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시절 조선군은 얼마나 강했을까? 한국사 속 전술과 무기의 변천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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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시절 조선군은 얼마나 강했을까 한국사 속 전술과 무기의 변천사 2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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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비극적인
사실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가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전쟁의 경험도 많아지면서 전술과
무기도 변해 왔는데요 한국 전쟁사에서
우리의 전술과 군대 편제 무기 등이
어떤 변화를 거치며 진화했는지
살펴보는 변천사 지난 영상에 이어
조선 시대부터 시작합니다 조선은
문약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 때 조선의 국방력
군사력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우선
조선을 건국한 태주 이성계부터 무인
출신이잖아요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고려시대 당시에는 없었던 무과를
과거에 신설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무과 창설에 대해서 논의만 되다가
1402년 태중 이방원 때 비로서
처음 무과가 시행됩니다 과거의 무과는
3차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전국적으로 각 도별 인구
비례를 고려해서 지방 훈련한 주제
70명과 병마절도사 주제 120명 총
190명을 뽑습니다 이차 시험은 복시
아고 해서 수도인 한양에서 이번엔
국방부 즉 병조 주관으로 190명 중
28명을 뽑습니다 법전사 28명
정원이 원칙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8명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네요 마지막 3차 시험인 전신은
구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2차
시험을 통과한 28명을 1등부터
28등 아지 등급을 정하는 시험입니다
당연히 높은 성적을 거둘수 좋은 보직
혹은 본인이 원하는 보직에서 근무할
수 있겠죠 무과 시험은 총 여섯 가지
영역이 있었습니다 먼저 300m
거리의 관 을 화살로 맞추는 목전
150m 거리의 광역을 화살로 맞추되
굉장히 짧은 화살을 사용해야 하는
편전 100m 같이 안 되는 거리의
광역을 화살로 맞추되 이번에는 굉장히
무거운 화살을 사용해야 하는 철전 말
위에서 화를 쏘는 기사 말 위에서
창을 휘둘러 지푸라기를 배워야 하는
기창 그리고 말위에서 공을 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격구 등 총 여섯
가지 종목이었던 여섯 가지 종목 중네
개가 활과 관련한 시험으로 조선
시대까지도 우리 민족이 활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가 있죠 조선
군인의 주 활은 동물 의 뼈나 뿔을
섞은 각궁이 있습니다 조선의 각궁은
물소의 뿔과 민어의 부레로 섞었는데이
두 재료를 섞으면 아주 단단하고 먼
사전 거래를 확보할 수 있는 우수한
화일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
군사에 대한 관심은 건국 직후부터
이어졌고 비단 무인 출신은 태주
이성기뿐 아니라 조선 계곡을 설계한
정도전의 관심도 많이 쏠려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말년에 요동 정보를
주장했을만큼 군사력 강화의 심혈을
기울였는데 정도전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훈련 방식과 전시 메뉴들을 정리한
진법을 고아내는 습니다 정도전의
진법은 방어에서 먼저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에게 선공을 유도하고
방패로 무장한 방어 부대가 적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뒤에 배치되어
있는 궁병이 화살을 퍼붓는 방식이죠
궁병들이 공격으로 선공을 한 적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면 그때 최 후미에
대기하던 기병대를 투입시키고 하는
편제가 정도전의 진법이 있습니다
정도전의 진법에 볼 수 있는게 역시
조선군은 궁병과 기병이 메인이었다
점을 알 수가 있죠 하지만 적군의
공격이 매우 강력한 나머지 반격에
실패할 수도 있죠 있잖아요이 점을
감안하여 조선군 대형은 병사들 간의
감격 그리고 분대별 감격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에게 피해가 많이 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죠 또 궁병 중심의
조선군이 있기에 간격이 넓어야
궁병들이 공격이 더 자유롭고 더
위력이 강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간격이 넓은 경우 상호간의 협력도
다소 어려워진다는 한계가 있죠
정도전의 이러한 진법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살해된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태중 이방원과 세종 대양은 변계량게
정도전의 진법을 보완 및 강화하도록
하였죠 조선 시대부터는 냉병기 화기가
공존하던 시대였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을 발견한 일에
조선 시대부터 화약에 대한 개발및
