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격렬했던 전투는 어떤 전투일까? 시간순으로 보는 역사를 바꿔버린 가장 위대한 50가지 전투 26 ~ 50번째 통합본 2부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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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가장 위대한 전투 TOP50 26~50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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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대규모 전쟁에선 역사적 의의가 굉장히 중요한 전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골라봤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top 50
시대의 순서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26번째 1632년 유럽의 종교전쟁 30년 전쟁 중 가장 하이라이트 전투
였던 리친 전투입니다.
유럽의 크리스트교가 종교개혁 으로 인해 구교와 신교로 다니고
종교를 핑계로 유럽의 각 국가들이 저마다의 이해관계로 인해 국제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중 독일의 리친이란 곳에서 벌어진 리친
전투가 가장 큰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신교측 사령관은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이세였고 구교측 사령관은
신성로마제국의 알브레이트폰 발렌 슈타인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전징사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겼을 만큼 리친 전투
는 드림매치이기도 했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이세는 경우전 기병대 하카펠리타트를 이끌며
맹활약을 해서 신교측이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구스타프 이세가 전투 도중 전사했고 사상자수는 비율로 따지면
신교측이 더 컸죠.
27번째 1709년 유럽 발트의 주도권을 두고 러시아와 스웨덴에 싸웠던
전쟁 대북방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폴타바 전투입니다.
러시아의 짜르는 다르마니 표트르 대제 거기에 덴마크 노르웨이 폴란드
리투아니아까지 러시아에 가세합니다.
대북방 전쟁은 가히 북유럽과 동유럽 한의 30년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폴타바 전투는 대북방 전쟁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였습니다.
불리한 관계에서도 스웨덴은 초기 에 승승장구를 하며 스웨덴의 국왕
칼 12세가 러시아 원정에 나섰습니다.
현 우크라이나의 폴타바라는 곳에서 러시아가 스웨덴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하여 스웨덴에 큰 피해를 주 었습니다.
폴타바 전투를 기점으로 대북방 전쟁을 러시아로 전세가 기울었고
스웨덴은 전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스웨덴은 발트의 주변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주는 영토를 러시아에 넘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대북방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황제를 칭하며 러시아
제국의 역사가 시작하고요.
28번째 1781년 미국 독립전쟁의 종지부를 지었던 요크타운 전투입니다.
미 동부 13개주 식민지들이 영국 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으킨
독립전쟁은 사실 계란으로 바위치기 였습니다.
다만 조지 워싱턴의 분전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의 외교와 사교
덕에 유럽에서 영국을 싫어하는 국가들의 원조를 받았죠.
결정적으로 1781년 조지 워싱턴 의 대륙군과 민병대는 육지에서
프랑스 해군이 바다에서 요크타운 에 고립되어 있던 영국군을 집중
공격했고 2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영국의 코널리스 사령관이
항복합니다.
요크타운 전투의 패배로 영국 내각 이 뒤바뀌었고 계속되는 전쟁에
영국 의회도 여러 부담을 겪고 있었습니다.
결국 프랑스의 중재로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승인해주죠.
29번째 1805년 나폴레옹의 팽창에 영국이 처음으로 제동을 걸었던
트라팔 가해전입니다.
유럽을 재패했던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어떻게 못하는 국가가 섬나라 영국
이었습니다.
나폴레옹과 프랑스는 해전에는 자신이 없었거든요.
나름 나폴레옹 입장에서 야심작으로 해군을 키워보기는 하지만
스페인 남쪽 바다 트라팔과 곧 인근 해역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
이 맞붙습니다.
프랑스 사령관은 해전 경험이 별로 없던 빌레브 제독이었고
영국 사령관은 영국판 이순신이라 불리는 넬슨 제독이었습니다.
넬슨은 일반적인 함대 진법인 단종 진을 구사하지 않았고
냅다 돌격해버리는 전술로 영국 이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영국군 전사자는 500명이 되지 않았지만 프랑스 측 전사자는 4300여 명
다만 전투 도중 영국의 넬슨 제독 이 저격되어 전사했죠.
서른번째 1805년 나폴레옹 전쟁사 에서 전설적인 전투로 평가받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입니다.
