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진행형 100년 전쟁,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전쟁을 하는 이유는? 1~4차, 그 이후 중동전쟁 한편으로 몰아보기 (50분 순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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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한편으로 몰아보기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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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오늘 날
서남아시아 중동 지역은 끊임없는
전량에 휩싸이고 있다는 건 모두 아실
겁니다이 지역은 이슬람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슬람 내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또 분파 안에서도 더
많은 종파들 가렸고 또이 지역은
오래도록 부족 단위로 체제가 이루어져
있고이 부족 그리 이해 관계도 있어서
한 국가라고 하나의 민족주의가 있는게
아닙니다 이러한 갈등은 제국주의 시절
영국과 프랑스가이 지역으로 진출하고
위임 통치를 하다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평화주의자 로 위장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자기적인 기준으로
정부를 세워 놓고 하나의 국가들로
독립시켜 버렸습니다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국명은
민족명절 대충 묶은 거예요 2차 세계
대전 후 오늘날까지도 끝나지 않은
중동 전쟁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데
이처럼 중동 지역에 전쟁의 기름을
부어놓고 결정적으로 불을 지혀 버린
사건이 이스라엘 건국이 1차 중동
전쟁이 발발합니다 영상에 앞서
이슬람의 역사 시리즈를 보고 오시면
내용 이해해 더 큰 도움이 되니 참고
바랍니다 이슬람의 역사 시리즈에서
다루었지만 서남아시아 중동 지역은
비록 종파와 부족이 달라도 공통적으로
7세기 형 일래 약 1400년 간
이슬람을 공유해 왔습니다 터키와
중앙아시아 그리고이란 지역을 제외한
서남아시아의 이슬람을 이끌던 건
아랍인들이 있죠 이슬람을 창시하고
처음 퍼트린 것도 서남아시아의
아랍인들이 있고요 그러니까이 지역은
이슬람 아랍인들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구권 열강들이 해선 안 되는
짓을 해버리니 이 이슬람 아랍인들이
모여 있는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
이스라엘을 알받기 해 버린 겁니다
마치 현 이스라엘의 국토 모양처럼
아랍 지역에 이스라엘이란 단도를 박아
버렸죠 오늘 날 팔레스타인 하면 가자
지구만 떠올리지만 원래이 가나안
지역과 그 부은 전체를 팔레스타인이
불렀습니다 지명이었던 거죠 비록 저
오래전에는 여러 종교와 여러 민족들이
공존하던 지역이었고 또 기원 전에는
유대인들이 모여 살았던 땅이면 맞지만
고대 로마 제국 시절부터 유대인들의
상당수가 이 지역을 떠나 유럽으로
퍼졌고 또 이슬람이 창시되어는
팔레스타인이 지역도 당연히 이슬람화
되었습니다 반면 기원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모여 살던 유대인들은 거의
2,000년간 유럽을 떠돌아 다녔는데
19세기가 되면 민족주의가 유행하면서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의 기원전 11세기
경에 만들어졌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자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
중에서도 핵심 지역을 시온이라는
그래서 유대인들의 고대 이스라엘 왕국
재건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합니다
이때까지 팔레스타인 지역은
이슬람교이지만 아랍인은 아닌 투르크
족이 건국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 편에 붙은 오스만을
견제하고자 영국은 오스만 내
아랍인들의 반란을 부추 이기로 합니다
오스만이 아랍인들이 같은 이슬람이
하지만 오스만은 아랍인의 나라가
아니라 투르크의 나라였으니 1차 세계
대전이 한창에 던 1915년 이집트
주제 영국 대사관이 있던 맥마흔이
이슬람 세력의 지도자에게 전쟁만
끝나면 영국이 너희만의 국가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줄 거라며
반란을 부추기습니다 이걸 맥마흔
선언이라고 합니다 맥마흔 선언 믿고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슬람 아랍 세력은
아니라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에서도
오스만을 공격했죠 그런데 맥만
선언에서 2년 후였던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 시오니즘의
강력하게 후원하고 있던 유대인 금융과
대부부 지안 로스차일드 가문에가
영국도 시오니즘의 지지한다며 1차
세계 대전만 끝나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을 위한이 이스라엘 왕국을
약속해 주겠다고 합니다 이게 벨푸어
선언입니다 그러면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던 이슬람 아랍인들과 이곳에
오려고 했던 시오니스트 유대인들은
서로 영국만 믿고 독립 국가의 꿈을
키우는 거예요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적극적으로이 지역의 세력을
확대했고 비어버린 서남아시아 중동지역
상당수를 위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을 믿었던 유럽 곳곳에서 퍼져
있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왔고 1925년에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1933년에는 20
13명의 유대인들이이 지역에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땅들
가운데 비록 보호국이 했지만 요르단
왕국과 이라크 왕국을 만들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영국은
명목상 요르단 왕국을 1948년
이라크 왕국을
독립시켰다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았던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의
물자와 인력을 뽑아 먹다가 1922년
이집트 왕국을
독립시켰다 여전히 영국의 영향력은
강력했고 스웨즈 운화 경영권도 쥐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1900
12년 점령한 시리아 왕국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지금의
시리아로 독립시켰고 레바논 지역에서는
1943년 국민
협정이라는이란 나라가 탄생해
1943년
독립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만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만들어지지 못한 채
영국의 위임 통치령 이었다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과 아랍인들에게 국가를 건설해
주겠다고 이중 약속한 영국은 수습은
하지 않고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기간이 끝났다면서 싹 발을 빼버립니다
행정력이 부지한 상황 팔레스타인에서는
원래 살던 이슬람 아랍인들과 물밀듯
들어온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주인의
자리를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엔이 중지에 나서기로 하지만 국제
정세는 유대인 편이었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재개 건물들
상당수가 유대인이 아아 유은 사이좋게
지내려면 팔레스타인 지역을 일정
비율로 쪼개서 한쪽은 유대인의 국가
한쪽 은 아랍의 국가를 세우라고
합니다 원래이 지역에 살던
아랍인들에게 어이가 없는 거고 원래이
지역에 살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일정
비율이라 어떻게 됐으니 이득이었다
유대인들은 더 많은 땅을 원했습니다
결국 1948년 오느 날 테라비 그를
수도로 이스라엘이 건국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의 가장 주도적이 있던
사람이 폴란드계 유대인 벤구리온이라고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였던 의원내각제 국가 였기에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권력자는 총리
