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종지부 찍는 가장 완벽한 전투, 죽음을 불사른 이순신의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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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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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포입니다 자타공인
우리 한국서 최고의 성웅 이순신
임진하 당시 이순신 장을 쌓 해전도
중엔 전설처럼 전해지는 전투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아마 가장 유명한
전투가 한산도 대첩과 명량 대첩이
있죠 그의 못지 않게 유명하고 의의가
상당한 전투가 있으니 바로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싸움이었던 노량
회전입니다 여러분은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신 최후의 전투 노량 해전에
대해 얼만큼
아시나요 1592년 일어난 임진
회라는 중 의 휴전 협정을 한다고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었다가
1997년 정유재란이라고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진 해라는
재개되었습니다 전쟁 제개 직전 이순
씨는 백기 중군 상태였던지라 일본
수군은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 회전에서 완전히 전멸시키고
이후 일본 육군은 거칠 것 없이
북상에 국토를 유리했습니다 그간
이순신이 지켜냈던 전라도 방어선이
뚫려 버리고 만 거죠 하지만 3도
수근 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명량
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다시 전라도
방어선을 회복해 냈고 고 다시 보급이
차단된 일본 육군은 더 이상 북진하게
못한 채 한반도 남부 지방으로 전부
철수하여 곳곳에 외성을 쌓고 전보하여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이 시작되는데 그 중 하나가
울산에서 가투 기호 마사가 농성한
울산성 전투이고 다른 한 전투가
고니시 유키 나가가 농성한 예교
전투였습니다 울산성 전투에선 조명
연합군이 패배하여 울산성 함락에
실패합니다 조명 연합 본부는 울산성
함락의 실패 여인으로 수군의 부자를
꼽았고 예교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의
수분까지 합세한 육군과 수군의 합동
작전을 기획했죠 육군에서는 명나라
제독 유정과 조성군 도서 권유이
지휘하며 예교에 대한 공사를 먼저
진행했습니다 1998년 음력 9월
20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조선수군
이순신장군의 조명 연합 수근이 순천
외성 앞바다에 도착하여 화포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이순신의 난중 얘기에
이순신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침에
진군하여 화를 쏘기도 하고 화포를
놓기도 하며 종일 서로 맞붙어
싸웠으나 조수가 외우 얕아서 접근하여
싸울 수가 없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전쟁은
늘어지다가 9월 30일 명나라구나
백여 척이 증파 10월부터 격렬한
난전이 벌어졌고 이순 씨는 상륙
작전도 감행해 보았지만 피해만 늘릴
뿐이었죠 육군 쪽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더
과감해진 일본군이 성을 나와 유정과
권율의 육군을 기습할 정도였습니다
계속된 전쟁이 이어지며 명나라 군남
2척이 격침되고 일본군 진영에선
고니시 유키나가의 막사가 포에 날아가
버리기도 하였죠 육군 쪽의 유정
제독은 점점 소극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육군에 그렇다 할 지원이 없으니
이순신도 답답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유정은 도연 잠시 전혀를
가다듬는다면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습니다 방처 버린 이순신과 진리는
그대도 벨 수 없이 철수하여 만 했죠
이렇게 고니시 유키 나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이순 신에게는
순천 예교 3에 틀어박힌 고니시 유키
나가를 반드시 물리치는 것이 그의
[음악]
목표였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합니다 전쟁 초기에
어땠을지 몰라도 후반으로 갈수록 록
전쟁의 양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고집에 의한 전쟁이었습니다
일본 내부적으로 반전 여론이 쌓이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 내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덴노를
설득해 조선에 있는 일본군 전군
철수를 지시했습니다 남해 한일 때에
분포했던 일본군은 차례차례 본국으로
도망쳤지 일본군은 명나라 군에게
안전한 퇴로 확보를 부탁하며 뇌물을
로비하고 있었으며 조선 정부도
후퇴하는 적군들을 그냥 보내 주라는
의견이 대세였죠 그러나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적들을 단순히 보내
줘 버리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
르는 거고 확실한 전쟁의 종지부를
찍어야 앞으로도 일본군이 조선을
손쉽게 여기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죠
이순 씨는 다른 부대는 몰라도 통제형
가까이 순천에 있던 일본군의 핵심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 만큼은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이순신은
11월 11일 고니 씨가 순천에서
나와 철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합니다
고니 씨의 부대를 그냥 보내라는 조선
조중의 말을 무시하고 이순 씨는
마지막 출정을 떠났습니다 조명 연합
수고는 순천과 광양 사이의 작은 섬
장도 부근 좁은 해협에 진을 치고
고니시 유 나가의 퇴로를 찾아내
버렸습니다 고니 씨는 명나라 수근
제독 진리에의 뇌물을 바치며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에 사천의 심하지
