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의 네 번째 주제, 마음에 독이 되는 세 가지를 요약합니다.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손해가 되는 것을 계속하게 됩니다. 삼독, 즉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이렇게 세 가지에 바탕을 두었거나 삼독을 일으키는 건 다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불교에서 다루는 정신 인식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가지 독이 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를 내면 당신의 제자가 아니고 남이 나를 톱으로 썰더라도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를 이야기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참거나 거부하는 것도 다 화입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화내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업의 법칙, 인과의 법칙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해를 끼치면 훨씬 많은 것을 되받게 됩니다. 남을 도울 때도 하나를 주면 적어도 그 100배 이상을 받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정확히 보는 것이 어리석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탐욕과 화가 일어납니다. 탐욕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있는 것을 당기는 것이고, 화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있는 것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축적되면 정신 불건강의 토대가 됩니다. 치료가 되려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이 정신이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면 그 순간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고 유익한 마음 작용이 계속 일어납니다.
첫번째 질문 :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즉 삼독심이 우리 정신건강에 해로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두번째 질문 : 우울과 불안은 화난 마음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요? 세번째 질문 : 가정폭력 피해자의 화와 공격성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네번째 질문 : 업의 실상을 어떻게 믿음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요? 다섯번째 질문 : 탐욕에 대한 세분화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현재 집중은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정신건강을 되찾는 길 [전현수 박사 불교정신치료 51강]
사장의 네번째 주제에 마음의 독이 되는 세 가지를 요약합니다.
사람이 지혜가 없으면 손해가 되는 것을 계속하게 됩니다.
손해가 되는 것은 삼독, 탐욕, 성냄, 어리석음
이렇게 세 가지 독의 바탕을 두었거나
삼독을 일으키는 건 다 손해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는 불교에서 다루는 정신인식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가지 독이 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우리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보지 못합니다.
정신인식 과정에는 속행이 있고
우리가 잠깐이라도 화를 내게 되면
정신인식 과정이 1초에 몇천억 번 일어나고
속행은 온몸에 영향을 주고 과보와 연결됩니다.
이러한 미세한 것을 본다면
화가 얼마나 위험한지 확실히 압니다.
부처님께서는 화를 내면 당신의 제자가 아니고
남이 나를 토보로 썰더라도 화를 내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를 이야기할 때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니라
참거나 거부하는 것도 다 화입니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마음이 편안하지 않으면 화내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은 업의 법칙, 인과의 법칙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에게 해를 끼치면 훨씬 많은 것을 되받게 됩니다.
남을 도울 때도 하나를 주면 적어도 그 100배 이상을 받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정확히 보는 것이 어리석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탐욕과 화가 일어납니다.
탐욕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있는 것을 당기는 것이고
화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있는 것을 밀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업의 실상은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 수준이 아니면 제대로 보기 어렵습니다.
앙굿다라니까야 생각할 수 없는 경에서
부처님이 생각하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되는 네 가지를 말씀하셨고
그 중 하나는 업의 과보로
이것은 생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머리가 아프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축적되면 정신불건강의 토대가 됩니다.
치료가 되려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이
정신이 작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면 그 순간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없고
유익한 마음작음이 계속 일어납니다.
본문 유학도 길었지만 질문이 많으니까
질문의 길이를 좀 조절해 주세요.
첫 번째 질문은
절이나 마음 공부하는 데서 수행할 때
우리 보살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뭐냐면
보살은 화가 많다, 진심이 많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좀 마음이 불편해요.
물론 우리들이 화가 많은 건 알지만
또 남이 그래 말하면 좀 싫거든요.
그리고 또 화가 막 올라오면 그걸 보고
지금 딱 알아차리고 내려놔야지
또 진심이 올라왔네 그러면
아이고 제가 또 놓쳤네요 하면서
내려놓기는 하지만
이런 과정이 좋지가 않고
계속 무한 반복이에요. 사실은
그래서 탐독, 탐진치 안 좋다
그래서 화내는 거 안 좋다 알지만은
계속 올라오고 또 말 듣기 싫어하는데
오죽 안 좋으면 독이라는 말을 썩겠어요. 그렇죠?
박사님께서 여러 번 설명해 주셨지만
오늘 정말 확실하게 이건 독이다
진저리 쳐질 정도로 가시는 아니고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설명을 좀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렇죠. 탐진치가 삼독이다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는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게
뭐 적당한 탐료 또 적당한 화
뭐 이런 거에 대해서 굉장히 좀 활력소
내지는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거로 이야기를 해요.
뭐 예술 작품이나 이런 것도 보면
영화나 이런 것도 보면
사랑에 대한 거 이런 게 많이 나오잖아요.