벤구리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광국 국은 당연히 팔레스타인 지역내
아랍인들뿐 아니라 그외 아랍 국가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1948년 월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고 바로
다음 날이었던 5월 15일 이스라엘을
내쫓아 버리겠다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서 아랍 연맹을 만들고
이스라엘로 쳐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1차 중동 전쟁이며 혹은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라고
[음악]
하죠 이스라엘이라고 건국을 선언하면
아랍 국가들에서 처 올리란 걸 몰 쓸
리 없죠 이스라엘 건국으로 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로 유대인들이 계속
들어오면서 이미 여러 작은 충돌과
대립은 항상 있어 왔기에 유대인들은
일찌감치 민병대를 조직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가나 아는 민병대가
있었는데요 오늘 날 이스라엘군의
전신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가나 외에도
지하조직 민병대 있던 이르군 레히
등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이
민병대들이 통합해 이스라엘 군을
만들어 냈죠 자만 민병대를 합친
군사였다 명 그리고 무기들은
절대적으로 그 수가 부족했습니다 위임
통치 기간 끝났다고 영국이 나가면서
남겨 놓은 무기들 주서운 거 정도였죠
아랍 연맹 쪽을 보자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그리 조직한 민족 방위군이
있었지만 만 명이 조금 넘는 인원으로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뭐 무기도
부족한 것 같았죠 오히려 아랍 쪽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보다는 그 외 아랍
국가들이 주도한 전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집트 왕국은 처음엔
9,000명을 투입했다가 계속 병력을
증원해 나중에 4만 명까지 투입시켜
습니다 무기는 그래도 이스라엘보다
많았습니다 약간 아랍 연맹의 맹주
역할을 하던게 이집트 있죠 개전
직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공군이
없었지만 이집트에는 공군 병력이
있었고 또 2차 세계대전 때 참전한
경험도 있죠 시리아의 경우 일만이
조금 넘는 병력과 전차 이라크의 경우
약 2만의 병력과 전투기들 레바논은
약 3,000명 요르단은 만 명의
병력을
투입시켰다 동쪽에서 요르단과 이라크가
이스라엘 남쪽에서 이집트가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시리아 와 레바논이 공격해
왔습니다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랍
연맹에 비해 열쇠였던 하지만 1차
중동 전쟁의 승자는 열쇠를 극복한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1차 중동전쟁
전후로 이스라엘의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을 마구 몰아내고
있었습니다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도
많이 이루어지고요 아랍 연맹국이 거의
도착했을 때는 이미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소환
그리고 북쪽의 곤란 고원 쪽으로 쫓겨
몰려 있었고 이스라엘이이 지역
대다수를 차지는 상태였죠 이미 유이
한 분할안을 위반에도 훨씬 위반한
국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제
아랍 연맹국 오면은 상황이 바뀔 줄
알았으나 안타깝게도 아랍 연맹의
국가들은 동상의 몽을 꾸고 있었고
연맹이라고 하지만 조직적으로 싸운게
아니라 각 국가들 별로 따로 싸우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나마 요르단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지만 아랍 연맹의
승전국은 이게 거의 유일했습니다 아랍
연맹에서 활약을 해야 하는 군대는
이집트 군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능했던
지중의 연한을 따라 이스라 수도
테라비 향했지만 테라비 아지 가지도
못하고 또 중간중간에 주요 요충지를
하나도 점령을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군의 저항이 격렬하게 했지만
이집트군 병사들은 전투 지식과
노하우가 아 정말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지했고 지휘 체계도 엉망 이집트 군
장교들은 병사들 벌리고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북쪽 전선의 시리아와
레바논은 더 무능했습니다 무능을 떠나
싸울 의지도
옅었다 간 휴전 기간을 가졌는데이
기간 이스라엘은 암시장에서 체코로 터
과거 나치의 무기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무기의 질과 양이 올라갑니다
또 전 세계에서 유대인들이 자원
입대하며 몰려들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여이 휴전을
기점으로 이스라엘 군이 정해화
되었으며 군 행정도 잘 정비하여
오늘날에도 이스라엘군 징병률이 세계
1위입니다 7월 이집트가 전쟁을
제기했지만 이스라엘이 오합지졸이 있던
전에도 이기지 못한 이집트가이
정예화된 이스라엘 군을 상대 로
어떻게 이겼 있습니까 공격 실패
정도가 아니라 이집트 군은 밀리면서
후퇴해야 했습니다에서는 중제 분할안을
계속 꺼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부 분할하는 거부합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이미 전쟁을 충전했고
이집트는 밀리기만 하고 요르단은
이집트를 도와주지 않았죠 오히려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에게 털리도
방치했습니다 결국 헤르 넘겨
1949년 2월 이집트가 3월
레바논이 4월 요르단이 7월 시리아가
이스라엘과 휴전을 하면서 1차 중동
전쟁은 명명백백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쟁 전 유이 제시한
분할하는 거의
반반이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지역의
80% 먹었고 팔레스타인은 나머지
20% Pro 축소되었습니다 오느 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관계가 이렇게
형성되었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몰려들었던 가자지구는 이집트에
요르단강 소환은 요르단에 골란고원
일부는 시리아 관할로 넘어갔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이 되었고 같은
아랍 국가들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들이었습니다 1차 중동 전쟁은
아랍 국가들의 엄청난 변형의 시앗을
뿌렸고 그 변혁의 씨앗으로 2차 중동
전쟁까지 번집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일어난 이스라엘 건국
전쟁 이른바 1차 중동 전쟁은
1949년 이스라엘의 명명백백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1차 중동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성공적으로 알박기를 성공해
중동의 자리를 잡았고 반대로 1차
중동 전쟁의 패전으로 아랍 연망
국가들에는 변혁의 계기가 되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난
국가는 이집트 있습니다
우선 1차 중동 전쟁 때까지 이집트는
이집트 왕국이었습니다 본니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으며 19세기 민족주의
부과 함께 이집트로 파견되었던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1841년 이집트 왕국을
세우고 오스만 그부 독립했습니다
중간에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적이
있지만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하지만 반영 정서가 유독
심했던 이집트에서 스웨지 운하
경영권이 영국에게 있고 또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가 보란듯이
패배하면서 이집트 왕실의 체면이
추락해 버립니다 이집트의 구왕 파루크
1세도 부정부패와 사치의 결정과 같은
존재였고 이집트 왕실에 대한 불만이
주로 군부에 마련해 있었습니다 이집트
군부에 자유 장교 단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이집트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조직 자유 장교단
