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논쟁이 의미가 아주 없는 게 아닌 이유는? 한국성리학의 계보 8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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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리학의 계보 8부. 예송논쟁이 의미가 아주 없는 게 아닌 이유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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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한국 성리학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국 성리학의 계모 8부입니다.
1659년 효종이 죽고 효종의 장남이 28대 왕 현종으로 직위했습니다.
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조정의 대신들과 왕실 사람들은
일정기간 상복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
자이대비라고 현종의 할머니이자 효종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친어머니는 아니고 효종이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계모였죠.
그래도 자이대비는 효종의 어머니 뻘이죠.
그러면 어머니 뻘 되는 자이대비 는 아들 뻘이 죽었을 때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입장 이 애매해진 겁니다.
성리학에서는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이 죽은 사람이 적장자이냐
아니냐를 두고 달라집니다.
죽은 효종은 적자이긴 하지만 장남은 아니죠.
형 소연세제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또 소연세제가 일찍 죽었 으니 효종을 장남으로 봐도 무방
하고요.
효종이 장남이냐 아니냐를 두고 신하들 의견이 갈린 겁니다.
이때 붕당 남인 소속의 윤휴가 효종 은 장남으로 보는게 맞다며 자이대비
가 상복을 3년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태환은 당시 예약의 정통가였던 송시열에게
자문을 구하는데요.
송시열은 효종을 장남으로 볼 수 없다며 자이대비가 상복을 1년을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선대왕을 장남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는 발언은 대단히 위험한 발언으로
번질 수가 있습니다.
영의정 정태환은 이게 혹시나 일이 너무 커질까봐 송시열의 말대로
자이대비가 상복을 1년을 입게 의견 을 모을테니 그 논거가 효종의 장남
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냥 관례대로 하는 것으로 정하자고 했죠.
3년상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의 국왕 들은 3년을 다 채우는 일이 많지
않았고 관례적으로 1년쯤 됐을 때 상복을 벗었거든요.
조선의 국왕인 현종과 현종의 할머니 자이대비가 송시열의 의견에 동의
하면서 자이대비는 상복을 1년만 입기로 합니다.
영의정 정태환은 송시열 말대로 하기는 하되 논거까지는 취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 습니다.
효종이 장남이냐 아니냐 논쟁이 커지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거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처음 현종에게 자이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관으로 3년을 주장했던 남인 소속 의 윤슈와 서인의 송시열 사이를
걱정했던 것도 있었습니다.
남인 소속의 윤슈와 서인 소속의 송시열은 서로 다른 붕당이었음
에도 젊은 시절에는 꽤 사이가 좋 았습니다.
그런데 효종 제위 시절 윤슈가 성리학 에 대해 중국의 주자가 해석한 문장
하나가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제기 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은 어디
감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의 해석에 토를 다냐며 주자의 해석
에 토를 다는 사람을 성리학자라고 할 수 없다고 윤슈에게 사문낸적
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사문낸적이란 성리학의 올바른 사성 과 도를 욕보이는 이단화라는 뜻
에 성리학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욕입니다.
이게 최초의 사문낸적 사건인데 최초의 사문낸적 사건이었던 만큼
이때는 큰 파장을 일으키진 않았 습니다.
윤슈와 송시열 사이가 이러할지 니 영의정 정태환은 나름 중재하려고
중재를 했던 거죠.
어쨌든 현중제위기에 할머니 자 이 대비가 상복을 1년을 입기로
결정이 되면서 뭐 큰 사건 없이 지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1년이 지나고 이제 슬슬 상복을 벗어도 되는 시점이 왔을 때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이 장문의 상소를 올려 상복을 3년으로 늘려야 한다고
논쟁에 재점화를 해버립니다.
허목의 근거가 굉장히 논리적이라 송시열을 따르는 서인 내부에서도
어느정도 남인의 주장에 동조하기 까지 했는데 이걸 송시열이 철저한
예약에 근거한 상소를 다시 올려 허목의 주장에 잘못했다고 반박
했죠.
송시열은 예학자의 선구자라고 하는 사기 김장생의 직계 제자였
잖아요.
더군다나 서인은 집권 여당이고 남인은 야당이기 때문에 허목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끝나나 싶더니 남인계열 의 어부사시사로 유명한 윤선도
가 이 자이 대비가 상복을 3년 입어야 하는게 맞다는 상소를 다시 올립니다.
다만 상소의 내용이 유교적 근거는 빈약하고 그냥 송시열은 왕실을
능멸하는 놈이라면 일방적으로 송시열을 디스하는 내용이 지배적
이었죠.
심지어 남인의 당수 허목과 함께 효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려는 송시열
을 처형하라고까지 상소했죠.
송시열의 제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서인들은 윤선도를 벌할 걸 주장
했고 심지어 송시열은 허목과 윤선 도를 사문난적으로 몰아갔죠.
현종은 서인들과 송시열의 등살에 떠밀려 윤선도에게 가장 높은 단계
의 유배령을 내립니다.
남인은 한국 성리학의 메카인 영남 학팔 출신이죠.
정치 권력은 서인이 집권여당이었 지만 한국 성리학의 메카인 영남
학팔 유생과 유림들은 퇴기의 이왕에 학풍을 이은 남인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윤선도가 유배를 가자 영남의 유림 들이 윤선도가 옳다는 상소를 거듭
올리죠.
현종 제외 7년에 이제 짜증이 난 현종이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언포를 놓으며 사단이 마무리되는 듯 했습니다.
이 사건을 1차 예속 논쟁이라고 합니다.
