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역사 그 자체, 흥선대원군은 왜 항상 논란이 될까? 흥선대원군 파헤치기 한편으로 몰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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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파헤치기 한편으로 몰아보기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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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 입니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자신이 남긴 족족이 굉장히 거대해서
향후 한국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흥선대원군일텐데 요.
흥선대원군 척화비 등의 단어는 외래 문화에 대해 극단적으로 거부
감을 표출하고 보수적인 뜻을 담은 인터넷 밈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한국 역사에 있어서 흥선 대원군의 존재감이 압도적인데
하지만 동시에 흥선대원군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못 알려져 있거나 혹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도 많습니다.
어쩌면 깜짝 놀라실 수도 있는 흥선대원군 파헤치기 시리즈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어서 붙여준 호칭이고 그 이전에
자기는 흥선군이었습니다.
흥선군의 본명은 이하응 호는 석파죠.
흥선군의 족보는 이렇습니다.
사도세자의 서자 중 은신군이라고 있습니다.
정조의 이복 동생인거죠.
이 은신군의 양아들이 흥선대원 군의 아버지 남현군입니다.
즉 족보상으로는 흥선군의 할아버지 가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 동생인겁니다.
적통은 아니라는 소리죠.
하지만 조선의 22대왕 정조 23대왕 순조 24대왕 헌종의 계보가 헌종
때에 끊깁니다.
헌종이 아들 없이 20대 초반의 나이에 사망하거든요.
그래서 당시 조선의 조정을 주도 하던 안동김씨 일파는 강화도령
이라 부르던 반개 출신의 왕실 종친 을 25대왕 철종으로 옹립했습니다.
그런데 25대왕 철종도 후사 없이 사망합니다.
그럼 또다시 왕실 반개 출신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해야만 했죠.
그래서 세간에 알려져 있기론 반개 출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면 흥선
군과 그 가족들도 후보에 들어가는 것이고
흥선군이 안동김씨의 환심을 사고자 일부러 안동김씨의 연회에 참석
하며 가랑이 사이를 기고 안동김씨 에 누군가가 던진 음식을 개처럼
먹고 자존심 다 버려가면서 마치 자신은 권력에 큰 욕심이 없음을
보였고 허수아비 왕을 옹립하고 싶어 했던 안동김씨가 흥선군의
연기에 속아 흥선군의 아들을 차기 구강으로 동의해 주었다고 하죠.
또 일부러 껄렁한 모습을 보이고 자 거렁뱅이처럼 헤진 옷을 입고
다니며 시정잡배들과 파라코라는 무리를 만들어 왕실 체면 떨어뜨리는
일을 해갖고 안동김씨 일파들이 뭐 저런 놈이라면 자기 아들의 왕이
되어도 무능한 왕의 아버지로 가만히 있을 줄 알았다는 거죠.
하지만 이는 조금만 생각해도 말이 안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두정치기를 거치며 조선의 정치와 사회가 무너졌다고 해도
아직 성리학을 절대시하던 시대에 지배층들에게는 체면이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만약 흥선군의 저런 거지 행보가 사실이라면 오히려 왕으로 추대되기
에 마이너스 요소라는 거죠.
흥선군의 평판은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흥선군이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커녕 오히려 왕실종친들의 특권 확보
에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 특히 흥선군은 시서화에 능통해
당대 화단과 문단에서 흥선군의 능력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흥선군은 특히 난초그림에 정통 했는데 흥선군의 스승이 다름아닌
조선 후기 지성계의 거물이었던 추사 김정이였죠.
사대부들은 흥선군의 난초그림을 높이사 높은 가격에 사가기도 했습니다.
흥선군은 관직경험도 있고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도 않았죠.
흥선군은 왕족이었기 때문에 이미 철종시기부터 궁궐출입을 자주
하며 조대비 등 왕실 어른들이나 사대부들과도 친분이 있었고요.
무엇보다 아무리 반개 출신의 왕족 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고 한들
그래도 그나마 적통에서 가까운 왕족을 추대해야 했고
그런 점에서 흥선군의 가족들은 굉장히 높은 후계 서열이었습니다.
갓대기나 흥선군의 평판도 좋으니 흥선군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는 데 큰 반대가 없었고 철종도 죽기 전에 흥선군이나 그의
아들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을 비추었다고도 합니다.