강력한 반영 정서를 지닌 단체로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영국과 같이 싸우던
이집트 왕실에 엄청난 불만을 뛰고
있었습니다 자유 장교단의 리더격인
인물이 어쩌면 이집트에서 파라오를
다음으로 유명 한 나세르 있습니다
나세르는 세계 현대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인데요이 몇 가지 사실로
나세르의 특징을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나폴레옹이 있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도 나세리 높게 평가했으며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존경하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또 나중에
나세르가 죽었으니 그의 장례식에
500만 명이 모였다죠 이렇듯 후배
독재자들의 무 존경을 받는 인물이
나세르 있데요 언변도 수료하고 풍채
좋은 체구에 이때는 그의 외모가 가장
많은 이목을 끌었을 정도의 이미지였던
지라 독재에 최적화되어 있던 비주얼과
성격이었고 1차 중동전쟁 당시
나세르는 소령이 있는데 1차 중동전쟁
후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 장교단
이집트 왕가의 더 큰 불만을 품었고
결국 1952년 나세르의 자유 장교단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쿠데타 과정에서
자유 장교단의 반서구 과격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무슬림 형제단에 도움을
받기도 했죠 나세르는 파루크 세를
폐위시키고 이집트 혁명 사령 평의회를
조직하고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파르크 1세를 비롯한 이집트 왕 국의
왕실에 대해서는 이집트만 떠나면 추가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신변을 보장해
주면서 이집트 왕실은 유럽으로 망명을
갖고 나세르는 이집트 정부 인사를
물가리 했죠 하지만이 물갈이가 피해
숙청은 아니었던 것이 대외적으로
선량한 이미지를 보이고자이 왕당파
인사들만 해임시키고 꼭 왕당파가
아니라면 관록 있는 정치인들은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죠 쿠데타 세력은
이집트도 공화 정부로 전환하기로 하여
1953년 대통령제를 채택 자유
장교단의 또 다른 멤버이자 1자 중
동 전쟁 당시 이집트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도망치기 급급했을 때 몇
안되는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나이브가 이집트의 1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나세르는 부수상이었는데
부수상 이에도 나세르가 대통령
나기보다 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나세르와 나이브는 서로
신경전을 벌리다가 취임 1년만인
1954년 나세르는 나기브 대통령에서
해임하고 가택 연금 시켰습니다
나세르는 대통령 자리를 공속으로 둔
채 본인은 수상으로 취임했는데 다만
나세르이 나기브 대중적 인기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던 나세르는 나기브 연금을
풀어주고 정치에 복귀시키는 모습을
보였지만 끝까지 나기를 압박해
나이브가 자발적으로 정치에서 물러나는
형식으로 나기를 내쫓아 버리고 이집트
혁명 사령 평의회의 의장으로 있던
나세르는 1956년 스스로 대통령에
오르면서 이집트의 2대 대통령이
[음악]
되었습니다 취임한지 얼마 안 된
독재자들은 꼭 대규모 토목공사를
버리기 마련입니다 나세르 역시 대규모
토목공사를 발표하는데이 나일강 중상류
아스완이라는 곳에 거대한 댐을
만들기로 합니다 나일강이 워낙 큰
강이다 보니 나일강을 활용할 수 있는
거대한 댐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역할이 상당하거든요 실제로 오늘 날
아스완 댐은 엄청난 전력을 생산하고
있고 날강 대홍수를 막는데 가장 큰
기여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이 정도 큰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했죠 그런데이 자금을 미국이 상당
부분 부담해 주기로 합니다 비록
이스라엘을 지지하던 미국이었으면
아랍의 국가들을 무작정 적 로
돌리기보다는 그래도 우호적인 관계를
체결하는게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아랍
모두에게 양다리 외교를 하는게
미국에게도 외교적 이점으로 작용할
수가 있었거든요 그러는 한편 나세르는
1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처럼
체코를 비롯한 동국관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게 이스라엘이 체코로 무기를
구입하는 거랑 아랍 국가가 체코로
무기를 구입하는 건 좀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냉전이
그게 달할 때잖아요 결국 미국은
이집트의 아스완댐 건설 비용을 부담해
주겠다는 약속 을 철회해 버립니다
나세르는 분노하면서 더더욱 공산주의
동구권 진영에 접근했고 터키 때문에
남하가 막혀버린 소련 입장에서는 중동
지역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집트와 소련이
수교를 맺으며 아스완 댐 건설 비용
부담은 물론 소련제 무기들을 대거
이집트에게 지원해 줍니다 나세르는
소련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관심도
없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기 했는데
어디까지나 외교적인 차원이 있기에
골수 정통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죠
이집트 이러한 친소련 외교는 미국을
포함한 서국한 국가들의 반발을 섰고이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나세르는 강경한 반영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집트 민족주의를 내세웠고
그리고 이집트도 어느 정도 아스완댐
건설 비용을 부담해야 했기에 재원
확보 차원에서 1956년 스웨즈
운하를 국유화 해 버립니다 스웨즈
운하의 가장 큰 지분을 가지고 있던
최대 주주 영국이 방방 뛸 수밖에
없었죠 또 나세르는 다른 아랍
국가들에도 개입해서 영국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선이이는 총 리는 나세르의 중동의
히틀러라는 이집트의 군사 개입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동참한게
이스라엘이 있는데요 이집트가 1차
중동 전쟁의 분풀이로 이스라엘도
수해주 운나 사용 금지 지시를 내려
버렸거든요 이뿐만이 아니라 이집트의
지원으로 가자지구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페다이라는 무장 테러 단체를
만들어 이스라엘 고은 물론 이스라엘의
민간인들 테도 끔찍한 짓들을 자행하고
다녔고 이집트는이를 무긴 할뿐 아니라
오히려 더 부추겼습니다 본니
이스라엘은 차 중동 전쟁 이후
온건파의 총리가 취임해 있었는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페다 이의 킹에
치르던 이스라엘에서는 바로 강경파
있던 뱅구 리원이 복귀하였고 이제
전쟁은
[음악]
불가피했습니다 1956년 10월 2차
중동 전쟁이 터졌습니다 서구권에서는
우선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싸움을
버리면 그걸 빌미로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계획이었죠 선재 공격은 10월
29일 이스라엘이 먼저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와 가자지구 넘어
신나이 반도를 침공했습니다 11월
2일 가자 지구가 멸치를 못 버티고
점령되었고 가자 지구에 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명목상 이집트 군이 보호해
주고 있었는데 이스라엘군이 들어오니
이집트 군은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오죽하면 이집트 군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남인들을 죽이거나
남인들게 식량을 뺏어 가기도
했겠습니까 이집트 군과 함께
이스라엘과 싸울 생각이었던
팔레스타인의 무장 테러단체 페다 이도
어이가 없었겠죠 결국 페다 이도
이스라엘 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습니다 페다
이에게 당한 것이 많았던 이스라엘군은
보복하기 했다며 가자지구 곳곳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물론
이스라엘 측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자지구 점령 후
이스라엘군은 신나이 반도로 더
