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최후의 왕조 청나라는 어떻게 끝났을까?, 청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9부 최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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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역사 총정리 몰아보기 통합본 9부 최종화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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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서 돋보기입니다 이번
영상에서 비로소 청나라의 끝 청나라의
마지막을 다룰 예정입니다 만주족의
청나라 중국사 최후의 왕조 청나라는
어떻게
[음악]
끝났을까요 의화는 운동 이후 청나라
정부가 실시한 근대화 개혁 신정에는
정말 많은 제도들이 개혁되고
신설되었습니다 1901년부터 지방
곳곳에 각 지역별 신식군대 이름바
신군이 새롭게 창설되었습니다
1905년에는 과거제가 폐지됐고
1909년에는 자 2국을 통해 지방
의회를 조직하였으며 1911년 5월
그토록 발해 왔던 내각이 결성되면서
이펀 군주제가 개막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신정에는 여러 한계가
많았습니다 이판 군주제를 표방하며
조직된 내각은 각계 각층을 대표하지
못했고 황족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전제
군주제와 사실상 다를게 없었습니다이는
수많은 한파를 분노하게 하기도
했답니다 무엇보다 세금이 청나라
조정의 지지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켰다
청나라 정보는 신정이라 개혁의 명부도
각 지역별 어마무시한 세금을 뜯어
갔습니다 이러던 중 청나라 정부가
중국 백성과 각 지역 순무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순무는 청나라 각 지방 성별
최고 책임자인요 청나라는 중국 전역의
철도 부서를 목표로 1905년부터
철도 회사를 설립하고 자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금 유치가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철도를 만들 수
없는 재정 상태였죠 유일한 방법은
차원이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차관을 도입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재정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천국
191년 5월 각 지역별로 부설되는
철도에서 발생하는 모든 수익의
100% 국가가 갖겠다는 철도 국유
활용을 내렸습니다 철도 국유 활용은
모든 지역의 각 성별 무들의 반발을
섰습니다 재정 적자 상태는 중앙
정부뿐만 아니라 지방 경제도 심각한
상태였습니다이 적자 상태가 아니더라도
그 지역 철도 수익을 일정 부분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100% 다
가져간다는 것은 지역 경제를 전혀
고려치 않은 처사였습니다 청나라 각
지역에서는 국유 을 철해 달라는
이른바 우리 지역의 철로는 우리가
지켜내겠다는 뜻에 보로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국유 활용을 반대하는
보로 운동은 사상적인 문제가 아니라이
지방관들이 분노한 문제였고 철도
수익을 기대하고 있던 상인들도
극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겠죠 가장
먼저 보로 운동이 벌어진 것은
호남성이었습니다 청나라 정보는 각
지역의 지방 의회 있던 자유국 통해
보로 운동을 비난만 할뿐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중앙 정부에
대한 분노가 덮어지게 되는 계기가 될
뿐이었죠 여태 계속 무력 본기를
일으켰지만 번이 실패하고 있던 혁명파
단체들은이 보로 운동의 분위기를
타기로 합니다 유독 보로 운동이
심했던 지역이 사천성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인명 사상 피해도 여러 차례
속출하자 사천성의 민간인들도 무장하여
맞서 싸웠고 도저히 사천성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이
청나라 정부은 인근 호북성의 신군은
투입시켰고 6성은 특히나 혁명파
청년들이 많이 밀집해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호북성의 지켜야 할 호북성
신군이 사천성으로 투입되자 호북성의
있던 혁명파 있는이 때를 기회로
삼기로 합니다 당시 호북성의 성도는
오늘 날의 우한 시인 우창이
곳이었습니다 호북성의 토착 혁명파
단체였던 문학사와 공진회이 사천
봉기의 흐름을 타서 우창서길
일으키고자 했습니다 두 단체의