바다에서는 트라팔카 해전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했지만
동시에 나폴레옹이 직접 지휘하는 프랑스 육군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현 슬로바키아의 아우스터리츠 에서
나폴레옹의 신들린 전술로 프랑스 가 크게 승리합니다.
도망친 러시아 오스트리아 병사 들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려고 했는데
프랑스 포병들이 대포를 강에다가 퍼부어 언 강을 부숴버렸고
그 위에 있던 러시아 오스트리아 군은 찬물에 떨어져 익사해버렸죠.
서른한번째 1815년 나폴레옹의 마지막 몰락이었던 워털루 전투입니다.
고공행진하던 나폴레옹이었지만 러시아 원정의 실패
그리고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진 나폴레옹은 패위되어 엘바섬으로 유별해갑니다.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해 다시 황제에 등극했고
영국 프로이슨 네덜란드 등 대프랑스 동맹군이 나폴레옹을 막으러 집결했죠.
현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집니다.
초반엔 나폴레옹이 우세했지만 현장 사령관이 기병과 보병 활용을
개판으로 하는 바람에 전열이 무너졌고
심지어 프로이슨의 병력까지 영국군에 합류하자
나폴레옹은 더이상 전투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워털루 전투에서 패전한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별을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외롭게 사망합니다.
32번째 1863년 미국 남북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 전투입니다.
노예제를 반대하던 링컨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노예제의 찬성주였던 남부의 주들이 연방으로부터 독립했고
남부주의 독립을 인정할 수 없다며 남북전쟁 일명 11화가 발발했습니다.
남북전쟁의 전선은 크게 북부의 율리시스 그랜트가 남부를 침공하는 전선
남부의 로버트 리가 북부를 침공하는 전선
이렇게 두 가지였습니다.
로버트 리의 남부군은 북부의 수도 워싱턴 dc 인근까지 위협하는데
로버트 리의 남부군을 물리쳤던 전투가 게티즈버그 전투였습니다.
게티즈버그에서 북부군의 맹공격 으로 인해 남부군 3400명이 전사하고
180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6500명이 실종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게티즈버그 전투 이후 남부는 다시는 승기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북부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게 컸죠.
전투 4개월 뒤 링컨 대통령은 전투 당시 희생된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게티즈버그를 찾았습니다.
이곳에서 링컨은 게티즈버그 연설 이라는 인류 역사상 길이길이 남을
명연설을 남겼죠.
33번째 1895년 청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웨이하이웨이 해전입니다.
19세기 후반 만주와 조선을 두고 일본 청나라 러시아가 경쟁했습니다.
이중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 전하면서 가장 먼저 아웃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주력부대였던 이홍정이 북양함대는 당시 세계 8위급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아시아에선 최대 규모였습니다.
이런 해군력을 갖췄음에도 일본에게 패전한 건 청일전쟁 발발 전 서태우
등 부패한 청나라 황실이 북양함대 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렸고
또 혹시나 북양함대가 피해를 입으면 자신의 입지가 약해질까 두려웠던
이홍정이 매우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북양함대의 기지는 산둥반도 끝자락 에 있는 웨이하이웨이인데요.
일본은 웨이하이웨이로 일본 해군 을 투입해 북양함대에 막대한 화력을
퍼부었습니다.
누가 봐도 상황이 청나라 해군 에 불리해지자 일본 측에서는 북양함대
의 사령관이었던 정여창에게 항복 을 권유했습니다.
정여창은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으나 항복을 하자는 병사들의 쿠데타
가 일어나기도 했죠.
정여창은 독을 마시고 자살했으며 뒤이어 부하장교도도 상관 정여창
을 뒤따랐고 북양함대는 괴멸되었습니다.
서른 네번째 1905년 러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쓰시마해전입니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아웃되고 이제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조선
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경쟁하였 고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러일전쟁
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넘어 만주로 가서 아주 치열하게 만주를 장악했죠
.
러시아는 러시아 최강함대였던 발티칸대를 보내기로 합니다.
다만 발티칸대는 발티해에서 출발 해 지구 반바퀴를 돌아오나라 시간이
걸렸고 그사이 일본은 만주를 장악 했죠.
조선의 지내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는
발티칸대가 거의 다 도착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쓰시마해업에
숨어있다가 지나가는 발티칸대를 매복 공격했습니다.