적극적으로 진격했고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공수부대와 외인 부대를
투입하고 공군 동원에서 신나이 반도의
폭격을 퍼부었습니다 1차 중동 전직
때 이집트 구는 오합지졸이 있잖아요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체코로
무기들을 사들이면서 뭔가 좀 달라질
줄 알았는데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집트 군은
오합지졸이 있어요 군기도
재판이었다 안 돼서 이스라엘군이 저
넓은 신화인 반도 전체를 다
차지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성공적으로 스웨즈 운하도 장악했고
그런데 나세르의 뒤에는 큰 형님이
계시죠 바로
소련이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맹비난하면서 흐루시초프가이 전쟁이
지속된다면 본인들은 핵무기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소렌이 등장하고 또 핵무기가
언급되면서 미국이 등장을 안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오히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화를냅니다 지금 스웨즈 운하
때문에 의 핵전쟁이 우는 데고 국제
정세를 이렇게 위기에 빠뜨리는게 말이
되냐 그리고 왜 사전에 미국한테 말을
해 주지 않고 너희들 멋대로 전쟁을
일으키냐 말이죠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앞으로 적국으로 삼을 수도
있다면서 초강수를 두었고 별수 없이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끝내야
했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너희도
이제 그만해 라면서 시나이 반도에
주둔하고 있다가이 눈치 슬금슬금
보면서 다 차지해 놓은 신나이
반도에서 철수합니다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가자 지고만 달라고 했지만
미국이 안 된다고 했죠 오히려 미국이
이집트의 구원 투수로 등장한 건데
전투에선 나세르의 이집트가 졌지만
전쟁에선 영국과 프랑스가 진거나 다름
없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무것도
얻은게 없었으며 이집트는 공식적으로
스웨즈 운하를 국유화하는 2차
중동전쟁으로 이집트 군이 탈탈
틀렸음에도 전쟁의 결과는 이집트의
승리이다 보니 나세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2차 중동
전쟁을 스웨즈 전쟁이라고 합니다
나세르는 거만해지고 이스라엘은 열심히
써서 다 이겨놓고 얻은 건 아무것도
없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는 가장
세력이 컸던 무장 단체 패다가
해산되면서 오히려 더 많은 수의 무장
단체들이 조직되며이 중동은 더 깊은
혼란에 소용 놀이로
[음악]
들어오죠 우선 2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살펴보겠습니다 스웨즈 은학 국유화를
이뤄낸 나세르는 아주 고안했습니다 또
중동 아랍 권에서도 나세르의 대한
지지도가 굉장했죠 나세르 대통령은
장기 집권에 돌입했습니다 1956년
2대 대통령이 오른 나세르는 4대
대통령까지 죽기 직접 전이었던
1970년까지 약 14년간 집권했고
3차 중동 전쟁은 나세르의 집권
후반이었던 1967년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나세르는 2차 중동전쟁
이전부터 그 이후로는 더더욱 범 아랍
주의에 가치를 내걸었습니다 아랍
국가들끼리 연맹을 만들고 나세르
본인은 맹주 같은 역할로 군림하고 다
같이 힘을 앞에 이스라엘을 축출해내는
청사진을 꿈꾸죠 나세르는 이집트를
중동의 패관 국가로 만들고 이집트를
넘어서 범 아랍 연맹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세르
스스로의 거만함과 그리고 2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인지도 덕에
나세르는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나세르의 행보를 나세르
주의 혹은 나세리 am이라는 용어가
생길 정도로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나세르 있죠
이러한 연장선에서 1958년 시리아가
먼저 이집트에게 제안해서 이집트와
통합하기로 했고 그렇게 이집트와
시리아가 합쳐진 아랍 연합 공화국이
출범했습니다 같은해 이라크와 요르단도
국가를 합치기로 해서 아랍 연방을
수립했습니다 이슬람의 역사 시리즈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요르단 왕국의
왕가와 이라크 왕국의 왕가가 같은
하심 가문이 아아 하지만 요르단
이라크의 아랍 연방은 반년도 가지
못하는데요 이라크 내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쿠데타 세력은
수도 바그다드로 진격해 이라크의 국왕
피아스 리세를 폐위시킨 뒤 왕실
사람들을 총살시켜야 세력은 이라크
왕국을 해체하고 이라크 공화정을
세우면서 지금의 이라크가 탄생했죠
살아남은 왕실의 하심 가문 사람들은
영국 국으로 망명 갔죠 다만 쿠데타
정부도 정권을 안정화 시키지 못해서
이라크는 내부적으로 끊임없는 내분에
시달립니다이 혼란을 수습했던게 사담
후세인이 있죠 다시 나세르의 범 아랍
연맹으로 돌아오자면 비록 시리아와
합해 아랍 연합 공화국을 세웠지만
나세르의 비롯한 이집트인들이 시리아를
이집트 인처럼 동등하게 데우지 않아
시리아에선 불만이 쌓여서 결국
시리아에서 분리를 원하던 쿠데타가
일어나 1961년 시리아가 아랍 연합
공화국에서 나와 버렸습니다 체면 국인
나세르는 통합할 다른 아랍국가 없나
찾다가 선택한게 예멘이 있습니다
1962년 예멘에서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발발했던 소련이
공화파의 지원하자 이집트의 나세르
예멘의 공화파 지지한다며 예멘의
지원군을 보내줍니다 하지만 전세가
공화파가 점점 불리해지자 나세르는
매년 군대를 보냈고 1967년이 되면
무려 13만 명의 이집트 군이 예멘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아지는
건 없었죠 범 아랍 연맹 만들겠다고
예멘 내전에 개입한 나세르 있지만
예멘 내전이 오히려 나세르의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세간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발이 묶긴 미국과 예멘 대전에 발이
묶인 이집트를 같이 비유했고 또
나세르가 범 아랍 연맹을 주장하려면이
이스라엘 문제를 짚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범 아랍 연맹의 명분을
위해서라면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스라엘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실제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 지대에서는
국지전이 계속 전개되고 있었고요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차
중동전쟁 이후로 시나이 반도를 도로
뱉은 이스라엘은 불만이 계속 많았고
이스라 이이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고립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선 선재
공격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전략을 군사학
적으로 예방 전쟁이라고 하는데요 훗날
벌어질 것 같은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내가 먼저 선재 공격을 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개념입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시나의 반도 끝자락에 티란
해협을 봉쇄해 버립니다이 티란 해협은
이스라엘이 바다로 나아가는 출구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예방 전쟁의 명분을
내걸며 1967년 전쟁을 일으킵니다
비록 2차 중동 전쟁은 이집트의
참패였다 중동 전쟁 때 나세르는 좀
자신 있었습니다 2차 중동전쟁에서
3창 중동전쟁 사이에 약 10년간
소련으로부터 더 많은 무기를 지원
받았거든요 1967년 6월 5일 아침
9시 경에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들이
이집트의 공군 기지들을 기습 폭격하면
3차 중동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실력은 굉장히
우수했습니다 기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구사하기 어려운 운항 술로 운전하면서
이집트 공군 기지들을 향했습니다 반면
이집트에서는 소련으로부터 받은 우수한
항공기들이 있었지만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었고 활주로의 버젓이
전시에 두고 있어서 공격하게 딱이었어
결국 공습 3시간 만에 이집트 한공기
약 450대 중에서 약 300대가
박살이 나 버립니다 성공적인 폭격으로