강화도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전기 화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있습니다 태종 때와 세종때의 최해산이
비롯한 여러 화약 및 무기 전문가들이
화포 개발에 착수했고 조선 전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청동으로 만든
화포를 만들어 냈습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화포가 크게네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크기의 순서로 천자 총통
지자총통 현자 총통 황자 총통이
있었죠 네이밍은 천자문 순서입니다
가장 큰 천자 총통은 길이가 무려
1.3m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며
천자 총통 있는 대장 분전이 아는
거의 로켓에 가까운 발사체를 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괴력이
어마어마한만큼 사용법도 까다롭고 화향
량도 많이 소비되었다 쓸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지자 총통은
길이가 1m 조금 안 됐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했지만
지자 총통도 너무 무겁고 화약
사용량이 많아 세종 대형은 최산 에게
더 간소화 도를
개량하였다 총통과 길이 약 50cm
황자 총통을 만들어 냈는데 이후로는
현저 총통과 황자 총통을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휴대하기도 상대적으로 편하고 위력도
결코 약하지 않았거든요 또 최 회사는
완구 신포 화통 같은 다양한
신무기들을 만들어 내기도 했죠 세중
대왕의 사군육진 개척 전쟁이 쉽게쉽게
일어난게 아니었던 겁니다 또 세종식당
그 장영실이 같이 만든 무기가 그
유명한 신기전이 신기전은 화약으로
화살을 쏜다는 아이디어에서 차아
냈는데 화약의 폭발로 장거리까지
날아가는 대형 화살인 거죠 그런데
신기전은 휴대하기도 불편하고 쏘기도
불편해서 초창기 공경용다는 신호용으로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조선 전기
군사인 무기 방면에서 크게 기여했던
왕이 유명한 밀리터리 덕후 5대왕
문종이 문종은 신기전의 위력을 더
배가시킬 방법을 생각하다가 신기전을
꽂아 넣을 수 있는 발사 틀을 만들고
그 발사 틀을 바퀴로 실어가는 화차를
생각해낸 겁니다 그러면 휴대하기도
운반하기도 발사하기도 훨씬 용이하겠죠
그냥 발사 틀의 신기전을 꽂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사 지점과 발사
거리까지 계산할 수 있도록 발사 틀을
위아래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문종은 1451년 한
해에만 무려 700여대의 화차를
생산합니다 그리고 정도전 변계량
내려오던 진법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문종은 동생 수양대군과 직접 진법서
만들고 김종서 정인지 더로 자문하게
했습니다 오행의 의거에 방진 원진
곡진 직진 예진 총 다섯 가지 진법을
조선군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으로
삼았습니다 그 원칙 자체 자체는
정도전의 진법에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답니다 문종 때에 강화된
군사력은 7대왕 세조 때에 빛을
받는데요 1460년 신숙주가 두만강을
넘어 북벌을 감행 조선 정부에
대행하던 여진족 부족들을 초토화시키는
그리고 1367년 함경도에 이지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시의 진압
전이었던 말령 전투는 화차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조선 전기 최대의
규모의 활력 전이었죠 화차 pun
아니라 말령 전투에 사용되었던 화포
총통이 9백 자였고이 무기대가
군사들이 그대로 압록각 넘어 여진
토벌에 투입되어 2차 북벌에 큰
승리를 거두죠 세조의 2차 북벌은
명나라와 함께하는 작전이었다 명나라가
오기도 전에 조선군 단독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던 전투였습니다 이처럼 세조
때의 전란이 많았고 그만큼 군대를
징발하고 동원하는 체계가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세조 전까지만 해도이
체계가 다서 중근 한 방이었는데
세조는 진관 체제로 일어나 하였죠
진관 체제는 전국적으로 각 지역별
관할하는 거진 두고 각 지역별 거진
다시 시 해당하는 돌을 책임지는
병영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진관 체제는 지역 단위로 이루어진
군사 방어 작전이었고 하지만 조선
중계에 이르러 특히 9대왕 성종
때부터 조선이 급격하게 무역과 됩니다
이에 조선의 군동원 체제도 15대왕
명종 때에 진관 체제를 철회하고
새로운 체제 재승 방력 체제로
전환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단히 잘게
쪼개던이 거진 몇개로 통폐합을 시켜
버리고 지휘관들도 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중앙에서 마땅한 사람을
파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가성비는
높일지 언정 국방력은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고이는 임진열
테 큰 화를 보게 되었죠 수근의 경우
고려 말 공민왕이 이히와 정지의
제한으로 수군을 별도로 창설한 일에
조선도 수군을 육군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화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만큼 그에 맞춰서
배도 기동성은 느리 되 둔중하고
거대한 배를 제작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맹선이라는 배를 이용하였는데
조선 중기에 외구의 침입이 다시
많아지자 맹 선보다 더 큰 크기에 더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있도록 하는