1차 예속 논쟁을 통해 송시열의 사상에 반대하는 남인들은 대거
실각했고 조정은 송시열의 추종자 들 혹은 그 제자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송시열은 관직에 나아갔다 나아가지 않았다를 반복했기에 관료로 볼
수 없었는데 그 누구보다 조정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
송시열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송시열은 스스로를 관료 가 아닌 성리학자를 자처했는데
송시열이 성리학계를 꽉 쥐게 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절대화가 되었습니다.
송시열은 율곡이의 제자의 제자 이면서 현실적인 정치개혁보다는
성리학의 명분과 원리에 입각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할 주자의 해석
에 그 누구도 반박을 해서는 안된다며 성리학의 절대화를 추구했죠.
송시열이 이렇게 강하게 나왔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선의 사회는 임진왜란 병자우란 을 거치며 급격하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신분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사대부들은 반상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며 크게 걱정하고 있었죠 .
집의 이대올로기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국가 자체가 힘이 사라진다고
판단하여 송시열은 변하는 시대상 과 반동적이로 성리학의 원리원칙
을 절대 고수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선의 예속논쟁을 보시면서 상복을 얼마나 입는게
뭐 얼마나 중요한거라고 저런거나 따지고 있으니 조선이 망하는게
아니냐며 비판하시는데요.
예속논쟁은 조선 정치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 성리학 역사에서 가장 큰 논쟁 이 16세기에는 이기논쟁이었고
17세기에는 예속논쟁이었습니다.
이기논쟁은 성리학의 이와 기의 관계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 논쟁으로 이현적 서경덕 에 이어 이황기대승 그리고 이황이
위로 이어졌죠.
하지만 이기논쟁은 정말 성리학 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벌어진
논쟁이었습니다.
이기논쟁이 정치에는 아무런 영향 을 주지 않았죠.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우란을 거친 이후에 벌어진 17세기의 예속
논쟁은 달랐습니다.
예속논쟁도 성리학의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벌어져서
그거 가지고 싸운게 아니냐고 볼 순 있지만 성리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예속논쟁은 이기논쟁과 달리 조선의 정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1차 예속논쟁에서 서인과 남인의 싸움은 예학을 잘못 해석했다는
논거로 싸우지만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건 저 논리를 주장하는 상대방의
정치적인 생명을 끊어버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 예속논쟁에서 승리한 송시열은 자신이 실각시킨 남인의
대신대를 사문난 쪽으로 몰아버렸 습니다.
송시열의 입지가 절대적으로 변하면서 행여나 송시열이 사문난 쪽으로
몰아버리면 이제부터는 정치인생의 생명이 끝나고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성리학에 대한 송시열의 해석에 반박을 할 수가
없었고 또 누구도 정치적으로 송시열 에게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1차 예속논쟁에 대해 아무런 의미 없는 걸로 싸운 조선의 쓸데없는
성리학 추앙하기 문화를 욕할게 아니라 이제 사상의 논쟁이 정치논쟁
으로 퍼졌고 건전한 논쟁이 아니라 상대방 죽이기 논쟁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사회가 급격히 보수화 되며 권력자가 말하는 이데올로기
에 함부로 반박을 해서는 안되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셔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조선의 18대왕 현종은 이런 송시열의 절대적인 입지를 매우
탐탁치 않아했습니다.
자신의 정권 초기에는 아무래도 송시열이 원로 대신이고 살림으로서
입지가 탄탄하고 자신도 왕권이 다소 불안정해서 어쩔 수 없이 송시열
과 서인들의 등 떠밀림에 움직이 긴 했지만 현종은 송시열을 벼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현종의 결정을 송시열이 제자들을 동원해 막은 적도 있었
죠.
그런데 어느샌가부터 현종은 송시열 의 제자가 아닌 특히 남인 계열들의
젊은 사대부들을 조금씩 조금씩 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인의 상징적 존재들을 욕하는 서인 대신들에게 벌을 내렸
죠.
시간이 더 지나면 송시열의 상소 에 현종이 대꾸도 안해준다거나
송시열이 예약을 주장할 때 뭐 옛날에는 전부 송시열의 예약에 따라
왕실 행사를 진행했으나 송시열 의 말에 반박하며 송시열의 예약
을 따르지 않는 일들도 일어났죠 .
현종 15년이었던 1674년 현종의 어머니 즉 효종의 아내 효숙 대비
가 사망합니다.
이때도 효종의 어머니 뻘대는 자이 대비는 살아있었는데 이번에는
자이 대비가 자기 며느리가 죽으면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예조에서는 처음에 1년을 입어야 한다고 보고했지만 신하들이
다시 생각해보니 송시열의 논리 로 따르면 9개월을 입는게 맞다고
생각해 수정안을 보고합니다.
다시 예속 논쟁이 불거진겁니다.
이때 남인쪽 사람들은 정통대로 1년을 주장했고 또 송시열은 이를
반박하며 9개월을 입는게 맞다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런데 현종이 송시열에게 가만히 짜져있으라는 질책을 주며 1년
입으라는 남인의 주장을 현종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주었습니다.
서인 측에서 계속 송시열의 예약 을 강조하자 현종은 송시열의 예약
을 주장하던 서인 대신들을 전부 삭탈관직시켰습니다.
이 사건이 2차 예속 논쟁입니다.
2차 예속 논쟁으로 송시열의 추종자들이 대거 실각하고
그 자리에 남인이 자리를 차지하며 급작스레 집권여당이 되어버렸
죠.
현종은 이 기회에 서인들의 잘못된 살림정치를 뿌리뽑고 정통성리
하기라고 자부하는 남인들을 더 키워줄 생각이었는데
아이고야 현종은 2차 예속 논쟁 이 있고 두달 뒤 승하합니다.
이제 송시열은 어떻게 될까요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