일본 함대는 발티칸대의 기함과 발티칸대의 사령관들 함선을 위주로
집중폭격해 러시아 함대 21척이 침몰했고 7척은 낙포되었으며 3척
정도만 도주해 성공해 쓰시마해전 에서 일본이 승리했습니다.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러시아까지 아웃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가 되었죠.
서른다섯번째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산의 참호전입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인류 전쟁 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전투들로
손꼽힙니다.
협상군과 동맹국 모두 프랑스 벨기에 지대에서 양측이 서로 더 길고 더
큰 참호를 파기 위해서 참호에 참호 가 계속 이어지며 서부전산에서는
거대한 참호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참호전이 왜 끔찍하냐면 일단 위생 상태가 최악이죠.
참호전에서 진격하기 위해선 우선 상대측의 폭격을 엄청 때려야 합니다.
서로 폭격을 퍼붓다 보니 땅엔 웅덩이가 생기고 이때 비가 내리면
진흙이 형성되면서 진군이 더 힘들어 집니다.
진흙을 밟으면서 진군하면 상대방 공격에 대응하기가 너무 힘들죠
그리고 서로가 진지 앞쪽에 철조망 을 무수히만해 설치해놓는데 철조망
으로 적군의 진군을 더디게 만들 때 그때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겁니다.
양측 모두 그저 군사들 물량으로 집어넣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에
밀어붙이기만 하다가 아무런 소득 없이 피해만 늘렸죠.
흔히들 1차 세계대전 최악의 3대 전투로 베르덴 전투 쏨 전투 파스
샹달 전투로 꼽습니다.
베르덴 전투 때는 도합 7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쏨 전투 때는 도합 1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파스 샹달 전투 때는 독가스까지 살포하면서
도합 40만에서 80만 정도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서른여섯번째는 1차 세계대전 도중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이어졌던
갈리폴리 전투입니다.
처음에는 중립굽을 폐방한 오스만 트리크는
러시아만큼을 견제하고자 독일과 더 친하게 지내는데
이는 협상국에게 중립으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장관 처칠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군의 지원 없이 해군 단독으로 다르다넬리스 해업에 갈리폴리를
장악하고 2주 안에 오스만 트리크의 수도 이스탄부를
함락시키겠다고 자신했죠.
다르다넬스 해업은 유럽에서 트리키아 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고대시대에는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반도로 들어간 입구였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나설 때 출발지였던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1915년 2월 프랑스 해군이 살짝 지원한 연합군 해군이
다르다넬스 해업으로 들어왔는데 좁은 해업의 양해안에
포대들이 질비해 있었습니다.
오스만 트리크 해안포대의 집중 포화와
오스만 트리크 해군이 야간에 몰래 설치해둔 기례에
연합군 해군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상륙 작전이 무려 6주나 지연되었죠.
해군의 고전에 영국 정부는 결국 육군을 지원해주었습니다.
영국 육군은 갈리폴리 뒤편 해안에 상륙해서
해안포대를 뒤에서 제압할 계획이었는데
첫 출발 영국군은 오스만 트리크의 군사력을 너무 약봤죠.
갈리폴리 상륙 작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국군의 축차 투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꺼번에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 조금씩 나누어 군대를 보내는 방식인데
이렇게 파편화된 부대는 오스만 트리크가 막을만 했던 거죠.
케말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트리크 군은 매우 용맹하게 싸웠고
1916년 1월까지 계속 병력만 잃어가던 영국군은
퇴각을 결정했습니다.
채 1년이 안되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연합군은 57만 명 중 25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연합군에 참여했던 호주군과 뉴질랜드 군의 피해도 극심했죠.
37번째
1920년 소비에트의 적화 진출을 폴란드가 막아냈던 바르샤바 전투입니다.
1917년 러시아에선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여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소비에트 정권의 지도자 레니는
소비에트에 반발하는 백군의 저항에 싸우며
적백내전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1919년엔 전세계 공산주의를 단결시키기 위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이른바 코민테른을 창설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위성국가들을 적화시키기 위한 전쟁에 나섰죠.
대부분 소비에트에게 정복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으나
이를 유일하게 막은 나라가 폴란드였습니다.
