서파들은 성리학적 질서와 도덕에 따라 조정이
안정화되어야 한다며 마치 영남학파 처럼 현실정치보다는 이념과 명분을
더 강조했습니다.
괜히 훗날 청서파의 대표인 김상 원이 사대를 주장하며 청나라의
만주족을 오랑캐라 여겨 화의에 반대했던게 아닙니다.
성리학적 질서에 따르면 공자와 맹자의 나라인 명나라의 사대를
하는게 옳은거고 오랑캐인 만주 족을 상대해서는 안됐잖아요.
1627년 정유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시기에 공서파와 청서파는 청나라
에 대해 화의를 할것이냐 절대 화의는 불가능하다라는 의견을
두고 대립하였습니다.
공서파의 경우 전쟁을 멈추고 안령 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였고 청서파
의 경우 명나라의 사대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척화파
였죠.
하지만 결국 조선은 병자호란을 겪었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했으며 미리 화의를 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건만 굳이
그런 굴욕을 겪고 인조는 청나라 와 화의해야만 했습니다.
인조야말로 사건 발단의 가장 큰 책임자였지만 병자호란 이후 인조
는 김상원 등 척화를 주장했던 청 서파들을 더욱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조정의 실세는 공서파의 최명길 최명기를 뒤를 이어 김자점으로
넘어갔는데요.
권력의 실세가 된 김자점은 어느 생각 인조가 인조의 아들 소현세
자를 멀리하고 있다는걸 눈치채 고는 소현세자가 병으로 사망하자
곧바로 인조의 둘째 아들 복림대 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소현세자의
척화를 박살내고 그 아들들마저 비운해 죽게 하였죠.
이렇게 막 나가던 김자점이었지만 너무 비호감같은 캐릭터라 그저
인조만 김자점을 감싸 안아서였 을 뿐 조장이나 성리학계에서는
김자점을 극도로 꺼려했습니다.
인조 사후 김자점이 지지하였던 인조의 둘째 아들 복림대 군이
17대 왕 효종으로 즉위했습니다.
비록 효종은 김자점이 자신을 지지해 주었지만 아버지 인조만큼이나
김자점을 아끼지는 않았습니다.
효종도 이런 비호감 캐릭터 계속 데리고 있어봤자 본인에게 전혀
득될게 없다고 여겼죠.
효종이 즉위하고 청서파 서인들이 대거 김자점 탄핵을 외쳤고 효종은
처음엔 어느정도 김자점을 두둔 해주나 싶더니 얼마 안가 김자점
을 탄핵시켰죠.
그리고 효종은 청서파 서인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조의 서인정권은 공서파의 정권 이었고 효종의 서인정권은 청서파
의 정권이었죠.
왜 그랬을까요
효종은 즉위하고 가장 강력하게 외쳤던 사업이 있었습니다.
청나라에게 당한 모욕을 씹고 청 나라의 복수를 하러가자는 북벌
이었죠.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군사비 예산 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고 조선군
의 훈련 강도도 높이며 군사력을 대폭 강화했습니다.
단 효종이 실제로 청나라와 전쟁 을 하려고 했던건 아니었습니다.
원래 효종은 왕이 될 운명이 아니 었습니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 왕자 출신 으로 형 소연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그리고 소연세자를 미워한 인조 가 그 손자들까지도 다 내쫓았기
때문에 효종은 왕이 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본인의 기반도 애매했던 효종은 정권의 기반을 위해 북벌을 외쳤던
곳이었고 그래서 청나라에 대해 반감이 강한 청서파 대신들을 대거
등용했던 겁니다.
병자오란 이후 조선의 성리학계 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살림의
등장입니다.
병자오란 때 조선은 워낙 큰 굴욕 을 겪었고 또 결국은 청나라와 강화
를 맺었기 때문에 정치에 등을 지고 재하로 숨어버린 선배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병자오란 이후 인조의 정권도 결국 공서파의 세상이었던
만큼 공서파에 끼지 못한 존재 들 대표적으로 청서파들은 재하에
있으면서 현실의 종치를 욕하던 키보드 워리어가 되었는데
단순히 키보드 워리어들도 있었지만 명망에 높은 선배들은 영향력이
남달랐기에 관지를 받지 않고 조선의 조정에도 없으면서 자기
제자들 조정에 보내놓고 영향력 을 행사하던 존재들이 바로 살림
이었습니다.
인조 제윕 알기에는 이런 살림의 존재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공서파의 세상이었으니까 요.
하지만 효종이 직위하고 효종이 청서파 서인들을 증용하면서 이
증용된 청서파 서인들의 대스승들은 살림으로 군림하며 조선 정치에
강하게 개입했죠.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송시열이었 고요.
송시열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송시열 의 스승을 알아야 합니다.
송시열의 스승은 사계 김장생으로 사계 김장생은 충남 논산 출신의
대표적인 기호학파이며 또 율곡 이의 제자였죠.
딱 서의의 직계의 계보죠.
김장생은 현실 정치에는 강력하게 개입하지 않았던 학자로서의 정체성
이 더 큰 선비로 예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예학이란 성리학의 원칙에 의거 하여 예의 본질과 의의 그 쓰임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까지는 이황 의 이긴 논쟁에서 알 수 있듯 주로
조선 지성계에서는 성리학의 형의사학적인 혹은 관념적인 논쟁이 주된
화젯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조선 사회가 쑥대밭이 되고 기존의 질서
가 동요하자 이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지한 사대부들은 현실
개선의 반환으로 예를 탐구하는 어젠다로 관심사가 옮겨갔죠.
그래서 김장생은 상례비호 가례 진람 의뢰문회 등을 집필하며 예학을
만들어냈고요.
김장생 역시 서인이었지만 정치 인이 아니었던지라 공서파가 아닌
청서파에 해당했습니다.
김장생의 예학을 직접적으로 계승 한 두 성리학자가 바로 송중길과
송시혈이었습니다.
이후 서인의 청서파는 송중길과 송시혈이 이끌었는데 효종이 청서파
를 되새워 북벌을 추진할 때도 가장 크게 의지했던 두 사람이 송중길
과 송시혈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양송이라고 부를 정도로 제하인사로서 두 사람의 입장은
상당했습니다.
효종 입장에서도 두 사람만 포 섭하면 청서파 선인 전체를 끌어
안을 수 있는 것이었죠.
1659년 효종이 죽고 효종이 장남의 18대왕 현종으로 직위하였습니다.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진급하면 조정의 대신들과 왕실 사람들은
일정기간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자이대비라고 현종의 할머니자 효종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친어머니는 아니고 효종에게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계모였죠
.
그래도 자이대비는 효종의 엄머니 뻘이죠.
그러면 어머니 뻘이 되는 자이대비 는 아들 뻘이 죽었을 때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입장 이 애매해진 겁니다.
성리학에서는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이 죽은 사람이 적장자이니
아니냐를 두고 달라집니다.
죽은 효종은 적자이긴 하지만 장남 은 아니죠.
형 소연세자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또 소연세자가 일찍 죽었 으니 효종을 장남으로 봐도 무방
하고요.
효종이 장남이냐 아니냐를 두고 신하들 의견이 갈린 겁니다.
이때 붕당 남인 소속의 윤휴가 효종 은 장남으로 보는 게 맞다며 자이대비
가 상복을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환은 당시 예학의 정통이었던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하는데요.
송시열은 효종을 장남으로 볼 수 없다며 자이대비가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대왕을 장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는 발언은 대단히 위험한 발언으로
번질 수가 있습니다.
결국 위험한 사건으로 번지게 되는데요.
다들 아시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럼 역사독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독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