또 뭐 즐기는 거
근데 왜 그러면 불교에서
독이라는 말을 썼을까
독이란 거는 보통 중에 독이란 말을 쓰진 않잖아요.
독은 심한 독은 바로 죽거나
안 그러면 엄청난 휴증을 남기는
그 해를 끼치는 게 독이라잖아요.
그래서 이 독을 이해하기는 굉장히 쉽지 않아요.
독을 이해하려면은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면
그게 이제 업이 돼요. 업이
업이란 거는 어떤 원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원인에는 결과가 수반돼요.
그래서 업과 업의 과보 이런 이야기를 쓰거든요.
그래서 이게 탐진치 삼독이라는 말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어떤 의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는 걸
정확히 알 때 이거를 잘 이해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이해가 굉장히 어려워요.
예를 들면은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면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어떤 정신현상을 일으키면
정신인식과정이란 게 있거든요.
그 정신인식과정은 쭉 보면은
오문인식과정이란 게 있어요.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으로 일으키는 인식이 있고
또 정신만으로 일으키는 인식이 있어요.
그걸 우리는 의문인식과정이라 그래요.
거기서 볼 때 기능만 하는 정신이 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어떤 과보를 가져오는 정신부분이 있어요.
그게 이제 속행이라는 부분이에요.
속행은 중요하게 좀 일곱 번이 일어나요.
일곱 번 일어나는 다른 정신은 한 번씩 일어나요.
예를 들면 암문전향, 안식,
뭐 받아준 돈 한 번인데
속행은 일곱 번이에요.
일곱 번 동안 여러 가지 현상들의 작업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속행이 일어날 때 보면
우리가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서
유익한 마음, 해로운 마음이 있어요.
해로운 마음이 탐진치의 3도계에요.
유익한 마음은 탐진치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셋 중에 하나만 있는 그런 경우에요.
그러니까 있더라도 심각하게 있는 건 아니에요.
약간의 탐욕이 있는 거예요. 세상적인.
그래서 탐진치가 없는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하고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세 가지로 영향을 줘요.
하나는 이 정신은 물질을 만들어내요.
그래서 우리가 좀 기분이 안 좋으면 몸이 좀 무겁잖아요.
움직이기도 좀 쉽지 않고.
그런 물질을 일단 만들어내요.
두 번째는 순간적이지만
아까 정신은 1초에 1조 번 일어나요.
정신인식까지는 한 몇 천억 번 일어나겠죠.
그 순간에는 그 정신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심하게 하면 하루 종일 해로운 마음이 하루 종일 그 정신 속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한테 영향을 줘요.
이거 가지고 우리가 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건 괜찮잖아요.
그런데 세 번째가 뭐냐면 과보를 가지고 와요. 과보.
그러니까 속행이 일곱 번 일어나거든요.
첫 번째 속행은 이 생에 어떤 조건을 만나면
조건을 만나지 않으면 절대로 과보는 일어나지 않아요.
조건을 만나면 과보를 가져와요.
일곱 번째 속행은 다음 생에 과보.
두 번째부터 여섯 번째는 다다음 생부터 윤회를 끝날 때까지
어떤 조건을 만나면 과보를 나타나기 때문에
독이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불교 주석서가 있어요.
경전, 니가야도 있지만 주석서가 있는데
주석서에 보면 좀 끔찍해요.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독이 왜 되는지 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신 분은 그냥 들으면 될 거예요.
주석서란 것은 부처님 말씀 다음으로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불교계에서 거의 다 지혜로운 사람들
이건 맞다 해서 내려오는 게 주석서예요.
그 주석서에 보면 먼 과거의 일이죠.
어떤 분이 선임이었어요.
선임이고 훌륭하시니까 공부도 많이 했으니까
어떤 재가신자가 절을 하나 지어서 모시고 있었어요.
그래서 평온하게 생활했죠.
그러다 하루는 그 지역에 아란이 한 분 나타났어요.
그러니까 선임을 모시던 재가신자가
그분도 좀 모시고 온 거죠.
그래서 되게 겁쟁하게 하니까
이분이 질투심이 좀 생긴 거예요.
이 선임이.
질투심이라는 건 해로운 마음이에요.
탐진치 할 때 그런.
뭐 진에 해당되겠죠.
치를 바탕한 탐진치가 같이 있는.
탐진이 같이 있는.
그래서 이분한테 질투심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그 재가신 자기를 지금까지 지극히 공량했던
그 재가신자가 그 아란 선임한테 하는 걸 보고
질투심이 일어나니까 기분이 안 좋은 거죠.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이 안 좋았던 거예요.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이제 같이 있다가
그 재가신자가 다음날 같이 공량에 오시라고 그랬어요.
