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02】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왜 독재자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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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헌법의 역사 2부. 이승만은 어떻게 독재자가 되었을까?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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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총선을 통해 초대국회 재헌국회가 만들어졌고
1948년 7월 17일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인 재헌헌법이 발표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최초의 국회였던 재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위한 과도교적 국회였던 만큼
첫 임기가 2년이었으며 그 다음부터 국회의원의 임기를 4년으로 정하였죠.
그 뜻은 다음 국회의원 선거인 2대 총선은 1948년으로부터 2년 뒤인 1950년이었다는 겁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한 달 전이었던 1950년 5월 30일 제2대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국회의원 수는 초대국회보다 10석을 늘린 210석으로 정하였고 총선이 치러졌는데
1950년 제2대 총선의 결과는 이승만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이승만이 지지사력이 모여있던 대한독립촉선국민회가 참패하고 말았던 겁니다.
초대국회에서는 55석으로 가장 많은 의원수를 확보했던 대한독립촉선국민회가
2대 총선에서는 겨우 14석 다른 야당들에게 밀렸습니다.
그것도 제1야당뿐 아니라 제2야당만도 못한 의원수가 나와버렸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석이 다양합니다.
아무래도 대통령 취임 후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친일파를 비호하며
반민특위를 해산한 사실과 또 김구의 암살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민심이 흉흉했거든요.
총선에서 대한독립촉선국민회의 패배는 이승만 입장에서는
2년 후 치러질 2대 대통령 대선에서 위태롭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초기 헌법에서는 대통령의 임기가 4년이고 재선까지는 가능했거든요.
이 정치적 위태로움을 느끼고 있을 무렵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승만은 겉으로는 국민들을 안심시키고는 누구보다 빠르게 가장 먼저 서울을 탈출했고
1950년 8월 18일부터는 부산이 임시수도로 기능하였죠.
가뜩이나 2대 총선에서 이승만이 지지사력이었던 대한독립촉선국민회가 참패한 마당에
한국전쟁까지 터지고 이승만의 초기 대응이 워낙 실망스럽자
이승만은 더더욱 정치적 위기감을 느낍니다.
이에 이승만은 정당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사실 대한독립촉선국민회는 정식 정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체에 불과했거든요.
이승만이 정식적인 정당을 창당하려고 했던 목적이 있었으니
바로 헌법을 고치는 것, 개헌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국회에 이승만의 지지사력이 없는 마당에 1952년에 있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럼 당연히 이승만이 대선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재헌 헌법에서는 대통령 선출을 국민들이 직접 투표하는 직선제가 아니라
국회의원들을 투표로 선출하는 간선제 방식이 원칙이었거든요.
이대로라면 이승만의 2대 대통령 취임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이 생각해낸 게 헌법을 바꾸어
대통령 선출을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었죠.
하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지지사력이 국회의 적은 마당에
개헌을 요청했을 때 개헌에 동의해줄 사력이 적다고 판단하는 이승만은
우선 정식 정당을 만들기로 한 거죠.
그래서 국회에 참여한 여러 정당들 중 몇몇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회유하는가 하면
원외 정치단체들 사람들도 모아서 1951년 자유당을 창당했습니다.
하지만 자유당 내에서도 이승만의 개헌에 대해선 부정적인 여론도 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1952년 1월 이승만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국회에 요청하자 바로 부결되었습니다.
화가 나는 이승만은 다시금 자유당을 물가리하여
오로지 친 이승만 추중자들로만 구성해버렸습니다.
문제는 자유당을 설령 이승만의 추중자들로만 구성한다고 해도
여전히 국회에서는 친 이승만 사력이 소수였기 때문에 개헌이 통과될 수는 없었죠.
이에 이승만은 부산에 깡패들을 동원합니다.
1952년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북한군과 내통하고 있다면서
이승만은 깡패들을 불어 야당 의원들을 폭행하고 그대로 연행해버렸습니다.
이 사건을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 하죠.
야당에서 이승만을 규탄하려고 하자 이마저도 이승만은 깡패들을 불어 전부 잡아들였습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국무총리 장택상은 야당의 대표 의원들을 만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건 이승만 대통령의 개헌 요청을 통과시키는 것이라고 협박했고
끝내 잡아둔 야당 의원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야당 대표들은 개헌에 동의하기로 합니다.
결국 이승만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은 통과되었는데
이때도 이승만은 군경을 불어 임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해놓고 거벅하고 있었다고 하죠.
1952년 7월 7일 한국사 최초의 개헌으로 만들어진 2차 헌법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최초의 개헌을 발췌 개헌이라고 합니다.
이승만은 그래도 야당과 국회의 요구였던 양원제를 조금은 발췌해주었다는 뻔뻔한 이유로 발췌 개헌이라 이름 붙였죠.
이승만은 전시 상황에서 대통령이 바뀌면 불리하고 위험하다는 가스라이팅으로 국민들의 지지도를 샀고
1952년 8월 대선에서 끝내 당선되어 2대 대통령이 되었죠.
