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공군 최대 규모의 공세! 6.25 한국전쟁, 중공군의 5차 공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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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역대급 규모, 중공군의 5차 공세 1부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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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6.25 전쟁 중공군의 공세를 요약하는 시리즈
이번 영상에서는 중공군의 공세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가장 메인 배틀이었던
중공군의 5차 공세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공군의 3차 공세로 서울을 빼앗겼던
유엔군과 국군은 다시금 반격에 나서
서울 남부 근교까지 진격했고
이에 중공군은 중부전산에 있던 중공군으로
서울 남부 근교에 있던 유엔군과 국군의 측후방을 공격해
이른바 4차 공세로 우리를 포위선발하려 했으나
지평리 전투에서 유엔군이 막으며
중공군의 4차 공세를 저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1년 3월 15일
중앙청의 태극기를 개항하며 서울을 재수복하였죠.
강원도 전선에서도 국군 6사단인 춘천을
국군 5사단인 인재를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3월 말에는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 문산에서부터
강원도 화천을 거쳐 강원도 동해안의 양양까지 진격하여
38선 인원 부군은 거의 다 탈환한 상태였죠.
이제 38선을 넘어 다시 북진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유엔군 내부적으로 논의가 오갔고
그동안 유엔군과 국군은 중부전선 지리적 요충지인
철원, 김화, 평강 이른바 철회삼각지대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습니다.
북진을 하든 말든 일단 철회삼각지대는 반드시 빼앗고 봐야 했거든요.
이에 중공군도 철회삼각지대를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했고
또 서울을 다시 점령하겠다는 전의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중공군 총선왕한 펑드화이는 마우저돈과 협의 후
그간 4차례에 걸친 공세를 담당했던 13병단을 뒤로 물리기로 합니다.
공세를 4번이나 치르면서 흘린 피해도 만만치 않았거든요.
대신 과거 중공군 2차 공세 당시
장진호 전투에 투입되었던 9병단과
새롭게 3병단과 19병단을 투입시켰습니다.
기존에는 13병단 하나였지만
이제는 무려 3개의 병단과 싸우게 된 것이었죠.
그렇게 펑드화이는 5차 공세를 준비합니다.
그 사이 유엔군에는 큰 변화가 있었는데요.
1951년 4월 11일 그간 미국의 트럼한 대통령과 갈등을 빚던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원수직에서 해임되었고
그 후임자로는 그간 한국전산에서 총지휘를 하던
리찌웨이 중장이 승진해 유엔군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전산에서 총지휘를 맡을 미8군 사령관으로는
벤플리트 장군이 부임했죠.
벤플리트 장군은 리찌웨이만큼이나 용장이자 명장이었습니다.
일전에 리찌웨이 중장은 화력 사용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씀드렸는데
벤플리트는 더했습니다.
벤플리트는 리찌웨이보다 훨씬 더 화력 사용에 제한을 없애버리다시피 하고
쏟아 부을 수 있을 만큼 쏟아붓기로 하죠.
중공군의 5차 공세 준비가 마무리 되는 시점이
1951년 4월 말이었습니다.
이때가 봄이라서 중공군의 춘계 공세라고도 하는데
여태 중공군의 1,4차 공세는 별다른 별칭이 안 붙었잖아요?
그런데 5차 공세는 춘계 공세라고 따로 부를 정도인데
그 정도로 역대급 병력이 투입되었던 전투였습니다.
중공군 3개의 병단과 북한군까지 합류한 병력은
비록 바로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후방에 있던 중공군까지 합치면 95만에서 100만에 이르는 병력이었죠.
그야말로 인해 전술이었고
중공군의 5차 공세는 한국 전쟁사에서
우리 한국이 외적의 침입을 받은 역사 중
612년 수양제일 고구려 침입 다음으로 규모가 큰 침입이었죠.
중공군 5차 공세 전선에 투입된 70만 명 중
서울 쪽으로 투입된 병력만 55만이었습니다.
5차 공세부터는 기존처럼 우회 후 측후방을 공격하는 전술을 과감히 포기합니다.
이젠 여기에 유엔군과 국군이 익숙해진 거죠.
대신 그냥 떼거지로 밀고 내려가는 말그대로 인해 전술을 펼쳤죠.
중공군의 5차 공세는 1951년 4월 22일부터 전개되었습니다.
유엔군은 서울을 재수복하고 38선 이나면 거의 대부분 탈환했다는 승리에
다소 방심하고 있어서 모든 전선에서 갑작스레 밀고 내려온 중공군의 5차 공세에
모든 전선에서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중 서부 전선에서는 당연하게도 임진강 유역의 경기도 파주 문산지역이
가장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임진강 하류 파주에는 당시 국군 1사단과 영국 제29 독립보병여단이 사수 중이었습니다.
미군은 주로 가장 중요한 연천 포천 화천 이 일대에 있었죠.
그래서 중공군이 강한 미군보다는 미군이 별로 없는 파주를 공략한 겁니다.