그 당시는 우리는 공량시간될 때
목탁치고 그러잖아요.
갑시다 이래요.
근데 거기는 서로 방해 안 하려고
조그마한 줄을 연결해서
거기 약간 흔들면 소리가 나는 그런 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공량에 아침에 가야 되니까
줄을 거의 손만 딱 대는 정도가 안 들린 정도로 하니까
반응이 없잖아요.
혼자 온 거예요.
혼자 이제 재가신자 집에 가니까
그분은 왜 안 오세요?
그러니까 좀 게으르고 좀 안 좋다.
이런 식으로 좀 비방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 재가신자가
뭐 그렇냐고
그렇지만 공량에 안 오셨으니까
이 음식 좀 갖다 드리라고
그걸 받아가지고 오다가 버려버린 거예요.
그리고 와보니까 그 선임이 없는 거예요.
이미 아란이니까 그 마음을 알았던 거예요.
그래서 떠나버린 거예요.
그 질투라는 이 어떤 업 때문에
그 마음 하나 때문에
이분이 지옥에 태어나요.
주석사에 하면 지옥에 태어나고
지옥에서 나와서도 500생을 또 야차로 보내요.
또 나머지 그 다음 또 500생을 개로 보내요.
그래서 막 얻어먹지도 못하고
뭐 그래 그래면서 계속 다음 생에서 먹는 게 굉장히 불편해요.
그래서 마지막 생에 이제 좋은 과거의 업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부처님
석가문이 부처님 거기에 출가를 해요.
출가해서도 계속 못 먹어요.
아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그런 한순간에 어찌 보면
뭐 하루 사이 아니에요.
그때 일으킨 업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우리 그걸 독일에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불교 공부를 철저히 뭐 하거나
또 믿음으로 접근하거나 해서
이제 그런 걸 알면은
해로운 마음은 잘 안 일으켜요.
좀 끔찍하죠.
알면 진짜 끔찍해요.
그래서 불안자 이상은 화가 없어요.
자기한테 이익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너무 끔찍한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란을 비방해서
그 과보가 그렇게 큰 것인가요?
아니면 질투심 자체가 아란이든
다른 대상이든 내면은 그렇게 되는 건가요?
여기서는 주석세 포과서는 질투심이에요.
해로운 마음.
그래서 지금 여러 번 정신인식 과정을 설명해 주시고
업과 과보를 설명해 주셨지만
진짜 끔찍하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내가 2003년에 미얀마를 가서
느낀 게 뭐냐면
살기가 굉장히 열악해요.
열악하고 매연 때문에 머리가 띵할 정도예요.
버스는 만 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 얼굴이 좀 평온해서 굉장히 놀라웠어요.
그분들이 다 수행을 해서 이런 걸 터득한 건 아니고
믿음으로 알기 때문에
마음의 이런 탐진치가, 하여튼 화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보사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안 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두 번째 질문은 화가 해롭고
지금 들은 대로 정말 독인데
표면상으로 화내는 것뿐만 아니라
참거나 나 화 없어라고 부인하는 것도
이제 모두 화라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으면 그게 화인데
그러면 우울이나 불안도 참 안 좋잖아요. 상태가.
그래서 이런 우울과 불안과 화가
또 어떤 관계인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 특히 조기불교죠.
그리고 조기불교를 바탕으로 한 불교정신치료에서는
탐진치로서 탐진치가 딱 머릿속에 박혀야 돼요.
이제 탐진치의 근본은 치예요.
치라는 것은 정확히 못 보는 거예요.
정확히 보게 되면 인과위 법치상 다 일어나게 돼요.
인과위 법치상 다 일어나기 때문에
그걸 그냥 평온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걸 못 보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욕심을 내서
뭔가 이렇게 됐으면 하는 게 탐이에요.
그 다음에 아 이거 싫어 하는 게 진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 우울이나 불안도 우울이라는 것은 잘 보면
우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우울은 보면 지금 현재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 거예요.
자기 삶이 좀 싫은 거예요.
그럴 때 우울이 생겨요.
자기 삶이 만족스럽고 자기가 너무 좋으면 우울하겠어요.
그렇잖아요.
어떤 의미에서 어쨌든 지금 현재 자기 삶이 불만족스러운 게 우울이에요.
그 말은 뭐냐면 지금 삶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내가 살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있는데 이게 안 되기 때문에
그 차이만큼 나는 우울이 온다고 봐요.
그게 심하면 많은 우울이겠죠.