간부들은 중국 동맹회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중국 동맹회 황신 was
숭자 어원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10월 말을 목표로 무장 본기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간부 한 명이
폭탄을 제조하다 실수로 터트려 버려
화성을 입었습니다 폭발 소리 때문에
경찰들이 출동했고 혁명파 요원 몇명
체포되어 버렸죠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혁명파 요원 몇 명은 본기를
잠시 중단하고 몸을 살리자고
제안했으나 황신 순자는 이렇게 된
이상 미루기 보다는 차라리 바로
봉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고 계획보다
빠르게 10월 10일 본기를
일으켰습니다 호북성 신군의 절반은
4천 봉기를 진압하러 천성에 있었고
남아 있던 호북성의 신군은 약 7천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함정은 각 성별
신군 내부에도 혁명파 요원들이 많았고
호북성 신군 중 1분이 혁명파 있다고
합니다 결국 호북성 신군 내부에서
봉기에 호응하며 신군의 빠르게
무력화시켰고 무기고를 점령한 후
우한을 그리고 더 나아가 호북성 아지
장악합니다이 사건이 신의 혁명이
시작이 되는 우창봉기 혹은 무창봉기
있니다 호북성의 혁명파에게 넘어가
버리면서 매우 심각한 사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리용에 이어
북양 군벌을 이끌던 위안스카이를 통해
북양 군벌을 호북성 보내 진압하게
합니다 사실 위안 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종 내각을 반대하다가 탄핵되어
있었는데 북양 군벌이 워낙 청나라
정의 지신은 안 받고 위안 스카이의
병적 성격이 짓자 별수 없이 위안
스카이를 복직시켰다 거죠 위안
스카이는 경친왕 혁에게 당장 국회
조직해서 열고 황종 내각을 철회해
내각을 다시 편성하며 본인에게 청나라
전병력 회군 전임을 넘기도록 하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이렇게 위안
스카이와 강 사이에 밀당이 오가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11월이나 돼서야
위안스카이는 우창 본기를 진압하러
남아 합니다
10월 10일 우창 봉기 이후 10월
22일 호남성 섬서성에 혁명파 혁명파
장악한 신군이 봉기를 일으켜 호북성의
이어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더 이상
청나라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이후로 곳곳에서 주로 남부
지역에서 각 지역마다 혁명군과 신군이
장악을 하고는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하며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총
13개 이성의 독립을 선언했죠 11월
2일부터 황신이는 중국 동맹의
혁명군이 위안 스카이와 붙었습니다 뭐
당연히 상대가 안 됐습니다 아무리
청나라 군사에게 개판이 도 그나마
구실을 하는게 뭐 그래도 전통이 있는
부양 군벌이 있죠이 와중에 각 지역의
독립은 이어졌고 11월 말이 되면 총
15개의 성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포합니다 당장 위안스카이가 황신의
혁명군을 몰아 세우고는 있지만 지방
모 전국이 전부 청라에 반기를 드니
위안스카이는 이게 계속 청나라
편에서는게 맞나 고민이었습니다 단
독립한 성들이 전부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산발적으로 독립을 선언한 것이
한계라면 한계였습니다 원래 청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형성된 혁명 단체 중국
동맹회 이 연이은 본기를 기획한게
아니라 보로 운동을 기점으로 터진
본기가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지방
곳곳으로 퍼진 경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야 우리 다 같이 시밀
모와 독립해서 청나라 정보를
무너뜨리자 아니라 옆동네 독립했다는
우리도 해보자 이뭐 이런 거였던 거죠
성공적인 혁명을 위해선 지방별 각
성들이 조직화되는 것이 중요했죠
호북성 출신의 혁명파 리위안 웅이
각성의 전보를 쳐서 대표단을 모아
공화 정보 수립에 관해 논의하자고
했습니다 원래 우창해사 했으나 위안
스카이의 북양군이 우 을 포여고
있어서 한커우 만나 임시정부 조직
대강을 논의했습니다 11월 30일
각성 대표대회 회의가 시작되었고
12월 2일 혁명군이 난징을
장악하자이 혁명 파들은 난징의 거점을
두기로 하고 12월 3일 임시정부의
이름을 중화민국이 정하였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대세는
이미 혁명파 쪽이었고 그래서 위안
스카이가 리위안 훈에게이 혁명파
수립한 임시정부가 공화정이 아니라
이펀 군주정이면 뜻을 같이 하겠다고
했으나 당연히 혁명성 거절합니다 대세