처음엔 폴란드도 국경지대에서부터 계속 밀렸으나
결정적으로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군이 소비에트군을 포위 후 선멸전을 펼쳐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폴란드 측 전사자는 4,500명이었지만
소비에트 측 전사자는 무려 2만 명 이상
아직까지도 폴란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전투가 바르샤바 전투이며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기에
바르샤바 전투의 승리는 폴란드인들에게
엄청난 민족주의적 감정을 부추겨주었죠.
38번째
1942년 6월 2차 세계대전 일부였던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 같았던 전투 미드웨이 해전입니다.
본디 중립국을 표방했던 미국이었지만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받은 뒤
미국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로 하고
일본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태평양 전쟁은 크게 세 방면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양상이었는데요.
먼저 맨 북쪽에 알래스카에서부터 쿠렐열도를 통해
일본의 후카이도로 들어가려던 루트
두번째로 맨 남쪽 호주 북쪽 파피아 뉴기니와
과달카넬에서부터 치고 올라가
솔로문 제도와 필리핀을 거쳐
일본의 남쪽으로 들어가려던 루트
그리고 마지막 그 사이 가운데
태평양의 재해권을 두고 벌이는 전투였죠.
이 중 태평양의 재해권을 두고 벌인 전투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습니다.
미드웨이는 미국 태평양 함대의 본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의 함대는 미드웨이를 치기 위해
내척의 항공모함을 이끌고 미드웨이로 가지만
미국 암호해독반이 일본의 미드웨이 침공 날짜와 병력수를
다 해독해냈습니다.
암호해독반만 3만 명이었다죠.
그리고 미국의 함재기들이
우연히 일본 항공모함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고
미국의 급강화 폭격기들은
득달같이 일본 항공모함에 달려들어
일본 내척의 항공모함 중 3척을 격침시킵니다.
남은 한 척도 끝내 침몰하죠.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모함이 총 6척이었는데
그 중 4척이 침몰했으니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은 수세에 몰리고
더 이상 팽창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습니다.
서른 아홉 번째
1942년 하반기에 걸쳐
2차 세계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벌어졌던
엘 알라메인 전투입니다.
엘 알라메인 전투는 2차 세계대전 최대 전차전으로
많은 밀득들이 환장하는 전투 중 하나죠.
전차전 하면 항상 거론되는 사막의 여우
독일의 롯멜은 천지적인 전차전술로 북아프리카 일대를 장악하고
연합군의 반격에 대응하기 위해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으로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엘 알라메인은 사막이라는 지형 덕에 방어에는 유리했지만
공격에는 취약했습니다.
그래서 롯멜의 독일군도 연합군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냈지만
반격에는 거듭 실패합니다.
영국의 처칠은 사령관을 몽고메리 로 교체했고
몽고메리는 막대한 전차들을 동원해 더 강하게 공세를 펼칩니다.
아무리 엘 알라메인이 방어에 유리했다지만
독일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또 롯멜이 개인건강 악화로 지휘를 하지 못합니다.
비록 영국군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지만
끝내 엘 알라메인을 돌파하는 데 성공
전선에 복귀한 롯멜은 부랴부랴 튀니지 방면으로 후퇴하죠.
마흔번째 1942년부터 1943년까지
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벌어졌던
스타링그라드 전투입니다.
히틀러가 전쟁 전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는데
수세에 몰린 히틀러는 자원 확보차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며
끝내 소련과 전쟁을 시작합니다.
바로 독소전쟁이죠.
스타링그라드는 그 자체로 규모가 큰 공업도시였으며
또 지리적 요충지였습니다.
스타링그라드는 누구나 격전지가 될 것이라고 여겼고
소련의 스타링은 군인 민간인 구별 없이
최대한 가용한 인력들을 스타링그라드로 집어넣었습니다.
스타링의 스타링그라드 사수 작전은 인력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정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독일도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작전이 도루묵이 되기에
모든 공력을 다 때려부었습니다.
약 반년간 이런 소모전과 총력전 이 계속되었고
먼저 포기한 건 독일이었죠.
스타링그라드 전투의 패전으로 독소전쟁은 이제
소련이 진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죠.
그러나 독일과 동맹국 사상자는 약 85만 명
스타링그라드를 사수하기 위해 희생했던 소련의 사상자는
무려 112만 명이었고 민간인 비율도 매우 컸습니다.
41번째 1944년 3월에서 7월까지
미얀마 인도전선에서 벌어진 인팔 전투입니다.