조그마하면 가벼운 우울이겠죠.
그래서 우울이라는 건 어찌 보면
지금 현재 삶을 못 받아들이고
이거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고
또 이거는 이거보다 더 나빠질 수 있어요.
어찌 보면 이것도 다행이에요.
이런 거를 잘 모르는 어리석음에 기반해서
현재 삶을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큰 털에서는 탐진치할 때 진,
이거를 거부하는, 싫어하는,
못 받아들이는 어떤 성내미로 봐야 돼요.
그 다음에 이제 불안이란 거는
이래 잘 보면 불안도
지금 삶이 만족스럽고 여러 가지 의욕을 가지고
이래 호기심 가지고 보는 사람한테 불안이 있겠어요.
불안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어떤 현재 삶에서 하여튼 뭔가 불안한 요소를 보든지
안 그러면 사실은 불안은 이게 더 많아요.
앞으로 1초라든지 하여튼 언젠지 닥칠
어떤 위험을 미리 생각하고
거기에 마음이 가 있거나 하는 걸 불안이라 볼 수 있어요.
어쨌든 지금 일어난 현상을 잘 이래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도 온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측면에서 이 불안도
어리석음에 기반을 한 못 받아들이는 화로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이 우울과 불안 이것들을
불교정신치료 입장에서는 정확히 보지 못하고
그 결과 좀 싫어하고 없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많이 생긴 상태가
불안, 우울이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그거에 대한 해결은 좀 정확하게 봐서
그것을 거기서 뭔가 지혜를 얻고
거기서 뭔가 노력해서 또 나은 삶을 잊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
그것이 이제 해결책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저희가 임상에서는
우울이나 불안을 종류를 많이 나누지만
제가 이렇게 들어보니까 지금
종류가 많지만 근본적으로는 어땠든
어리석음에서 사실을 기반을 하는 거네요.
그러니까 그 어리석음과 있는 그대로 좀 보는
그런 게 좀 해결이 되면
종류나 뭐 이런 생리적인 것도 있지만
생리적인 것조차도 만약에 있는 그대로 정확히 보면
좀 해결이 될 수가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랬다 생각하신대요.
내가 원하지 않은 게 일어나요.
뭐 불안이 우리는 잘못 보고 있다.
바로 보자.
바로 보는 게 살길이다.
티셔츠라도 벗고
그렇죠. 바로 보자.
잘못 보고 있다.
그렇죠. 잘못 보고 있다.
그래야 될 것 같아요.
그 다음에 이제 세 번째 질문은
약간 좀 전문적인 얘기
복잡한 얘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임상에서 이렇게 만나는 분들 중에
가정폭력 때문에 매맞는 여성분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매맞는 아내분들
또 뭐 남자분들도 맞을 수 있고요.
그렇죠.
배우자 외에서 이제
그런 가정폭력의 대상이 되는 피해자들이
이렇게 보면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맞는 거 두려워하고 싫어하지만
근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제 그런 현상이 뭐냐면
내가 좀 잘했으면 안 맞았을 텐데
내 잘못이다. 라든지
그래도 이 사람이니까
때리더라도 나랑 살아주지.
그렇게 맞은 만큼 모질란 나를
누가 나랑 살아주겠는가
이러면서 굉장히 자기에 대해서
탓을 하고 죄책감 느끼고
이런 분들이 있으시단 말이에요.
근데 이제 상담을 해보면
영화에도 아주 유명한 대사가 있지만
이트난 리오포트에서 당신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했을 때
그거로 더 자유로워지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 임상에서 복잡한 거는
그렇게 했을 때 더 안 좋아지는 분들도 있단 말이에요.
뭐냐면 그동안은
그래서 이렇게 고생하고 내가 맞는 이유가
내 잘못이라고 했을 때는
뭐가 설명이 되는 게 있었는데
내 탓이 아니다 라고 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이러면서 오히려 더 무기력해지고
힘들어지는 분들이 사실 있거든요.
그래서 사실 가해자로부터 분리를 시켜놔도
한 달 뒤에 다시 돌아가는 분들도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저희가 어떤 치료적인 접근으로 봤을 때
그런 분들은 오히려 화나 공격성 이런 것들을
좀 정당화하면서
그걸 좀 분출을 하면서
이것이 어떤 에너지가 돼서 치료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단 말이에요.
그랬을 때 불교정신치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나 접근에 대해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궁금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불교정신치료는
정확히 보는 게 필요해요.
그 사람이 왜 매를 맞고 사는지
이걸 정확히 보고
거기서 뭔가 작업을 해야 될 거예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요즘도 매를 맞고 사는 여자들이 있어요?