파악하는 능력만큼은 대단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가 썩은 동화
줄이라 여겨 영국 공사에게 본인과
혁명파 간부들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덕에 위안스카이는 리위안
훈과 만나 우선 12월 1일부터
3일까지 휴전을 하기로 했으며 혁명군
입장에서도이 싸움으로 부경 군벌을
이기기가 힘드니까 오히려 혁명군
편으로 돌리자는 의견이 강성해지자
12월 14일 난징에서 각성 대표들이
위안스카이를 임시 대충 통에 임명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자 의견이
나왔으나 황신 숭자 오원 등 중국
동맹의 출신들은 순원을 대총통
선출하고 싶어서 반대합니다 결국
11월 29일 17개의 성대표
45명의 선거를 치렀고 가장 많은
득표를 받은 순원이 임시 대총통의
임명되자 1912년 1월 1일 순원이
임시 대총통의 리위안 홍이 부총통
취임했고 황신은 육군 총장 승자라는
내문 총장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탄생했죠
중화민국은 삼권 분립에 입각해
참의원이 아는 입법부를 구성했습니다
각 성별 대표 3인이 참가하기를
하였으며 이렇게 임시 참여 원에서는
총 43명의 의원들로 구성됐습니다
43명 중 33명이 중국 동맹회
회원들이었다 임시 약법 작성에
착수했고 임시 약법 작성은 숭 저울이
도맡았습니다 한편 자기가 임시 대충이
되는 줄 알았던 위안스카이는 난징
포위를 풀지 않고 있었습니다 순원의
지지자들도 그리고 수원도 당장의 부양
군벌의 포위를 풀기 위해선 위안
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 자리를 넘겨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고 결국 수원과
위안스카이가 만나 임시 대총통의 위안
스카이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무너뜨리기로
합니다 다만 수년이 원 세계에게
요구한 두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청나라 멸망 후 새로운 정보는 반드시
공화정이 하며 수도는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바꿀 것이었습니다 위아
스케는 두 가지 모두 받아들이고
포위를 풀고는 방향을 돌려 베이징으로
향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조정과
경치랑
협광망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궁궐을
초토화 시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금세 베이징에 입성했고
경주당 형광에 루이 16세처럼
잔인하게 처형되고 싶 지 않으면
알아서 하야 하라고 했습니다 대신
위안스카이는 여덟 가지 황실 우대
조건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첫째 청나라
황제 선통제 푸이는 자금성에 계속
거주한다 둘째 황제에게 세금 400만
양의 경비를 지급한다 셋째 자금성에
있다가 황제는 이화원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며 근의 부대는 계속 사용할 수
있다 넷째 청나라 황제는 앞으로도
계속 종묘의 제사를 치를 수 있다
다섯째 선대 황제인 광서제의 무덤은
황제의 예로서 제작한다 여섯째 환관을
더 이상 고용할 수는 없대 기존 에
있는 환관들은 계속 황제를 모실 수
있다 일곱째 현재 황제가 소유하고
있는 개인 재산을 인정한다 여덟째
궁궐 수비대는 중화민국의 부대에
그대로 편입되며 월급은 똑같이
지급한다 경치랑 형광은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황제 선통제
푸이는 여섯 살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1912년 청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청나라 조정은 해산했고 1912년
2월 12일 위안스카이는 황제 태위
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이렇게 신해의
혁명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줄 알았으나
배신의 아이콘인 위안 스카이는 금세
순환과 혁명 정보를
[음악]
배신하는 위안 스카이를 배신의
화신이라고 하는데요 우선 청나라를
배신한게 첫 번째 배신이었다 2월
12일 공식적으로 청나라가 멸망했고
다음 날 13일 수어는 임시 대충
통에서 스스로 물러났고 위안
스카이에게 이양했다 수어는 애당초
위안 스카이와 약속한 대로 난징을
수도로 할 것과 난징에서 취임식을
가질 것 그리고 임시 약법 반드시
지킬 것을 다시 한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위안스 스카이가 난징에 가기를
거부합니다 2월 29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 곳곳에서 폭동과 소요를
일으키는 자작극을 펼치고는 베이징
치한이 엉망이니 베이징 질서를 잡을
때까지만 베이징에기로 하죠 1912년