따라서 야사로만 전해지는 흥선 군의 그 불량한 모습은
후대에 급화된 것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흥선군이 아니라 흥선 군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까요
평판이 높았던건 흥선군이지 흥선 군의 아들이 아니잖아요
흥선군도 본인 입장에선 자기가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죠 어차피 자기가 왕이 되면 자기 아들
도 다음 왕이 될텐데요 실제로 흥선군을 왕으로 추대하자
고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원칙적으로 흥선군은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왕위 계승은 반드시 선대왕보다 족보상 학렬이 낮아야 한다는 원칙
이 있었고 흥선군의 족보가 철종 보다 낮지
않았기에 반드시 흥선군의 아들이 차기 국왕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동김씨의 1파의 당수이자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김좌근의
주도로 그리고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조
대위의 최종 승인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1863년 조선의 26대 왕 고종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흥선군은 왕의 아버지 자격 으로 흥선 대원군이 되었죠
자 그럼 여기서 또 다른 의문점이 생깁니다.
장자승계 원칙이 일반적인 조선 시대에서 왜 흥선군은 자신의 장남
이재면이 아니라 차남 이명복을 왕으로 세웠을까요
흥선군은 족보 학렬상 왕이 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왕의 준하는 권력을 누리고자 했습니다.
장남 이재면은 당시 나이 19살로 충분히 친정을 해도 되는 나이였
죠.
반면 둘째 아들 이명복은 나이 12살로 반드시 누군가의 섭정이
필요했습니다.
순전히 흥선군의 개인적인 야심으로 둘째 아들 이명복을 내세웠지만
왕이 계승의 최종 결정권자였던 조대비가 큰 반대 없이 승인해준
건 정확한 사연은 역사에 전해지진 않지만
조대비와 흥선군 사이에 사전에 거래를 하거나 합의를 받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12살에 이명복이 고종으로 등극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기로 합니다.
다만 조대비의 수렴청정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 실질적으로는 흥선
대웅군의 섭정이었죠.
흥선 대웅군이 아무리 왕의 아버지 라고 하지만 자기만 높아진 것일
뿐 정치에 개입해도 된다는 자격 은 없습니다.
대왕군은 관직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사각에서 보듯이 흥선 대웅군이 조정회의에 참석
해서 정책을 펼치는 구조가 아니 었습니다.
흥선 대웅군은 운현궁이라는 사저 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주요 고위직
관료들이 운현궁에서 흥선 대웅 군과 다 결정을 하고 조정회의에서는
마치 조대비의 명령인 것처럼 그 정책들이 발표되는 구조였죠.
조대비가 섭정자임에도 실질적인 통치를 흥선 대웅군에게 이림한
건 그녀는 너무 늙은 노년의 나이라 정치를 주도하기 애매했고 차라리
패기로운 흥선 대웅군에게 맡겨 조선의 정치를 개편하는 쪽이 더
합리적이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흥선 대웅군이 섭정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뜻에 따라준 조대비에게
보답하고 왕권을 개혁하고자 안동 김씨를 숙청했다고도 알려져 있죠
흥선 대웅군이 조정 대신들에게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으로 만들고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들고 남대문 을 높여 3층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여러 공들은 라고 했다고 합니다.
태산을 깎아 평지를 만든다는 건 노론의 힘을 약화시킨다는 뜻이고
남대문을 높인다는 건 남인들을 중용하겠다고 하는 건데
그리고 흥선 대웅군이 저 말을 한 건 조선왕족실록에는 없답니다.
오히려 흥선 대웅군은 안동 김씨 일파를 대단히 존중해 주었습니다.
안동 김씨의 당수였던 김작은의 경우 워낙 노년이라 애당초 조정
에 더이상 있을 수가 없어서 흥선 대웅군은 김작은에게 명예직을
주었으며 김작은의 양아들이자 안동 김씨의 새로운 세대였던 김병기
도 처음에는 지방관직을 전전하긴 했으나 곧바로 다시 중앙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고종이 왕이 되기 전부터 이미 김병기 는 흥선 대웅군과 친분이 있었고
요.
안동 김씨의 또 다른 실권자였던 김병학은 흥선 대웅군이 영의정
에 임명해 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안동 김씨 중에 유능한 자들이 있다면 흥선 대웅군은 적극
등용해 주었죠.
만약 흥선 대웅군이 피해숙청을 감행했더라면 그간 안동 김씨의
권세가 있었기에 어마어마한 저항 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흥선 대웅군은 본인이 구상하는 계약을 하나도 시행을
못하고 안동 김씨랑 싸우노라 집권기를 보냈겠죠.
