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대 문명은 왜 세계 4대 문명이라고 할까? 세계 4대 문명 총정리 한편으로 몰아보기 통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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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도포입니다 여러분
세계 4대 문명 아시죠 오늘 날
인류의 역사를 시작시킨네 개의 태초의
문명을 읽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이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것만으로 문명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명이 되기 위한 조건들이 있죠 우선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청동기 자체의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청동기 시대에 접어든 인류는 신분제를
형성했기 때문에 나름의 체제라는 것이
생겼다는 뜻이거든요 두 번째 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중앙집권의
국가까지 아니더라도 도시 국가 정도는
이루고 있어야 됩니다 도시 국가라
하면 각 도시의 성벽을 두르고 도시
내부적으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누어지고 또 지배층 사이에서도
왕이라는 존재와 귀족이라는 존재로
분화되어 시스템적으로 성벽내어 있는
도시가 굴러가는 형태를 말합니다 첫
번째 기준 청동기 시대와 두 번째
기준 도시 국가 형성을 충족시키는
문명이라 못 꽤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이 까다 데요 고유의 문자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문자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걸로는 안 되고 현재 확인이
가능한 고유의 고대 문자까지 가지고
있어야 문명이라고 인정해 주는 거죠
조건까지 아니지만 4대 문명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내 문명 모두 큰 강
근처에서 도시 국가가 형성되고
문명으로 발전되었다는 겁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강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황하 문명은
황하 이렇게 말이죠 왜 왜 큰 강
근처에서 문명이 만들어질까요 강
근처는 식수 확보가 용이하고 농토가
비옥해서 물론 이것도 맞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아요 그렇지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큰 강은 범람하기
마련입니다 식수 확보가 용이하고
농토가 비옥해서 강 근처에서 살긴
하지만 큰 강이 범람하면 여강 골치
아픈게 아니죠 그래서 큰 강 근처에서
살려면 반드시 관계 시설 공사와 치수
사업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이
사람 몇 명에서 뚝뚝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군다나 강의 규모가 크면
관계 시설 공사와 치수 사업에 더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즉
큰 강 근처의 도시 국가에서는 그
정도로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가 나타난다는 거죠 다시 말해
강 근처에 사람들이 몰리는 건 맞지만
강의 크기만큼 권력자의 권력 크기가
결정되는 법이고 이런 권력자들은
스스로의 권력의 신성을 부유하기 위해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고
자칭했다 적인 문명 소개를 해 드릴까
합니다대 문명이라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학술 용어는
아닙니다대 문명이란 개념은 20세기
초반 중국의 양치 차우와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 등에 의해 형성되어
주로 동양에서 그중에서도 동아시아에서
많이 쓰는 개념일뿐 서양에서는 굳이네
가지로 국한시키지 않고 문명의
요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니까 뭐
서양인들에게 포
Civilization이라고 말하시면
못 알아들을 가능성이 큽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문명의 요람은 더군다나 기준도
그렇게 빡세지 않습니다 자 이제 4대
문명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4,000년 기원전 3,500년
경까지 소급되는 인류사 최초의
문명입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중동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를
가리키며 큰 강 하나만 있어도 문명이
발달하는데 큰 강이 두 개씩이나
있으니 얼마나 문명이 발 하기 좋고
땅도 비하 있습니까 그래서 서양에서는
비옥한 초승달이 말합니다 지금은이
지역이 푸석하고 건조한 삼막 지대지
저 오랜 고대 시절에는 지금보다는
강수량이 풍부한 생명력 넘치는
곳이었습니다이 지역이 인류사 최초의
농사가 시작한 발원지이기도 하잖아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군 민족은
수메르인이 합니다 수메르인들은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에 쓰기 문자라고
알려진 글자들을 생겼습니다 쓰기
문자가 인류사 최초의 글자라고 하네요
그리고 지구라트 아고 하는 거대한
신전을 건설했습니다 진흙 벽돌로
재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신전을
쌓았다고 하는데 구약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이 지구라트 아고 해석하고
있답니다 유목을 하던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정착민들의 지구라트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을 테죠
절대자의 관력 크기는 유목민들다는
정착민들이 더 크니깐 더불어 구약
성서에는 바벨탑의 제로가 역청이
하는데 실제 지구라트의 재료가 역청이
합니다 지구라트 봐도 그 지구 트를
건설할 수 있는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시킬 수 있는 절대자의 권력이
컸다는 걸 쉽게 유치해 볼 수 있고요
수메르인들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 여러 도시별로이 도시 국가들을
형성했는데 그 가운데 우르크의 도시
국가가 가장 컸다고 합니다 도시 국가
우르크의 가장 유명한 왕이 바로
길가메시 그리고이 전설적인 길가메
시에 대한 신화가 길가메시 서사시
우르크 비롯해 수메르인들의 여러 도시
국가들이 서로 싸우고 경쟁하면서 전문
전사 집단이 형성되고 또 도시 국가들
내부적으로는 관료제가 정착했으며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이 나면 승자의
권력은 더 커지겠죠 고대에
가까워질수록 전쟁은 역시 인류 사회의
발전을 자극하는
[음악]
법이니깐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 수메르인들의 도시 국가들끼리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이 1대를
통일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수메르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중간중간에
일시적으로 수메르인이 통일한 적은
있지만 확실하게이 일대에 평정한 건