있죠.
옛날에는 많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도 있습니다.
있긴 있겠죠.
있긴 있는데
그러니까 나는 볼 때는
그 사람도 우리하고 똑같다고 생각해요.
똑같은데 그런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런 상황이 있을 때 이렇게 보면
그 사람이 그런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뭐가 나는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사례마다 다 다르겠죠.
다르지만 우리가 좀 추측할 수 있는 거는
그 사람이 그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게
일단은 자식 문제도 있을 수도 있어요.
자식 문제도 있을 수도 있고
또 그 다음에 지금 자기가 있는 이 삶을
완전한 변화를 가져오는 건
자기가 감당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리고 또 어찌 보면
매맞는 아내가 매일같이 매매를 맞으면
도망해 놓을 거예요.
그런데 복하하다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물론 집마다 다 달라요.
집마다 다르면 그것에 대해서
좀 잊어버리 살다가
아, 그때만 좀 넘어가면 되지.
뭐 이럴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상황이 있어요.
그래서 그 상황을 우리가 잘 들어보고
거기서 그분이 좀 고칠 수 있는
뭐가 있으면 좀 고쳐서
그 상황이 나아지도록 하는 게 좋아요.
나는 그 사람들이
내가 매맞을 짓을 했으니까
그 부분도 어느 정도는 뭐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 부분이 좀 바뀌면
또 좀 나아질 수도 있는 부분
그 사람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말할 때는
그럴 만한 유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요거를 우리가 좀 더
뭐 정당한 공격성의 표출은 중요하다
그런 거는 그냥 좀
내가 볼 때는 허무 맹랑한 이야기고
그보다는 사람이
그 사람이 그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고
또 왜 그래 됐는지
이 사람의 요인 또 가족의 요인
뭐 여러 가지 속에서 충분히 언언하면서
그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게끔
우리는 도와주는 게 필요하지
그렇지 않고 뭐 어떤 치료자가
이 화학 정당한 공격성 건강한 거
이런 데 사로잡히면 난 안 된다 봐요.
그래서 일단은 그 상황을 잘 보고
그 사람이 그런 생활을 유지하는
그 속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거예요.
사실 누구든지 잘 살고 싶죠.
그리고 또 다른 대안이 없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좀 작업을 충분히 해나가고
또 그리고 뭐 필요하면 또 배우자가
협조가 되면 와서 또 서로 이야기하고
뭐 그래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 가야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조건을 좀 더 정확히 보고
그에 맞는 이제 접근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왜냐하면 이제 사람은 언제나
어떻게 보고 있느냐의
그 어떤 결과거든요.
그 사람이 내가 잘못
내가 맞을 짓을 해서 맞는다.
또 내지는 뭐 사는 게 그런 거다.
뭐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수 있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보고 있는 거예요.
그거를 아무런 대안 없이
또 그리고 그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 없이
바꿔라 이러면 그 사람은 바꾸기 힘들 수 있어요.
힘들 수가 있어요.
그러면 좀 추가 질문인데요.
그러면 이제 그 화나 어떤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 공격성이나 이런 건 이제 다른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게 아니라
이제 그 사람의 생각은
이제 정확히 보는 걸로 설명이 되었는데
그런데 이게 우리가 진화적으로 화나 불안 자체가
사실 그 어떤 신호적인 기능이 있어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 않을까요.
그렇죠.
예를 들어서 뭐 지혜롭게 보면 화가 필요 없죠.
근데 이제 지혜롭게 못 보기 때문에
세상하고 충돌하는 거예요.
충돌하면서 어쨌든 내 존재가 볼 때는
싫다 할 때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요.
있으니까 그 화를 이제 잘 살려서
뭔가 또 작업을 하고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바꾸고 이러면 점점 나은 뭐가 되겠죠.
근데 이제 화를 동떨어져서
뭐 이건 꼭 필수하다 필수적이다
이런 건 좀 난 곤란하다.
네 알겠습니다.
네 번째 질문인데요.
이제 업의 실상을 보통 사람들이 알기 어려워서
이제 이거 생각하다가 믿을 수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이제 좀 납득이 돼요.
그런 게 사실은 괜히 생각하다가
진짜 이상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근데 그랬을 때 우리가 업의 가보를 우리가 믿는다.
업의 실상에 대해서 믿는다 이렇게 할 때
왜 그런 어떤 불교에서도 뭐 부사님 이제 잘 행동하고
잘 하면 급락 갑니다 죽어서
뭐 이렇게 다음 생에 좋은 나오는 데 태어난다
이렇게 이제 얘기를 하잖아요.
