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의 전투 없이 8개의 도시를 장악했던 홍경래의 난, 조선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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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악의 암흑기 세도정치 2부. 홍경래의 난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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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조선
최약의 암흑기였던 세도 정치의 역사
2부입니다 정조사 후 순조가
등극했으며 순조의 나이가 어려 증조
할머니였던 정순 왕우가 수남 청장을
맡았습니다 정순왕후는 자신의 집안이
소속되어 있던 붕당 벽파 중심의
국정을 펼쳐 나가며 옛 정조의 측근
세력들 중 남인 기여을 완전하게
탄압했습니다 정조의 측근 붕당 중
가장 세력이 컸던 파을 처리하지는
않았죠 수렴 청정 3년 후 정순
항원은 수렴 청정을 거두었고 이때
순조의 장인 어른이었던 김조순의
필두로 한 파 세력들이 벽파 세력에
공세를가 있습니다 정순왕후는 다시
수렴 청정에 나서려고 했으나
실패했으며 1805년 사망하자
정순왕후 사 후 시파는 벽파를
완벽하게 조선의 조정에서 몰아냈고
이로써 그 오랜 붕당 정치가 끝이
났죠 파가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자
이제 붕당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고
시파의 우두머리였던 김조순이 조정대
최고의 권세를 진 권신이 되었습니다
김조순의 가문이었던 안동김씨 집안의
사람들이 대거 조선 조정에 등용되었고
혹은 안동김 씨의 주를 된 사람들이
그 다음으로 등용되었고 바야 후로
안동김 씨에 의한 세도 정치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김조순이 인물은
결코 평면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보통 이러한 권신들의 간신으로 남길
마련인데 김조순의 간신이 해석하는
관점은 거의 없다시피합니다 김조순은
정순 왕후가 사망한 일에 대부분의
관직을 거절하며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순왕후 수름 청정할 때
정순왕후가 김조순게 여러 주요 관직을
제소했고 정순왕후가 스스로 수렴
청정을 거둘 때도 김조순이 조정에
있으니 어린 순조를 잘 보필하여
국정을 운영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죠 그렇지만 김조순은 바로
정순왕후 배신을 때리고 벽파 세력들을
모두
몰아냈던 정순왕후가 죽고 벽파를 전부
몰아낸 이후에 순조가 내리는 관직을
김조순은 한사코 거절했습니다 순조는
김조순게 군형 중 하나였던 금 이영의
금의 대장직을 맡아 달려면 다섯
번이나 부탁했지만 김조순은 끝까지
거절했습니다 김조순은 이런 말을
남겼죠 국구 가 조정의 정사에 참여할
수 없음은 국조 일의 오랜 규정이며
아름다운 일입니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 어른이다 보니 보통 국왕의
장인어른 즉 국구 게는 영도용 부사는
명예직이 주어졌는데 그게 거의
전부였죠 하물며 순조는 김조순의
재산을 하사하고 해도 김조수아
있습니다 김조수아 주었다고 하며
나중에는 관서 지방 즉 평안도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이 심각하다며 지역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방안도
상소문으로 올리는 등 깨어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울 가문 하나의
모든 권력이 독점되는 정치가 썩을 수
있다며 자신의 안동김 씨 가문 외에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집안이었던
반남박씨 집안의 사람들을 우대하며
조정의 요직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죠
그래서 수빈 박씨의 아버지 즉 순조의
외할아버지는 어영청 어영 대장과
의금부의 수정인 파행 그 부사를 여임
있으며 수빈 박씨의 오빠들 그러니까
순조의 외삼촌도 막강한 권력을
소유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안동김 씨와 반남박 씨 모두 묶어서
세도 장치 세도 가문이라고 손가락질을
하긴 했지만요 조선 왕족 실록에는
김조순의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김조순은 용이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귀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 밖게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의 급지 아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에 깊이 알아 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조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본래 성격이
우하에라 인륜을 돈독해 닦았음 그
미침이 더러 범박 이르렀으며 또
언행으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리 순상 아이 많았으니 대게 공업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칭찬 1세기 괜히
정초가 김조순은 절대 신임했던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여기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비록 김조순이
튀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조중의 고의 관직과 실무자들은 전부
안동 김씨 집안이나 안동 김씨와
결탁한 반남박씨 집안이나 혹은 안동
김씨의 주를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김조순이 쉽게 조종하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더군다나
김조순 스스로 는 명예 직이라
여겼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비변사의
총책임자로 되어 있었는데 설령
김조순이 한 번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안 해봤다고 해도 이게
의미가 없는게 조선 후기 조선의 모든
정치는 정승이 소속되어 있는
의정부보다는 비변사에서
이루어졌습니다이 비변사의 핵심 멤버들
모두 김조순의 사람들이었죠 즉 마쿠의
흑막은 김조순이 맞았으며 당장에
불거져 나오지 않았을뿐 암세포를
군데군데 뿌려놓은 장본인은 김조순이
