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의 전쟁 영웅, 강감찬의 인생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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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수 도포기
이영입니다네 아홉 번째 주제는요
오랜만에 돌아온 대화 세각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강감찬의 귀주대첩 있니다 고려 초
10세기에서 11세기에 세 차례에
걸쳐서 거란족이 세운 국가 요나라의
침입을 받았습니다이 중에 오늘의
주제인 귀주 대첩은 세 차례 전쟁
중에서 마지막 3차에 해당하는 전투로
데미를 장식한 전투적 어이 귀주
대첩은 어 3차 전쟁을 끝낸 전투인
동시에이 긴하인 세차를 에 걸친
거란과의 모든 전쟁을 다 끝내버린
승리였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데요
본격적인 귀주대첩 이야기하기 전에
강감찬의 대해서 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강감찬은 아버지가 개국
공신이었다 합니다 개국공신 집안에
그리고이 제주도 남달랐네요 그런데
이상하게 36 살이라는 늦은 나이의
문과의 장원 급제를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이 설울 사시는 분들은 많이
아실 것 같은데 강금이 태어난 곳이
어디죠 서울의 2호선 지하철 노선도가
있습니다 선인데요 이쪽에 이제
낙성대는 역에 있습니다 설대 입구역
가는 그 근처에 있는데 낙성대가
대학교가 아니라요네 강감찬이 태어난
곳입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어
정확한 명칭은 강감찬 장군은 아니죠
강감찬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해요 그래서 그 지역을
낙성대 아고 불렀다고
합니다 자 강감찬이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 전면으로 나서는 거는 거란군의
2차 침입 되었습니다 이때 그
거란족의 황제가 직접 내려 려운
전투가 2차 전투였던 제가 또 뭐
거란족 황제랑 직접 방송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제 개인적으로 친합니다
그 거란족 황제랑 아무튼 그 거란족
황제가 2차 때 수도 개경 아지
진격해 오는데 그때 고려 조정에
대부분의 신화들은 다 항복하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유일하게
강감찬만이 현종이 잠깐 피신을가
있으면은 어 충분히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라고 현종을 설득해서
현종을 나주까지 보내라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강감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이후 강감찬의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2차 전쟁 때 현종이
개경을 나와서 나주로 피신 간 그
이후로 강감찬이 2차 전쟁 때 뭘
했는지는 어 역사서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래서 아마 뭐 드라마
만드시는 분들이 굉장히 이것 때문에
곤욕을 치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런데
뭐 아무것도 안 한 거는 아닌 거
같아요 왜냐하면은 2차 전쟁이
끝나자마자 현종은 강감찬을 전폭적으로
밀어줍니다 이로 말미암아 2차 때
뭔가를 했기 때문에 현종이 강감찬을
2차 전쟁 이후에 밀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이 들고요 2차 때 어떻게
해서 전쟁을 끝내냐 그은 는 현종이
직접 거란족이 세운 국가요 나라에
직접 찾아 가겠다라고 약속을 했지만
약속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언제고
거란족의 요나라가 다시 고려를
쳐들어올 거라는 거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를
했어야만 됐죠 그래서 이제 현존 같은
경우는 강감찬 테 당시 수도 개경
지금의 북한 개성이 개경 수도에 크게
성벽을 두루는 공사를 진행을
했습니다이 개경이 수도 그 주변을
둘렀던 성벽을 이제 나성이 하는데 그
나성 공사 의 총책임자를 강감찬 테
맡겼습니다 그리고 어 강감찬을 동북면
행형 병마사 동북면이 어디냐면 지금의
함경도 지역입니다 예 함경도에 두만강
있죠 두만강 위쪽으로는 여진족
있습니다 강감찬을 동부면 행위 병마사
