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언제 계엄이 선포되었을까? 대한민국 계엄 선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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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계엄 선포의 역사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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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보입니다 개엄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죠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개엄이란 군사적 필요나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를 위하여 일정한
지역에 행정권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군이 맡아 다스리는 일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에서 개엄 선포는
대통령의 권한인데 대통령의 개엄
선포의 가동 범위와 조건에 대해서는
헌법상 그리고
개념법학 개엄 선포와 관련한 조항인
77조에 의하면 대통령은 는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
사태에 있어서 병으로서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개을 선포할 수
있고 비상 개이 선포된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영장제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개령이 선포되면
개엄 사령관과 대통령은 합법적으로
국민들의 기본 생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게 됩니다 즉 개엄은
정말 심각한 상태일 때 선포가 되는데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는 몇 차례 언제
개엄이 선포되었다 대한민국 개엄
선포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개엄 1948년 10월 선포된
이승만의 개엄이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있던 제 14연대 제주도로
투입시키고 했으나 제 144년 대에
잠입해 있던 남로당의 당원들이
1948년 10월 19일 14연대의
장악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다음날
20일 순천에 있던 중대 규모 하나도
반란에
가담하였다 여순 사건인데요 여수
14년 대와 반란 세력은 인근 보성
벌교 구례까지 진출했습니다 그 다음날
21일일 이승문 대통령은 반란군 토벌
전투 사령부를 조직하면서 개업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개업용
이었죠 단 이때의 개업은 전국을
대상으로 한 개엄 이이 아닌 여수와
순천일자리 whom 개업이 있습니다
발라는 약 주일 후 27일
진압되었지만 개령 자체는 이듬의
1949년 2월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제주도의 43 항쟁도
격해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한해서 1948년 11월 개을 또
선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전국 대상으로 한 개엄 선포는
언제였을까요 625 한국 전쟁 때죠
개엄이란 자체가 전시를 대비하기
위함이니 전쟁이 벌어지면 개엄이
선포될 수밖엔 없습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부산의
임시수도였던 이승만은 차기대 에서
승리하기 위해 헌법의 내용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 방식이
간선제 있는데 국회의 이승만지지
의원들이 절대 대수가 아니었던지라
국회의원 투표 간선제 방식으로 가면
대선에서 실패할 수 있다고 여겨
이승만은 국회의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
방식으로 대선을 바꾸자는 직선제
개헌을 국회에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바로 부결시켰고 물러설 수
없었던 이승만은 1952년 5월 느닷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북한군과
내통하고 있다면서 전국을 대상 상으로
한 비상 개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대통령이 자기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전국의 개엄 선포한 첫 선례 있죠
이승만은 개엄 그과 부산의 정치
깡패들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폭행
후 연행해 버렸습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국무총리 장택 상은 야당의
대표 의원들을 만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이승만 대통령이 개헌 요청을
통과시키는 것이라고 협박했고 끝내
잡아둔 야당 의원들을 풀어주는 대화로
야당 대표들은 개헌에 동의하기로
합니다 개헌을 가결시킨 때도 이승만은
개엄 상황이라며 개엄 로 하여금 임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하고 국회의원들을
겁박했고 이승만의 개헌이 이루어졌고
2차 헌법이 발표되고 바로 다음 날
7월 8일 66일 만에 비상 개을
해제하였습니다 이어 전쟁이 끝나고도
7년 후였던 1960년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3위로 부정 선거에
항거하며 4월 19일 전국적으로
419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이때
이승만은 처음엔 가장 10위가
격렬했던 서울 한 종으로 비상 개을
선포했다 곧이어 전국 대상으로 개엄
확장했습니다 내 민주화 운동을 이기지
못한 이승만은 하야를 발포했고
부통령이었던 이기붕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으며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약속했고 또한
그간 이승만 개인의 독재를 보장해
주던 헌법을 다시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개원하기 했습니다 1960년 6월경
대통령 대응이었다 허정이 개엄
종료하였고 그다음 개념은 박정희
소장의 구테타 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당시 육군 참모 총장
장도영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개엄 선포
여부를 물었고 윤보선은 개엄 법적
절차를 따라야 하고 내전으로 절대
번지면 안 된다며 쿠데타 진압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육군
참무 총장 장도형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결국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에
성공했고 오전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은
윤보선게 개업을 강요했습니다 윤보선은
개업용 선포의 시기를 놓쳤고 쿠데타
세력이 개업을 이용하기로 한 거죠
윤보선은 쿠데타 세력의 강요로 개엄
선포했으며 육군 천무 총장 장도영이
개엄 사령관이 되었고 박정희는 요
전쟁 때의 명장 장도영은 앞세워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려고 했던 거죠