아 물론 2년 후 치러지는 3대 총선에서 양원제에 따라 참의원 선거와 민의원 선거가 분류되어 진행되어야 하는데
자유당의 반대로 민의원 선거만 치러졌습니다.
그러니까 이승만이 국회의 요구를 어느정도 수용하고 발췌해주겠다던 양원제는 실은 시행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제외하고는 대한민국의 정신을 명시한 전문과 제1장 총광부분은 기존의 것과 거의 동일했습니다.
1950년 이승만은 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대통령의 임기와 재산까지만 가능하다는 원칙은 개헌되지 않았기 때문에
1956년 있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원칙적으로 출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이승만이 욕심을 부립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 연임 제안을 철폐하자고 헌법을 또 고치자고 한 거죠.
하지만 역시 개헌이 통과되려면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의 동의가 필요한데요.
1954년 3대 총선으로 만들어진 국회에서는 전쟁이 끝난 공로를 이승만과 자유당의 공으로 돌린 덕에
자유당이 압승을 하기는 했지만 114석만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회의원의 수가 203명이었기 때문에 개헌이 통과되려면
자유당에서는 자유당 외 의원들에게 접근하며 뇌물을 쓰고 협박도 해가면서
개헌안이 국회에 붙여질 경우 동의하겠다고 약속을 받은 의원들까지 137명까지 확보하는 데 성공하죠.
그리고 1954년 11월 27일 운명의 개헌 투표.
분명히 137명이 동의하겠다고 했으나 실제 동의한 의원의 수는 2명이 미치지 못한 135명이었습니다.
이대로 개헌은 부결이 되나 싶었죠.
그런데 국회의원 수 203의 3분의 2는 자연수수로 정확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135.3333의 무한소수로 가기 때문에 그래서 동의하는 국회의원들이 최소 136명이 필요한 건데
이게 너무 애매하게 135명이 나와버린 거죠.
이대로 개헌을 부결시킬 수 없던 자유당에서는 원래 반올림의 원칙이라는 게 4사5입이라고
소수점에서 5 이상은 올리고 4 이하는 내리는 게 아니냐
따라서 135.3333에서 0.3333은 올려야 하지 않고 버리는 게 맞다.
즉 203명의 3분의 2는 136명이 아니라 135명으로부터 쳐야 하기 때문에 개헌안은 통과되는 게 맞다고 주장한 겁니다.
여기에 대한수학회의 회장이자 서울대 수학과의 최윤식 교수와
인하공과대학의 학장이었던 이원철 박사까지 수학적으로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 맞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두 교수들의 발언은 그저 135.3333에서 소수점을 버려야 하는 것이냐 올려야 하는 것이냐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을 뿐
그것이 개헌 동의를 위한 질문이었는지는 몰랐다고 해고했습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또 장치깡패들을 동원해 국회에 집어넣으며 야당의원들을 겁박했고
결국 2차 개헌이 통과되며 1954년 11월 29일 3번째 헌법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2차 개헌을 그래서 4사5입 개헌이라고도 부르죠.
이승만의 1, 2차 개헌이 문제인 건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무력을 동원하면 개헌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잘못된 관행과 문화를 만들어서 훗날 독재자들의 출현 가능성을 더욱 높여버렸다는 겁니다.
그나마 이승만의 독재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투표에서 이겨버리는 거죠.
과거 발최 개헌 때의 대통령 직선제 방식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여당, 자유당의 국회의원 보유 비율이 가장 많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대선에서 대통령을 뒤바꿀 수 있었습니다.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이 출마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는 장면인 출마했습니다.
신익희는 한때 우익진영의 정치인으로 우리나라 초대 국회 부의장이기도 했고
이승만의 지지세력이었던 대한독립축성 국민은 소속이기도 했지만
막 나가는 이승만의 환멸을 느끼고는 일찌감치 야당으로 전환하였죠.
민주당이라는 정당도 신익희가 이승만의 독재를 막고자 3대 대통령 대선 1년 전에 창당한 야당이었습니다.
이때 민주당에서 내걸었던 구호가 아주 유명하죠.
바로 못살겠다, 가라보자였죠.
여기에 또 한 명의 대선 후보자가 있었는데
바로 과거 농지개혁을 주도했던 조봉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익희와 조봉함이 신익희로 단일화를 약속한 겁니다.
두 후보가 단일화가 되면 이승만도 당선은 장담할 수가 없었죠.
아니나 다를까 신익희의 인기는 어마어마했습니다.
어느 한 유세 연설에서는 30만 명이 운집하기도 했죠.
그런데 갑자기 지방 유세를 가던 신익희가 기차 안에서 사망해버립니다.
신익희의 죽음으로 이승만은 3대 대통령에도 당선되어 이승만의 독재는 계속되었죠.
그리고 4년 후 1960년 4대 대선에 이승만은 또 출마하는데요.
3부여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