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럼통으로 만든 박격포가 성능이 좋다고? | 중국의 몰양심 박격포 비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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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_Howard_Livens, https://www.wikipedia.org/ https://baike.baidu.com/item/%E9%A3%9E%E9%9B%B7%E7%82%AE / 飞雷, https://zh.wikipedia.org/
Fougasse_(weapon), https://www.wikipedia.org/ 국공내전, https://ko.wikipedia.org/ 비뢰포, 나무위키
오늘은 밀리터리 이야기, 국공내전 당시 만들어진 깡통포, 비레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은 폐망했습니다.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은 공동의 적이 사라지게 되었죠.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협력을 하던 공산당과 국민당은 관계 개선을 위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1946년 국민혁명군이 공산당 지구를 공격하며 제2차 국공내전이 시작되었죠.
전쟁 초기, 국민혁명군의 병력이나 장비 보급은 공산당의 인민해방군보다 우세했습니다.
셔먼전차도 가지고 있었죠.
이는 국민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민해방군은 중화기조차 부족한 상황이었죠.
일본군이 남기고 간 기관총이나 치아전차를 써야 할 정도였습니다.
중화기가 부족했던 인민해방군은 요새나 차량을 상대할 때마다 큰 희생을 치러야 했죠.
특히 공병부대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피해가 컸는데
이유는 공병이 직접 폭탄이든 가방을 들고 요새를 파괴하는 일을 많이 맡았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전투에서는 승리할 수 있었지만 비용이 너무 크다는 점이 문제였죠.
그리고 이런 현실을 반기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여기 1938년에 입대한 서폐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차량과 공학폭발물에 능숙했던 그는 1944년 공병부대의 중대장이 되죠.
서폐장은 많은 전투에서 성과를 올린 노련한 베테랑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장병들이 하나둘 전우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고선 생각에 잠겼습니다.
적진지나 차량에 폭탄을 든 사람이 아니라 폭탄만 보낼 수 있다면
그러던 중 어느날 고문계라는 젊은 장병이 물었습니다.
중대장님, 폭발물을 박격포처럼 날릴 수는 없습니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습니다.
일본군과 싸울 때 극초한 폭우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꽤나 효과적이었다고...
이 말은 서폐장의 가슴에 열정을 불태워주었죠.
무더운 여름날 서폐장은 언덕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박격포와 비슷한 폭우를 성공적으로 제작하죠.
말이 박격포지, 이는 사실 서양 국가들이 16세기부터 사용하던 푸가스였습니다.
푸가스란 일종의 극조된 박격포입니다.
정폭취래라고도 부르죠.
푸가스의 설치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선 집안이나 암석에 구멍을 뚫은 후 폭발물이나 화약을 넣습니다.
그리고는 돌과 대포알 같은 투사체를 그 위에 얹으면 푸가스가 완성됩니다.
서폐장의 극조 폭우는 1미터가량의 터널을 비스듬히 파낸 후 화약을 넣고
철판이나 나무판을 그 위에 올리고 폭탄 묶음이나 돌더미를 올렸습니다.
푸가스와 사실상 다를 게 없었죠.
서폐장과 고문기의 발명은 공병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 극조 폭우는 최전선 부대에 즉각 투입되게 되죠.
그러나 실전에서 사용된 서폐장의 극조 폭우는 큰 단점이 있었습니다.
발사 준비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고 힘들었기 때문이죠.
적의 방향과 각도를 계산하고 구덩이를 파냈는데 자그마치 2시간이나 걸렸습니다.
폭우를 파내는 공병들도 위험했죠.
사정거리도 200미터 정도였기 때문에 사실상 적의 코앞에서 설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2시간 동안 의미심장하게 땅을 파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사람은 없겠죠.
폭우 자체도 문제가 있었는데요.
구덩이가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마치 총알처럼 한 번 발사하면 못쓰게 되는 것이죠.
서폐장과 고문기는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을 떠올립니다.
공병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한 결과였죠.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만들었던 리벤스 프로젝터가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리벤스 프로젝터, 영국의 윌리엄 하워드 리벤스가 설계한 푸가스의 일종인데
값싸게 제작할 수 있는 원통을 폭우로 사용해 만든 것이었죠.
솜전투 당시 독일군의 견고한 참호는 폭격으로 피해를 주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화염방사기는 의외로 효과적이었죠.
화염방사기가 참호를 대상으로 뛰어나다는 것을 본 리벤스의 동료는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됩니다.
화염방사기 대신 기름통을 통째로 던져버리면 어떨까?
리벤스는 곧 기름통을 하늘로 날려버릴 장비를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제작할 수 있는 박격포를 만들어내죠.
외형은 대충 한쪽 끝이 막힌 파이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벤스 프로젝터입니다.
화학무기와 기름통을 발사해 참호를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죠.
서폐장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드럼통이 리벤스 프로젝터의 원통과 흡사라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는 드럼통의 한쪽 면을 뚫어 구경 30cm, 길이 90cm의 포를 제작하죠.