안동 김씨 입장에서도 흥선 대웅 군과 굳이 척을 지기보다는 흥선
대웅군과 같은 편을 해서 그 기반 을 유지하는 쪽이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이었을 것이고요.
그래서 안동 김씨 가문에서 흥선 대웅군의 정책 일부분을 지지해
주기도 했습니다.
안동 김씨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흥선 대웅군의 그 파격적인 계약
들은 불가능했을 것이고요.
흥선 대웅군이 교묘하고 영악하게 정치제를 잘했던 게 서로 정적인
조대비와 안동 김씨를 모두 끌어 안았죠.
다만 고종 제위 1년이었던 1864년 흥선 대웅군이 세도 정치의 권력
기관이었던 비변사를 없애버리면서 결과적으로는 세도 정치가 점점
희미해진 건 맞습니다.
비변사 협파에도 안동 김씨가 저항 하지 않았던 건 어쨌든 흥선 대웅
군이 안동 김씨를 우대해주고 있으며 비변사도 곧바로 폐지한 게 아니라
처음엔 권한을 축소했다가 이듬 에 완전히 폐지했고 비변사를 의정부
에 통합시킨다는 명목을 없앴기 때문에 큰 반발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이전부터 비변사가 워낙 부정적인 기구라고 욕을 먹는
여론이 팽배해 있었죠.
이처럼 흥선 대웅군은 초기에 아주 이상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다져
갔습니다.
바야흐로 흥선 대왕군의 세상이 될 수 있었죠.
역시 섭정을 시작한 지 이제 1년 후 넘겼던 1865년 흥선 대웅군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경복궁 중권지시를 내렸습니다.
경복궁 중권 사업은 1868년까지 이어졌는데 이 사이에 백성들이
강도 높은 노역에 시달렸으며 심지어 중간에 경복궁에 화재사고가 있었음
경복궁 중권으로 워낙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었고 이를 메우고자 흥선
대웅군은 안동김씨 집안의 영의정 김병학의 제안에 따라 기존 상평
통보의 100배 가치에 해당하는 당백전 을 발행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도 했죠.
경복궁 중권은 이때도 부담이 워낙 크다며 반대가 잇따르기도 했지만
끝내 흥선 대웅군은 경복궁을 중권 해 냈습니다.
오늘날 경복궁의 원형이 흥선 대웅군 때 중권된 공거래랍니다.
흥선 대웅군의 섭중 기간에 그의 골머리를 앓게 했던 외부적 요소
도 있었습니다.
바로 서양 세력이었죠.
이 당시 러시아가 청나로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를 가져와 조선과
국경을 맞대니 불안했던 흥선 대웅 군은 프랑스와 수교를 맺어 러시아
를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천하의 흥선 대웅군이 처음엔 서양 과 먼저 수교를 맺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프랑스 측 선교사들이 흥선 대웅군 신경 거슬리는 짓들을 많이
해서 화가 난 흥선 대웅군은 집권 3년 후였던 1866년 선교사들에게
조선을 나가거나 사형당하거나 를 선택하라고 했는데 다 순교하겠다고
하자 천주교 신자 8천여 명을 처형한 역대급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을 병인 박해라고 하는데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도 처형
되었죠.
자국민이 죽었다는 정보가 퍼지자 당시 청나라에 있던 프랑스 병력
이 조선의 강화도를 침공합니다.
이 전쟁이 병인 양유죠.
2년 후 1868년에는 독일인 오페르트 가 흥선 대웅군의 아버지 남현군
의 묘를 독을 하려고 하기도 했고 또 3년 후 1871년엔 이번엔 미국
이 강화도로 쳐들어와 신미양유 를 일으킵니다.
연이은 서양애들의 침략과 만행 에 피가 거꾸로 솟은 흥선 대웅군
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절대 서양 애들과 수교를 안 맺겠다고
선언했죠.
오죽하면 신미양유 때 미국인들이 조선인 포로들을 보내주겠다며
협상을 제안해왔을 때 흥선 대웅 군은 서양애들과 절대 뭐 안 맺
겠다며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놈들은 내 할 바가 아니라며
거절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척화비의 내용은 서양의 오랑캐가 침범해오니 그들과 싸우지 않겠다
고 하는 것은 곧 허친을 주장하는 것이오 허친을 주장하면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였죠.
이 이후로 흥선 대웅군은 국가재정 확충작업에 들어섭니다.
경복궁 중관하면서도 느꼈고 여러 차례 침략받으면서도 더 절실하게
느꼈죠.
국가에 돈이 없다는 걸.
