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그리고 음악” 저자 이종구 한양대음대 명예교수 문화사 강좌 | 29강 | 국사찾기협의회서 찾은 대륙백제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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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명예교수 이종구
있니다 지난 시간까지 해금과 해적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오늘은이 해금과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해금을 만들었다는 해적은
선비족의
부족이었다 선비족 즉 고시의 선비가
건국한 제나라에 의해서 멸망
당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해적은
고구려와 백제로 망명에서
흩어졌어이
제나라는 양자강 남쪽에 있었던 또다른
제나라와 구별하기 위에서 북제 하고
남쪽에 후일에 생긴 제나라를 남제
합니다 제나라와 남는 모두 백제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 요
우선 북제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북제 위나라 북쪽에서
실권을 잡고 있었던 한이라는 사람이
새로 세운 왕자로서 꼭두각시
황제였던 동의의 정제를 밀어내고 동의
영토를 그대로 인수한
나라였습니다 550년 초대 황자
있었던
고환은 북이 육진의 안에 가담해
해금을 잘 다루던 해적을
멸하고 나라를 세워 한때 우수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흥
국가로서의 우의를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 때부터
이따라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가
태어났기에 국가에서 큰 해악이 돼서
무장을 억압하고 중국인 귀족들을 정
어 황제의들은 아들로
실었습니다 이들 세력간에 암로
내부에서 붕괴돼서 결국 북주의 나라를
빼앗겼 마지막 황제 고인은 공과 난왕
등의 명장을 모함으로 처형하는 바람에
멸망하게 됩니다 사진을 잠깐
보실까요 북제의 부와
어때요 우리나라의 석을 연상하지
않습니까이 석도 백제 장인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이 조각품은
조그
맣 여러분 혹시 능을 아시나요 북제의
공으로 뛰어난 무술을 자랑하지만 너무
얼굴이
잘생겨서 미남이기 때문에 적들이
무서워질 않았다죠 그래서 흉한 을
전쟁에 섰다고 하는데요 그가 금성에서
북주의 군사들을 물리친 무용담을 난왕
진국이라는 기약 즉 가면 국으로
만들어서 중국에서는 아주 매우
유명합니다 지금 중국의 사대 미남을
라면은이 난을 꼭 빼놓지
않습니다 북제 유물로는 석제 반가상
있는데요 연대에 걸터 앉아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들어서게 되고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그런
불상입니다이 북제의
반가사유상은 한국의 국보 제
78호와 매우
유사하죠
이렇듯 북제 백제 사이는 유사한
유물들이 있는데 이또한
진평 백제와 깊은 관련성이 있어
보입니다 한국의 반가사유상은 모두
백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일본의 국보 이론은 경도시 광에 있는
목조 반가 사상인데이 역시 백제에서
제작한 것으로 일본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남와 백제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남자는 중국 남북조
시대 강남 지방에서 건국한 남조의 두
번째
왕조 북조의 북제 또 춘추전국 시대의
제나라를 구별하고 해서 남재 또는
초대 황제인 소도시의 성을 따라서
소재라고 부르기도 하죠 송나라 말기
소도 성은 능 출신의 하급 병사로서
유효범 반란을 진압해서 권력을 은 뒤
황제를 폐하고 479년 제로부터 선을
받아서 제나라를
건국했습니다 그뒤 도성이 유한지 3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 무제가 다시를
했지요 그 뒤로 여섯 황제까지 세습을
했지만 악행과 무법으로
되다가 마지막 황제 소원은 황족 많이
죽였지만 많은 중까지 죽여서 또
전에서는 과대한 사치를 해서 정치를
매우
어지럽습니다 황족 중 한 사람에서었던
소라는 사람이
있는데이 형이 그 시에게 사해를 당한
일을 대의 명분으로 내세워서 병력을
일으켜서 황제를 살해하고 화제를
했으나 다음에 화재로부터 서을 받아서
양나라를
건국했습니다이 남의 역사서에는 과
같은 글이 있어요 위나라는 수십만
기병으로 백제를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는이를 대파했다
것입니다 백제와 북위의 전투를 기록한
부분인데요 정작 우리나라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서기 488 위나라 군사가
보내서 침공을 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했다라는 딱 한 구절만 남 남아
있습니다
역사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다른 나라와의 전쟁 사이인데
우리나라의 정사라는 삼국사기는 이렇게