파주를 공격하던 중공군의 규모는 파주를 사수하던 유엔군의 8배에서 10배에 달하는 병력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는 설마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파주의 우측 설마리를 방어하던 영국 제29 독립보병여단의 글로스터 대대가
본대와 차단되어 고립되고 맙니다.
4월 22일부터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는 3일간 분전합니다.
중공군은 가막산에서부터 내려오며 고지대에서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에 공격을 가했습니다.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는 막중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3일간 쉬지 않고 싸웠습니다.
글로스터 대대의 대대장 제임스 칸 중령은 여단장과 통화를 해서
도저히 우리 대대는 싸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이미 고립이 되었으니
다른 부대의 철수를 위해 시간을 벌어야 한다면 끝까지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3일을 싸우고 나니 탄약이 바닥날 정도였죠.
여단장은 글로스터 대대의 대대장에게 자력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대장 제임스 칸 중령은 설마리에서 탈출을 시도합니다.
대대의 병력 중에서 D 중대 한 부대만 무사히 포위망을 뚫었고
나머지는 전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죠.
제임스 칸 중령 역시 포로로 잡혔습니다.
훗날 설마리 전투에서 살아남은 앤소니 파라 호클리 대위는
설마리 전투에 대한 자서전을 남겼으며
영국 스스로도 한국전쟁에서 벌인 전투들 중
설마리 전투를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끝내 설마리 부군을 빼앗기고 우리 유엔군은 철수를 했지만
아주 오래도록 영국군이 시간을 많이 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국군 1사단도 설마리는 아니지만 파주의 임진강 하류 문산에서
똑같이 3일간 끝까지 싸우며 중공군에게 최대의 피해를 주고 철수하죠.
중부전선을 보겠습니다.
중부전선에서는 연천 포천 화천 이 일대에 미군이 주로 주둔하고 있었다고 했죠.
여기에 국군 6사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군과 우리 6사단은 어마어마한 중공군의 병력에 가평까지 남쪽으로 밀립니다.
파주 설마리에는 영국군 제29여단이 있었다고 말씀드렸죠.
가평에는 영국군 제27여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군은 영국군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영연방이라고 해서 영연방에 속하는 국가들도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고
가평에 주둔 중이던 영국군 제27여단에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부대가 소속되어 있었죠.
연천 포천 화천 일대가 중공군의 공세에 뚫렸고
미군과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천 포천 화천보다는 후방인 가평에서는 영국군 제27여단이 견과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중공군은 5000명씩 2개로 부대를 나누어 가평의 504고지와 677고지를 공격했습니다.
가평 504고지를 지키던 부대는 호주군이었습니다.
4월 23일에서 24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중공군은 무려 4차례나 걸쳐 호주군의 504고지를 공격했지만
호주군은 모두 무찔렀습니다.
물론 호주군의 피해도 컸죠.
중공군은 지속적으로 군대들을 밀어 넣으며 호주군의 피해가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하필 지시 하달과 소통에서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호주군을 지원하려고 했던 영국군 이 다른 데로 가거나
호주군 일부가 철수하기까지 하면서
504고지에 남아있던 호주군 일부는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죠.
24일 오전 때마침 뉴질랜드의 포병 연대가 나타나
엄청난 화력 지원을 해주며 504고지에 있던 호주군을 방어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호주군이 역습을 감행해 중공군을 무찔렀죠.
가평의 504고지와 동시에 504고지 반대편에 있던 가평의 677고지는
캐나다군이 사수하며 중공군과 싸웠습니다.
677고지에 있던 캐나다군은 고작 450명
가평전투의 모든 시선은 504고지가 있었고
677고지에 캐나다군을 지원해주기 는 어려운 실정이었습니다.
450명의 캐나다군은 5천명의 중공군을 상대로 고지대를 통해 싸웠습니다.
캐나다군도 혈전을 벌이며 전멸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504고지 전투를 끝내고 온 뉴질랜드 포병여단이 화력 지원을 해주었고
677고지도 사수하는 데 성공했죠.
가평전투의 승리로 중부전선에서는 중공군의 공세가 저지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중부전선에서 중공군이 저지가 되면
당연하게도 서부전선에 있던 그 중공군에게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겠죠.
캐나다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스스로도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기념하는 전투가 가평전투랍니다.
가평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중공군은 서울 진격이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의정부까지 내려왔다만
경기도 방면으로 중공군의 협조가 어려워졌잖아요.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펑더화이는
어떻게든 의정부에서 서울로 강제로 병력을 집어넣었는데
4월 29일에서 30일 북한산 일대까지 중공군이 내려오기는 했지만
서울 시내에서 미군이 화력을 그대로 쏘아붙어서
중공군의 진격은 좌절되고 서울 점령은 실패합니다.
그래도 그럼에도 중공군의 5차 공세가 펑더화이의 회심의 일격이었던 만큼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대로 5차 공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펑더화이는
4월 공격은 깔끔하게 졌다고 판단을 했지만
5월 다시 5차 공세를 재개하기로 합니다.
그럼 역사돋보기였습니다.
저희 역사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