3월 8일 위안스카이는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베이징에서 취임식을
치렀으며 취임 선서는 서면으로 전보를
쳐서 난징에 보내는 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국무 총리로는 위안
스카이의 오른팔 탕사 오이가
임명되었습니다 비록 탕사 오인은 위안
스카이의 부하였지만 워낙 평판이 좋고
능력도 뛰어나 순원 황싱 숭자 오른
등 중국 동명회 측 회원들도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국무 위원들
특히 국가의 가장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는 각 부처
대신까드립니다
기존 혁명파 사람들을 전부 배제시키고
했죠 이에 순원 황싱 수저론 등 중국
동맹의 출신들은 제대로 된 혁명파
사상을 가진 이들끼리 정당을 만들자며
국민당을 형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 국민당은 아니고 그
전신격인 정당입니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더 선을 넘고 있었습니다 우선
아직까지 당시 중국에서 보편적으로
황제와 대충 통의 차이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이는 위안
스카이도 마찬가지였죠 1912년 3월
위안 스카이는 참의원의 압박에 보
이겨 어찌지 순재 원이 작성한 임시
약법 발표했는데이 임시 약법 대통령
중심제 아니라 내각 책임제를 근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실질적 권한은
대총통이 본인보다 총리인 탕사 오이가
더 강력한 겁니다 전제 군주제에
익숙해 있는 위안 스카이에게이 내각
책임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겁니다
위안스카이가 임시 작법과 순환과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 않차 중화
민국의 공화 사상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한 중국 동맹의 회원
출신들 그리 창당한 국민 당에서 제
2차 혁명을 선언합니다 위안 스카이를
조속히 난징으로 부르고 임시 약밥에
따른 올바른 공화 정부의 중화민국을
수립하도록 요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중국 동맹회 회원들이 국민당을
창당하다 우창 봉기를 주도했던 호북성
혁명파은 리위안 흥을 필두로 공화당을
상당했습니다 국무총리 탕사 5인은
난진 정보와 위안스카이 베이징 정부
사회를 중재하느라 열심히 뛰어다녔는데
위안스카이 입장에서는 자기 부하가 왜
그렇게 국민당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냐면 탕사 오이는 점점 위안스카이
눈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위안스카이는
탕사 오에게 압박을 주다가 1912년
6월 15일 탕사 오인은 총리 지에서
스스로 사퇴를 해
버렸습니다 1912년 8월 8일 신의
혁명이 처음으로 일어났던 우창 신군
출신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의 혁명을 일으키는 건 본인들 있데
대우가 너무 불만족스럽고 월급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거든요 호북성
중심의 공화 정당 공화당의 리위안
송이 직접이 반란을 진입했는데 리위안
홍은 평소 본인과 마찰이 잤던
장전후이 반란의 주동자로 모함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리위안 웅은 위안
스카이에게 장전후 반란의 배후인
체포해야 한다고 했고 위안스카이는
장전으로 속여 베이징으로 초청하고
장전호가 오자 바로 체포해 버렸습니다
전제 군주제의 청나라가 아니라
중화민국이 men 임시 약법 따라
재판을 받고 선고를 치러야 하는데
위연 스카이가 재판 따위 없이
장전으로 그냥
총살해야 국민 당에서는 무식하게
짝이없는 제 재판 방식에 대해
비난하자 류안 스카이는 전부 리위안
흥이 시킨 일이라 말 발뺌하고 비난의
화살을 모조리 리위안 홍에게
돌려버렸습니다 난징 정보와 베이징
정보 사이 갈등의 골이 깊어질 때로
깊어지자 위안스카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위안스카이가
수원에게 베이징으로 와서 회담 자리를
가져보지 않겠냐고 제안했고 수원은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1912년 8월
24일부터 9월 25일까지 13일
차에 걸쳐 회담을 진행했고 국문
총리와 내각을 국민당 당원들로부터
위안 스카이의 통일된 중앙민족 선포에
합의를 받습니다 그리고 수년은
전개에는 더 이상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1912년 12월에서 터
1913년 2월에 걸쳐 총선이 단행
되었는데요 이렇게 정식 참의원이
발족했다 총선의 결과는 국민당의
압승이었습니다 총 596 석 중
국민당이 269 수석을 차지했죠
행정부를 책임지는 위안 스카 입장에서
본인을 견제할 입법부가 야당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당 그만 채워지면