조선은 세도정치 이후로 일제강점기 때까지 만성 적자재정이었습니다.
흥선 대웅군은 호포법을 실시해 세금제도를 개혁했습니다.
호포법의 내용을 아주 쉽게 설명 드리면 그동안 양반은 내지 않던
세금을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거 아니냐구요 이 조선시대에는 포를 납부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반의 경우 여러 이유로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되어서
포를 납부하지 않아도 되었죠.
그러나 포를 과세하는 기준을 호별로 즉 집집마다로 바꾼 겁니다.
양반들은 웬만하면 다 자가를 가지고 있기에 포를 납부해야만 했죠.
흥선 대웅군은 또 서원을 철폐해 버리는데
이 서원은 정부에서 재산도 주고 면세 혜택도 줍니다.
교육기관이라는 서원의 취지는 좋지만
어느새 서원이 양반들의 탈세창고 가 되어주고 있었거든요.
이런 서원이 전국에 너무 많아서 흥선 대웅군이 딱 47개만 남기고
한 600개 정도를 철폐해 버립니다.
호포법이랑 서원 철폐가 1871년 한 해에 동시에 일어난 개혁들입니다.
이러니 사대부들과 유승들이 흥선 대웅군에게 어마어마한 불만을 품게 됩니다.
흥선 대웅군의 섭정은 어디까지나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한다는 명분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등극하고 3년 후 고종이 15살이 됐을 때 수렴청정을 철회했습니다.
그럼에도 흥선 대웅군은 섭정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었죠.
그러던 중 1871년 흥선 대웅군이 호포법과 서원 철폐라는 강수를 두면서
흥선 대웅군에 대한 사대부와 유승들의 불만이 가득 쌓였고
1873년 비서실에서 일하던 동부승지 최익현이 상소문을 올립니다.
상소문은 당연히 신화가 왕에게 올리는 것이기에
최익현이 흥선 대웅군에게 올린 상소가 아니라 고종에게 올린 상소였는데
이 상소문은 흥선 대웅군의 정책과 횡포를 수위 높게 까내리는 내용이었습니다.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벽을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험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발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흥선 대웅군을 겨냥한 거죠.
최익현은 당대 사대부와 유림들의 압도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던 상징적인 존재였습니다.
이런 최익현이 총대 메고 직원을 날린 거죠.
이에 대해 이제는 20대 초반이 된 고종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고종이 아버지 흥선 대웅군을 실드 쳐주지 않고
흥선 대웅군을 비방한 최익현을 비호해 주는 거죠.
조정 내에는 흥선 대웅군의 측근 세력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들이 불편한 기세를 보이자 고종은 그대들의 상소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아버지 흥선 대웅군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흥선 대웅군이 워낙 강수로 사대부와 유림들을 적으로 돌렸기에
대부분 최익현의 뜻에 동조하기도 했죠.
최익현은 새로운 상소문을 다시 올립니다.
이를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목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의되게 되었고 오는 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인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역시 흥선대원군을 비방하며 고종이 이젠 진짜 친정을 시작하라는 상소였죠.
고종은 흥선대원군 측근 신하들을 내뚫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1873년 물살을 거슬리지 못하고 대세에 따라
운현궁을 나와 경기도 양주의 별장에 집구하면서
운현궁 정치는 끝이 납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10년 만이었죠.
다만 최익현의 경우 아무리 그래도 대원군에게 지나치게 불충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고종은 최익현을 제주도로 유배보내지만
이는 형식적인 절차였고 금세 유배를 풀어줍니다.
아시겠지만 최익현의 상소와 고종의 최익현 지키기는 한 사람의 빅피처였습니다.
바로 고종의 아내이자 흥선대원군의 며느리 명성황후민씨였죠.
명성황후민씨는 고종제위 3년차였던 1866년 고종과 혼이 나며 왕비가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왕비를 간택하는 데 있어 대단히 신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처럼 세도 정치로 번질 수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왕실의 체면을 높이려던 흥선대원군 입장에서는
아무 가문에서나 왕비를 간택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여흥민씨 집안이 제격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내내 여흥민씨는 몇 차례 왕비를 배출한 적이 있는 명문 가문이었지만
조선 후기에서 세도 정치기에 이르면 권력의 중심부에서나 벗어나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아내이자 고종의 엄마도 여흥민씨 가문이었습니다.
또 흥선대원군의 엄마도 여흥민씨 가문이었습니다.
즉 흥선대원군은 여흥민씨 가문과 밀접한 사이였고
흥선대원군은 여흥민씨와 힘을 합치면 독보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봐서
여흥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했죠.