정작 수메르인이 아닌
아카드라이브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이
하나로 다 이어져 있잖아요이 거대한
대륙의 정 가운데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1대입니다 거기다가이
일때는 평원 지대인 이민족의 침입이
굉장히 잦은 동네예요 수메르인들이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남쪽에
있었다면 아카드 인들은 그보다는 북쪽
강의 중류 쪽에 있었어요
그렇게 사르곤 왕이 이끄는 아카드인
메소포타미아 중남부를 통일합니다
하지만 지형상 이민족이 침입이 쉽다는
조건은이 지역의 주인이 된
아카드인에게도 마찬가지일 거 아니에요
결국 아카드인의 문명도 구티족이라는
유 민족들에게 멸망당해 버리고이
시점이 약 기원전 2천년 경정도
됩니다 구티 족이 왔다간 이후로
수인들이 다시 걸기 하였고 특히
우르라우스
사망조회 수메르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지구라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지구라트가 이때 만들어진 우르
지구라트 있니다 그리고 우르남무
법전이라면 성문화한 법전이 있는데
이게 바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이
그런데 우르 제 3 왕자도 이민족의
침입을 여러 번 받고 내부적으로도
무너지면서 와해된 이후로 300년
정도 또다시 이신 나르다 시대라고
부르는 도시 국가들의 내전 분열
시대가 이어집니다
입니다이 분열 시대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다시 통일한 민족이 누구냐
아모르인생 아시나요 하지만 아모리
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한
국가 이름은 아주 익숙하실 겁니다
아모리인 turned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중류 바빌론라는 도시에서
흥기 아여 세력을 확장하고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했던 건데
그들이 세운 나라가 그들의 수도명 알
수 있듯이 바빌로니아 왕국입니다
훗날 다시 부활하는 신 바빌로니아
왕국과 구분하기 위해 고바빌로니아
왕국이라고 부릅니다 고바빌로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입은 구강이 그
유명한 한물 아비 구강이 한물 아비
구강이 제정한 법전이 바로 한물 아비
법전이 기원전 1750년 경에
만들어졌다는 한물 아의 법전은 앞서
우르 제 사망조회 우르남무 법전이
있어서 세계 최초의 성문법을 아니지만
우르남무 법전을 계승한 법전이었고
2미터가 넘는 검은 돌의 쐐기 문자로
새겼습니다 한물 법전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 중이고 법 원리가
받은만큼 돌려준다는 것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이 원칙이 여기서 유래한
거랍니다고 바빌로니아 왕국의 영토가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접하고 수도
바빌론은 세계의 수도라고 불릴만큼
확정되었습니다 한물 아비 왕은 정복지
다 한물 아비 법전을 세워 법질서를
일어나고 고대적인 중앙집권화를
이루어냅니다 하지만고 바빌로니아
왕국도 이민족의 침입이 싶다는이
고질적인 지형의 분리 을 극복하진
못했습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하류에는 수인들이 살았고 류에는
아카드인과 바벨로니아 왕고을 건설한
아무루 인들이 있었다면 조금 더 내륙
상류 쪽에는 아시리아가 있었습니다
그간 메소포타미아 문명인 통일
제국들은 아시리아 진출하지 못했지만고
바벨로니아 왕국은 영토가 워낙
넓어지다 보니 아시리아와 접했고
이번엔 아시리아에 끊임없이 침입을
받았습니다 또 메소포타미아 지방과이란
그 사이에 있는 자그로스 맥에서
넘어온 카시트 족들에게 워낙 침략을
많이 받으면서 고바빌로니아 왕국은
점점 약해졌고 기원전 1595년
오늘날 터키에 있던 히타이트의
결정적인 공격을 받아 고바빌로니아
왕국이 멸망합니다 고바빌로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또 지난한 분열 시대가
찾아옵니다고 바빌로니아 왕국을 끝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끝입니다
왜냐하면고 바빌로니아 왕국 멸망 후
분열 시대로 접어들면서 청동기 시대가
끝나고 철기 시대로 돌입하기 때문이죠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국가들이 장수하지
못한 건 결국 너무 많은 민족건대
var 때문에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는
거죠고 바빌로니아 왕국 멸망 후 분열
시대에도 굉장히 많은 민족들이
싸웠으며 유대인들도 이때 넘어와
이스라엘 왕국을 건립합니다 이후로
이란의 페르시아 유럽의 알렉산더
제국이 들어서지만 결국은 자꾸만
외세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제가 봤을
때 최종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통일한 건 이슬람교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 아카드 수메르 바빌로니아 뭐이
정도로 단순하게 도시화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집트
문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이집트 문명은
약 기원전 3100년 경우로
소급이란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큰 강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죠 큰 강은 범람하기 때문에
관계 시설 공사와 치수 사업이
필요하고이를 위해선 막대한 자본과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절대자가
필요하기에 강의 크기에 비례해서
절대자의 권력 크기도 결정된다고이
이집트의 나일강이 야 말할 것도 없고
나일강 1대의 절대자를 태양의 신
파라오 불렀죠 고대 이집트는 나일강을
두고 처음에는 상하 두 국가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이때를 이집트
선왕조 이집트 원왕조 등으로
부르는데요 신석기 시대부터 나일강의
상류와 하류에 각각 부족을 이루며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자연스레 사회가
발전해 갔습니다 상 이집트가 하
이집트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는데
특히 상 이집트의 문화를 나카다
문화라고 부르며 국가 조직체가 더 정
해지면서 복잡해졌고 다양한 문화
예술이
진보하였다 이아 문명과 지중의 작은
섬들 그리고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들과 교류하며 자기 발전을
이루어냅니다 히에로글리프 부르는
이집트의 상형 문자도 맘때쯤 상
이집트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상하 이집트를 기원전 3천년
경 지음에 상 이집트의 나르메르 왕이
통일을 하고 본인을 태양신의 비유하며
유의 절대 왕으로 군림하는 나르메르
왕이 바로 1대 파라오 있니다 이것이
이집트 문명의 시작이었고 수도는
아비도스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을 어느
정도 아시는 분은 어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건 나르메르 왕이 아니라
메네스 왕 아닌가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이 부분이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의 미스테리입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최초의 파라오가 메네스 왕이라고
한답니다 하지만 역사학적으로 과연