그리고 이제 이것도 이제 믿음의 영역인데
심지어 다른 종교에서도 죽으면 천당에 태어난다.
천당인가요? 하늘에서 보답을 받는다.
뭐 이런 얘기들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랬을 때 이 업의 실상을 믿음으로 접근한다는
이런 의미가 이런 것들이랑 좀 비슷한 내용인지
똑같은 믿음인지 좀 궁금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사실 불교에서 믿음이라는 걸 되게 조심해서 봐야 돼요.
이제 믿는다는 걸 모른다는 거예요. 사실은.
아는 사람이 못 믿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모를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거예요.
하나는 부인하거나 하나는 내가 모르지만은
들어보니까 좀 타당하다.
그쪽으로 노력하고 나도 알아봐야 되겠다 하는 게 믿음이에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제 수행자가 갖춰야 될
다섯 가지 어떤 기능을 이야기를 해요. 시스템을 이야기해요.
그 중에 그게 다섯 가지가 뭐냐면 믿음, 정진, 마음 챙김,
그 다음에 삽매, 지혜 이래 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믿음과 지혜가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고 해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면 무제한 상태에서 끝나는 거예요.
그보다는 이제 믿음을 가지고 출발해서 그걸 자기가 체험하고
체험까지는 아니지만 공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이게 되어야지 믿음만.
그러니까 내가 보면 다른 어떤 신을 믿는 종교의 믿음은
신을 아무리 노력해도 확인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그냥 믿어야 되는 거예요.
하지만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믿음을 바탕으로 자꾸자꾸 노력하게 되면
그에 근접하는 지혜를 얻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면에서 볼 때도 업은 그냥 믿으면 조금 곤란해요.
그러니까 생각할 수 없는 경에 업의 과보는
그래서 업이 어떤 식으로 일어난다는 거는
그거는 진짜 여러 가지 관계 속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부처가 아니고는 힘들다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고
그래서 그 부처님의 사자호의 긴경이라고 있어요.
마찌마니까요.
거기 보면 열의 심력이라 해서 열에게는 열 가지 힘이 있다.
그래서 거기 보면 그 열 가지 중의 하나가 과거, 미래, 현재.
불교에서는 꼭 과거, 현재, 미래 아니에요.
과거, 미래, 현재예요.
이 순수가 부처님 말씀에 계속 나와요.
과거, 미래, 현재의 업의 과보는
업의 과보를 조건과 원인에 대해서 다 안다는 거예요.
그것이 과보가 어떤 조건이 있을 때 일어나고
뭘 원인으로 일어난다 이런 걸 다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찌 보면 그걸 상세히 하는 것은 굉장한 수준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꼭 그렇게 부처님 정도는 아니라도 수행을 하게 되면
이런 업으로 이게 태어난다, 연기 수행을 하면 그걸 또 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말씀도 이를 보면 무조건 믿으라는 건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업분석의 짧은 경이라고 있어요.
거기 보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14가지 경을 이야기해요.
오래 살고, 빨리 죽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하는
그것이 어떻게 했을 때 그런 게 온다.
질투심이 많으면 사람이 체력이 약해져요.
그러니까 누구를 자꾸 질투하잖아요.
그러면 다 언젠가 업으로 태어나면 자기 주위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거예요.
같이 칭찬해주고 이러면 체력이 생겨요.
하여튼 우리가 좀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걸 쭉 말씀하시고
또 우리가 수행하면 그런 것들도 이해하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믿는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다른 종교에서는 확인이 곤란해요. 사실은.
확인이 곤란하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불교는 그것이 이해가 좀 되고
또 어느 정도 수행을 하면 또 확인도 돼요.
그렇지만 정말로 어려운 건 또 어려워요.
그러니까 그건 좀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사실은 모른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볼 때 타당해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겠네요.
그러니까 재미있는 게 앙구타라 니카야의 시아경이라고 있어요.
그 당시에 대장군이에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에요.
그분이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해요.
보시를 했을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결과가 있나?
하니까 부처님께서 쭉 일곱 가지 이야기를 해요.
아란들이 먼저 생각해주고 또 법을 서라고 쭉 하면서
명성이 따르고 쭉 하면서 맨 마지막으로 보시를 하면
선처, 천상에 태어난다. 선체에 태어난다. 하니까
시아 장군이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까지는 내가 다 알겠다.
그렇지만 이건 내가 모르니까 믿음으로 믿겠다.
그러니까 믿음은 어떤 부처님은 정말 거짓말 할 뿐이 아니니까 하는 그런 점이 있어요.