하지만 이는 흥선대원군의 최악의 실책이었습니다.
명송왕후가 훗날 순종이 되는 고종의 적장자를 낳기 전에
한 명을 더 출산을 했었는데 거의 태어나자마자 죽습니다.
후계가 탄탄해야 왕실의 권위와 왕권도 강해지는 법
이때리기 점으로 흥선대원군은 명송왕후를 노골적으로 미워했다고 합니다.
강단있는 여자였던 명송왕후도 흥선대원군에게 앙심을 품었고
명송왕후는 고종에게 친정을 하라고 계속 부추겼고
이 조정내에 신하들을 포습했으며
결정적으로 최익현에게 상소문을 올리라고
뒤에서 사주한 사람도 명송왕후였답니다.
이렇게 흥선대원군의 섭정이 끝나자
명송왕후는 여흥민씨 집안의 사람들을 적극 등용해 조정을 가득 채웠죠.
경기도 양주의 별장으로 가있던 흥선대원군은 얼마 안에서 우년공으로 돌아오지만
우년공을 찾는 발길은 끊겼고
조정은 여흥민씨 집안, 즉 명송왕후의 외척들이 다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도 여기서 포기할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흥선대원군의 섭정 종료가 며느리 명송왕후의 작품이었던 만큼
고종의 친정이라 해도 명송왕후의 입금이 엄청났고
그녀의 여흥민씨 집안이 득세하니 세도정치나 다름없었죠.
하여한 흥선대원군은 아들 내외를 매우 미워했고
이는 고종 명송왕후 부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874년엔 명송왕후의 양오빠인 민승호의 집에 함이 하나 배달되었습니다.
함은 열쇠와 함께 자물쇠가 걸어져 있었는데
의아했던 민승호가 이 함이 뭐지? 하고 열쇠를 자물쇠를 여는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나
현장에 있던 명송왕후의 친엄마와 민승호가 사망해버립니다.
민승호가 죽기 직전 다죽어가는 목소리로
우년공을 몇 번 읊줄이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민승호 폭사사건은 아직까지도 진범이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고종과 명송왕후는 물증은 없지만 심증으로는
확실하게 흥선대원군의 소행이라고 의심하고 있었죠.
따라서 명송왕후에게 흥선대원군은
자기 일가족을 살해한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던 겁니다.
금쪽이 흥선대원군은 하야 이후 내내
쿠데타를 일으켜 고종을 패위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패위한 뒤
자신의 서자였던 이재선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려고
과거 자신을 따랐던 일부 신하들과 함께 쿠데타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이 쿠데타 기도가 사전에 발각되어 누설되었고
흥선대원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했던 신하들은 전부
의금부에 하혹되어 역모죄로 사형당했습니다.
다만 정작 이재선은 이 쿠데타에 참여하진 않았는데
놀란 이재선이 알아서 자수를 했건만
그 역시 제주도를 유배를 간 뒤 사약을 받아 사사되었죠.
흥선대원군은 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이로써 흥선대원군도 자기가 직접 옹립한 아들 고종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거죠.
친정을 시작한 고종과 명송왕후 정권은
이전의 흥선대원군 섭정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자
통상수교를 거부했던 흥선대원군과 달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근대화에 일부러 근대식 신식군대 별기군을 조직했는데
문제는 기존의 군인들은 참밥친세 가 된 나머지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월급조차 제대로 못받았는데
많은 분들이 기존의 구식군인들이
별기군이라는 신식군대의 창설로 인해
월급을 지급받지 못했다고 아시는데
구식군인들은 별기군 창설 이전부터
월급을 제때 받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와중에 정부의 지원을 많이 받는 신식군대가 창설되니
불만이 가득 쌓였고
결정적으로 밀린 월급을 주겠다며 준 월급에선
쌀이 아닌 모래같은 불순물들이 첨가되어 있었죠.
결국 1882년 참다참다 폭발한 구식군인들은
이모군란이라는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모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은
이 모든 것이 다 명송황후와 그녀의 지만
여흥민씨 가문에서 쓸데없이 개양하고
무능하고 각종 비리를 저지른 것이라며
그들을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반란군 일부는 명송황후를 잡으러 군걸로 침입했고
일부는 별기군 창설의 주동자이자
구식군인들에게 월급을 그 따위로 준 장본인
민겸호를 잡으러 민겸호 집으로 향했고
또 일부는 흥선대원군을 만나러
운현궁으로 향했습니다.