유시로 고성의 타치바나 문의시에 남의
소 요시토 씨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들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열어
주기 위해 일제히 순천으로 향했죠
영화 노량에서 백윤식 배우님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사천에서 출발하는
시마지 유시 1호입니다 시마지 유시
1호가 사천성에 틀어박혀 있을 때
역시 조명연합군 군이 공격한 적이
있는데 그때 시마지 유시 이로는 1만
명이 안 되는 병력으로 4만에 당하는
조명 연합군을 막은 전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바다에서 일본군이 모여들고
있으니 이제 조명 연합군이 포위될
위험에 처해 버렸습니다 이제 조명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테로를
무작정 차단만 하고 있을 순 없었고
지원 오는 일본군과 싸워야만 했죠
이순 씨는 테로를 차단하고 있던
장도에서 나와 노량에 매복하고 있다가
지원 노는 일본군을 기습할
작전이었습니다 조선군은 판옥선 60척
명나라 전남 200에서 300척
지원온 일본 외산의 규모도 300척
ES 500척 사이였습니다 11월
19일 새벽 순천으로 구원하러 온
일본 외성이 새벽 안개를 거치고
시야에 포착되자 매복해 있던 조명
연합 수구는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어둑한 새벽 하늘에 빨간
화약 화포의 괴성을 울리며 외선
내리꽂고 폭발로 인한 연기가 바다와
하늘에 가득 채웠죠 이순신의 기습적
전은 대성공이었습니다 규모 자체는
일본의 외성이 더 많았지만 노량
해협이 좁 았기에 제대로 양적인
물량의 힘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했죠 화포 기술만큼은 조선보다
명나라가 앞섰기에 조명 연합 수군의
활력은 실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일본
외선 은 어떻게든 퇴로를 비집고
도망쳤습니다 도망치는 일본군은 남의
섬에 관음 폭까지 내려가는데 이순
씨는 그곳에서도 매복시켜 두었죠
예상한 태로 있던만큼 이순 씨는 곧장
후퇴하는 외산을 추격했습니다 관음
포에서 2차전이 시작했고 일본 군에겐
죽음의 싸움이었고 싸움은 아침까지
지속됐습니다 아침 하늘은 밝았지만
여전히 푸른 바다는 검은 그름과 붉은
화염으로 얼룩졌습니다 이순신은
최전선에서 배를 지휘했습니다 해협이
좁은만큼 최전선의 배들은 외병의 조총
사정거리에 있었습니다 이때 날아오는
조총에 타나이 이순신을 관통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출혈을 받지 못하고
전사했고 죽기 전 이순신은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어 현장의 병사들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지휘관의 전사 소식을
몰랐다고 하죠 이순신이 전사하자
이순신의 조카였던 이완이 대신 지휘하
있습니다 새벽부터 아침까지 조명현
학군의 화포에 격침된 적선의 수는
무려 200 척으로 절반 가까이가
수장된 거죠 반면 조명현 학군 피해는
전사자 수가 1천명이 되지 않았고
피해 전함 규모도 다섯 척
이내였던이 한창이던 사이 고니시는
순천에서 나와 무사히 살아
돌아갔습니다 심하지 요시로 역시
살아서 도주하는데 성공하지만 함대
절반 의상을 잃고 정말 목숨만
겨우겨우 부지 한채 도망갈 수 있었죠
7년의 전쟁은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끝이 났죠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의 피해는 일본군에 비하면 극히
적었지만 그럼에도 이전에 이순신
해전에 비하면 피해가 꽤 큰
편이었습니다 이순신 외에도 이영남
이현령 박덕용 등 꽤 많은 여러
지휘관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만큼
이순신의 노량 해전은 이순신이 굉장히
공격적으로 임했던 전투임무 알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이순신 장군은
노량 해전에서 강경하게 밀어
붙였을까요 일본 측에선 이순신장군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는 일본군을
너무 과하게 잡았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이를 두고 이순신장군은 출정
전부터 이미 죽을 준비를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장군이 전쟁
중간에 갑옷을 벗고 싸웠다고 하는데
이게 진짜인지 아니면 후대의
이순신장군의 죽음을
극화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순신장군은 과감할 지언정
무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아군의 사기가 수령일
걸 알고 죽으면서까지 자기 죽음을
감추려고 했던 분이 일부러 총을 막기
위해 갑옷을 벗고 싸웠다 이순신
[박수]
장군스팀세차
굳이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하지 않거나
추격을 해도 적당히 하다가 멈췄습니다
하지만 노량 해전은 도주하는 적을 단
한 명이라도 단 한 척이라도 소탕하기
위한
선전이었다 수 있을 때까지는 적군이
사전 거리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싸워야 했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전쟁일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어찌됐든 노량 해전은 임진
대란 7년을 종지부 짖는 가장 완벽한
전투였습니다이는 100% 이순신의
판단이었던 겁니다 노량 앞바다에서
노량 해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드리는 영상을 보고 싶으시다면
코리아 베가본드 남의 편을 시청해
주세요 끝으로 이순신의 죽음에 관해
그의 절친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묘사한
대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데 슬퍼했다 그의 연구
행렬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이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수많은 백성이 연구를
붙들고 울어 길이 막히고 행렬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럼
역사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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