메네스 왕의 실존 인물인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팔레르모 석이라고
상하 이집트 시대인 선 왕조에서 터
고대 이집트 왕국 제 5왕조 아지
역대 파라오의 순서를이 고대 이집
이집트인들이 직접 기록한 비석이
있는데 팔레르모 석에는 메네스 왕의
이름이 등장하질 않고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대 파라오는 나르메르 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르메르의
팔레트라는이 석판에 나르메르 왕이
누군가를 정복한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석판의 안면과 뒷면에 나르메르 왕이
서로 다른 왕관을 쓰고 있어서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것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메네스 왕의 실체는 아직
모릅니다 나르메르 왕과 메네스 왕의
동일 인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무명은 지리적으로 대륙의
전 가운데에 있고 주변이 온통
평원이라면이 침입이 잦았다고
말씀드렸죠 훗날이 지방 문명과 왕조들
전부 이민족의 침입이 잦은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요 하지만
이집트는 달랐습니다 이집트는 지형상
폐쇄적입니다 우선 북쪽으로는 지중해
바다고 아래로 사하라 사막이고 해외로
나가기 위한 유일한 창구 라고는
이집트에서 중동 쪽으로 가는 길목인데
이마저도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 쉴드
역할을 해주잖아요 그래서 고대 이집트
왕국은 반대로 이민족의 침입이
어렵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고대 이집트 왕국은 이후 아주
오래도록 이집트 지역을 지배했고 무려
26개의 왕조가
계승되었다 합니다 1대 8로 나르메르
왕이 이집트 문명을 통일하여 본격적인
이집트 문명을 시작시킨 시대죠 이집트
초기 왕조에 이르러 비로서 이집트의
상형 문자가 자리를 잡았고 이집트
신화 역시 이때 때 정립되었습니다
이집트 신화로 꼭 말씀드려야 하는
신이 바로 오시리스 있니다 인간의
시대 이전 신들의 세상이었습니다 적에
오시리스는 이집트를 다스리던 왕이자
신이었다고 합니다 오시리스의 아내가
그의 여동생 이시스 있는데 다른
여동생과 간통을 하고 있었더랍니다
문제는 오시리스가 간통하는 다른
여동생이 자기 남동생 세트의 아내였던
거죠 분노한 세트는 형 오시리스를
죽인 뒤 실체를 등분을 해서 나이
강에다 던져버렸습니다 여동생들이
오시리스의 모든 신체들의 찾았지만
성기만 찾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면
물고기가 성기를 먹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남편
오시리스의 장례를 치러줄 때 붕대로
성기 모형을 만든 뒤 입안에 넣어
마법의 힘으로 되살려내 미라가 된
남편의 시체와 관계를 맺은 뒤 아들
호루스를 잉태했다 합니다 오시리스
신화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오시리스를
죽음의 신으로 모셨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사람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아누비스는 신이이 영혼을
오시리스지 데려가면 오시리스가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로 채서 죽은 자의
생전 영혼의 고결함을 심판하는데 만약
깃털보다 무거울 시 타락했다고 판단해
지옥으로 떨어뜨려 그 영혼은 지옥의
괴수 암무트게 잡아 먹힌다고 합니다
오시리스 신화를 통해 또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미라 문화인데요 이집트
초기 왕조로부터 미라 문화가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인 카와 육체인
하로 구분이 되는데 이집트인들은
부화를 믿었기 때문에 특히 그것이
절대자 파라오는 더더욱 언젠가 영혼이
돌아왔을 때 육신을 그대로 보존 할
수 있도록 시신을 방부 처리하던 것이
미라 장래의 시작이었죠 미라는 심장을
제외한 모든 장기를 꺼낸 이후 화학
처리를 한 뒤 붕대로 가마 관에
넣었으며 빼낸 장기는 카노푸스
단지라고 하는 단지에 따로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미라 제작의
차이는 있지만 미라는 파라오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 심지어 동물까지
미라로 제작했습니다 미라와 더불어
이집트의 장례 문화에 중요한 것이
사자의 서입니다 죽은 자의
기록물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관해 넣을 때이
사자에서 함 넣었는데요 죽은 영혼이
안전하게 사후 세계로 다다를 수 있게
만든 안내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파피루스는 식물로 만든 종이에 사후
세계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그림으로 그리고 또 사후 세계에서
괴물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오시리스의 재판에서 받게 될 생전
망자의 제목들을 적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죠 또 오시리스 재판에서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주문 글들도
적어 두었고요 사자 이서의 이집트
상향 문자로 적힌 내용들은 대부분
해독에 성공한 상태랍니다 여담으로
이집트 초기 왕조의 수도 아비도스
아직도이 시대 유물들이 몇 개 남아
있는데 그중 아비도스 어느 한
신전에서는 비행기 혹은 우주선 모양의
그림이 부조되어
[음악]
있습니다 26개의 왕조들 가운데 제
1 2 왕조를 이집트 초기 왕조라고
부르고 제 3에서 6 왕조가 이제를
이집트 고왕국 식이라고 부릅니다
연도는 기원전
2686부터 기원전
281지며 바로 피라미드가 만들기
시작한 피라미드의 황금기이자 제 3
왕조를 개창한 첫 파라오가 조세르
있데 이 조세르 파라오에게 이모테크
아고 하는 어 조세르 총애했던 재상이
있었습니다 이모테크 조세르 파라오를
위한 무덤을 설계하는데 이전까지
파라오의 무덤은 마스타바 아고 부르는
직사각형 모양의 무덤이었다 모티프는
조세르 파라오를 길이 고자 더 큰
계단식 무덤을 설계를 했고 조세르
파라오의 무덤이 기원전 250년에
완공된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입니다
조세르 파라오를 시작으로 제 3에서
제 6왕조 아지 파라오 4 후
파라오들의 위한 거대한 피라미드
무덤이 건축되는 관례가 생겼고 현재
70에서 80여개의 피라미드들이 남아
있답니다 제 4 왕조를 개창한 스네프
파라오는 제 3왕조의 피라미드
양식이었다 계단식이 아닌 좀 더
매끈한 형태의 피라미드를 처음으로
시도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피라미드
건설을 위한 완벽한 공법을 익힌
시점이 아니라 스네프루 처음 시도했던
메이둔 피라미드는 무너져서 현재는 그
원형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스네프루
사후 제 4왕조의 2대 파라오가 된
대망의 쿠푸 파라오가 마침내 완벽한
피라미드 건설을 위한 공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구글의 이집트 피라미드를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사진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상징과도 같은 피라미드가 바로이 제
4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 쿠프
파라오의 피라미드이다 쿠프 피라미드는
모든 피라미드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피라미드입니다 원형도 가장 잘
