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의 중국대륙 통치과정(부제 : 중원이 목초지가 되지 않은 이유)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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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후기부터 우구데이까지 몽골이 중국대륙을 통치해가는 과정을 알아봅니다. 본 영상의 자막은 AI기반 자막프로그램인 vrew의 도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참고서적)
1. 대원제국. 혜안출판사
2. 아틀라스 중앙아시아사. 김호동
3.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르네 그루세.
4. 위키백과. 나무위키
00:00 인트로
00:05 서론
00:57 1. 초기지배방식(간접통치)
02:55 2. 한인세후(간접통치)
05:11 3. 다루가치(간접통치)
06:51 4. 세법제정(직접통치)
08:34 5. 호구조사(직접통치)
09:29 아웃트로
안녕하세요 저스티스 있니다 이번
시간에는 오랜만의 몽골 제국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주제는 몽골인들이
금나라를 정복한 후에 한인들을 어떻게
통치했습니다 관한 이야기입니다 챙기
스카는 초원을 통일하고 초기에
금나라를 침략했을 때에는 약탈물
가지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이런
식의 약탈 전쟁이 수차례 거 되자
몽골 황실은 이것이 불필요한 손실을
초래하므로 침략지 직접 지배하는 것이
이익이라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초원에서 살아가던 몽골인이 적응기
없이 처음부터 한인을 직접 지배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떻게 통치해야
하는지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동안 간접 지배라는
과도기를 거쳐 직접 지배로 넘어가게
되는데요 이번 시간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칭기스칸은 몽골 을
통일한 후 곧장 남쪽 정주 문명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몽골 제국
초기에 정주 문명에 대한 중요한 정책
기존은 동산만두 teran는
것이었습니다 친기 스카는 부동산 즉
땅을 점령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아마 초창기에는
정주 지역의 기술이나 지식은 초원으로
들여와도 유목 생활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몽골의 약탈
전쟁이 반복되면서 한번 정복했던 곳을
제차 3차 정복해야만 하자 쓸데없이
전투력을 낭비하지 말고 점령지를
영구적으로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몽골의 정주 문명 지배는 친기 숙한
말기부터 서서히 발생하여 그의
사후에는 본격적으로 항구적인 지배로
바뀌게 됩니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도
몽골은 여전히 동산 약탈에
집중했습니다 약탈물이나 지식이 어떤
생산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는지
알아내고 그것을 초원에 적용시키려
하기보다는 단지 결과물 그 자체에
집중했습니다 그결과 곡물의 징수
의무나 방법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그밖의 것에 대해서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몽골 제국이
초창기에 속국을 지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고려로 몽골은 곡물에 관심이
있을뿐 고려왕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제약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는 고려가 통일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통치 방식이었는데 당시
중국의 화북 지역은 금나라가 무너지고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에 몽골은 어쩔
수 없이 화북의 통치에 관여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화북의 여러
정부가 난립하며 혼란을 가중시키고
공납 징수도 어려워질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한인 새우입니다
금나라 선종이 중도를 버리고 수도를
남쪽에 개봉 으로 옮긴 것을 정우의
남천이 합니다 정우의 남천이 강행되나
백성들의 동요가 심해졌습니다 대부분의
군대와 관료들이 하남으로 도여 있기
때문에 금 조정이 아무리 하복 사수를
천명한다 해도 백성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만약 또다시
몽골이 쳐들어와서 자기들이 위기에
빠진다면 금나라 정부는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은 거주지 이동 금지령으로
인하여 남아 수도 없 었는데 금지령이
없다 하더라도 모아둔 재산이 없는
일반 백성들로는 고향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백성들은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스스로 자위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향촌의 자위대는
점차 주 현 단위까지 연결되며 군사
조직화 되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당시까지만 해도 몽골의
관심은 주로 곡물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것을 누가 주는지는 크게 에
문제되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화북 향촌의 자치 조직은 각자 몽골
제국과 협상하여 공납을 약속하는 대신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물론 모든 자유단이이 목표를 달성했던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그 와중에
몽골에 의해 괴멸 당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도적 대의 습격으로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일단 몽골과의 거래에 성공한 사람들은
몽골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한인 새우라 부르는데 그들은
훗날 몽골 권력자로 터 징세권 비롯한
일정 권한을 부여받아 해당 지역의
내부를 통지하는 정치 집단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한인 세우는 일종의
봉건제를 할 수 있는데 그들은 자신의