배를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5대왕 명중 때의 판옥선이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맹서는 전투와
세금을 운반하는 용도로도 쓰였는데
판옥선은 오로지 전투에만 최적화된
군함이 있죠 판옥선의 사례에서도
나타나고 또 조선군의 진법 전 투수를
보자면 조선군은 궁병들이 활 화포
기병대가
주력이었다 최적화되어 있었죠 조선
전기 조선의 상대는 대부분 여진족이
있고 여진족 을 토벌하는 전술에
맞추어 조선군도 편재와 무기가 발전한
겁니다 그리고 큰 성과를 봤죠 대신
그만큼 보병들이 약점이었던 무과
시험만 봐도 도검 시험은 전혀 없죠
삼국 시대의 검 고리자루 큰 칼이
고려 시대에는 고리자루 칼 즉 환두
2로 길이가 짧아진 것처럼 조선
시대의 검 환도는 이보다 검의 길이가
더 짧아집니다 조선은 검술에 대해서
딱히 신경을 쏟지 않았던 거죠이 역시
임진한한테 조선군이 쓸려 나가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마치 여진족 럼 상대했던
거죠 하지만 지만 일본군과 여진족의
전술 방식은 당연하게 더 달랐고 그
이해에 대한 차이에서 조선군이 그렇게
맥없이 당한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내에 기병대 1583년 두만강
1대에서 대규모 여진족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 니탄 계이 난 사건이
있었습니다이 니탄 계의 난을 진압한
장본인이 신립의 기병 되었고이 전투를
기점으로 신립이 조선의 영웅이 되었죠
하지만 임진란 초기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실리의 기병대는 쓸려 나갔죠
일본군은 조총을 세운 보병 위주였고
여기에 기존의 조선군 편제와 전투
수를 맞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조선은
임진한 조청을 처음 봐서 초반엔
그렇게까지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조선은 임진 내란
전부터 조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선의 활이 조총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을 했던 거죠 조총이
빠르긴 빨라도 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 사이에 화를 쏘면 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하지만 임진 내란으로
여러 충격을 받은 조선은 곧바로 군제
개혁에 나섭니다 군제 개혁을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 있습니다 임진란
도중 유성룡은 선조의 허락을 받아
훈련 도감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신설했고 훈련 도감에 기존의 창과
화를 쓰는 보병과 화를 쏘는 궁병은
그들을 유지하고 조총 부대인 포병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도 총을
쏘는 부대가 등장합니다 또 기병대
있었고요 그리고 훈련도감 병력은 직업
군인이었고 사실상 인지란 이후 조선
후기 조선군의 핵심이자 자존심이
바로이 훈련도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깐
기존 조선군 편제에 조총 부대를 통해
보병의 위력을 강화시키며 그간
조선군의 약점을 보완하는 부대였던
겁니다 임진 애한테 조선은 비단 일본
군뿐 아니라 원군으로 파병 왔던
명나라 군을 통해서도 군제 개혁에
레퍼런스를 받아들였습니다 임진 혜란
전
명나라도자기 광이 명나라의 군제
개혁을 단행했는데 임진 혜란 이후
조선도 첫 기광의 병법서 기호 신서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군제 기억의
교본으로 삼았죠 기호 신서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받은게 창을 이용하는
보병이 있죠 명나라군이 가장 잘 쓰던
창이 삼지 창인 당파 있는데 임진한
명 나라 원군이 사용하던 당파를 보고
감명을 바고 기호 신서의 의거 당파를
보편화 시키고 또 기호 신서의 나오는
창 군대군대 철심을 박은 대나무
나뭇가지들을 마구 달아놓은 무이 낭선
도입하였습니다 전국 군동원 체제도
소고이츠 양반까지 모든 남성들이
평시에는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일정 기간 훈련하고 전시에는 동원되는
체재를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재승 방력 체제에서 다시 진간 체제로
돌아가 지역 단위 방어를 채택했고이
소국군 체제도 기호 신소을 기반으로
수립한 제도였습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뒤늦게 도입한 조총 부대였습니다
조선군의 조총부대 실력은
최강이었던 활 화포 총 등 원거리용
무기 활용 만큼은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15대왕 광해군 때는 비록
결과는 패전이 있지만 명나라와 연합에
누르하치와 싸운 사루 전투에서 가장
잘 싸웠던게 조선군의 조총 부대였고
16대왕 인조는 오로지 하기만을
다루는 부대 어영청 조직했다 17대왕
효종 때는 병자 호환으로 겪은 치욕을
복수하자고 청나라 공격하자는 북벌론이
제기되었는데 비록 명분에 불과한
북벌론 이었지만 조선군의 군사력이
일시적으로 강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인
벨트브랜드
러시아군이 가장 무서워하던게 조선의
조총 부대였고 22대 정조도 조선군의
군사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후이 나름 나쁘지 않아 보이는
조선군인 그런데 대체 왜 조선은
마지막에 그렇게 약속 국이 되어
버렸을까요 마지막 3부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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