미얀마 인도전선은 영국과 일본의 싸움이었는데
일본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쳐 영국군을 무력화시키고
인도를 독립시켜준다는 믿기로 인도와 영국을 이간질한 뒤
당시 중일전쟁까지 수행하고 있던 일본이기에
미얀마에서 중국 서남쪽으로 칠 인팔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그러나 인팔 작전을 수행하던 사령관이
다름 아닌 조롱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무타구치 레니아
무타구치 레니아는 보급에 대한 그 어떤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리하게 진군했습니다.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 풀을 먹으며 진군하면 된다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고 실제로 그렇게 진군하려 했습니다.
결국 모든 작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고
인팔 전투는 실패해버렸죠.
일본군은 병력 절반 이상을 잃어버리며
2차 세계대전 미얀마 인도전선은 굉장히 빨리 끝나버립니다.
참고로 인팔 전투에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의
9명의 특수부대 인면전구 공작대를 투입시키기도 했습니다.
이 특수부대는 감청 진단살포 포로신문 등의 임무를 맡았고
영국군이 중국 장데스에게 이대를 극찬했다고 하죠.
이미 이 시점은 북아프리카를 재패한 연합군이
이탈리아로 넘어가 이탈리아를 무력화시킨 시점이었으며
이제 유럽 본토 진공만을 남겨놓고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직전을 감행합니다.
독일도 연합군이 상륙직전을 할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상륙지점이 노르망디 보다는 칼레가 더 적합해서
칼레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연합군도 칼레로 상륙할 거라고 거짓 정보를 계속 흘렸습니다.
미국, 영국, 캐나다 연합군이 총 노르망디 5가지 해변에서 상륙을 시도했고
1차 선봉 대마을 17만명이 투입되었던
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직전이었으며
디데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죠.
유타 해변처럼 저항이 그렇게 크지 않았던 상륙해변도 있었지만
오마하 해변처럼 엄청난 격전이 이루어졌던 상륙해변도 있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 장면이며
끝끝내 노르망디 상륙직전은 성공했고
연합군은 교두보 확보 후 유럽 본토를 진격했죠.
43번째 1944년 10월 태평양 전쟁에서 일어났던 레이테만 해전입니다.
태평양 전쟁의 3가지 전선 중 최남부 전선에선
미군이 파표현 유기니와 과달카넬에서부터 치고 올라가
솔로몬 제도를 거쳐 필리핀까지 공격합니다.
필리핀은 사실상 일본 입장에서는 마지막 방어선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했고
미군은 필리핀의 레이테만에 성공적으로 상륙합니다.
이때 메가더가 아에프 리턴즈라는 명언을 넘겼죠.
일본은 필리핀 레이테만을 탈환하기 위해
우선 재해권 확보를 위해 항공무안과 함대를 투입시켰습니다.
미 해군도 재해권을 지키기 위해 벌어진 해전이 레이테만 해전이며
양측에게 레이테만 해전은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사활을 걸었고
레이테만 해전은 인류 해전 역사상 최대의 규모의 전투로 남아있고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규모입니다.
일본은 가미카지까지 동원했지만 끝내 레이테만 해전에서 패전했고
이후 필리핀에 완전히 빼앗기죠.
필리핀 장악 후 미군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까지 장악하고
일본 본토로 쳐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전에 원자폭탄을 투하해 전쟁을 끝냈죠.
마흔 네번째 1948년 11월에서부터 1949년 1월까지 벌어진
중국 국공내전의 마지막 전투 화이하이 전투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패망하면서 중일 전쟁이 끝나자
이제 중국의 패권을 두고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 등의 공산당이 맞붙습니다.
바로 국공내전이죠.
국민당의 병력은 430만명으로 정규군이 200만명
공산당은 병력이 120만명으로 정규군은 60만명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국민당이 압도적이죠.
하지만 공산당은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지만
미국은 장제스에게 당장 마오쩌등과 화해하지 않으면
무기 및 물장 공급을 중단하겠다면서 실제로 끊어버렸습니다.
화이하이 전투는 국공내전의 3대 전투로
화이하이는 중국 동남부 화이허강이 흐르는 안후이성과 장수성 일대를 말합니다.
화이하이 일대가 무너지면 경제중심지였던 상하이와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이 바로 그 다음이었기에
최종 방어선이나 다름없었는데
66일 동안 싸워 공산당 사상자 13만명
국민당 사상자 55만명을 기록하며
결국은 국민당군이 무너집니다.