당황하겠지 소위 말에는 여소야대 내각
책임제의 따라 국민당의 숭자 오원이
총리로 선출되었습니다 1913년 3월
20일 총리로 취임하기 위해 숭자
오언은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이었습니다 갑자기
괴한에 누군가 나타나 순자에게 총을
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수자원은
그대로 병원에 이송됐지만 3월 22일
사망해 버렸습니다 순자 오에의
절친이었던 황싱 그 친구의 시체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며 오열했다고
합니다 며칠 후 범인이 체포되었고
범인을 진술한 결과 위안스카이 측
고위 간부들이이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게 밝혀졌습니다이 불난 집에
위안스카이는 기름을 껴 붙는데
1913년 4월 26일 위안스카이가
단독으로 계국 은행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라는 어 어마어마한
차관을 도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오해 전부터 참여한
의원들에게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자고 주장했지만 당장 중화민국
경제가 원활하지 않은데 우리에게 갚을
능력이 어디 있냐며 거액의 차관
도입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선우
대차관계 가장 반대한 이유는 계국
은행이 차관을 이후로 요구한 담보는
어마무시했고 사실상 중화민국의 경제
재정권을 외국에게 넘겨 주다시피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승자는 암살
사건과 선우
대차관계 자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위언
스카이는 본인이 탄핵될 위기에 처하자
국민당 출신의 각 지방관들이 전부
해임하고 어떻게든 개구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받아내서 군자금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부양
군부를 제일 집결시켜 본격적인 무력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국민 당원이었던
리레지염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수원은 리레인 사령관으로 삼고
위안스카이를 토벌한다 뜻에 토원 그을
조직했습니다 리레인 이끄는 토원 그은
1913년 7월 조직되었으며 북양
군벌과 사와 금세 박살이납니다 단
2개월 만에 끝난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을 개축 전쟁이라고 합니다 국민당
창당해 터 계축 전쟁까지 신내 혁명의
제 2차 혁명이라고 하죠 수녀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위안스카이는 일본
정부의 순원 체포를 부탁하는 바람에
수원은 일본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1913년 9월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강제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아울로 위안 스카이의
탄핵을 거부하며 1913년 10월
10일 임시가 아니라 중화민국의 정식
초대 총통으로 등극했습니다 이때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헌법 즉 신 약법
발표해 기존 중국 동맹에서 승조원을
중심으로 작성 되었던 임시 약법
깡그리 무시하고는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총통으로 굴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4년 1월 10일에는
위안스카이가 국회마저
[음악]
해산시키지 일찍이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의 다음 목표는 중국이었다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주를
장악하는 루트와 산동성을 기점으로
세력을 확대해 가는 루트를 생각
중이었는데 산동성은 독일이 꽉 쥐고
있었죠 그런데 당시는 세계 1차 대전
중이었고 일본은 산동성에 대한 독일의
이권을 빼앗고 싶어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 라고 연합 군축으로
들어왔습니다 일본은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21가지의 조건을 요구합니다
일단 산동성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게 넘기고 만주 지역의 광산
채굴권 철도 부채권 일본에게 넘기고
중화민국의 정치 재정 군사 업무를
일본과 협의하도록 했습니다 어떤 미친
놈인걸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미친짓을
