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전방에만 70만 명! 중공군의 최대 공세는 어떻게 막혔을까? 6.25 한국전쟁, 중공군의 5차 공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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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역대급 규모, 중공군의 5차 공세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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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1951년 4월 22일, 중공군은 북한군과 함께 최전방 병력으로만 무려 70만 명을 동원한 역대급 최대 규모의 5차 공세를 펼쳐보였습니다.
서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이 밀고 내려갔지만 중부전선에서는 영국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캐나다군의 분전으로
가평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의 협조가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중공군이 사용한 펑더화이는 이 정도 대규모 병력의 공세를 펼쳐보이고도
서울 공격을 안 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억지로 의정부를 통해 서울로 병력을 밀어버렸지만
위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진군이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중공군의 5차 공세가 펑더화이의 회심의 일격이었던 만큼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4월 공세를 통해 서울로 진격이 실패했지만 5월 다시 한번 공세를 밀어붙여서
어떻게든 이 역대급 규모를 동원한 5차 공세를 성공시키고 싶어했죠.
그래서 중공군의 5차 공세는 4월 공세와 5월 공세로 구분한답니다.
4월 공세에서 펑더화이가 느낀 건 역시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상대하기가 버겁다.
5월 공세부터는 기존대로 전투력이 약한 국군을 노리자는 전략으로 바꿉니다.
그렇지만 국군은 어디에 집중되어 있었는가?
거의 모든 전선에 국군이 일부 조준하고는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서부전선과 서부전선과 붙어있는 중부전선의 경우
확실히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비중이 많았고
반면 동부전선, 지금의 강원도 인제 입대에는 우리 국군부대들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펑더화이는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대거 남하하는 것을 5월 공세의 목표로 삼았고
서부전선에 있던 중공군 3병단과 9병단 병력 25만 명을 강원도 인제로 보냅니다.
당시 강원도 인제에는 국군 5사단, 7사단, 9사단, 3사단, 4개의 사단이 주둔 중이었죠.
1951년 5월 16일 중공군 5차 공세의 두 번째 5월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아니나 다를까 국군은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가장 왼쪽부터 5사단이, 그 다음 7사단이, 그 다음 9사단이, 그 다음 3사단이 차례대로 무너졌죠.
4개의 사단은 각자의 루트에 따라 밑으로 철수 중이었습니다.
그 중 9사단과 3사단은 강원도 인제의 현리까지 내려오는데요.
그들의 최종 철수 목적지는 강원도 평창이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북한군 3군단과 5군단이 우리 국군 9사단과 3사단을 쫓고 있었고
북한군의 공격을 피하며 현리에 있던 국군 3사단과 9사단은 강원도 평창으로 후퇴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현리에서 평창까지의 도로는 딱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도로는 오미제라는 고개를 넘어야 했고 곳곳에 여러 산들이 쌓여있어 능선이 연달아 이어진 구조였죠.
즉, 매복하기 딱 좋다는 뜻이죠.
북한군의 공격을 피해 철수하던 국군 9사단과 3사단이 오미제 고개를 통해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중공군이 미리 오미제를 장악하고 차단해놓은 상태였습니다.
9사단과 3사단 병력은 철수하느라 경황이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채 오미제를 향해 내려가다가 매복해 있던 중공군이 집중 공격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오미제를 뚫을 수가 없던 국군 9사단과 3사단은 정상적인 도로를 포기하고
옆에 있던 방태산이라는 해발고도가 1,400미터에 이르는 산을 넘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살 길이 없었어요.
그런데 방태산의 해발고도가 결코 낮은 산은 아니었기 때문에
병사들과 장교들이 방태산을 넘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고
이들은 무기와 장비까지 버려가면서 방태산을 넘었습니다.
도저히 산을 넘지 못할 것 같던 병사들은 그냥 산 아래로 다시 내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었죠.
그렇게 방태산을 힘들게 힘들게 넘어 목표로 했던 강원도 평천에 도착한
우리 국군의 병력은 처음 병력의 40%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잃어버린 장비와 무기는 훨씬 더 많았고요.
참패도 이런 참패가 없었으며
현리전투는 6.25 한국전쟁 가장 부끄러운 전투로 꼽히는 전투랍니다.
현리전투에서 40%만 남은 9사단과 3사단은 국군 제3군단으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미군의 벤플리트 장군이 유재웅 군단장에게
당신들 병력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을 때 유재웅은 모른다라고 대답하자
화가 난 벤플리트는 제3군단을 해체해버렸습니다.
제3군단은 몇 년 후 다시 창설되기는 하지만 참 창피한 일이죠.
첫 공격에 대성공을 한 중공군은 그대로 강원도 더 남쪽으로 남진했습니다만
미군 제2사단이 강원도 홍천인 778 고지에서 중공군의 고지를 성공적으로 사수했으며
경기도 광주에 있던 미군 3사단이 급하게 강원도로 넘어와
평창까지 내려온 중공군을 평창의 운두령에서 막았고
또 강릉을 막고 있던 수도사단에서도 급하게 연대병력을 강원도 평창으로 보내주어
수도사단의 1연대가 평창의 대관령을 성공적으로 사수하였습니다.
현리전투를 통해 강원도 인재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국군 9사단과 3사단이 후퇴하고 있는 동안
승리의 자신감에 중공군은 중부전선에서도 진격을 감행하기로 하였습니다.