남아 있기도 하고요 쿠프 피라미드가
있는 이집트 기자 지구에는 제일
거대한이 쿠프 피라미드 옆으로 제
4왕조의네 번째 파라오 카프의
파라오의 피라미드 여섯 번째 파라오
멘카우레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있어서
이 세 개의 피라미드를 기자의 3대
피라미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집트
여행 가셔서 피라미드 관광을 갈 때
제일 많이 찾는 피라미드가 기자의 새
피라미드 들이고이 새 피라미드들을
피라미드들 중에서도대 피라미드라고
부릅니다 새 피라미드 앞에는
피라미드를 지키는 수호수 스핑크스가
있는데 스핑크스의 얼굴이 커플의
파라오의 얼굴을 벗었다고 하네요
인터넷에서이 피라미드 제작시기 책한
미을 본 적이 있는데 현재 우리가
피라미드를 보고 와 옛날 사람들이
저런 걸 만들었다고 라고 놀라잖아요
천년 전 2천년 전 3천년 전
사람들도 저희랑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 때도
피라미드는 주요 관광지였다 해요 저
오랜 세월에 피라미드를 세웠다는
공법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또 미라
방부 처리를 하는 의학을 통해 알 수
있듯 이집트 문명은 수학과 기하학
과학 기술이 매우 발달해 있었습니다
날강 같은 큰 강의 범람을 막으려면
자연수의 수학과 공법 등이 발달할
수밖에 없잖아요 수를 10단위로 끊는
십진법 이집트 명에서 시작을 했고
그때 이집트 력이고 해서 1년을
365일로 정하는 태양력을 최초로
사용했죠 물론 오늘날 인류가 사용하는
역법과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저
오랜 과거에 365일을 계산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죠 이집트
고왕국 시대 중 제 4 왕조때 수도를
멤피스로 옮겼으며 이후 고대 이집트
왕국은 세번의 분열 시대를 맞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고왕국 제 1 중간기
이집트 중앙국 제 2 중간기 이집트
신왕국 제 3 중간기 이렇게 시대를
구분하기 이집트는 이란의 페르시아
제국 영토로 귀속이 됐고 그다음은
알렉산더 대왕의 손에 넘어갑니다 저는
그럼 다음 인더스 문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다뤄보겠습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4천에서 3,500년 경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100년
경으로 수급이 된다면 인도의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 경 정도
됩니다 다른 문명과 비교해 보자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한창
수메르인들이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도시 국가들을 세우고
길가메시가 굴리면서 무렵이고 이집트
문명에서는 피라미드가 제작되던 이집트
고왕국시대 즈음입니다
[음악]
인도에는 서쪽에 인더스 강과 동쪽에
겐지스강 이렇게 대표적인 두 개의
강이 있죠 인더스 문명은 당연하게도
인더스 강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인더스
강이 있는 인도 지역을 펀자브
지역이라 부르며 파키스탄 역시 인더스
강에 흐리기 때문에 인더스 문명은
인도의 펀자브 지역과 파키스탄을
영역으로 하 있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인더스 문명은 다른 문명처럼 청동기
시대를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이전 신석기 시대에는 파키스탄의
발루치스탄 주에 메르가르 문화가
선행하고 있었고이 메르가르 문화가
확대 발전하여 인더스 문명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메르가르 문화에서는 세계 최초의 치아
드릴링 흔적이 발견됐다고 하네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인들이 처음
일구었던 토대를 다른 여러 이민족들이
유입해 더욱 발전시켰으며 지형상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이 일구고
발전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인더스 문명을
일군 주체들은 누구일까요 신석기 시대
인더스 문명의 전신이 되는 메르가르
문화를 이룩하고 인더스 강을 활용하며
도시를 만든 민족들은 하나이 민족이
아니랍니다 다양한 민족들이 인더스
강에서 무수히 많은 도시 국가들을
만들어 냈고 하나이 도시 국가
내부에서도 여러 인종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인도 파키스탄의 토착
민들도 있었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넘 민족들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민족들 심지어는 지중의 쪽과
오스트레일리아 남태평양 쪽 출신의
민족들도 있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은
현재 타일러를 사용하는 드라비다 인이
그나마 가장 많은 비율을 이루고
있었던 인종이 있다는 건데 이마저도
통설이 정설은 아닙니다 즉 확실하게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지금도이
부근과이 지역 민족 구성이
다양하잖아요 여하은 여러 인정이
뒤섞인 고대인들이 인더스 강을 따라
여러 도시 국가들을 세웠고 그 중에서
가장 강하고 찬란한 문화를 꼽힌 도시
국가들이 하라파 모헨조다로 있습니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는
이집트 문명의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쌓지는 않았지만 와이 저때의
고대인들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놀랍기
만한 고도의 도시를 일구었습니다 아마
인더스 문명에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다 보니 지구라트는 피라미드와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제작할 수 있을 만한
단 하나의 절대 권력자가 없었던
듯하지만 다양한 인종인만큼 다양한
지식들을 와 도시 건설에 힘을 쓴
케이스가 아닐까 합니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은 벽돌로 지은 집으로
바둑판 모양의 계획 도시를 건설해
포장 도로가 있었고 하수도의 공중
목욕탕 제분소 제철소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인더스 문명의 시그니처
같은 유물이 바로 인장입니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은 다양한 문의를
그려놓은 인장을 사용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인더스 인장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하더군요 하지만이 인장의
사용 목적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뿌이
하나 있는 말 그림이 그려진 인더스
인장 일명 일각수 인장이 출토가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도
적극적인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더스 문명에서는 토이
악세사리 등 고도의 수공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이런 작품들로 적극적으로
상업에도 뛰어들었던 거죠 인더스
문명에서도 상형 문자를 사용하였는데
현재 해독하지 못했습니다 세계 4대
문명 중 유일하게 해독하지 못한
문자이 구 인 예시를 들기 위해 가장
규모가 컸던 모헨조다로 도시 국가와