영 진해에서 독자적으로 증세 증병
관리 임용 등을 관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인 세우는 시간이 가면서
세력화 되어 한인 세우관 불화도
발생시켰습니다이 말은 제국의 결집이
필요할 때 한인 세우가 결집을
방해하는 장애요인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그래서 나온 관직이
바로 다루 가치입니다
금나라 백성들은 저마다 자치단
구성해서 몽골에 항복했고 스스로 몽골
제국의 속령이 되었습니다 속령이 된
자치단 공납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각종 군사적 협력을 하면 몽골 제국의
간섭을 배지한 채 해당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몽골 황실
입장에서는 자치단이 공납 의무를 잘
이행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대한의 대리인으로 감찰관이
파견되었는데 그들을 다루 가치라
불렀습니다 다루 가치는 제압과 정도의
의미를 가집니다 몽골의 관직으로
유목민이 아니라 송영의 정주민의
대상으로 창설된 조직입니다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다루 가치는 정우의
남촌 직후에 임명된 자파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칭기스칸도 다루가 치로 직접 임명받아
금나라의 옛 수도인 중도에
거주했습니다 자파르 하사받은 직책은도
다루 가치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조금
더 작은 관아를 다루는 다루 가치가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점 언급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몽골 비사의
따르면 우구데이 시절 고려를 포함하여
동쪽에 대략 72명의 다루 가치가
존재했고 서쪽에 동서 투르키스탄
지역에도 수많은 다루 가치가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행정
지역마다 전부 파견한 것은 아니며
몽골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도시 몇
곳을 골라서 파견했습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호구조사를 비롯해서 병력 증발
역참 설치 조세 징수 공납 수송 등
다섯 가지였습니다 물론이 다섯 가지
업무만 한 것은 아닌데 대체로 다루
가치의 직무 범위는이 다섯 가지였다
합니다 이렇게 한인 새우와 다루
가치를 통해서 송영을 통제하던 몽골
제국은 간접 통치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 면 한인 세우가
중앙정부의 납입할 세금만 제대
납부하면 나머지 공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취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통치 방법의 문제점을 확인한 우구
대인은 서서히 직접 통치로 전환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송영의 세법을 제정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229년 최초로
한지에 대해서 호를 단위로 하는 세금
부과 원칙이 만들어지고 세목과 세율
징세 기관도 결정되었습니다이 업무
프로세스를 관장한 임무로 은 야율
초재 있니다 야율 하니까 야율 아
보기가 딱 떠오르는게 상당히
거란사운드
이제는 야유 아보의 장남으로 동단국
왕이었던 야율 도력의 8대손입니다 즉
거란인이었는데 하나한 이후에 금나라가
중원을 차지하니까 금에 귀부 아여
관직을 하던 자였습니다 당시에 몽골
관료들은 대부분 중원을 몽땅
초토화하고 목초지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
병참선이 짧아지며 강력한 기병대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야율 초재 남벌 중원을 목초지로
만들어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쪽은 지형과 기후가
중원과 달라 김병만 그는 정복할 수
없으며 징세를 통해 소금 비단 말
국물 등을 충분히 보충한 후 시간을
두고 공격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구데이 대한은 이때
몽골 관료들의 말을 듣지 않고
놀랍게도 야율 초 의 말을 받아들이고
그를 등용하여 세법 제정을
추진하였습니다 세법을 제정하면서
동시에 진행된 것은 호구
조사였던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있는지
파악해야 세율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호구 조사
결과 우구데이 통치시기 화보에는 대략
7 이만의 한인 호가 있었다고 하는데
금나라가 최종 멸망한 후에 호구
조사가 다시 이루어졌고 약 111만
호가 추가로 등재되었습니다 결과적
적으로 우구데이 180만 호가 넘는
가구를 기초로 본격적인 세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세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그때까지 한인 새우들의 개인
재산을 늘리는 수단에 불과했던 징세권
몽골 제국이 회수함으로써 국가의 불을
급격히 늘릴 수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아울러 두 차례의 호구조사를 통해서
한인 세우나 몽골 군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민호를 국가의 백성으로
만들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몽골은 최초 금나라를 정벌할 시기에는
약타로 퇴각 즉 히트앤드런 작전을
원칙으로 하다가 같은 곳을 제차
정복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영토
점령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통치
할지 몰랐기 때문에 한인 새우를
통해서 간접 지배하고 한인 새우를
감시하기 위해서 다루 가치를 두었다
여기까지가 간접 집의 시기이다 이후에
우구데이 거란족 출신의 재상 야율
초제를 등용하여 세법을 만들고 호구
조사를 통해서 한인들을 직접 지배하는
방법으로 통치 방식을 변경했다고
정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후에
진행된 상황을 조금 더 말씀드려 보면
야율 초재 이렇게 확정된 세법을
기초로 몽골 제국의 중국식 주현제
도입하고 관료 정치를 관철시키려
노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구데이
대한은 야율초재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종 및 공신들에게 영지를
분봉하기 초재 원했던 국가 구조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음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