중부전선에서는 중공군 19병단의 63군이 가평을 통해
경기도 양평으로 남아중이었습니다.
양평 여행 다녀오신 분들은 아실 텐데
이 양평에는 용문산이라는 유명한 산이 있죠
용문산을 기점으로 양평을 방어하는 부대는 국군 6사단이었습니다.
저번 5차 공세 1편에서 다뤘는데
중공군이 4월 처음 5차 공세를 퍼부었을 때
강원도 화천에 있던 국군 6사단은 사착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너무 놀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있는 무기 없는 무기 다 버리고 준행량을 쳤습니다.
그래서 국군 6사단은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형식적으로나마 용문산에 배치되어 있었던 거죠.
6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장도영 장군은
사착리 전투에서의 도주를 매우 치욕스럽게 여기고 있어서
이후 무기들을 지원 받으면서도 연대장과 대대장들을 전부 교체하는 등
6사단을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6사단은 결사항쟁을 다지고자 철모에 결사라고 적은 머리띠를 두르기도 했죠.
언젠간 이 치욕을 만화하겠다는 장도영 사단장의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때
중공군 19병단의 63군이 가평을 지나쳐 용문산 방면으로 내려오고 있었던 겁니다.
장도영 사단장은 6사단의 이현대를 용문산에서부터 약 15km 북쪽으로 떨어진
북한강 홍천강 일대로 보내 내려오는 중공군을 정찰하도록 하였습니다.
5월 18일 중공군 63군이 북한군과 홍천강 앞에 나타나자
이현대는 각 대대별로 강을 넘으려는 중공군에게 피해를 주면서 철수하였고
철수한 6사단의 이현대는 북한강과 용문산 사이에서
진을 치고 중공군의 공격을 철통 방어하였습니다.
6사단 이현대는 각 대대별로 방어에는 유리하지만 공격에는 불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각 대대별 긴밀하게 상호 엄호 및 협조할 수 있는 위치를 고수하면서
철통같은 방어대형을 구축했고 약 6배 차이가 나는 중공군을 상대로
중공군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병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다면
6사단 이현대가 지쳐갈 게 뻔했죠.
당연하게도 장도영 사단장은 용문산에 주둔 중이었던 6사단의 다른 연대들을
지원 보내주고 싶어 했지만
벤플리트 사령관이 최후의 일격을 위해서 기다리자고 지시했습니다.
대신 미군은 포병대대를 지원해 주어
용문산으로 내려오려는 중공군에게 불세례를 퍼부어주고 있었죠.
점차 시간이 지나며 조급해지는 건 중공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6사단의 이현대가 워낙 잘 싸워서 중공군은 6사단 전체 병력이 있다고 생각해
그냥 가지고 있는 병력 대부분을 여러 방면에서 밀어넣기로 합니다.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그냥 몸빵 으로 밀고 나가자는 거죠.
이때가 5월 19일이었는데 벤플리트 사령관은 드디어 때가 왔다면서
5월 20일 오전경으로 서부전산에서부터 동부전산에 이르기까지
전 유엔군과 국군 총 반격을 지시 했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의 대규모 반격에 중공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서쪽으로는 파주와 의정부 일대를 탈환했고
중부전산에서는 용문산에서 기다리고 있던 6사단의 다른 연대들이
빠르게 이현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이현대를 구출해주면서
중공군 63군을 쫓아냈습니다.
이 전투가 용문산 전투이며 용문산 전투로 6사단은 국인 체면 제대로 회복했던 거죠.
용문산 전투 때 중공군 63군의 피해가 4천에서 5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여기까지가 중공군 5차 공세의 두 번째 페이즈 5월 공세이고
모든 전산에서 유엔군의 대반격에 중공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중공군의 5차 공세도 끝이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벤플리트 사령관은 단순히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철수하는 중공군을 추격하기로 합니다.
모든 전산에서 유엔군의 진격에 중공군은 각 부대별 연락과 통신이 모두 단절되었고
전열이 완전히 와해된 채 각자 철수하는 마치 아수라장 같은 철수였습니다.
그 중 벤플리트와 이승만은 강원도 화천의 중요성을 실감해서
어떻게든 화천을 확실하게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화천은 지리적으로 철원을 포함한 철의 삼각지대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이기도 하고
또 화천에는 화천수력발전소가 있거든요.
이에 미군이 화천에 들어온 중공군 테러를 전부 차단하고 포위하자
화천에 있던 중공군은 화천 저수지에 그대로 고립되었고
미군의 공군과 화력 세례를 받다가 결정적으로 5월 27일부터
국군 6사단이 화천 저수지 이른바 화천호로 투입되어
28일까지 중공군을 선멸해버렸습니다.
화천호에 고립되었던 중공군이 이 전투로 사망한 전사자 수가 무려
2만 5천명이었습니다.
화천호 전투의 승리로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기뻐하며
국군 6사단의 공로를 치유하고 훗날 화천호를 오랑케르 묻지른 호수였다며
화천호의 이름을 855라고 불렀는데 그래서 이 전투가 855전투입니다.
855전투는 중공군 5차 공세를 마무리 짓는 화룡점정 같은 전투였고
회고에 의하면 온통 중공군 시체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공군이 역대급으로 최대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온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역대급 최대 규모의 피해만 입으면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