이스라엘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하지만 나세르는 이집트의이 처참한
전황을 공개할 수가 없어서 라디오
방송으로 이집트가 이스 이스라엘
항공기들을 다수 격추시켰다 허위
정보를 선전했습니다 이집트 국민들은
당연하고 뭐 심지어 이집트 군과
해외에서도 이집트가 이기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세르의 거짓
방송은 3차 중동 전쟁 내내 이어졌고
이것이 이집트의 피해를 더 늘리는
계기가 되었죠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스라엘은 이젠 육군을 신화의 반대로
진출시켰고이 전투기들도 이스라엘의
보병과 기갑부대를 지원해 주면서
진격하는 이번에도 신나의 반도의
이집트 군은 탈탈 털립니다 또
이스라엘 정보 기관의 실력도 엄청나서
이집트와 이집트 군에 대해 이스라엘은
속속이 파악하고 있었어요 결국 3일
만에 신나이 반도가 장악합니다
이스라엘 군은 공구는 물론 보병과
기갑 부대까지 정예병 들이었고 반면
이집트 군은 여전히 오합지졸이 있어요
너무 소련지도 의지하면서 훈련도 안
되어 있었죠 또 소련제 전차들이
사막에서는 적합하지 않았나 봅니다
신나이 반도에서 패전하고 이집트
본토를 후퇴하라는 이집트군 보다
이스라엘군이 더 먼저 스웨지 운하까지
진출하여 신화의 반도 했던 이집트
군은 고립되어 버렸죠 주위 급들
차이가 컸는데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의 하우돈 국방부장관 모세
다양 참모 총장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이
이스라엘 군을 정해화 키고 전쟁을
탁월하게 계획하고 지휘하던
인재들이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계속
거짓 방송으로 승리를 위장하려
바빴고요 이렇게 이집트의 완패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이집트의 구원
투수가 등장하니 바로 요르단이
있습니다 요르단은 아랍 국가들 중에선
그나마 군사에게 가장 출중한
국가였습니다 1차 중동 전쟁 때도
유일하게 승 했던 국가가 요르단이
있잖아요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딱 붙어
있다 보니까 요르단 강만 건너면
예루살렘이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수도
테라이 보였어요 요르단의 궁강 후세
일생을 꽤 유능했던 예루살렘의 박격포
세례를 퍼부었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공수부대를 괴멸시키고 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의 자랑이 있죠 바로
공군 이번에도 이스라엘 항공기들이
나서서 요르단 공군 기지들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모세 다야는 요르단의
군사에게 세서 싸우기를 주저하면서도
어쨌든 전쟁 에 터졌으니 적극적인
공격을 허가해 주었고 참모총장 이사크
라빈의 주도로 요르단이 점령한
예루살렘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승자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요르단의 군사에게
남 달랐기에 요르단을이긴 이스라엘의
승리는 매우 기쁜 승리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성지 잖아요 예루살렘에
들어온 모세의 다양 하빈의 사진에 또
유명합니다 요르단이 이집트의 구원
투수라고 말씀드렸지만 요르단이
이집트를 구원하러 전쟁에 들어온게
아니었습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이집트가 이기고 있다고 거짓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고 했 요르단이 여기에
속은 겁니다 이집트가 이기고 있다고
하니까 요르단도 참전해서 뭐 최종
승리하면 숟가락이도 얹을 수 있잖아요
하지만 요르단이 괜히 들어왔다가
밀리니까이 시리아를
참전시키자 이집트의 거짓 방송에
속아서 자기들도 숟가락 뭐 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참전합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내려오죠
이스라엘 공군 폭격으로 이집트와
요르단 공군 기지들이 초토화된 것과는
좀 다르게 시리아는 먼저 공군
항공기들을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군과 항공전에서 시리아
공군 항공기의 약 70% 손실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육군이 이스라엘
시리아 국경지대인 곤란 구원으로
진출합니다 시리아도 이스라엘 공군을
괴멸했다 거짓 방송을 내면서 시리아
육군을 당당하게 곤란 구원으로 향했죠
시리아군이 정예병은 아니었지만이
골란고원 지형 자체가 싸우기에는
적합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자랑인 기갑 전차가 들어가기도
힘든 지질이 있거든요 말 그대로
알보병 투입이 있는데 이스라엘군
피해가 극심할 수밖에 없었죠 각종
지뢰와 철조망이
어 이스라엘 여단 병력의 90% 죽는
마당이었다 뭐 세명 남고 여덟명 남고
이랬죠 그런 피해에도 이스라엘군
보병들은 진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절대
곤란 구원으로 못 올라올 거라고
자신했던 시리아 있지만 이스라엘군이
돌파를 해버리니까 당황한 시리아 군은
도망쳤습니다이 골란고원 전투에 투입된
여단은 곤란이 여단이 하며 끝끝내
골란고원을 차지한 병사들을 본
여단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고
하죠 시리아에서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이스라엘군이 스스로 쳐돌 수 있다고
고위직 관료들은 국민들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어 다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시리아 방면으로
진격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소련이 등판해서 전쟁을 중단하라고
압박합니다 엔까지 나서면서 이스라엘은
6월 10일 정전 협정을 하며 3차
중동 전쟁도 이스라엘의 완승으로
끝납니다이 모든게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6일간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3차 중동전쟁을 6일
전쟁이라고 하는데 6일 동안 일어난
싸움이다 라기보다는 6일 만에 이집트
요리던 시리아가 콩가루로 분쇄되어
버린 전쟁이다 뜻이 더 강합니다 3차
중동 전쟁의 압승으로 이스라엘은
영토를 더 넓혀 신나의 반도와
골란고원 같은 군사적 요충지를
차지하면서도 또 요르단강 서한 같은이
경제적 이익을 볼 수 있는 지역들
아지 차지할 수 있었죠 파면 나세르의
위상은 추락하고 나세르가 꿈꾸었던 범
아랍 주의는 3차 중돈 전쟁의
패전으로 사실상 종식된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2차 중동 전쟁으로
나세르의 인기가 올라간 반면 3차
중동전쟁으로 에 나세르의 위상이
추락해 버렸죠 하지만 나세르는 아주
치사한 방식으로 인지도를 계속
유지합니다 나세르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바람에
이집트가 졌다고 변명했습니다 실제
미국 영국 프랑스는 참전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걸로 면피하려는 겁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책임지고
물러나겠다는 적당한 퍼포먼스를
해주면서도이 모든 책임들을 자신의
절친이자 정권의 2인자였던 아메르게
뒤집어 씌웠는데 분노한 아메리가
나세르 축출하려 하다가 계획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옥중에서 스스로
목숨 을 끊었죠 이렇게 나세르는
인기와 정권의 명분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나세르 개인 건강이 좋지
못했고 1970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는데요 그의 장례식에 500만
명이 모였다죠 나세르는 끝까지 자기
이미지 갖고 가면서 죽은 겁니다 아랍
국가들에서 나세르의 죽음에 대단히
비통해 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의 4대
총리이자 유일한 여성 총리였던 골다
메이어는 대체 나세르가 자기
국민들에게 전쟁을 준 것 말고 뭘
했냐며 나세르의 조롱했습니다 나세르
사 후 나세르의 뒤를 이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되어 이집트를 이끈 건
나세르와 함께 혁명 정부에 인사였던
사다트 있습니다 비록 사다트 역시
나세르의 방침을 이어가겠다고 했으나
사다트는 조금 달랐습니다 사다트는
과도한 국유화 정책들을 폐기하고 또
군부를 대거 물가리 하면서 젊고 실력
있는 장교진로 대체했던 군사 훈련도
혹독하게 진행합니다 또 기본적으로
이집트의 외교 기존은 친 소련이었지만