하라파 도시 국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모헨조 다로는 현재 파키스탄에 있고
모헨조다로 고대 유적은 파키스탄에서
몇 안되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랍니다 모헨조 다로의 공중
목욕탕 벽에는 습기가 차지 않도록
무려 방수 처리를 하는 적이 있으며
가장 큰 도로의 폭은 무려 9m 아고
합니다 그 도로를 따라 배수로를
만들고 하수 처리를 했다고 하네요
화장실도 발달에 있어서 고대
모헨조다로 인들은 위생의 신경을 많이
썼던 거 같네요 모헨조다로
최상층에서는 대량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들이 무더기로 나왔는데
그 내막은 알 수가 없습니다 모해
조대로 아는 뜻 자체가 죽음의
언덕이라고 하네요 얼마 전 2022년
파키스탄 대홍수로 유적 상당수가
침수되어 버렸습니다 하라파 역시 현재
파키스탄에 있습니다 역시 선진화된
도로와 하수 시설이 돋보이며 아주
거대한 곡물 창고 유적과 국립 묘지
유적도 발견되었습니다 하라파 유적의
성체도 매우 높고 두꺼웠습니다 높이가
무려
15m 인더스 문명을 읽은 주체
세력들은 약 1천년간 조속하다 큰
위기를 맞습니다 바로 외지 민족
아리아인이 처대 왔는데요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강 유역으로
유입해 왔습니다 아리아인은 파키스탄
다 더 북부 이란과 중앙아시아 뭐
무슨무슨 스탄 동네 부근에서 내려온
유목 민족들로 기존의 인더스 문명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더스
문명을 일군 세력 중 하나로 추정되는
드라비다 인들은 현재 인도의 동남부와
스리랑카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더스 강에 거주하던 드라비다인이
아리아인 에다가 싸우다가 패퇴하여
인도 동남부와 쓰리랑카 아지
내몰렸다는 해석이 일단은 중론입니다
동시에 언제나 고도의 도시를 만들었던
인더스 문명의 고대인들이 도시를 더
확대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벽돌로 공수하고 자 대규모 삼림
파괴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급작스러운
건조화 현상으로 문명이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아리아인은 기존 인더스 무명의
민족들을 내쫓은 뒤에는 유목
민족이었던 아리아 인들조차 인더스
강의 혜택을 누리며 농경에 종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유목 민족적
성격은 남아 있어서 인더스 강에서
조금씩 더 동쪽으로 전진했고 아리아
인들은 처음 인더스 강에 내려오 고부
500년 정도 후였던 기원전 천년
경에 겐지스 강으로 아지 진출을 했고
이때부터 인도는 철기 시대로 들어가죠
아리아 인들은 구체적인 종교관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아 인들은 하늘 땅
바람 비 태양 등 자연의 모든 것들을
신으로 모시는 애니미즘적 다신교
있습니다 자연 즉 신들을 참여하는
내용의 글들을 수록한 경전이
있었는데이 경전의 이름이 베다 있니다
그래서 아리아인이 일군 문명을 기존의
인더스 문명과 비교하기 위해 베다
문명이라고도 하죠 그리고 아리아인이
인도 북부를 점령한이 시대를 베다
시대라고 하고요 아리아인이 부르던
종교 찬송가를 리그 베다 아고 합니다
리그가 참가라는 뜻이거든요 리그베다
외에도 사마베다 야주 베다
아타르바베다 세 가지가 더 있는데
이네 가지 중에서는 리그 베다가 가장
유명합니다 또 그들의 종교 신화를
베다 신화라고 합니다 베다를 기본으로
하는 이러한 아리아인들의 종교 명이
바로 브라만 교회였습니다 브라만은
아리아 인들의 종교에서 사제를
지칭한다 브라만 교회에서는 소를
굉장히
신성시했던 강 유역이 인더스 문명의
무분별한 개발로 삼림을 잃자 강의
범람이 잦아지고 그러면 초지도 잃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소의
개체수가 급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가 농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소를 해칠 수가 없었고 소의 신성이
들렸다며 숭배하기 시작을 했고
신화적으로 신들이 아끼는 동물로
나옵니다 무슨 종교가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힌두교적 브라만교와 확대 발전한
것이 바로 힌두교 있니다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사제를 일컫는 말이 브라만이 아아
아리아 인들이 겐지스 강으로 진출할
무렵쯤 브라만 교가 힌두교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고 브라만교 시절에는 사제
일부는 소로 제사를 지내고 소고기를
먹기도 하였으나 힌두교로
정립되고부터는 계율이 더 해집니다
신화 역시 초기 베다 신화는 이란계
영향에 짙었지만 아리아인데도 유구한
세월 인더스 강에서 겐지스 강으로
진출하면서 이란계 영향을 벗고 토착화
되면서 베다 신화의 변형이 가해지면서
힌두교가 정립될 무렵 힌두 신화로
진화합니다 예를 들어 베다 신화에서는
뇌신이 최고신의 이름이 디아우스
였는데 힌두 신화로 넘어가며 그
이름이 인드라 바뀌죠 또한 아리아인게
바 제도라는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인간 세상을네 가지로 나누는 종교관에
따라 사회적 신분을네 가지로 결정하는
것인데 바리나 제도에서는 이러한
신분이 세습되는 않았습니다 갓난
아이가 태어나면 사제가 신의 뜻을
받아 아이의 신분을 결정하죠 하지만
아리아인이 겐지스강 정착하고 그들의
종교 브라만 교가 힌두교로 진화할
무렵 바리나 제도도 더 확대되어 신분
세습 개념에 신분 제도가 탄생하니
바로 카스트 제도입니다 카스트 제도는
사제인 브라만 왕족과 귀족 크 트리아
평민 바이샤 최하층민 수드라 구성되어
있으며 각 카스트 별로 허용이 가능한
직업도 정해져 있습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오늘 날에도 전해지고 있죠
아리아 인들이 겐지스 강에 정착한 후
브라만교의 힌두교로 베다 신화를 힌두
신화로 바레나 제도를 카스트 제도로
진화시키며 사회적 발전을 이루어냈으며
기존의 도시 국가보다 더 규모가 큰
왕국을 만들어 냈습니다 인더스 강에서
겐지스 강이 이르기까지 파키스탄과
인도의 중북부에 걸쳐 총 16개의
왕국의 공조 했는데 그래서이 시기를
16대국회 통일한 왕조가 난다
왕조이다 왕조 때 알렉산더 대왕이
쳐들어 온답니다 다음 편에선 마지막
4대 문명 중국의 황하 문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황하를 중심으로 문명이
형성된 지역을 흔히 중원이 표현하는데
중국의 황하 문명이라함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일명 하상주 일컫습니다
하지만이 중 하나라는 아직
역사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은 신화에서
존재하는 나라이기에 공식적으로 나라와
나라가 황화 문명이라 하며 향후
중국의 역사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굳이 한 나라를 역사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신석기 시대의 불안 연맹이
청동기 시대의 상나라는 문명으로
발전하기 직전의 과도기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4대 문명의 3대 조건
중 하나가 도시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죠 도시란 성벽을 두르면서
시작합니다 단순히 성벽만 두르는게
아니라 성벽 안에서 그 나름에 발전된
정치 공동체와 사회 공동체를 조직해야
하고요 공식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신화 속에만 등장하는 한나라가 성벽만
두르고 아직 문명까지 나아가지 못한
조직체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벽만
두른 국가를 성읍 국가라고 하죠
거기서 더 발전하여 문명의 수준을
