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자랑 국군! 1946년 처음 창설된 국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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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군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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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돋보기입니다.
대한민국의 또 다른 자랑거리인 국군.
1907년 우리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군대조차 없어
군대의 근대화를 미처 겪어보지도 못한 채
해방 후 부랴부랴 만들어진 우리 대한민국의 국군이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군은 해방 후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해방 직후엔 미군적인 실시됐기에
대한민국 국군 창설은 미군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해방 직전 그리고 직후엔 국군이 되기 위한 사설 군사단체들이
수도 없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다 통합할 예정으로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해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로만 장교단을 구성하였고
1946년 1월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한 것이
오늘날 국군의 모태입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뒤로
39년 만에 우리 국가의 군대가 생기는 것이었죠.
조선국방경비대의 계급 명칭은
과거 대한제국군 명칭을 그대로 따랐으나
곧 오늘날의 계급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조선국방경비대의 육군은
포병병력과 무기가 지나치게 작아서
거의 소총부대나 다름없었습니다.
국방경비대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으로
독립전쟁에 나섰던 대한광복군 출신들
중국국민당정부의 군부대에서 일본과 전투를 벌었던 출신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관동군 출신들
식민지 조선에 주둔 중이었던 일본군 출신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에 대해서 모병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워낙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터라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자원 입대하는 수가 굉장히 많았죠.
그렇게 결성된 국방경비대의 조직은
처음엔 연대 단위로 전국 주요 도시에 9개의 연대를 설치했습니다.
점점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임관하고
자원 입대하는 수는 늘어나고
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국방경비대는 추가 연대대를 더 설치하기로 합니다.
그렇게 강릉의 10연대를
수원의 11연대를
군산의 12연대를
아산 온양의 13연대를
여수의 14연대를
마산의 제15연대를 설치했죠.
1947년에는 각 연대대를 3개씩 지역별로 묶어
여단으로 편제하기도 하였습니다.
아, 물론 조선국방경비대의 예하부대로
조선해안경비대를 두었는데
이미 수준 높은 항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고
해군 창설을 대비하고 있던 손원일을
조선해안경비대의 사령관으로 삼았습니다.
감투는 받았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독립한 나라에 배가 어디 있겠어요?
해군이 있는데 배가 없는 거예요.
그럼에도 손원일은 투자와 지원을 어떻게든 얻어내
조함창을 만들고
훗날 해군사관학교에 전신이 되는 해군 병학교를 설립하고
주요 항구도시에 초보적인 아마 기지의 부지를 마련하는 등
해군 조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썼죠.
그리고 과연 손원일 사령관은 독립운동에 이발지한 집안답게
해군 소속으로는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들을
거의 등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공군 전력에 대한 필요성도 꾸준히 제기되었는데
공군은 아무래도 전문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만큼
쉽게 만들 수가 없어서
1946년 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고
2년이나 흐른 1948년 5월
조선국방경비대 소속의 항공부대가 설치되었죠.
해군에 손원일 제독이 있다면
공군엔 최용덕 장군이 있었습니다.
한국 광복군 출신인 최용덕 장군은
중국에 있을 때 육군 군관학교와 보정항공학교를 수료하며
항공인으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최용덕은 중국 국민당 산화부대의 항공대에서 활약하는
베테랑급 파일럿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이었고
국민당의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겸
공군기지학교장 지길 정도로
엄청난 위치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1940년부터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소속되어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으며
해방 전부터 임시정부 소속으로
공군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죠.
해방 후 최용덕은 다른 파일럿들과
항공건설협회를 만드는 등
공군 창설에 박차를 가하지만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면서
광복군 출신의 최용덕 경력도 무시하였고
미군정은 최용덕에게
조선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학해
미군훈련을 다시 받으라고 합니다.
이전까지 장군대우받는 사람한테
다시 훈련소 가라니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최용덕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배기장군에 빗대며
50세인 아이로 임관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만들어졌습니다.
조선국방경비대는 육군이 되었으며
군사영어학교는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꾸준히 육군 규모를 확대하여
한국전쟁 발발시점 육군은
총 8개의 보병사단과 1개의 수도사단이 있었습니다.
제1사단은 개성을 제2사단은 대전을
제3사단은 부산을 제5사단은 광주를
제6사단은 춘천과 원주를 제7사단은 동두천을
제8사단은 강릉과 주문진을 제9사단은 서울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왜 4사단은 없지? 의아해 하실텐데
여수 순천선거 때 반란을 익힌 부대가
4여단과 14연대여서 4라는 숫자를 쓰지 않았답니다.