그렇지만 시아 장군이 또 노력하면 수행을 했었다고 할 수도 있겠죠.
네, 알겠습니다.
다섯 번째 질문인데요.
이것도 약간 전문적인 게 될 수 있지만 사실 내용은 다 궁금할 것 같은데요.
이 정신건강에서 갈망이라고 용어를 표현하는데
크래빙이라는 게 있어서 중독 현상을 설명할 때
그 막 원하는 마음을 말하는 용어인데요.
그렇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탐욕이라고 이렇게 딱 말해서
어떤 욕심, 원하는 마음, 그래서 그걸로 인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그 원인을 제시하는데 사실 심리학에서는 크래빙 말고도
심리학적 개념으로 세분화하잖아요.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떤 임상현상이 있을 때
그거에 맞는 어떤 거를 정확하게 얘기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랬을 때 불교의 정신치료에서 만약에 이걸 탐욕이다 이렇게 하면
이게 좀 너무 포괄적이지 않을까.
정신건강을 설명하고 치료할 때는 좀 세분화된 개념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그렇죠. 심리학에서 정신현상을 설명하는 건 좀 도움이 되지만
어째 보면 내가 불교 수행을 오래 해봤잖아요.
불교 수행은 다 심플한 거예요.
그냥 호흡에만 딱 집중하는 거예요.
이거 하다가 다 알게 돼요.
그러니까 어째 보면 우리가 실천을 잘할 수 있는 건 좀 심플한 거예요.
우리가 이런 말이 있어요.
사람이 지혜로워지고 뭔가 지혜가 깊어지면 심플&클리어가 된다고 해요.
우리가 복잡하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아요.
설명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고.
그래서 불교는 의외로 또 강점이 있어요.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언제나 탐진치로 딱 보는 거예요.
치, 정확하게 보나 안 보나.
정확하게 보려고 계속 노력해야 돼요.
그럴 때는 모른다는 걸 바탕으로 정확하게 보려고 노력해야 되고
정확하게 보지 못한 상태에서 내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요.
일어나지 않을 때 화가 나요.
그러면 일어나지 않을 때 사실은 내가 잘못 보고 있구나 하고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돼요.
근데 사람들은 그래 안 해요. 화를 내요.
그리고 새로운 또 무지를 해요.
그래서 내가 볼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쉬운
심리학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심면상을 설명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좀 더 낫기 위해서 노력하는 시스템 아니에요.
그럴 때는 이런 단순한 시스템도 굉장히 도움이 돼요.
근데 내 나름대로 볼 때는 불교에서 탐욕이라는 게 탐욕의 만부수라는 게 있어요.
만부수가 보면 탐욕, 사견, 자만이에요.
이것을 나는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탐욕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나는 봐요.
첫 번째 탐욕은 전반적인 탐욕이라고 보면 돼요.
세상에 맞지 않게 내가 뭘 원하는 노력에서 있을 수 있는 걸 하는 건 탐욕이 아니에요. 절대로.
내가 서울대학 가고 싶다. 열심히 노력해서 서울대학 가는 건 탐욕이 아니고 좋은 의도, 의지예요.
그렇지 않고 현실에 맞지 않은 걸 바라는 걸 탐욕이라는데
첫 번째 말하는 탐욕은 전반적인 탐욕을 생각하시면 돼요.
사견은 뭐냐면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견해를 우리는 사견, 견해라 그래요.
나에 대해서 내가 있다, 내 것이다, 무하다 이런 것도 다 견해 일종이에요.
바른 견해냐, 잘못된 견해냐인데 사견이란 건 뭐냐면 세상을 보는 눈, 설명하는 방식, 눈인데
정확히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멈추면 돼요. 자꾸 보려고 하면 되는데
이렇다 하는 게 사견이에요. 그것도 탐욕의 범죄가 될 수 있는 게 큰 카테고리에요.
그 다음에 자만이란 건 뭐냐면 내가 남보다 낫다는 거예요.
그런데 불교에서는 재미있는 게 자만할 때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도 자만이에요.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하다도 자만이에요.
내가 저 사람하고 같다도 자만이에요. 같은 건 없어요.
이걸 왜 자만으로 넣냐면 이 뿌리에는 내가 낳고 싶은 게 있는 거예요.
낳고 싶은데 못한 거예요. 낳고 싶은데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근본은 내가 낳고 싶은 뭐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도 하나의 정확하게 보면 그냥 사람은 다 다르고
또 인과의 법상 지금 이렇고 앞으로는 뭐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 비교가 막 일어나는 거예요. 그것도 욕심 현상이에요.