이룩하면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서
문자를 사용하고 발달된 도구를 통해
농경을 하고 정치 사회 공동체가
형성된 국가 형태를 읍제 국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첫 읍제
국가이자 중국 최초의 국가는 바로
상나라
있니다
상나라의 건국자 상황입니다 상황은
설의 14대 손이라고 하는데 설의
어머니가 3황 5제 중 한 명인
제국의 둘째 부인이며 설이 우임금
도와 치수 사업에 크게 일조했다고
합니다 설의 14대 손인 탕왕이 상족
이끌고 오늘날에 황하 중하류 일대로
진출해 명재상 이윤의 도움으로 명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해 하나라의 폭군
걸왕을 물리치고 나라를 건국했다는게
상나라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황 이
하나라의 폭군 거을 몰아낸 사건을
성탕 혁명이라고 합니다 탕의 성이
성씨 그든 상황은 오늘날의 허난성
상추 시에 해당하는 박이라는 곳에
도을 정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천읍
3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탕황의
상족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상족 초창기 이곳저곳을 누비며 상업에
종사하면서 세력이 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 한자가 상조에서 유리했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탕왕이
이끄는 상족이 황하 중화로 오기 전
상의 발상지는 어디였을까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크게 세 가지
설로 축이 되는데 먼저 상족 동이계
분류된 산둥 반도에서 발언했다는 설이
있고 두 번째는이 중국은 하나라의
유적이라고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초기
상나라의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이리두 1리 강 문화가 있던 허난성
정주시 부근 마지막 세 번째는 훗날
상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은허 즉
허난성 안양 지역이라는 설입니다
허난성 안양 지역이 상조의 발언
지었다는 설이 조금 도 무게가 실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갑골문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상나라로 하나라
럼 전설속의 국가로 간주되었지만
갑골문의 발견되면서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되었습니다 상나라 사람들이 글자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출토가 되었으니까
말이죠 상나라 때는 정치적 왕이
종교적 사재까지 겸하는 재정 일치
혹은 신정정치 사회였는데 전쟁을
결정하고 부족을 이끄며 전투를
수행하고 또 하늘의 뜻을 받는 국가의
우두머리는 하늘의 제사를 지내면서
거북이 등의 등껍질이 짐승의 뼈 같은
단단한 물질에 불을 씹혀서 갈라진
정도를 보고 하늘의 뜻을 점을칩니다
그렇다면 해석한 천명을 등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겨서 기록하죠이
기록문의 갑골문이라고 합니다 갑골문의
새겨진 글자는 물론 상향 문자이고
오늘날의 한자와는 다르지만 문법이
오늘날의 중국어의 문법과 같으며
한자의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어서
한자의 직기 글자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발견된 모든 각골 다 해석한 건
아닙니다이 그나마 해석한 바에 따르면
상조의 수도가 천읍
대읍읍 않고 지명 부족명 국가명으로
같이 쓴답니다이 상조의 발언 지야
설만 분분하지만 어찌됐든 상나라
자체는 안성에서 시작했고 그 첫
수도는 안성의 상이었습니다 최초의
문명은 허난성에서 시작했다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물론 상나라 있는 상종
있지 않았습니다 상종 있다면 그건
부족 국가죠 상나라는 상조기 주도를
하되 상조기 거느리는 타 부족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상조의 지배를 받는
부족으로 직접적인 지배를 받는 내복과
상나라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상나라의 호출에 따라 제사때
필요한 물자 내지 전쟁시 병력을
충원해 주는 외복 구성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갑골 문에는 상조기 5천에서
1 3천까지 병력을 원했다고 나오는데
저 오랜 고대 사회에서 겨우 한개의
부족에서는 저렇게 많은 수의 병력이
나오기가 힘들거든요 참고로 상나라의
복습하지 않은 부족들은 방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상나라의 군대는 보병
부대와 전차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어 상나라는 농업도 고도화된
국가였습니다 그 일내로 역법을 둘
수가 있는데요 상나라들은 그들 고유의
단력 계산법 이른바 역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나라는 태음력을 사용하여
1년은 12달로 나누고 각 달은
30일 혹은 은 29일로 구성했다고
하네요 날짜와 시간을 구분하기 간지도
상나라 있 유래한
거랍니다 탕왕 이후 상나라는 점점
쇠퇴의 조짐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가서는 왕족들 그리 왕의 쟁탈전을
벌리며 상나라는 급격하게 쇠퇴했습니다
수도를 다섯 번이나 넘겼다고 하죠
이때 상나라의 부흥을 수도한 왕이
나타나니 바로 19대 왕 반경이 있죠
반경은 혼란해진 상나라를 수습하고
상나라의 재건을 상징하기 위해 수도를
지금의 의 허난성 안양시의 은허 아는
곳으로 전도합니다 은허 훗날 중국의
후대인들이 옛 은나라가 있던 폐허라는
뜻에서 부른 명칭이고 실제 명칭은
그냥 한글자 은이 있습니다 이래서
한태 상나라의 명칭이은 나라로
불렸지만 은은 어디까지나 수도의
이름입니다 각 골문에서 은이란 수도도
대읍읍 상나라가 더 맞는 명칭입니다
반경의 은허 천도가 상나라의 재건을
상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상조의
발원지로 옮긴 것이 아니냐는
해석으로이 상조의 발언지 중 유력한
후보로 한한성 안양 씨가 꼽히는
겁니다 반경이 은허 수도로 옮긴 뒤에
상황 때의 선정을 되살린 덕분에
백성들이 편안함을 찾았고 상 왕조의
돈은 다시 형성하였다고 합니다이
은하로 수도로 옮긴 상나라의
최전성기는 22대 왕인 무정
대었습니다 무정은 반경의 조카입니다이
무정은 민가에서 구열이 사람을
찾아내어 재상으로 임명하여 사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정이 정사를
바로잡고 덕을 행하니 천하가 모두
즐거워하고 상나라의 도가 다시 일어났
다고 합니다 상나라의 후반기 수도
은어는 상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바뀌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상나라의 유적이 가장 많이 출토되는
지역이 은허이기도 합니다 은어에
수많은 갑골문의 출토가 되었고
330명을 순장은 대형 묘도
발견되었습니다 상나라는 인신공양
문화가 있었던 거죠 청동기 많이
출토되었는데이 사호 수정이라고 중국
최대 청동기 있니다 새발 달린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황하문명의 고유 양식으로 추정이 되며
동물 문양이 새겨진 청동기를 많이
출토되고
[음악]
있답니다 상나라는 무정 이후로 다시
쇠퇴의 역사를 걷습니다 이번에는
반경이 무정 같은 중흥 군주들이
나타나질 않는데요 오히려 상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옛 하나라의 걸왕이
맞먹는 폭군 주황이
지휘하였고 주황 들어 천부적으로