있죠 김조순이 지역 차별을 철폐하자는
상소를 올리면 뭐 합니까 김조순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던 조선의 조정은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순조가 굶주린
백성들에게 구유를 해 주는 정도가
전부였지 옛날에 정조처럼 개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정책들은 전혀 부제
있죠 그러다 결국이 사건이 터져
버립니다 평안도 용강이라면 곳에 몰락
양반가문 출신의 홍경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몰락한
가문이었던만큼 홍경래는 상민의 가까운
신 었죠 그래도 홍경래 나름 가문을
일으켜 보고자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1차 시험에 통과하지만 최종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합니다 과거 낙방에
홍경래는 분노하는데 홍경래는 절대
자기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낙방한 이유는 평안도 지방 즉 관서
지방에 대한 조선 정부의 노골적인
지역 차별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너무
피해망상이 아고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정말로 관서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은 조선 전기 일에
만연했습니다 조선 500년의 역사를
통틀어 관서지방 출신 의 고관 대작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관서 지방에
대한 지역 차별이 매우 심했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홍경래는 풍수 지리도 능했다고 하는데
홍경일뿐 아니라 관사 지방 출신의
중인 이상 계급은 설령 양반이라고
해도 설령 과거에 급제를 해도 조정의
부름을 받지 못하니 생기 유지가
어려워 다들 풍수지리를 통해 사람들
집이나 묘자리 알아봐 주는 직관 일을
해야만 했죠 또 지역 차별에 심하다는
건 그만큼 평안도로 부임한 지방관들이
백성들을 상대로 가렴주구를 일삼으며
폭리를 취하기 쉽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엔 탐관 우리들이
유독 많았죠 그나마 병자 오란 때까진
북방의 여진족 혹은 만주족이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국방 차원에서라도
신경을 쓰던 곳이기는 했지만 청나라에
조공을 한 이후로는 전쟁에 걱정이
없으니 평안도는 관심 받게
대상이었습니다 홍경래의 난 몇 개월
전에는 평안도 국산에서 수령에 지나친
폭리에 참지 못한 백성 수백명이
관하라 습격한 일도 있었습니다
1811년 12월 순조로 이젠
20대로 접어들었을 무렵 조선정부의
불만이 맡던 홍경래가 평안도 가사
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이 반란이 그
유명한 홍경래인 아니죠 홍경래는
스스로를 평서대 원수라고 자칭하여
부원수 김사용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역시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평소에
많았던 와중에 홍경래와 만나 함께
반란을 기획하였으며 마찬가지로 태천
출신의 서자 우군칙 반란 초기부터
참여하였고 반란이 최초로 일어났던
가산에서 광산을 운영하던 대부호
이희저가 반란의 자금을 담당하였습니다
이희저와 우군칙이 광산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공고에 수많은 광산
노동자들이 가산에 몰려들었습니다 아까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이 워낙
심해서 양반 사대부들조차도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고 말씀드렸죠 그럼
일반 농민들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요
그래서 토지를 잃거나 지주에게 쫓겨나
광산 노동자가 된 경우가 매우
많았습니다 홍경래 일당은 이렇게 모은
광산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힘들고 사회적 멸시를
받는게 전부 조정이 부패하고 세도
가문들이 득실되는 이라며 한양으로
가서 정부를 전복하고 선전한 뒤
반란을 일으킨 겁니다 입니다 그간
누적되어 왔던 평안도 사람들의 불만이
터진 것일까요 초기 1천명 정도
규모였던 반란군의 규모는 점점 더
커집니다 최초 발랑지 있던 가산에서
가산 군수가 백성들을 모으려고 했지만
가산의 백성들이 홍경 내의 반란군에
호응을 했다고 하죠 홍경 내의
반란군은 가산을 나와 평안도의
타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순식간에
용천 선천 태천 철산 등 여덟 개
도시들을 장악했습니다 이때 지방관들이
참 한심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이
홍경래의 반란군은 싸움 한 번 없이
여덟 개의 도시들을 장악했습니다 즉
각 거울의 지방관들이 싸우지도 않고
곧바로 홍경래에게 항복을 해 버린
거죠 타 지역의 농민 및 광산
노동자들도 전부 반란군에 가다
하였습니다 심지어 돈이 많은 상인
개층 들까지도
합류하였으며 막론한 반란군이 있죠
그만큼 평안도 지방 사람들이 쌓인게
많았던 겁니다 하지만 역시 전문
군인들이 아니다 보니 조정에서 급하게
꾸려 파견한 관군과 평안도 안주에서
싸우자 곧바로 깨지고 반란군은
평안도의 정주성 들어갔습니다 다만
정주성 전투만 그은 쉽지 않았는데요
몇차 에 걸친 관군의 공격에도
반란군은 모두 막아냅니다 무려
3개월을 버티죠 순조는 암행어사
경험이 있던 정만석 그 평안도로 보내
선정을 베풀면서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반란군의 명분이 얕아지고 말이죠
더구다나 정주 성에선 갈수록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관군은
정조성 아래 땅굴을 파고 그곳에
상당한 양의 화약을 넣고 폭파시켜
성벽을 파괴했습니다 그대로 정조성
안에 닥친 관구는 반란군을 진입했는데
문제는 이때 반란군이 아니어도 정조성
안에 살던 백성이란 이유만으로 반란에
동참 했다며 민간인들 마저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약 2,000명이 죽었으며
홍경래 역시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이렇게 세도 정치의 암흑기에 무을
여는 것만 같은 홍경 레이나는
1812년 반란 약 4 5개월 만에
진압되었다 이나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세도정치 기의 역사 3부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 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