위안스카이가 받아들입니다 1915년
5월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들어주기로 합니다 일본보다
국민 당이나 혁명파 적으로 간주했던
위안스카이는 일본을 자신의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했죠 그리고
결국은 1915년 12 월
위안스카이가 국가를 중화 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1915년 12월 31일 진기한
위안스카이는 홍헌이라는 연호지
제정합니다 전국적으로 위안스카이
만행의 반 위안스카이 운동이
퍼졌습니다 1915년 12월 25일
운남성에서 차이어 양치 차오가
운남고이라는 반 위안스카이 혁명군을
조직해 군대를 호국군이라 부르며 걸기
있습니다 1916년 차이의 주도하에
반
유아스카프 시작했고 차이는이를 호국
전쟁이라고 명명했습니다이 호국 전쟁을
역사서에서는 는 제 3차 신의
혁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부양 군모를 보낸
진압하면서 일본에게 반란 진압 협조를
부탁했죠 물론 일본이 거절합니다
서양의 국가들은 1차 세계 대전
중이라 중국 문제에 관여할 수가
없었고 민중들은 친을 파하며
위안스카이를 욕하고 심지어 호국군
진압하라고 보낸 북양 군벌의 장교들
다수가 호구 군들에게 설득 당해서
위안스카이를 배신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이미 노새에 있던
위안스카이는 점점 신경적도 쇠약해지다
별똥별을 보고 저건 자신이 죽을
거라는 징조라고 예전에 똑같은
별똥별을 봤을 때 이홍장이 죽었다며
이제는 자기 차례라며 극도의 불안
증사를 보였다고 합니다 유엔 스카이의
충북은 유엔 스카이가 너무 걱정되어
황제의 선포를 철회하라고 제안했습니다
황제 등급부터 잘못된 단추의
시작이었다고 하면서요 1916년 3월
21일 위안스카이는 충북도 몇 명만
조용히 불러 황제 철의 뜻을 밝혔고
충북도는 적어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
자리는 사수하게 도와주겠다고 했습니다
3월 22일 군주제 철해 선언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23일 홍헌
연호를 폐지하면서 국호를 중화
제국에서 다시 중화 민국으로
복귀시키고 했습니다 입니다 황제로
등극한지 83일 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국회를 다시 구성하겠다는 약속을
선남과 동시에 모든 호국군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했죠 이때 호군가 막
중국에 돌아왔던 순원 그리고 자녀
혁명파 사람들은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서도 자격이 없다며 대총통도
물러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렇지
않다면 호국군 해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위안스카이 휘하의 장교들은
대총통 투표를 재실시고 그 전까지는
위안스카이가 대총통 자리를 지키는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으나 각 성 대표들은
위안스카이 에 완전한 하야를 요구하며
독립했습니다 이때 위안스카이가 가장
아끼던 장교 진환이 위안 스카이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대충 통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달라고 애걸 복 거렸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신경 수학으로 원래 알코
있던 방광 결속이 심해지면서 병세가
급격히 안 좋아집니다 몇 번이고
실신할 정도로 몸이 나빠진
위안스카이는 대총통 직을 부총통 있던
리위안 홍에게 넘긴다는 말과 함께
대총통의 물러나 한적한 시골로 돌아가
살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위엔
스카이는 어딜 갈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아졌고 6월 5일부터는
임종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부양 군별 장교들을 모두
풀러 모두들 잘랐네 난 이미 다 된
사람이야라는 유언을 남기며 눈을
감습니다 그런데 몇 분 후 다시
위안스카이가 눈을 뜨더니 그놈이 날
죽인 거야라는 알 수 없는 의문의
말을 남기고 정말로 죽었습니다 6월
6일 중국 근대사의 격동을
불러일으켰던 위안스카이는 이렇게
죽었죠 3차 신의 혁명인 호국 전쟁의
결과 위안스카이가 전제 군주제 체제를
철회하고 바로 죽기는 했으나 혁명이
완전하게 끝이 난 건 아니었습니다
위안 스카이만의 모든게 다 해결되리라
생각했 지만 엔스카이 사후 북양
군벌의 각 장교들이 각자 세력을
만들고는 즉 군벌을 형성하고 유일한
패권을 두고 내전을 일으킵니다
중화민국은 다시 한번 군벌의 각축
전이라는 경락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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