사다트는 미국에게도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었고 이런 양다리 외교 정책으로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무기 지원을
받아냅니다 하지만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가 해결할 수 없는 고질적인
경제 위기가 있었으니 신나이 반돌이
이스라엘에게 뺏기면서 스웨즈 운하까지
뺏긴 겁니다 스웨즈 운하는 이집트
국가 예산에 약 3을 차지하고
있었던만큼 스웨즈 운하를 뺏긴 건
이집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이
경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이집트는 반드시 스웨즈 운하를
차단해야 했죠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승리에 도치되다 처음이 지역에 왔을
때 유엔 제한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
절반 정도만 할해 받았는데 지금은
곤란 고안에서 신하의 반도에 이르는
영토를 넓혔어요 그런데 이게
이스라엘한국 좋은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한정되어 있는데
방어해야 하는 영역이 너무 넓어진
거잖아요 또 그간 세차례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자랑하던 진병 동원도 이제
슬슬 부담스러워지고 의미없는 이집트의
국지 도발은 지속되니 서서히 안전
불감증이 생기기 시작했죠 이집트의
사다트는 스웨즈 운화 타라이
절실했기에 군사력을 강화하며 침공을
노리고 있었고 최고의 실력을 자라가는
이집트 정보 기관 모사드 ES 전쟁이
임박했다고 보고했지만 골다메이어
총리와 모세 다한 국방 장관은 그간
오합 지절 이집트에 대해서 딱히 큰
겁을 먹지 않고 있었습니다 결국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에서
신하의 반도를 타아 나고자 신하의
반도로 침공하며 4차 중동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10월 6일을 침공
날자로 삼은 이유는 이때가 유대교에서
대단히 중요시 역기는 용키 프루라
명절 공휴일이 있기 때문에 병사들이
종교적인 이유로 단식하고 상당수가
휴가를 나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4차
중동 전쟁을요 키푸르 전쟁이라고 하며
역대 중동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가장 규모가 었던 4차 중동 전쟁의
막이
[음악]
오릅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은 특수부대를 내서 스웨즈
운하를 도화 또 이집트군 공병대가
운하 도화에 큰 역할을 했죠 스웨즈
운하를 넘으면 이스라엘에서는 바레브
라인이라는 방어선을 만들어 놓았는데이
방어선이 모래 방벽이 있어요 모래가
그나마 활력에 잘 버티자요 그래서
이집트에서 생각해낸게 대형
파이프라인을 통한 물대포로 모래
방벽을 무너뜨린 거였습니다 9시간
만에 바레바레 인을 넘어선 이집트
군은 이제 곳에 구축되어 있던
이스라엘의 철근 방어 진지들을
무력화시켜야 했는데 휴일이었던 지라
이스라엘 병사들이 휴가를 나가 있어서
공격하기 용이했고 또 토산을 쌓고 그
위에서 전차를 올려놓고 폭격하면 철근
방어 진지들을 공략한 뒤 신나의
반도로 쭉 들어갑니다 이게 옛날에
이집트 군이 만나 싶을 정도로 무기에
대한 이집트 군의 숙련도와 이해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이집트 군의 전차들과
또 대전차 미사일들을 적극 활용하면서
이스라엘의 자랑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
전차 부대도 무력화 시키죠 이때이
이스라엘 전차 병력 절반 이생이 괴멸
그래도 이스라엘에게 자랑인 공군이
있잖아요 세상에 그 자랑인 이스라엘의
항공기들 이집트 군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 되기 일수였습니다 확실히 나세르
보던 사다트 있나 봐요이 이스라엘은
더 많은 전차부대를 투입시키면서
신나이 반도의 광활한 사막에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전차전을
전개됩니다 이집트의 전차는 소련에서
지원받은 티거 전차들이 있고
이스라엘의 전차는 미국의 셔먼 전차를
개조한 전차들이 있는데 뭐 티거나
셔먼이 장단점이 있었겠지만 우열 차가
크진 않았습니다 그저 그동안은 이집트
군이 전차에 대한 숙련도가 낮고
도망가기 바빴다면 4차 중동 전쟁에선
제대로 싸웠는데 이집트군 전차부대의
대승이었다 박살이 나죠 전쟁 계전
3일 만에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에
탈아납니다 이스라엘의 위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벼르던
아랍 국가가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시리아 있습니다 시리아는 3차
중동전쟁 때 곤란 구원을 뺏겼아요이
시리아에서는 반서구주의와 소련으로부터
지지를 받기 위해서의 사회주의 그리고
범 아랍 주의를 내세우는 사상을 합친
바트 당이라 정권이 지지를 받다가
3차 중동 전쟁과 4차 중동 전쟁
사이에 시리아 바트 당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시리아도 강경
여론이 대세였고 이집트와 함께 4차
중동 전쟁에 나섰던 거죠 시리아에서는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곤란 구원을
탈환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원래 시리아
군사력은 이집트만 못했는데 이번엔
시리아도 달랐습니다 시리아는 헬기를
적극 이용하면서 고원 전투에 임했고
무엇보다 시리아 전차 부대도 갑자기
정해화 되어서 곤란 고원을 지키 는
이스라엘 기갑 부대를 전멸시켰습니다
3차 중동 전쟁 때 곤란 구원
전투에서 신화를 썼던 곤란이 여단이
었기에 처절하게 싸우기는 했으나
작정하고 들어온 시리아 있던만큼
이스라엘은 수적 열쇠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곤란 고원에서 시리아의
승리는 시리아도 놀랄 정도였습니다이긴
김에 시리아 고는 요르단 그지
진격하기 했는데 요르단강 100m
앞두고 진군을 멈추었습니다 요르단
강까지 가라는 사전 지시가 없어서
현장 지휘관들이 멈추기로 한 거죠
그러니까 시리아는 이겼을 때 그 다음
매뉴얼에 대한 한단을 못 내렸던 거죠
만약 요르단 강까지 갔으면 이스라엘은
바로 뒤지 있을 텐데 덕분에
이스라엘에서는 증원군을 보낼 시간을
마련하였고 이스라엘의 시간을 벌어준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츠비카
부대였습니다 골란 고에 시리아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휴가 중에 던
츠비카 중이가 곧바로 복귀했는데 이미
이스라엘 전차 부대가 박살난 상황
츠비카 중이는 반파되어 수리 가능하던
전차 한두대 가지고 리저리 삥삥
돌면서 시리아 전체 30여대를 상대로
10여대를 격파시 신화를습니다 이후로
근처에 있던 전차부대가 조금씩 지원을
오지만 시리아군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도 츠비카 한 16대로 계속
시리아군이 30시간 동안 쉬지 않고
싸우면서 시리아군 전차의 60대를
격파하자 이스라엘은 가능한 전차
부대를 계속 곤란 고원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항공기도 보냈는데 보내는
족족 시리아의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었고 시리아도 대규모 전차부대를
계속 집어넣고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이스라엘이 후퇴할 수가
없었어요 골란고원 뚫리면 다은
이스라엘
수도거성 전체 수가 이스라엘 전체
수보다 배 가량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대에서 20대 사이의 부대들이 조금씩
조금씩 모여서 싸웠고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의
역전승이었다 in이 중령이 이끄는
이스라엘 제 77 기갑 대대가 10대
1의 싸움에서 시리아군이
후퇴시켰다 다 버리고 도망가죠 물론
이스라엘도 피해가 컸어요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은 중대나 대대도 있었죠이
전투가 눈물의 계곡 전투입니다 얼마나
처절했던 눈물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지만 작전이라고 엄청난 크게
수송기를 통해 물자와 무기를
이스라엘에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막타를 날리기 위해
기갑부대 긁어 모아서 후퇴하는 시리아
전차를 쫓았고 또 지대공 미사일
파해법을 파악한 이스라엘 공군
항공기도 부활하여 지워 놓습니다
그리고 시리아 전차들도 다 같이
모이죠 골란 구원 마지막 전차전에서
시리아 전차가 1200대 가량이었는데
70% 이상이 격파 됩니다 이러서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사수에 성공했는데
이스라엘의 총리 골다메이어 기세를
몰아 시리아까지 진격하기 하죠
이라크가 시리아 구원하러 오는데
이스라엘에게 쓸려 나갑니다 시리아
구하러 온 요르단 공군과 이라크
공군은 피아식별 착각해서 자기들끼리