임명을 해서 함경도에 출몰하는 여진
족들을 토벌하기 하는 일을 맡겼고
우리가 근데 여진족 하면은 그냥
주로만 쳐들어올 거 같은데 두만강
쪽이 이젠 그 바다를 끼고 있잖아요
그래서 이제 여진족 해적들도 되게
많았습니다 단 강감찬이 그 여진족
두만강이 때에 퍼져 있는 여진족
적들을 소통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현종이 제 2의 고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석영네 지금의
평양이 북한의 속 그 석영의
총책임자인 석경 유수로 임명을 했고
일종에 부총리에 아지 임명을 하면서
강감찬을 통해서 어 전쟁에 데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8년 12월 항상 거란족의 요나라
군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조선
시대까지 가서 북방의 민족들이
우리나라로 침공을 할 때 항상 12월
아니면 1월에 내려오거나 그 이유로
아시나 PD 님 맞춰보시기 방이 어
아 맞습니다 보통은 두만강을 이용하진
않아요 왜냐면은 국가들의 수도는
대부분 이쪽 서쪽에 깨어 있기 때문에
두만강을 통해서 내려오지 않고 암록
강을 통해서 내려오게 되는데 12월이
되면 압록강이 없니다 그래서 얼기
때문에 내려오고 반드시 그 암록 강이
녹기 전에 돌아가야만 해요 그래서
118년 12월에 거란군 소배 아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합니다 이에 대해 현종은 강감찬을
원수로 강민첨 부원수 삼고 소배 의
거란군을 막게 하죠 거란군의 수가
10만 그리고 고려군의 군 병력은
20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고려나
조선 하면 항상이 이민족 침입을 받다
보니까 항상 우리 쪽이 군사 수가 좀
열쇠 거라는 어떤 그 선입견이 있는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3차 전쟁 때는 어
우리 고려군이 훨씬 더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령부가
있었는데 자여기 암록 강입니다
12월이 되니까 강이 언 거예요 그
여기가 지금의 평안도 안주라
곳입니다이 안주에 우리 고려군의
사령부를 설치를 했고요 자 거란군이
암록 강을 넘어왔습니다 자 넘어오면
가장 먼저 어 맞닥뜨리는 곳이
의주라면 곳입니다 고려시대 때는
의주를 뭐라고 불렀느냐 아마 드라마
좋아하시는 분들은 익숙하실 텐데
여기가 흥화진이었습니다 흥화진 2차
전쟁 때 어 의주 흥화진 공격했다가
흥화진 지키고 있던 양규 장군이
흥화진 지켜내는데 성공했죠 그래서
3차 전쟁 때는 흥화진 쪽으로 오게
되지만 흥화진 쪽으로 올 수밖에
없어요 일단은 내려오려면 그런데
흥화진 바로 가지 않고요 흥화진 좀
옆에 옆에 이제 그 교천이라고 암록
강의 지류가 있습니다 한이 부분
되겠죠이 삼교 3이라는 지류를 통해서
내려오게 되는데요 이때 강감찬과
강민첨이 교천이라는 지루를 통해서
내려오는 거란군을 방비하기 위해서
이렇게 막았다고 합니다 기병 1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켜 후 동아줄로 속아 죽을게요
성 동쪽에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
적이 다가오자 막아 놓았던 물주기를
터트리고 복병을 돌격 켜 크게
패배시켰다 그러니까 수공을 했다는
뜻인데 자 이거를 어디까지 믿어야
될까가 좀 의심스럽습니다 왜냐면은
아까 PD 님께서 얘기하셨지만
12월입니다 강이 어떻다고 했죠
얼었는데 언 물을 어떻게 소가죽으로
물을 이렇게 막아 놨다가
터뜨리겠다 하더라도 수공은 어 이게
이게 수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작전과
어려운 임무예요 수공을 하려면은
정확하게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적군이이 지역을 오겠구나 걸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어야 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 옛날에 고구려 그
살수 대첩 때 수공을 했다라는 잘못된
그 이미지가 퍼져서 잖아요 사수
대첩에서 수공을 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이 기록을 어떻게 믿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것도 다
부정해 버려야 되는 거 아니겠느냐라고
하지만 살수 대첩 같은 경우에는요
역사 기록서 있도 수공을 했다라는
기록 자체가 아예 없어요 그 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퍼졌다고 하지만이