명송황후는 군거를 나와 도망치는 데 성공하지만
민겸호는 도망치다가 붙잡혔고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운현궁으로 향한 반란군 일부는
흥선대원군에게 복귀해달라 간청했죠.
이렇게 흥선대원군은 궁으로 입건하여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명송황후는 이때 충청도로 피신을 까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은 명송황후가 죽었다고 알리면서
심지어 장례까지 치룹니다.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한 지 겨우 한 달 정도 됐을 때
인천을 통해 청나라군 3천명이 입항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한양까지 진입해 들어왔는데요.
조선에서 일어난 군란을 진압해 주겠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고종과 명송황후가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보낸 것이었죠.
청나라의 사령관이었던 마건충이
흥선대원군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군란 덕에 재집권했기에
청나라군의 개입이 탐탁치 않았죠.
마건충 사령관은 흥선대원군에게
조선의 외교 문제와 군사 문제에 대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고
흥선대원군은 모든 것을 예전처럼 돌려놓겠다고 대답합니다.
이때 청나라는 조선이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흥선대원군의 대답은 청나라로선 용인할 수가 없었죠.
결국 마건충은 군대를 불어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납치한 뒤
청나라 텐진으로 압송시켰습니다.
흥선대원군 납치 후 마건충의 청나라군은
왕십리와 이태원 등에서
구식 군인들의 반란을 완전하게 진압하여
이 모 군란은 끝이 납니다.
텐진으로 납치된 흥선대원군은
중국인들에게 각종 모욕을 받으며
3년간의 억류 생활을 겪습니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건강도 아주 안 좋아지고
자신의 가장 큰 취미였던
난초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죠.
1885년 청나라의 실세였던 이홍장은
흥선대원군을 귀국시키기로 합니다.
목적은 고종을 경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갑자기 청나라가 왜 그럴까요?
흥선대원군이 납치 시절을 보내던 사이
조선에서는 친명성황후파와
반명성황후파로 갈려 있었습니다.
이 두 세력은 각각 청나라와 우호적이어야 한다
아니다 일본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두 세력의 충돌로 갑신장변이라는 큰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청나라 입장에서는 명성황후를 예보할 수 밖에 없었고
고종도 명성황후와 같은 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갑신장변 이후 고종은
러시아의 우호적인 성향을 내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는 이런 고종을 경계하였고
이홍장은 고종 덜어 경고의 의미로 흥선대원군을 귀국시켰던 거죠.
그럼에도 고종은 1886년 처남 민영익을 시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몰래 접촉하게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는 청나라군의 사령관은 원색이었는데
고종이 민영익을 통해 베베르 공사와 만나려고 한 것이 원색에게 발각되었습니다.
원색에는 곧바로 청나라 본국의 이홍장에게 보고했고
이홍장과 원색에는 고종에게 매우 분노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 관계를 이용하려고 원색에게 접근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원색에게 고종을 끌어내리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내세운 새로운 왕은 자신의 첫째 아들이었던 이재면이었죠.
고종과 달리 이재면은 아버지 흥선대원군과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이홍장이 러시아와 극적 합의를 한 덕에
원색에도 굳이 흥선대원군을 도와줄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의 두 번째 고종 폐위 시도도 끝이 납니다.
결국 또다시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숨죽여 살고 있었는데
1890년 어느 한 동학도가 흥선대원군을 찾아와
한 2년 정도 운현궁에 머물며 흥선대원군의 식객이 됩니다.
바로 전봉준이었습니다.
이 지점이 정말 알 수 없는 역사의 미스테리인데
왜 전봉준이 뜬금없이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을 찾아왔을까요?
그것도 심지어 2년이나 머무르고요.
흥선대원군은 과거 섭정기간에 동학을 혹세무민의 사교라 깎아내리면서
동학의 창시자 최재호를 처형시키기도 하는 등 동학을 탄압했단 말이죠.
그런데 동학도인 전봉준의 흥선대원군을 찾아왔고
두 사람은 친분을 썼습니다.
1892년 운현궁의 일부 건물들이 화약으로 폭발하는 사건에 벌어졌고
비록 터지지는 않았지만
이재명과 그의 아들 이준용의 집에서도 폭발물들이 발견됩니다.
흥선대원군은 과거 민승우 폭사 사건과
연이훈 고중의 폐위 시도에 불만을 품은
명송황후의 소행이라고 단정하면 분노했습니다.
이젠 서로가 죽기를 원하는 지경에까지 온 거죠.
1894년엔 삼남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납니다.