변별력이 있고 영리하고 민첩하며
견문이 매우 빼어 났고 힘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고 합니다 이런 인재가 어쩌다
폭군이 되었을까요 주황은 능력만큼이나
매우 거만 했는데 모두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흠뻑 빠졌으며 여자를
탐했다 하는데 특히 달기는 여인을
총애하 있죠 점점 주앙의 사치 벽은
돌을 넘어섰는데요 왕실 정원을 만들어
수많은 공과 광대를 불러모으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 후 남녀들을 벌거벗겨 하여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한 사자 성어가 주지육림 있니다
주에 대한 내부 불만이 쌓이자 주황은
폭이라고 뜨거운 불 위에 기름칠한
구리 기둥을 두고 죄인들로 그 기둥을
걷게 하면 기름기 때문에 떨어져
불에타 죽게 하는 형벌을 만들 정도로
잔인했고 신하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는데 어 그녀가 주에게 음란함을
경고하자 주왕은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구를 죽이고 포를 떠서 소금에 절여
버렸습니다 왕은 무능하고 야비한
비중을 재상으로 임명하였고 상나라의
정치와 도가 무너져 버리자 상나라의
지배를 받던 외복 부족들이 하나둘
상나라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결국
상나라는 외복 부족들 중 하나였던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이
주나라에 대해서는 황하 무명 하편에서
계속 이어나가도록
[음악]
하겠습니다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주족 상나라의 복속되어
있던 외복 부족 중 하나였는데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의 횡포를
일삼으면서
족을 다스리던 서백 창의 위상이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서백건 상으로부터
받은 자기 창이 그의 이름이고 흔히들
주문왕이라고 부릅니다 주 문왕은
상나라의 주황이 폭군이 되었을 때
주황 이게 직원을 했다가 하옥된 적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풀려나와 상나라로
반기를든 부족들을 토벌하라 명령을
받았으나 상나라의 반기를든 부족들은
오히려 토벌하러 온 주문왕 이게
몰려들었습니다 주 문왕은 선정을
베풀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다른 부족들이 주문에 천명을
받은 군주라면 칭송하였다 나와
있습니다 주문에는 뛰어난 재상이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낚시계의
대부 강태공이 강태공은 70살까지
낚시만 하며 살던 어부였습니다
강태공은 자신이 낚시만 하는 이유에
대해 물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낚는 것이다라고 말했다죠 그의
나이 80이 다 되어서야 강태공은 주
문항을 만납니다 하필 주문이 강태공이
낚시하던 곳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강태공을 만났는데 문항은 강태공을
만난 이야기를 해보고는 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그를 중용했다
합니다 주 문항이 상나라 중앙에에
체포됐을 때 상나라 주황 미녀와
재물을 바치면서 주 문항을 풀어주게
해 준 장본인도 바로 강태공이
있습니다이 일로 강태공은 주 문항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주나라의 시작을 살펴보자면 그 시조는
고공 담보로 주 문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성은 히시이고 이민족의 침입을 받던
사람들을 보다가 오늘날에 섬서성
바이오지 시 기사네 자리를 잡았는데
상나라가 고공 담보를이 지역에 제후로
임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고공 담보는
주 태왕 출전이 됩니다 주 문왕이
일구어 놓은 주나라에 가뜩이나 상나라
주황이 민심을 일차 제후들이 주나라에
몰려들었고 주문항서 후에는 그의 아들
주 무왕이 뒤를이었습니다 주 무왕의
본명은 희발이고 주 무왕의 찬남
있니다 그리고 아버지 주 문왕이
스승으로 삼았던 강태공이 주나라의
재상이 되어주었습니다 강태공은 주
무왕에게 이제 천명과 대희가 상나라를
떠나 주나라에 있으니 상나라 토벌을
간해 주 무왕은 전쟁 준비에
돌입했습니다 제후들의 마음이 주나라를
향하도록 만든 것도 강태공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렇게 주 무왕에게
몰려든 재후 800명이었다고 하네요
상나라 주왕게 학을 된 제후들은 주
무왕에게 하루빨리 진군하여 상나라를
치자고 했으나 중 무왕은 아직은
천명이 내려지지 않았다며 2년이나 더
기다렸습니다이 2년간 상나라 주앙의
악함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으며
상나라의 신하들이 주나라를 도망쳐 와
상나라 토벌을 간할 정도 였습니다
비로소 무왕은 제후들을 다시 불러모아
이렇게 말하며 상나라 정보로
공포했습니다 지금 상나라 왕 준는
자기 부인의 말만 따르며 스스로
천명을 끊었고 삼정을 훼손하고
파괴했으며 왕의 부모 형제들을 멀리
하더니 마침내 선조의 음악을 져버리고
음란한 노래를 만들었으며 올바른
소리를 어지럽혀 사용하여 자기 부인을
기쁘게 하고 있소 그러므로 나 발은
오직 하늘의 벌을 받들어 행하려 하오
그대들이여 노력하시고 두 번 다시
기다릴 수 없고 세 번다시 기다릴 수
없소 주나라 제후들의 군대는 상나라의
수도 은허 교회 지역에 모기에서
나라와 대체하였습니다 주 무왕은
왼손의 환석 도끼를 오른손에는 흰색
깃발을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그대들의
창을 높이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라니 하며 그대들의 창끝을 세우시오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이미 상나라
주황은 모든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상나라 주앙의 학정에 분노하던 상나라
병사 상당수가 주 무왕에게 항복해
버렸습니다 항복하지 않은 상나라
군대도 금방 모두 무너져 버렸습니다
패전 소식을들은 상 라 주황은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어 죽습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너뜨린이 전투가 모야
대전입니다 상나라 수도에 입성한 주
무왕은 상나라 주앙의 시체를 찾아내어
화살을 세 번 쏘고 시신을 검으로 벤
뒤에 황색 도끼로 머리를 자르고
상나라 주앙의 머리를 흰 깃발에
효수하다 주앙의 애첩이었던 달기도 처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 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아들 녹보 무경은 살려두어
은허 지역의 재보를 계속 임명해
주었습니다 주 무왕은 오늘날 섬서성
시안시 근교의 호경의 도을 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알리니 바야흐로
주나라의 시대였죠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이 상주 혁명과 모야 대전을
배경으로 훗날 중국 명나라에서는
봉신연의 아는 신마 소설이 나와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주나라의 국무 총리
격의 해당하는 관료 대표를 태보고
하는데이 강태공이 태보가 되었습니다
강태공은 주나라의 재상이 자 1인자가
되었는데 한때 강태공이 할일없이
낚시만 하고 있을 때 한심한 남편을
보고 아내가 강태공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제 강태공이 재상이 되니까 떠났던
아내가 찾아왔으나 강태공은 그릇을