교천 전투 만큼은 수공을 했다라고
기록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를
어디까지 믿어야 될지는 아직까지도 내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자 그런데
거란군의 전략은 단순했습니다 고려군의
방어선을 하나하나 묻 너 뜨리고
내려가는게 아니라 다 무시하고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 아지 집공하는
거였어요이 되게 위험한 전술이 방어사
하나하나 아무들로 그냥 바로 간다는게
후방이 위험해지는 하지만 위험한만큼
하이리스크 카이 리턴이 아고 성공만
하면은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
전략 중에 하나입니다 발레가 거란군
테 이렇게 멸망을 했죠 그래서 바레
때도 한번 먹혔고 때문에 이번에도 쭉
내려옵니다 소이 쭉 내려와요 그래서
당황해 이제 부원 수였던 강민 첨이
쫓아가 가지고요 안주 밑에 있던
춘천이 아고 했습니다 저 도 순천
아닙니다 순천에 내부산화 공격을
했는데 공격을 받고도 계속 소배압은
진군합니다 진군을 하자 이제이 개경
위에 뭐가 있냐면 석영이 있죠 제
2에 도시 석영 근교에 마탄이라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조언이라는 사람이 군대를 준비하고
있다가이 지나쳐 오는 거란군을
공격해서 무려 1만여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1만 명이나 이런애도
소비하면 계속 진군을 해서 결국은
개경 아지 도착을 해요 자 그런데
계속 피해를 입고도 계속 내려오니까
강감찬이 깜짝 놀라가지고 강금 당시이
지역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김종현
병마 판관 김종현에게 일만의 기병대를
주고 개경으로 보냅니다 가서 네가
개경을 구원을 하라 자 그런데 이미
어 소배 합이 이끄는 거란군은 개경
근처 있던 신계군이라는 곳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개경과 신계군 거리가
40km 정도였다고 합니다 40km
면요 서울 서부에서 터 인천까지
거리거든요 굉장히 가깝죠 자 절제
절명의 위기에서 현종은 어 이번에는
두 번의 도망은 없다 라면서 개경을
철통같이 사수를 했고 청야 전술이라고
개경 바깥 에 있는 모든 농지들이
전부 다 불태워 버립니다 자 거란군의
전략은 수도 직공이 방어선은 하나도
안 무너뜨리고 그러면은 문제가
뭐냐면은 보급이 문제입니다 안정적인
보급을 할 수가 없어요 대신 이런
전략을 쓸 때 보급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현지 조달 다른 말로 약탈을
해야 돼요 그런데 약탈 하러 왔는데
현지 조달을 해야 되는데 어 현중에
다 불태워 버리는 청여 전수를 썼기
때문에 보급을 충당하지 못하는 겁니다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소배압 보급
문제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그래서 이제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소은 백을 해요 백을
하니까 이제 강감찬이 돌아오는이
거란군을 공격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이 안주 근처에 평안남도 개천시
그리고 평안북도 영변군 어 고려군이
기습을 해 가지고 거군 500명을
넘게 사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일단 돌아가야 되니까 도망가야 되니까
공격을 받으면서도 쭉 갑니다 쭉 가요
어디까지 가느냐이 평양북도 구성 시가
있습니다 지금의 평부터 구성인데요
여기가 어디냐 바로 오늘의 격전지인
귀주 있니다 여기서 강감찬이 군대를
를 대비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거란군을 무찌르기 위해서 자 그런데이
귀주 대첩은 성에서 싸우는 수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수성전 우리가
공격을 받을 때 싸우는 거고 지금은
우리가 공격을 받는게 아니라 후퇴하는
거란군을 공격하는 거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귀주 성에 나와서 강감찬은
귀주성 앞에 있는 그 들판에 야전으로
고려군을 배치하고 거란군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자 그래서 이제 귀주의
지형을 보면은 이렇게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고요 강을 사이로 여기에
이제 고려군이 대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라 군 같은 경우는 어디에