화이하이 전투 때 공산당은 국민당의 우수한 무기들을 전부 놓이켰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국민당을 상대로
핑진전투에서 공산당이 최종 승리하며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중국이 들어섰죠.
45번째 1950년 9월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꾸었던 인천 상륙적전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시작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공격 그리고 미군과 유엔군도 계산하지 못한
북한군의 선전에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서
당장이라도 적화통일이 될 마당이었습니다.
유엔군 사용관 메가단은 사태를 타개할 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를 끊어버려 북한군의 보급을 차단함과 동시에
낙동강에 내려와 있는 북한군을 고립시킬 수 있는 상륙적전을 기획했습니다.
사실 메가단은 낙동강 전선으로 밀리기 전부터
인천 상륙적전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상부 승인이 나지 않다가 낙동강 전선에 밀리니깐 승인이 떨어졌던거죠.
단 미국 본국에선 상륙지점으로 인천만큼은 반대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죠.
미 국방부에서 계산한 인천 상륙적전의 성공 확률은 5천분의 1
하지만 무대법 메가도가 누가 반대한다고 안할 사람이 아니죠.
사실 중국과 소련에서도 유엔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단 그렇게 빨리 상륙적전이 가맹될거란걸 몰랐고
또 김일성의 온갖 신경은 낙동강 전선에 가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부터 7시 사이에
첫번째 상륙지점 월미도의 그린비치에 상륙하는 데 성공합니다.
지도를 보시면 월미도가 뾰족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월미도를 제압하지 않으면 양쪽에서 폭격을 받을 수가 있어서
월미도가 우선이었습니다.
오후 2시부터 지금의 인천역 방면에 레드비치와
지금의 인하대 방면에 블루비치 양 방면에서 상륙하였고
다음날 16일이 되면 인천을 완전하게 장악했습니다.
인천 상륙적전은 대성공이었고
낙동강 전선에 있던 모든 북한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으며
양 2주 후 서울까지 수복해냅니다.
메가도는 인천 상륙적전을 지휘하면서
인천 상륙적전은 전쟁 사이 길이길이 남을 명장면이라며
자화자찬하였죠.
마흔여섯번째
1954년 베트남이 프랑스군을 몰아 냈던 dnbf 전투입니다.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죠.
하지만 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깁니다.
일본의 패전 후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했고
베트남에서 프랑스군을 막아내며 일어난 전쟁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입니다.
베트남은 프랑스로부터 너무 멀어
추가지원이나 보급지원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반면
베트남은 똑 붙어있는 중국의 원조를 받아 냅니다.
베트남군은 더 적극적으로 프랑스군을 몰아세웠고
결국 프랑스는 전군 철수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철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군의 포위를 뚫어야만 했는데
당시 프랑스군은 베트남 북쪽의 dnbf에 모여
그것을 요새화하여 수송하고 있었습니다.
dnbf는 고립된 지역이라
물자 수송이나 보급이 다소 힘들고
많은 적들에 포위되면 전멸한다는 위험이 있지만
적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으면
효율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트남군은 모을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모아
무려 5만 명의 병력을 모으고
dnbf에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프랑스군은 1만 명 남짓이었죠.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남군은 dnbf에 집중포격을 가했고
3일 만에 프랑스 군대가 작살이 납니다.
dnbf에 있는 프랑스군은
약 2개월 동안 베트남군의 일방적인 공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1만여 명 중 8천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전원전사했죠.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완전하게 독립할 수 있었던 전투가
dnbf 전투였던 거죠.
47번째
1968년 베트남 전쟁 중 북베트남의 기습 역습이었던
테트 공세입니다.
테트는 설 연휴, 구정을 말합니다.
구정 기간에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습니다.
1968년의 구정도 미군은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죠.
하지만 북베트남 및 베트콩 연합 8만 명이 관례를 깨고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를 기습해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정공세 혹은 테트공세라고 하죠.
미군은 구정공세로 상실한 도시대를 찾는 전투를 이어나갔고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야만 했습니다.
후의 탈환전은 25일간 쉬지 않고 싸웠으며
케산 전투는 구정공세 전투들 중
가장 치열하고 잔인했던 전쟁으로 꼽히죠.