수도사단은 수도경비사령부가 발전한 것으로
현재는 수도방위사령부가 별도로 생겨서
수도사단의 이름은 수도기계와 보병사단이 되었고
맹홀부대라는 이름이 더 잘 알려져 있죠.
6.25전쟁 개전 당시 기준 육군은 약 9만 5천명의 병력이 있었고
장갑차 27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유하고 있는 탱크의 경우 단 한 대도 없었습니다.
해군 역시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자
조선국방경비대 예하부대였던 조선해양경비대가 독립하여
오늘날의 해군이 되었습니다.
해군 병학교는 1949년 해군상원학교가 되었고
조선해양경비대 사령관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되었죠.
1949년 9월 손원일 제독의 강력한 주도로
대한민국 해군이 처음으로 구입한 군함이
PC701 백두산함이라는 600톤급 구잠함이었습니다.
구잠함은 잠수함을 탐지해서 대적하는 대잠함정을 말합니다.
비록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장교, 병조장들, 하사관들, 수병들이 월급의 일부를
해군 부인의 바자회 사업과
일반 국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돈으로 구입한
우리나라가 최초로 구입한 전투함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죠.
대한민국의 해군기지로는
목포, 묵호, 부산, 인천, 군산, 포항, 진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군의 경우 손원일 제독이 의도적으로
일본군과 관동군 출신들을 배제했다고 했죠.
이에 조선해양경비대 소속의 일본군과 관동군 출신들은
참밥신세였는데요.
여수 순천 사건 때 투입되었던 미군 해병대를 유심히 봤던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신현준 중령이
손원일 제독에게 해병대의 필요성을 내세웠습니다.
손원일 제독 역시 해병대의 필요성에 동의를 하였고
관동군과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1949년 4월 대한민국 해병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신현준 중령이 초대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죠.
해병대는 비행장 경납고에 생활하면서
열악한 시설과 여의치 못한 군수지원 등의 악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6.25 전쟁 전까지는 병력을 봉화함과 동시에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을 통해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6.25 전쟁기 전 당시 기준 대한민국 해군은 해병대 포함에서
6,900명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훗날 공군으로 발전하는 조선국방경비대 소속의 항공부대는
국군이 만들어져도 곧바로 공군으로 독립하지는 못했습니다.
국군이 창설되었어도 항공부대는 항공국으로 개편되어
여전히 육군 소속이었죠.
그러나 최용덕을 비롯해 김정열, 김영환, 박범집, 이근석,
7인이 강력하게 공군의 독립을 주장하여
1949년엔 공군사관학교를 만들고
10월 공군은 공식적으로 육군으로부터 독립했죠.
초대 공군참모총장은 공군 창설 7인 중 한 명이었던
김정열 장군이었습니다.
6.25 전쟁 개전 당시 기준 공군은 약 1,900명 정도로
항공기는 전투기가 전혀 없었고
훈련기와 정찰기로만 22대가 끝이었습니다.
조직규모도 제1전투비행단 하나였죠.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랴부랴 훈련기 몇 대 있던 거
전선에 투입할 수 있도록 개조하였고
미군으로부터 P-51 머스탱이라는 전투기 10대를 지원받았습니다.
대한민국 공군은 미군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주로 후방지원 및 지리산 공비의 토벌 작전으로
실전 경험을 키우고 있었는데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 공군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나중에는 미군 공군도 수행하지 못하는 작전을 수행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 게
6.25 전쟁 초기 우리 국군은
시설과 장비도 열악하고 현대식 훈련도 받지 못했던
미군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 도움은 안되던 부대가 우리 국군이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끝나던 시점엔
초기 국군의 모습은 전혀 없었고
정예병으로 완전히 성장한 상태였습니다.
미군을 포함해 유엔군 모두
3년 만에 이렇게 성장한 국군에 감탄을 했다고 하죠.
6.25 전쟁 발발 시점 기준 9만 5천의 병력으로
9개의 사단을 가지고 있던 육군은
현재 36만 명이 넘는 병력과
거의 40개에 달하는 사단 규모 부대를 보유하고 있고
해병대 포함 6,900명밖에 되지 않았던 해군은
현재 해병대 포함 약 7만 명의 병력과
총 3개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1개의 전투비행단과 1,900명 정도밖에 없었던 우리 공군은
현재 총 6개의 전투비행단과
6만 5천 정도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다는 말이
딱 우리 대한민국 국군에 맞는 표현이 아닐까 하네요.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