조선정부가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할 여력이 안 되자
명송황후는 청나래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청나래가 군대를 파병하자 일본도 같이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은 인천에 성력한 뒤 경복궁을 점령
반일적 성향에 다분했던 고종과 명송황후를 감금합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을 데려와 강제로 재집권시킵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사실 하나
동학농민운동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랍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동자 전봉준이
흥선대원군과 모의해서 일으킨 계획적인 사건이었죠.
전라도 정읍 고부에서
탐관할인 조병갑의 가름주고에 폭발한 사건처럼 보이지만
2년간의 운영궁 식객 생활을 청산한 전봉준은
고부로 내려와 이미 대규모 밀란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명송황후를 패위시키고
전봉준은 동학의 자유와 사회개혁을 약속받는 거래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둘 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태가 벌어졌고
얼떨결에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한 겁니다.
다만 일제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흥선대원군은
다시 한번 동학군과 결탁해 일본군도 쓸어버리고
고종과 명송황후를 패위시킨 뒤
동학군은 제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켜
전주에서부터 한양을 향해 진격합니다.
그 규모는 자그마치 4만.
흥선대원군은 이준용 덜어 동학군을 진압하라며
군대를 이끌고 경기도 남부로 보냈으나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진짜 목적은
경기도 남부에서 북상한 동학군과 합류한 이후
한양을 장악할 계획이었죠.
그러니까 전봉준의 동학군은 전주에서 충청도를 무사히 지나
경기도 남부에만 도착하면 이기는 싸움이었습니다.
연합 동학군이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먼저 장악해야 할 것으로
충청도에서 가장 행정적으로 중요한 도시 공주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수쪽으로 많은 동학군은 전봉준의 지휘하에 3개 부대로 나누어
새 방면에서 공주를 옥죄고 공주의 우금치 고개에 모여
단숨에 공주 도심으로 진격해 공주를 장악하고자 했습니다.
일본군은 우세향 고지점을 장악하고 있었고
유인전으로 좁은 협곡으로 동학군을 유인하는 작전에 펼칩니다.
무엇보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게틀링건이나 서양식 화기들이
너무 넘사벽이었습니다.
동학군이 근대와 깔짝한 조선 관군을 이길 수는 있었어도
아주 오래전부터 철저한 근대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기기란 불가능했죠.
1894년 11월 약 일주일간 40에서 50차례에 걸친 공격을 퍼부었으나
사실상 학살에 가까운 무자비한 선멸전이 자행됐고
4만의 동학군 중 3천명만 살아서 도주합니다.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한 거죠.
그리고 흥선대원군이 동학군과 내통한 혐의가 들통나자
일본군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탄핵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도주한 전봉준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고
전봉준과 지도부를 찾기 위해 전라도와 충청도 마을을 돌아다니며
동학군 색출 작업을 명분으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해버렸습니다.
전봉준은 순창에 숨어있었으나 부하의 배신으로 부하가 신고하여 전봉준은 체포됩니다.
1894년 12월 중순 동학군의 자녀 세력은 충청도 대둔산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이듬해 1895년 1월 대둔산의 동학군은 전멸당했고
3월에 전봉준, 손하중, 최경선 등이 교수정의 처해자 죽음으로써
동학 문민운동은 대단원에 막을 내렸습니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진압하면서 동시에 청나라군과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간 청나라만을 믿었던 명성황후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뜻밖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기로 했는데
마찬가지로 요동반도를 원했던 러시아가 압박해
일본은 요동반도를 도로 뱉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동학 문민운동과 청일전쟁 이전부터 고종만큼은 친-러 성향을 내비쳤고
청나라가 아웃된 바당엔 이젠 명성황후도 고종과 더불어 친-러 외교를 지향하죠.
조선의 내각도 기존 친일적인 내각이 와해되고
친-러 성향을 가진 대신들로 친-러 세각이 새롭게 구성되었습니다.
가뜩이나 요동반도를 통해 낸 것도 억울한 일본은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가 친-러 외교를 펼치자
고종은 명성황후에게 휘둘리기만 하던 걸 알던 일본은
이 모든 게 명성황후의 결정으로 여기고 온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하기로 한 건 일본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조선 내에서는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던 조정 대신이 있었으니
바로 박영효였습니다.