중요한 전쟁 이야기를 단
한마디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삼국 사계를 집필한
김부식 등의 역사관이 편협한 그 심리
때문이었습니다 그가이 백제의
진출과 그 정에서 보이는 전투에 대한
기록을 감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김 씨고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의
중이었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을 할
만한 솔직히 자질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재사를 들쳐 있다가는
당시 조공국으로 자세를 낮추고 있었던
고려로 금나라의 치를 안볼 수도
편이었어요 이래저래 당나라와 신라에게
패한 백제는 대륙을 호령하고 해상
국가로서 동양 최대의 문명을 누린
우리 역사의 최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김부식에 정치적인
호위를 가져야 했었던 송나라 사신
서의
입장에서는
박강식도
잘짓고 잘알아 학사로 신복을 받으니
그보다 더 위에 설 사람은 없다라고
그를 한껏 띄어놓고
있었습니다이 한마디가 우리 역사에서
김부식에 면제부를 주는 듯 했지만
20세기 초 근대 역사학자인 신채호의
의해 고려부터 조선까지 1천년의
역사에서 묘청의 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다이 사건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왕의 군사가 반역자를 친
그런 전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니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는
독립적이며적인 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김부식이 쓰지 못한 대륙
백제의 결과를 남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군 근 명이 떨치고 일어나서
충성과 애국의 결과로 국란을
물리쳤습니다 뜻과 용기가 참으로
굳세며 그 위험이 명장과 나란이 할
수 있으니 사직을 지키는 단단한
울타리입니다 수고를 헤아리고 공로를
논하여 마땅히 군대의 사계를 높여야
합니다 지금은 당연히 이해에 따라
임시 수를 줬는데 은혜를 베풀어서
정식를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영장군 면중 적근은 시급한
국물을 도와줬고 무업 또한 라하니
가행 장군 도군
도한의 권장군 팔중 여고는 약관의
나이에 왕을 보자하고 일찍부터 충성을
보였으니 가행 장군
아치 권장군 여력은 본 충성스럽고
문무가 라하니 가행 용양 장군
메로왕 광무 장군 여고는 시급한
공무의 충성을 다하고 밝게 국정을
베푸니 가행 권장군 불사 후에 봉화리
합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이 중요한
사건을 국내 사서가 아닌 양서 대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나
양나라 모두 세상에서 사라지자이
역사의 기록은 모두 잊혀지게
됐죠 이것을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린
것은 20세기 말에 국사 찾기
협의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남자의
기록에
위나라가 수십만의 기병을 백제로
보냈다고
했는데요이 기병은 말을 타고 싸우는
병사를 말합니다
그럼 중국 북방 있었던 위나라가
기병을 바다를 뛰어넘어서 대로
진격했던
말인가요 그 많은 말이 이동하여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그 한반도 남부의
백제를 쳐들어
왔다면 고구려를 거쳐서 백제를
공격해야 하는데이는 말이 안
되죠 당시 북의 국력은 고구려를
압도할 정도가 되지
못하고 북방의 었던
고구려가
타국 병사가 자기들의 영토를 지나치는
것을 그대로 용납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위나라가 말을 배에 띄워서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했다는
이야기인데 바다에 수십만 마리의 말을
실어서
항해할만큼 위나라의 해군력은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조선 술이나
하양 술이 동양에서
최고였어요 거기다가 자존심강한 저들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패한 역사를
기록해 놨으니 거짓말일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이 모든 미스터리의
해답은 바로 대륙
제였다 대륙 백제는 중국에서 광활한
영토를 갈고 있는 강대국
있습니다 백만 기병 을 갖고 있는
대제국이 바로 백제
있습니다 백제의 영토는 한반도에만
있지 않고 중국의
산동반도 요동 요소 양자 양안 그리고
외국의 남북
지방이었다 아직도 이런 사실은 중국의
자존심과 일본의 식민사관의 보호를
받으면서이를 들쳐 아는 사자들을
오히려
국수주의자 몰아서 비웃고
있습니다 오늘은 백제의 우방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한양대학교 막자
명예교수 이정구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