소금통 위에 올려져 있던 나무 뚜껑에 폭발물을 엮어 투사체도 만들어냅니다.
실험도 성공적이었죠.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시멘티 요새와 건물들을 파괴할 수 있었거든요.
이 급조포는 발사할 때 지뢰를 날려버리는 것과 흡사하여 비례포라고 불렀죠.
비례포는 앞서 설명했듯 주변에 뒹굴던 드럼통을 가지고 만들 수 있는 무기였습니다.
따라서 포의 구경이나 길이는 드럼통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는데요.
전쟁당 비례포의 구경은 보통 30cm에서 50cm 사이였죠.
이런 드럼통에 포다리를 붙이면 바로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한쪽 면을 땅에 파묻을 수만 있다면 말이죠.
이것도 여의치 않는다면 대충 비스듬히 기대서 발사하기도 했습니다.
최대 사정거리를 위해 45도로 기울이기만 하면 그만이었거든요.
발사에 필요한 재료도 간단했습니다.
드럼통 바닥면에 화약이나 폭발물을 채우고
나무 원판과 같은 막과 폭탄을 엮어 폭탄을 제작해서
도화선을 연결하고 폭탄에 불을 붙이고 발사하면 끝이었죠.
원거리의 적에게는 박격포처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원거리라는 게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고
보통 사정거리가 150m에서 200m 정도로 짧았죠.
사거리는 짧았지만 10km의 폭탄묶음을 사용하면 2m 이상은 살상반경이었고
20km의 경우는 5m였습니다.
비례포의 경우 살상방법이 조금 특이한데요.
현대의 박격포는 폭탄의 파편과 폭발의 충격으로 적을 살상합니다.
그러나 비례포의 경우 오직 폭발의 충격에 의존했죠.
살상력이 부족하다고는 하나 실전에서 쓸모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비례포에 맞은 시체는 파편이 없기 때문에 외상은 없었지만
코피가 터지고 내장이 파괴된 모습을 하고 있었죠.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놀고리였다고 합니다.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는 직격이었죠.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 말고도 비례포는 건물을 파괴하기 위한 용도로 잘 싸먹을 수 있었습니다.
1947년 9월 인민해방군이 공격했을 당시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의 화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죠.
혁명군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될 일이 없는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죠.
폭탄은 단단한 요새를 파괴하기까지 했는데
국민혁명군은 폭탄이 비례포에서 날아온 것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인민해방군의 화력에 놀란 국민당은 소련에게 비밀무기를 지원했는지 묻기도 했죠.
근거리의 적들에게는 클레이모어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는데요.
이 경우 폭탄 묶음 대신 돌이나 자갈을 넣고 발사했습니다.
가까이 있던 적들은 매석게 날아드는 돌에 찢겨나갔죠.
이렇게 비례포는 가격에 비해 엄청난 성능을 보여줬습니다.
때문에 국민혁명군 사이에서 비례포가 모량심포라고 불렸죠.
모량심이라는 말은 당시 아주 심한 욕이었다고 하는데
비례포가 그만큼 치명적이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단점이 있기 마련이죠.
비례포도 많은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안정성이 떨어진다.
드럼통 아래에 넣는 화약부터 발사체인 폭탄 묶음까지 모두 터질 위험이 있었죠.
까딱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자신을 포함한 전우들이 폭살 수도 있었습니다.
둘째는 파괴되기 쉽다.
앞서 개발한 급조포구와 마찬가지로 비례포도 사용 후 부서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금속 와이어를 두르거나 철판을 덧대는 개혁을 했죠.
하지만 태생이 드럼통이기 때문에 몇 번 사용하고 나면 못 쓰게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셋째는 목표를 정확하게 타격하기 어렵다.
비례포에는 조준을 위해 고안된 장비가 없습니다.
대충 탄도를 생각하고 설치하기 때문에 적을 맞추기란 쉽지 않았죠.
수십 개를 설치해서 발포하면 그나마 효과적이었다고 하네요.
아군에게 폭격할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인민해방군의 고위급 관계자들은 한때 비례포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었죠.
이런 단점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례포는 최전방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수비보다는 공격을 하기 위해 주로 사용했죠.
적을 직접 타격해서 효과를 보는 것보다 주로 폭격으로 인한 혼란을 심어주었습니다.
때로는 사기저하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죠.
6.25 전쟁에서도 중국의 용군이 비례포를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장비가 잘 갖춰진 연합군에게 밀렸다고 하죠.
양심 없는 가격에 준수한 성능의 비례포 어떠셨나요?
서폐장과 고문개는 젊은 장병들을 살리고자 비례포를 개발했습니다.
비록 적에게는 끔찍한 무기일지 몰라도
공병부대가 한데 모여 빚어낸 지혜의 결정체였죠.
비례포 이야기 이번 편은 여기까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