그래서 이런 불교를 좀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걸
충분히 불교도 나는 가지고 있고 실천하기 쉽고 우리의 어떤 행동 강령이 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해요.
저도 완전 동의하는데요.
만약에 우리가 그 정신인식과정이랑 마음보수를 잘 이해한다면
사실은 이런 심리학이나 의학에서는 개념만 말했지 사실 그 본질은 말을 안 한 거잖아요.
그래서 사실 그런 게 있으면 훨씬 더 단순하면서도 단순한 건 단순한데
클리어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죠. 실천이 가능하죠. 예를 들면 마음보수가 52거든요.
유익한 마음보수, 해로운 마음보수 그걸 매일 외우면서
나한테 지금 작동하나 안 하나하면 정신건강으로 갈 수 있죠.
그렇죠. 좋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그래서 우리가 근본적인 치료는 어리석음이 없어지는 건데
제가 생각할 때 그러면 아라한이 치료자가 돼야 될 것 같거든요.
그러면 너무 어려운 거 아닌가?
치료자는 아라한이 돼야 되고 환자도 그 과정에서 아라한이 돼야 되니까
치료가 너무 유원한 것 같은데 그럼 너무 어려운데
뭐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셨냐면
그러니까 굉장히 단순하거든요. 그런데 이게 또 폐의가 있어요.
제 주변에도 보니까 내담자 분들도 그런데 박사님 말씀하신 거 듣고 나서
선생님 요리하면 되는데 식구들이 요리 안 해서 자기가 야단쳤다는 거예요.
그러시면 안 된다고.
현재 집중이라고 하니까 또 너무 단순해져서
또 이게 말만 동동 뜨는 거예요.
그래서 주의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 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걸 남을 공격하는 무기로 수담을 잡으면 안 되죠.
공격이라고 생각하면 안 하시죠.
그렇죠. 좋은 거니까 안타깝죠.
그러니까 내가 거기서 실제로 사실은 내가 볼 때는
부처님 당시에는 무수한 아라한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부처님이 불교정신치료의 창시자예요.
그리고 아라한들은 학팔 수료환 치료자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그 당시에 다 중생들을 치료한 거예요. 아라한들이.
그래서 아라한까지 가는 길을 제시하고
그 치료받은 사람이 아라한까지 갔고 이랬을 거예요.
그렇지만 오늘 나는 그렇지는 않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책에서 현재 집중을 이야기한 것은 뭐냐면
탐진치가 삼독이고 우리한테 좋지 않은데
그럼 이게 좀 어떻게 멈출 수 있나.
멈출 수 있는 길이 현재 집중하면 그 순간에는 그건 없잖아요.
멈출 수 있는 길이다 이거죠.
그리고 또 우리에게는 마음은 언제나 일어나기 때문에
유익한 마음,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본질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딱 현재 유익한 마음으로
현재 집중하면 유익한 마음이 일어나니까
이거를 제시를 한 거죠.
그렇지만 그런데 사실은 하루 종일 이걸 실천하고 있으면요.
지혜가 생겨요.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컵을 돌면서 여기에 딱 집중하잖아요.
그럼 여기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 수 있어요.
준비된 정도에 따라서 컵이 어떤 건지 손이 어떤 건지
이 컵은 손이 시킨 대로 하는 거예요.
이것도 컵하고 똑같은 놈이에요.
그런데 안에 생명만 있다는 거예요.
이것도 시킨 대로 하는 거예요.
정신이 시킨 대로.
그럼 정신은 자기 마음대로 하냐?
그건 아니에요.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로 하루 종일 24시간, 잠자는 시간은 좀 빼고
24시간을 집중한다면 그 사람의 준비된 정도에 따라서 지혜가 생길 수 있어요.
생길 수 있고 하루 종일 유익한 마음이 생겨서 그것도 다 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그래하기는 어렵잖아요.
그래서 내가 세운 불교 정신치료에서는
몸과 마음의 속성, 세상을 아는 지혜, 순간순간 지혜로서 사는 것
이런 것에 유익한 방법으로 현재 집중이 있는 거지
현재 집중만 따로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현재 집중은 다 있긴 있어요.
늘 들으시니까 이것도 꼭 들으시고
가족한테 치료자가 아니라 나의 현재 집중으로
내 마음이 좀 편안해지신 데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그럼 한 번 정말 현재 집중을 중요시한다면
하루에 현재 집중 시간을 타임워치 같은 거로 체크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이라는 건 아는 기능이 있어요.
현재 집중하다 보면 알 수 있어요.
이제까지 정신인식과정이나 업의 과보 이런 거 많이 들었지만
오늘 대학원 수준으로 올라온 것 같아요.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