싸고요 이스라엘군이 수도 다마스쿠스
목전 앞까지 오고 폭격까지 이어지자
시리아는 별수 없이 항복하고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련도
이스라엘에게 시리아를 더욱 공격한다면
본인들이 전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는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합니다 이스라엘이 시리아 전선의
전력을 투입하는 이집트는 원래
목표였던 시나이 반도를 넘어 이스라엘
본토 까지 들어가기로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바로 반격이 나섭니다
이스라엘 판 패튼이 할 수 있는 샤론
장군이 끄는 전차 부대가 이학 물고
이집트 공격 방어에 나섰고 개전
초기까지만 해도 분명 이집트에게 밀린
이스라엘이 있지만이 시점엔 샤론의
이스라엘 전차 부대가 이집트 군 전차
200대를 격파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20대 손실 되고요 이스라엘의 샤론은
이집트 군을 몰아내며 신나의 반도를
다시 뺏어오고 스웨즈 운화 도하까지
계획합니다 샤론은 이스라엘도 이집트
본토로 들어가려고 했죠 이스라엘군이
포위하고 있던 이집트군 마지막 병력이
있어서 더 진격했습니다 정말 이집트도
무너졌을 겁니다 이때 다시 소련이
등장했고 미국까지 등판해서
이스라엘에게 선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말렸죠 그리고 미국이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을 강압적으로 말린 배경 중
하나로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었거든요 이로써
1973년 10월 6일에 시작한 요킨
푸르 4차 중돈 전쟁은 약 20일
만인 10월 25일에 끝이납니다 4차
중동 전쟁 후 이집트의 사다트는
차라리 소련보다 이스라엘이 꼼짝
못하는 저 미국 을 더 우방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이스라엘에서는
엄청 잘 싸우기는 했지만 피해가 너무
극심했던 터라 반전 여론이 대두되면서
온건 바람이 봅니다 1979년 미국의
지미카터 대통령이 나서서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중재해 주기로 하고
이집트의 사다트와 당시 이스라엘의
총리 백인과 함께 미국 대통령의 발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정을 맺고
이스라엘은 신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넘겨 주기로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신나이 반도는 이집트력 이죠 둘은
좋게 마무리된듯 싶었으나이 모든 중동
전쟁의 시발점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을
갈 수밖에 없었겠죠이 이후
팔레스타인은 어떻게 흘러서 지금의
전쟁까지 오게 됐을까요 1948년
1차 중동전쟁 1956년 2차 중동
전쟁 1967년 3차 중동 전쟁
그리고
1973년 4차 중동 전쟁까지 총네
차라의 중동 전쟁을 거치며 오느 날
중동의 질서가
재편되었다 재편된 중동의 정세가
안정적이라고 할 순 없는데요 따지고
보면 중동 전쟁의 원인들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은 여전히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곤 되찾지 못한 그저 난민에
불과한데요 마지막 중동 전쟁이었던
4차 중동전쟁 이후 팔레스타인과 기타
중동의 국가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2023년 하마스 이스라엘 전쟁까지
어떤 역사가 흘러왔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내 차라의 중동 전쟁이 모두
이스라엘의 승리였기에 아랍권 국가들은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
및 이스라엘을 도와주 는 서방의
국가들과 싸우기로 합니다 서남아시아에
그들이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자원이
있으니 바로 석유 서남아시아의 석유가
현 지구상 석유의 70% 차지하고
있거든요 석유 산유국끼리 뭉치기로
하는데 2차 중동전쟁과 3차 중동전쟁
사이였던 1960년 쿠웨이트이란
이라크 베네수엘라 사우디 아라비아
개국이 그들끼리의 국직이고 오백을
조직했습니다 이후 4차 중동 전쟁까지
리비아 아랍 에미리트 알제리 등이
가입하였습니다 오펙 회원국 보면은 는
중동전 깊숙히 개입한 국가들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같은 아랍
국가로서 아랍 연맹을 지지했기
사우디아라비아 주도로 석유 무기화하는
전략에 따라 4차 중동 전쟁에 맞추어
석유 수출량을 제안하였고 1973년
1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79년에는 오펙 회원국 중
하나였던이란 혁명으로 인해 2차 석유
파동이 일어나 전 세계가 휘청거리기도
했죠 두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석유를
보유한 아랍권 국가들의 국제 지위가
상당히 상승했습니다 판면 중동전쟁
모두를이긴 이스라엘이 있지만
이스라엘을 역시 두 차라의
석유파동으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이스라엘은 경제
위기뿐만 푸르 전쟁에서 흘린 피해가
너무나도 막대기 때문에 전쟁 여론이
가시고 온건 여론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이로 인해 4대 총리 골다 메이어는
실각했다 국방부 장관이었던 모세
다야는 총리 꿈을 단념해야 만 했죠
이집트 사다트 역시 그간의 친소련
성향보다는 차라리 이스라엘이 꼼짝도
못하는 친미 성향 쪽으로 외교가
기울었죠 내 차례 중동전쟁의 메인
대결 구도였던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에서 평화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77년 이스라엘 총일 100인이
초청하여 이집트의 사다트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전대 비문의 사건이 터지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둘 중 반드시 하나는
사라져야 하는 최악의 전쟁을 전개해
오던 두 나라가 화해 하리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을 거라 말이죠 사다트와
백인의 수교를 끝으로 지난했던 중동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평가를 바꾼
둘 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이
사이에 미국의 지미카터 대통령이
들어와 중재를 주도하면서 1979년
미국의 지미 카토가 이집트의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총리 백인을 미국으로 불러
함께 미국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서 평화 협정을 맺게
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은 절대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이 쓰리샷을 본
거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좋게 마무리
됐겠지만이를 바득바득 가는 곳이
있겠죠이 모든 중동 전쟁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 있니다 당초 중동 전쟁 자체가
아라 문화권이 중동의 이스라엘이
알받기 하고 기존의 팔레스타인인들을
내쫓아 이들을 보호하고 땅을 되찾아
준다면서 일어난 전쟁이자아요
이스라엘에게 땅을 뺏긴 일에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에게 거는 기대가
컸습니다 이집트와 기타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싸워서 원래 땅을 회복시켜
주리라 믿었죠 그래서 중동 전쟁
때마다 개 전으로 협조하기 했으나 뭐
전부 이스라엘의 승리였다아요
팔레스타인은 만냥 이집트에게 기대를
걸 수가 없었죠 팔레스타인에서는 3차
중동전쟁 3년 전이었던 1964년
그들끼리 정부를 수립하기로 해서 만든
조직이 바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즉
피에로 있습니다 피에로가 팔레스타인의
정보라고 했지만 실상은 유대인
민간인들 주에는 테러 단체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아락 국가에서도 피에로를
껄끄럽게 봤죠 3차 중동 전쟁 때는
요르단을 기점으로 게릴라전을 싸웠지만
3차 중동전쟁에서 요르단도 패전하면서
피에로 역시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길을
못 펴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피에로는
비행기 넘치 즉 하이재킹 사건들을
일으켰는데 1970년 9월 6일에는
무려 다섯 기의 항공기들을 동시에