51 6대의 비상 개업은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내린 개업이 아닌 타인의
강요에 의해 선포한 첫 사례였던 그
다음 개념은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60년대 3공화국 시절 박정희가
일본과 한일 수교를 불합리하게
체결하려고 하자 1964년 6월 3일
서울에서 한일 수교는 외교적
굴욕이라는 한일 수교에 반대하는 63
항쟁이 대규모로 일어났습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 개엄 선언하며
개군 서울에
투입시켰고 이때 대학생 시위대를
주도했던 사람이 고려대 총학을 이끌고
있던 이명박 학생이었죠 개엄 그은
수많은 대학생과 정치인들이 체포해
버리면서 시위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고 약 60일 후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 경험을 종료했습니다 다음 기업은
한국 개엄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비상 기업이었던 4공화국의 시작을
알리던 비상 기업이었습니다 본뒤 비상
기업은 어떠한 큰 사건 사고가
벌어지면 그때 대통령이 비상 경험을
선언하였으나 1972년 10월 17일
아무런 특정한 사건 사고가 없었음에도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 개을 선포했고
남북 통일을 위한 개헌 작업이
필요하다며 개업용 따라 모든 정치
활동 목적에 옥내외 집회및 시위를
일절 금하고 언론 출판 보도의 방송은
사전 검열을 받도록 하였으며 각
대학교는 당분간 휴교 조치한다는
휴교령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개엄
그들은 개에 반대하던 국회의원들을
체포해 버렸고 개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없는 상태에서 개헌 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였는데 당연하게도 부정 선거로 찬성
91% 기록하며 개헌이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개원된 헌법이 유신 헌법이
있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1을 국민들의 총선 투표가 아닌
대통령 추천과 통일 주최 국민회의에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여 국회를
장악했고 대통령의 권한을 헌법보다 더
위에 둠으로써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할
수 있는 긴급 조치권이라는 특별
명령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대통령의
연임 제한 자체를 없애 버렸죠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박정희의 유신
79년 YH 여공 사태와 박정희의
김영삼 재명 사건을 두고 그간 유신
정권에 품고 있던 불만이 터져버렸고
1979년 10월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반독재 시위 1명 부마
항정이 일어났습니다 부마 항정이
규모가 매우 크자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날 10월 17일 부산과 경남
지역에 한해 비상 개념을 선포했습니다
부마 항쟁을 어떻게 진압할 것이냐를
두고 박정희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논쟁을 하는 과정에서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이 10월 26일 박정희를
총으로 쏘아 박정희를
시했다이 된 국무총리 최규하는
박정희가 암살 당한 바로 다음날
10월 27일 기존 부상과 경남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비상 개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개엄 선언과는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개엄 산호관 정승화
총장은이 기회에 군내 존재했던 사조직
하나회를 멀리하려고 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하나회의 수장이자 당시
보안사의 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2월
12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승화 개엄
사령관을 체포해 버리면서 서울을
장악하고 쿠데타에 성공했죠 박정희의
죽음으로 전국적으로 민주주의가 도래할
것이라는 서울의 본 분위기가
확산되었으나 12월 12일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에 성공하자 개엄
해제하라는 시위가 더 격렬하게
확대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은 최규화 대통령을 압박해 개을
해제하기 커녕 기존의 비상 개엄
조치를 더욱 확대하도록 했습니다
헌법상 개엄 결정은 국무회의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전도하는 최규화
대통령과 국무총리 그리고 기타 장관들
를 불러놓고 무장 군인들로 포위하게
한 다음 개엄 조치를 확대하도록
압박했다고 하죠 당연하게도 전국적으로
개엄 조치 확대를 반대하는 시위가
다음 날부터 격해지다 전두환은 광주를
본보기로 학살을 해 버렸고 1980년
8월 16일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완벽하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전두환은 1980년 10월
자신의 독재를 위한 개헌을
공포하였다 여당인 민주 정의당을
창당했다 해제했습니다 이로써
1979년 10월 부모 황증 이후
발동되었다 비상 개엄이 약 1년
반만에 개엄이 종료되었고 많은 분들이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
개업이 선포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6월 민주화 항쟁 때는 개업이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위한 촛불 혁명 당시 개엄
선포가 검토는 되었다고 하지만
실행되지는 않았죠 즉 1981년에
종료된 개엄이 마지막 경험이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40년 뒤
2024년 12월 3일에서 4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이 도대체 알 수 없는
목적으로 비상 경험을 선포했지만 약
6 시간 만에 끝난 대한민국 역사상
최단 기간에 비상 개을 선포했고 보통
대통령들이 독재를 위한 비상 개을
선포할 때는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
체포하거나 궁금하게 말입니다 그
이유는 개엄 선포하는 건 대통령의
권한이지만 개을 종료시키는 것도
국회의 권한이라 헌법상 국회
재적의원의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하면
대통령에게 개을 해제하라는 요구를 할
수가 있는데 요구라고 하지만
대통령은이 결정이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애당초 제적 의원이
모이지 못하도록 국회의원들 대통령이
구금하고 하는 거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개을 대통령이 자기 법대로
개인적인 이유로 선포할 수 없는게
원칙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는 반국가적
행위를 하는 이적 단체 혹은 체제를
전복하려는 시도이며이는 내란죄에
해당합니다 설마 그런 대통령이 있지
않겠죠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