담긴 물을 쏟으며 쏟은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강태공은 모기 대전 이후
전력과 전술에 관한 이론서 6도 삼을
저술하기도 했죠 한편 주 무왕의 상주
혁명 당시 반대를 하던 주나라
신하들도 있었는데 바로 사마천의 사기
열전 제일 첫 번째로 등장하는 배기와
숙제 형제였습니다 주문사 후 주
무왕이 위하여 전쟁을 준비할 때
백기와 숙제는 아직 아버지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전쟁을 하는
것과 상나라의 신하 국가인 주나라가
반기를 든다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라며 반대를 했죠 하지만 주
무왕이 벌란 듯이 성공하자 주나라의
양식은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며 배기와
숙제는 수양산을 들어가 오로지
고사리만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마초는 배기와 숙제를 사기
열전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며 그들은
이와 같이 인과 덕을 썩고 청념
고결하게 살다가 이렇게 굶어 죽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됐 니까
도착은 날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사람 고기를 헤쳐서 먹으며 포악한
짓을 멋대로 저지르고 수천 명의
패거리를 모아 천하루 마구 휘젓고
다녔지만 결과는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그래서 나는 천도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라면서이 현실이란 도덕과 이상이
적용될 수 없는 잔인한 것이라며
한탄하기도
했죠 주 무왕이 상나라를 타도한
명분은 바로 천명 상이었습니다 천명
즉 하늘의 뜻이 이제 더 이상 상나라
있지 않고 본인 주 무왕에게 있다는
것이죠 주 무왕은 천명 사상을
위시하여 주나라 왕이 천명을 행하는
자라는 이념을 설파하기 위해서 주나라
왕을 천자 즉 하늘의 아들이라 일
그렇습니다 이후 중국사에 있어서
천재라는 단어가 가는 상징성은
엄청났으며 주나라 천자가 다스리는
영토가 곧 천하가 되기 때문에 그 외
지역에 대해서는 무조건 오랑캐로
취급하는 이분 법적인 세계관이
형성되어 중화 사상의 기초가 이때
만들어진 겁니다 상나라를 타도한 혁명
이후 주 무왕에게 한 가지의 과제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본인을 도은
제후들에게 논공 행상을 해야 하는 것
제후들이 모인 명부는 천명 사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들에게 무언가 떨어지길
원했기 때문에 준하에게 붙은 거죠
그래서 준나라 실시한 제도가 바로
봉건 제도입니다 봉건 제도란 천자가
제후에게 특정 영지를 분봉하기 그
영지에서 만큼은 뭐 상징적으로는 그
영지도 천자의 영토이지만 만
실질적으로는 제후들의 자치권이 더
많이 발휘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물론
전시나 제사 같은 큰 종교
행사에서는이 제후들이 참가하여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천자를 보필해
하는 조건에서 영지를 분봉 받은
것입니다 제후들은 천자의 친척들이나
공을 세운 공신들을 임명했습니다
따라서이 주나라 천자의 직할지 자체는
그렇게 넓진 않았습니다 제후 내에서도
등급이 있었는데이 주나래 때는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다섯 가지
등급이 있어서 등 작이라고 부릅니다
분봉은 제후들은 본인의 영지에서
실질적인 자치권을 행사하지만 명분
상으로는 천자에게 충성하고 긴급시
천자의 소환에 응해야 하죠 단순히
이게 끝이 아닙니다 각 지혜 제후들은
주나라 천자에게 정기적으로 조공을
해야 했습니다 조공이 바로 여기서
시작합니다 주나라 초창기에는
180여명의 제후와 제후국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고 그래서 조공 제도가
실시되었던 겁니다 조는 왕을 만난다는
뜻이고 공은 특산물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봉건제도의 기본적인 사상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중화 사상이라는
세계관입니다 주나라 천재가 다스리던
시대에는 천자에게 조공을 받친다는게
중화 즉 화하 족의 일원이라는 뜻이며
천자의 지배를 받느냐 안 받느냐는
선진화된 문화를 갖고 있느냐 안 갖고
있느냐의 문제였던 겁니다 따라서
천자에게 조공을 하는 그들은 우수하고
위대한 문명을 지닌 화하족이고 그 외
조공을 하지 않으며 천자의 지배를
받지 않은 민족에 대해서는이 즉
오랑캐라고 멸시를 했습니다
천하를 위대한 화와 열등한 2로
분하는 중국인들의 이러한 2분법적
세계관을 화이 사상이라고 합니다이
본건 제도는 비단 천자와 제후의
관계가 끝이 아니랍니다 제후국의 제후
주나라 천자 자기 아들이나 가족에게
세습을 합니다 하지만 아들과 가족이
한 명이 아니잖아요 그럴 경우
장남에게 제후를 물려주고 그 외
동생들이나 다른 아들들 혹은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제후국 내에서 또
분봉을 하는 2차 봉건제가 실시
입니다 제 후보다 한 단계 아래를 경
혹은 대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경과 대부도 역시 자기 장남에게
세습을 하지 않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 안에서 또 분봉을 합니다 경과
대부 한 단계 아래이 이제 봉건제도
그래프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이들을
사라고 합니다 사가 거느리는 지역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고 아마 농민들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실무자의 성격이 더
강했을 겁니다 주나라에 있어서 본건
제도만 중요하고 주나라를 대표하는
제도가 바로 주나라의 토지 제도
정제입니다 정제는 교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토지 제도로
교에서 말하는 유토피아 대동사회의
토지 제도입니다 원래 상나라의 외복
중 하나였던 주나라가 이제 상나라
다도 더 큰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새로운 토지 제도가 필요했는데 거기서
탄생한 제도가 바로 정전제 있죠
정전제 정은 우물 정자입니다 일정
단위의 토지를 우물 정의 모양처럼
구획을 해서 가운데 한 곳을 공동
경작지 공전으로 두고 나머지 여덟
군데를 인 사유재산인 사전으로
인정한다는 토지 제도입니다 사전의
수확물은 농민들이 가지고 가고 공전해
나오는 수확물은 세계모 바치는
형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과들은
정전제 존재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전혀
현실성이 없는 제도 든요 유구에서
하도 정전제 이상적인 토지 제도라고
하니까 동양의 여러 국가들에서 각종
정부와 학자들이 현실적으로 적용이
가능한 정전제 구상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정전제 자체가
이상 속에만 있는 이론이라는 거죠
그래서 정전제 존재하지 않았으며
후대에 주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기 위해 공자가 꾸며낸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고 주나라 때는
아직 청동기 시대인지라 철제 농기구가
없는 돌
농기구만들기이 주나라 때의 한에서만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계 4대 문명 시리즈를 훑어봤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역사
도박이었다 2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