구정공세로 말미암은 남베트남 전역에서의 탈환전 결과
북베트남 역시 어마어마한 피해를 받고
이때 베트콩이 사실상 전멸되었다고 합니다.
구정공세로 인한 각종 탈환전은 베트남 전쟁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각지에서 치러진 전투들은 방송을 타고 그대로 미국으로 전해졌고
민간인 학살 장면 도시 및 문화재가 불타는 장면까지 그대로 전파를 타
이 미국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반전요론이 들끓게 되었죠.
48번째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중 최대의 격전지이자
대규모 전차전이 벌어졌던 곤란고원 전투입니다.
4차례에 걸쳐 벌어진 중동전쟁 중
용킨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르는 마지막 4차 중동전쟁이 가장 규모가 컸습니다.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남쪽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막고
북쪽에서 시리아를 막는 양상 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에는 곤란고원이 있습니다.
시리아는 헬기를 적극 이용하면서 고원전투에 임했고
시리아 전체 부대도 갑자기 정해와 되어서
곤란고원을 지키던 이스라엘 기갑 부대를 전멸시켰죠.
수적으로 시리아 전차수가 이스라엘 전차수보다 10배가량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은 10대에서 20대 사이의 부대들이 조금씩 조금씩 모여서
싸웠고 결과는 이스라엘의 역전승 이었습니다.
특히 칼린이 중령이 이끄는 이스라엘 제77 기갑대대가
10대 1의 싸움에서 시리아군을 후퇴시켰고
시리아군은 전차들을 다 버리고 도망가죠.
물론 이스라엘 피해도 컸어요.
생존자가 한 명만 남은 중대나 대대도 있었죠.
이스라엘은 막타를 날리기 위해 기갑 부대를 긁어모아서 후퇴하는
시리아 전차를 쫓았고 곤란고원 마지막 전차전에서
시리아 전차 1200대의 70% 이상이 격파됩니다.
이렇게 곤란고원은 이스라엘이 사수하죠.
49번째 1991년 걸프전쟁 때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에 대공습 을 감행했던 사막의 폭풍적전입니다.
걸프전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이라크를 저지하고자 미국 주도 로
총 34개 국가의 다국적군이 편성되어 벌인 전쟁이랍니다.
걸프전은 크게 쿠웨이트 침공 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진출하려는
이라크를 방어하던 사막 보호작전 과
이젠 다국적군이 반격에 나서 이라크를 침공했던
사막의 폭풍적전으로 나뉩니다.
미군은 우수한 공군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로
이라크의 전투기나 전투시설을 전부 부숴버리고
이라크 곳곳에 압도적인 폭격을 퍼부어
이라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폭격을 퍼부은 시간을 다 합해보면 무려 1000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막대한 공습을 퍼붓고 전차부대와 보병 지상군을 투입하니
이라크는 금세 무너졌죠.
사막의 폭풍적전으로 이라크 사상자가 15만명에 이르렀지만
다국적군의 사상자는 300명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50번째
2022년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맹공을 막아냈던
키유 전투입니다.
2022년 푸틴의 지시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전쟁이 터진 시점에는 모두가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앙담하게 봤습니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길 리 없잖아요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이겼습니다.
아직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는 순전히 푸틴의 자존심 때문이고
사실상 우크라이나가 방어에 성공했다고 봐야죠.
우크라이나도 전쟁 초기 때까지는 순식간에 국경지대와 요충지대를 점령당하고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유까지 진격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구심점이 되어 주어 결사항쟁에 나섰고
키유 사수에 성공합니다.
키유 전투 이후 러시아군은 곳곳에서 패전하면서 밀리기 시작했고
끝내 우크라이나에선 빼앗긴 주요 도시들을 전부 되찾았죠.
러시아군이 패전한 이유에 대해선 전문가들이 저마다의 주장을 발표하는데
우선 우크라이나도 미국의 무기 원조를 많이 받았고
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침공 전쟁이었던 만큼
이 병사들 사기 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났고
러시아군의 지휘체계도 엉망이었다 고 하죠.
여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가장 위대한 전투 탑50이었습니다.
혹시 제가 빠뜨린 전투가 있다거나 꼭 더 강조되어야 하는 전투들이
있다면 댓글로 공유해주세요.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