납치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걸로
요르단에서는 피에로를 좋게 보지
않았죠 1971년 피에로는 레바논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1972년에 아마
아실 분들은 아실 유명한 사건인데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민회의
오픈닝 장면 인 미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켰습니다 1972년 서독에서 미헨
올림픽이 개최되던 때였는데 올림픽이
한창에든 민회에서 피에로 중에서도
극단적 과격 단체 검은 9월 단이
올림픽에 참여한 이스라엘 선수촌을
잠입해 이스라엘 선수단 11명을
인질로 삼은 사건이었습니다 4차 중동
전쟁을 끝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우호 관계로 전환됨에 따라 피에르도이
계속 분풀이 보복용 테러를 이어가
봤자 팔레스타인에 드게 될게 없다고
판단 피에로의 의장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 더 이상 테러를 하지
않겠다며 온건주의 노선을 표방하면서
1974년 유엔 참관국 인정을 받았고
1976년엔 아랍 연맹으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테러를 안 하겠다고
하는 건 기타 국가들에게 안 하겠다는
것일뿐이 이스라엘인의 상대로 한
공격은 지속적으로 전개됐습니다 한편
중동 전쟁을 종지부 짓고 노벨
평화상가 수한 사다트는 아랍 연맹
내에선 아랍의 배신자라며 온가 손
가락질을 당했습니다 결국 1981년
이슬람 과격 단체에 의해 수류탄을
맞고 암살을 당했습니다 사다트 암살
후 부통령이었던 무바라크가 대통령이
되어 약 30년간 독재를 일삼으면서
그 역시 사다트 이론의 한 사람으로
이스라엘과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나갔고 그래서 이집트는 꾸준히
아랍 연맹의 배신자 꼬리표를 달고
있어야 했죠 다른 나라들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집트만큼이나
이스라엘과 악연을 갖고 중동 전쟁
내내 이스라엘이 괴롭혔던 국가가
시리아 있죠 시리아는 는 4차
중동전쟁 직전 반서구주의와 범 아랍
주의를 내세운 바트 당의 쿠데타로
독재가 시작한 일을 계속 시리아 바트
당에서 독재를 하며 이스라엘과화한
이집트와는 달리 꾸준히 이스라엘과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준 것과는 달리 곤란 구원은
시리아에게 안 넘겼죠 바트 당이
득세한 국가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이라크인 그래서 4차 중동 전쟁
때도 이라크가 시리아를 구하러 가기도
했죠 그래서 이라크와 이스라엘 사이도
좋지 못합니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이라크 대통령이 되면서
이스라엘 이라크 관계는 더욱 안
좋아지죠 또 중동 정세에 빠뜨릴 수
없는 사건이 1975년 레바논에서
일어난 레바논 내전 있니다 그간 중동
전쟁을 다룰 때 레바논이 많이
언급되지는 않았죠 레바논은 아랍
국가들 중 유일하게 기독교 비율을
매우 높은 국가입니다 레바논이 나라
자체가 이슬람 내 수니파와 시아파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연합해서 만들어진
국가 있고 중동 전쟁 와중에는이
레바논의 대통령이 기독교인이 했죠
하지만 내 차례의 중동 동 전쟁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레바논으로 모여들었고 원래 요르단에
있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피해로도
요르단 테 쫓겨난 뒤 레바논의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예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한가운데 피에로의 본부를
설치할 정도였죠 결국 1975년부터
레바논 정보와 이슬람 단체들 간의
내전 이른바 레바논 내전이
발발했습니다 레바논 내전을 5차
중동전쟁 이라고까지 부르는데요
시리아가 레바논 내전 내 이슬람
단체를 지원하고 이스라엘이 레바논
내전 내 기독교 정부군을 지원해주며
했기 때문이죠 그러니깐 레바논
내전에서 이스라엘과 시리아는 중동
전쟁을 계속했던 겁니다
1982년에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에
휴전이 체결됐고 휴전의 내용에 따라
레바논은 피에로를 레바논에서 내
쫓기로 합니다 레바논에서 쫓겨난
피에로는 튀니지로 거처를 옮겼고 이제
피에로도둑 총리가 만나 평화 협정에
나섰고 이스라엘의 요르단강 서한 지후
와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
살 수 있도록 합의를 보면서 오늘날의
영토가 확정되어이 아라파트 1994년
팔레스타인의 1대 대통령이 되었죠
그러면 결과적으로는 해피 엔딩인
것처럼 보이잖아요 왜 지금까지
난리일까요 피에로의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기 전이었던 1987년 외교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과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아라파트 아는 달리
강경 팔레스타인인 들끼리는 무장 단체
하마스를 조직해 이스라엘군은 물론
이스라엘 민간인들을 테러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봉기를
인티 하다라고 부르죠 이러니
이스라엘에서도 팔레스틴에 대한 인지가
매우매우 안 좋아졌고 아라파트 럼
외교로 해결하려던 라빈 총리가
1995년 암살 되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평화는 단기간에
끝이 나버렸고 라빈 총리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급격하게 반
팔레스타인 강경 여론이 대두 되었죠
이스라엘의 샤론 총리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상대로 싸움을 전개합니다 그럴수록
하마스의 본기 인티파다 더 격렬해지고
그 사이에 낀 피해로이 아랍 파트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다가 2004년
사망합니다이 틈을 타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장악해 지금까지 가자 지구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아라파트
사후 그의 세력들은 파타라 조직 하의
요르단강 서한 지구의 팔레스타인 령을
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는 전쟁과 테러로 요르단강 서한
지구의 파타는 외교로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는 거죠
당연히 파 만이이 정부로서 그나마
국제적 인증을 받고 있고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이 파타르
의미하며 하마스는 가자지구를 점령하고
있는 무장 테러단체 이죠이 이후로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하마스 사이에선
분쟁과 미사엘 도발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에서도 총리들이
정권 지지도가 낮아질 때마다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책을 쓰면
지지도가 높아지죠 물론이 모든 분쟁을
안 족히 인식하는 이스라엘의 지식인
및 예술가들도 있긴 있지만 매우
극소수고 가장 가까운 사건으로 지난
2021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에 미사엘 공격을 하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침투했고 또
2023년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우디
아라비아와 관계가 좋아지자 혹시
사우디 아라비아의 지원을 끊길 것을
우려하는 하마스가 둘이 친해지지
말라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면 전쟁이
개시 되는데 이스라엘과 사우디
아라비아가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것에 진짜 견제했던 국가가 이란이었다
지라 지금의 전쟁은 이란이 하마스를
부추긴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결되는 것이 없고
매년 싸우기만 하는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그 사이에
민간인들은 너무나도 잔혹하게 희생되고
있고 또 유대인들이 꽉 쥐고 있는
서방의 재계에서는 이스라엘의 적대적인
입장을 표명한 이들을 갈라치기 하고
있고이 답없는 썸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결과에 어쨌든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고 민간인들의 희상이 더
번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럼 역서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