배치를 하냐면은 여기가 이제 구릉
지대였다 거란군이 이제이 지역에
주둔을 합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배치를 하는게 정말 방어에는 최적합
된 지형이 왜냐면 앞에 강이 방어
역할을 해주고 그리고 고지대 있기
때문에 고려군이 강을 넘어서 올라올
거면은 고지대 있는 거란군이 화살
살에만 퍼부으면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어 이제 소배압은
진영을 바꿔서 배수의 진을 치겠다
그래서 강을 건너서 일로 옮겨요
멍청한 짓을 한 거죠 제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례 중에서 배수의진 성공한
케이스는 배수의진 원작자는 한 신밖에
없습니다 배수의진 성공한 케이스를 본
적이 없어요 왜 이렇게 허술한 짓을
했을까 제 생각에는 배수 회진도 배수
회진이 있지만 지금 강의 높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 되거든요 근데 여기서
좋은 벌을 해 버리면은 전쟁이 만약에
빨리 안 끝나면은 강이 녹습니다 빨리
가야 되는데 그래서 빨리 고려군을
무찌르고 가야 되기 때문에 존버하는
작전을 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이 들판에서 귀주 들판에서
고려군과 거군이 야전으로 싸우게
되는데요 처음에는 막상 막카 있다고
해요 자 그런데 이때 얘기치 못했던
군대가 투입이 됩니다 바로 아까 그
소배압 이끄는 거란군이 개경으로
직경을 할 때 강감찬이 쫓으라고 보낸
김종현의 일만의 기병대가 있었다고
했죠 그런데 먼저 소배 합의 거란군이
개경에 도착해 있었고 얘네가 후퇴를
해버린 겁니다 그리고 뒤늦게 김종현이
개강에 도착했어요 그러니까 현종이 아
이미 개강은 사태가 다 달락 됐다 넌
다시 돌아가서 강감찬을 도와라 이래서
다시 올라오고 있는 도중에 싸우자
이때 김종현의 1일만 기병대가 측면
을 공격하면서 얘네가 아수라장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눈을 뜰
수 없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돌풍이 불었다고 그 돌풍이 우리
고려군 입장에서는 순풍 거란군
입장에서 역풍을 받아 가지고 게임 끝
귀주 들판에서 게임이 끝납니다 자
소배 아이 쳐돌 때 10만 대군을
데리고 왔다고 했습니다 자 그런데이
귀주 대첩에서 살아돌아간 수는 수천
명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사 저로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었는데요 귀주대첩 이후 시체가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명 뿐이었으니 거한 군사의 패전이
이때와 같이 심한 적은 없었다이
정도의 큰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새 차례에 걸쳤던 기나긴
고려거란 전쟁이 끝이나게 되고요 자
그런데이 귀 3차 귀주대첩을 포함해서
3차 전쟁은 그렇게 큰 위기가 없었죠
1차나 2차 입에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항상 우리가 외적에 침입을
받을 때 우리나라 군사 수가
부족했는데 3차 고려 거란 전쟁
때만해도 우리 고려군이 더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사실 2차
전쟁이 끝나고 3차 전쟁 사이에 되게
작은 소규모 국지전이 어이
국경지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안전 불감증이 걸린 국가들
같은 경우는 이런 국제전을 무시하고는
하는데 현종 같은 경우는 절대이
국제전을 무시하지 않았고 그래서
미리미리 방비를 할 수가 있었고 그런
철저한 준비 덕에 3차 전쟁은 큰
무리 없이 우리 고려가 이길 수
있었던 거 큰 무리없이이긴 수준이
아니라 대규모 압승을 거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이 작은 국지전이
냉랭한 국제정세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다가 된통 당한 사례가
동서고금에 얼마나 많습니까이 기주
대첩을 포함한이 3차 고려 거한
전쟁은이 국방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는 자세와 철저한 외교
분석 토대 위에 거둔 승리였다 이렇게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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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