박영효는 10여년 전 갑신정반을 일으킨 주동자였으며
갑신정반 실패 후 일본의 망명가에 있었으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흥선대원군을 탄핵시키자
그 대리인으로 박영효가 조선의 내각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나 고종과 명성황후의 압박으로 박영효 등 친일 내각이 해산되고
친-러 내각이 결성되자 박영효는 명성황후 암살 계획을 세웁니다만
발각되어 미수로 끝난 채 부리나케 일본으로 도망갑니다.
박영효는 일본 전개에 조선이 지금 러시아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간 조선이 러시아에 먹힌다고 경고합니다.
당시 일본 내각의 총리였던 이토 히루부미와 외무성에선
명성황후 처리 문제를 두고 논의가 오갔는데
이 시기에 새로 주조선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루는 어마어마한 강경파였고
명성황후를 제거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힌 상태였죠.
미우라 고루 공사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주요 실무진들을 포습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계획에 성공했을 때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떠맡을까봐
일부러 몰락 사무라이 낭인들을 고용했죠.
다만 궁궐에 있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선 일본군의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대신들 중 호응해줄 사람들이 필요했죠.
이 조선에도 수도 한양을 방해하는 수도방위사령부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수도방위사령부는 일본식 훈련을 받은 훈련대와
미군 장교들 아래서 미국식 훈련을 받는 시위대로 나뉩니다.
이 중 훈련대는 3대대까지 있었는데
1에서 3대대의 대대장들이 모두 친일파였고
전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동조하기로 합니다.
수도를 방해해야 하는 군부대가 수도를 위협하는 외적과 내통하기로 한거죠.
또 한사람 미우라 고로공사와 군부에서
이 명성황후 시해를 위해 주목한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미우라 고로공사는 친일대신이었던 유길준을 통해 흥선대원군을 포섭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그래도 얼마든지 궁궐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고종을 만난다는 명분으로 경복궁으로 들어간다면서
경복궁 문을 열면 병력들을 경복궁 안으로 밀어넣을 예정이었죠.
1895년 10월 8일 작전명 여우사냥
고용된 일본 사무라이들은 인천에 도착한 후
유길준과 훈련대 대대장들의 도움으로
별 무리없이 한양에 도착해 대기중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으로 들어가기로 한 시간은 새벽 3시
그런데 새벽 3시가 되어도 흥선대원군이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새벽 3시에 막 출발하고 있었다죠.
새벽 4시 더이상 흥선대원군을 기다릴 수 없었고
훈련대가 먼저 경복궁을 공격했습니다.
미국식 훈련을 받았다던 수도방해서령부 시위대가 훈련대와 교전했고
일부 교관들이 훈련대에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고 달래러 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도착한 건 새벽 5시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끝내 궁글문이 돌파당했습니다.
경복궁 안으로 일본 낭인 사무라이들이 들이대쳤습니다.
물론 그중엔 일본 군 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요.
그리고 결국 명송황후를 시행합니다.
아침이 밝자 미우라 고로공사가 직접 경복궁에 들어와
명송황후의 시신을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불태우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경복궁에 와있던 흥선대원군을 데리고 고종을 찾아가
이번 사태는 일본 측과는 무관한 낭인 사무라이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고 발뺌했죠.
미우라 고로공사는 본국에다가는 흥선대원군의 소행이었다고
흥선대원군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현장, 궁궐에 있었던 우크라이나인 건축가가 모든 걸 목격하고는
한양에 있던 각 외국 공사관들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고
일본은 국제적인 뒤탄을 받게 되었죠.
일본 본국에서는 미우라 고로공사를 강제 소환시킨 뒤 감옥에 넣었지만
며칠 후 바로 석방해줍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사실 명성황후 시의 사건인 을미사변엔
흥선대원군이 무언가 큰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 시의 모의를 사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말하지 않으며 방관했던 것만은 사실이죠.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오랜 갈등은 결국 이렇게 끝이 납니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살인사건에 얼마나 가담했는지
그때도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강력하게 개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훗날 고종은 자신의 생일에 참석하러 군과를 방문한
흥선대원군의 출입을 금지시켰다고 하죠.
을미사변을 계기로 극도의 공포를 느낀 고종은
1896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쳤고
이듬해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더 이상 왕이 아닌 황제를 칭하고
국호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칩니다.
대한제국 선포 1년 후였던 1898년
현 마포부 공도동의 별증에 머무르던 흥선대원군이
7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흥선대원군이 위독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고종은 한 번을 흥선대원군의 별장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으며
임종 때도 장례식 때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죽는 순간까지
주상은 언제 오냐며 고종을 찾았다죠.
이렇게 흥선대원군은 우리 한국사의 큰 족적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여러분은 흥선대원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