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식의 미술로 보는 동양사 강좌 11강 | 암각화에서 만난 환두대도를 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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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선식입니다.
미술로 보는 동양사 오강인데요.
오늘 테마는 음산 암각화와 대공리 암각화의 인물도상 비교라고 하는 주제를 잡아봤습니다.
음산 암각화는 대몽골 지역에 있는 음산 산맥에 있는 암각화입니다.
그리고 대공리 암각화는 잘 아시는 것처럼 울산의 대공리 암각화를 말하는 겁니다.
목차를 이번에 잡아봤어요.
처음으로 시원성 탐구가 왜 어려운가를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암각화를 살피는 가장 큰 목적이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인류의 시원에 관한 것을 탐구한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암각화에 담겨있는 시원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어떠한 기준으로 살펴질 것인가는 연구자마다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영하 지역과 음산 지역, 그리고 한국의 선사 암각화가 어떠한 개통성이 혹시 있을까라는 걸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음산 암각화 속에 사람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음산 암각화와 대공리 암각화의 비교, 이런 순서로 진행을 해보겠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시원성 탐구가 어렵다는 것을 한번 고민을 해보겠는데요.
암각화 연구자들은 암각화의 화면 구성과 내용을 무속적 재의성과 연관하여 고민해왔습니다.
그래서 그것과 관련해서 아주 구체적이고 세세한 분석에 따른 그런 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선사 암각화 연구는 시간대가 부여한 특수성 때문에 인류의 시원성을 살피는 소중하고도 어려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그런 내용을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중국의 내문골 음산 지역의 암각화는 중국 선사 문화의 일단을 출원하게 하는 주요한 미술 자료이고
인접한 이서 지역, 음산에서 좀 더 서쪽 지역인 영하의 하란산이라고 하는 지역이 있는데요.
이 하란산 암각화와 국방의 몽골 고비사막 인근의 암각화의 연관성을 좀 고민하게 하는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암각화 도상이 지닌 시간성의 혼란은 동아시아 인류의 시원성을 고찰하는데 또 다른 장애가 되고 있다는 말에 써놨는데
이게 무슨 얘기냐면요. 사실 영하 지역이나 음산 지역의 암각화를 보면 모든 화면이 다 선사시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데 아주 곤혹스러움이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선사시대 것이라면 고민할 여지가 없는데요. 사실은 갑자기 마차가 등장한단 말이죠.
마차가 선사시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거의 없어요. 그러면 선사 암각화에 등장하는 마차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라는 게 관건인데요.
아무래도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본래 선사 암각화가 있었던 그 암각화 바위 겉에 시간이 흘러서 철기나 또는 그보다 앞선 청동기 시대에 금속 재료를 가지고 수레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이제 영하와 음산, 몽골 그리고 한국의 선사 암각화의 계통관계를 한번 고민해보겠는데요.
이 몽골 암각화는 거기 답사를 한 분들이 많아서 알려져 있는데 영하 지역은 잘 안 알려져 있죠.
그런데 영하 지역에 보면 마치 고구려의 개마무사랑 너무 형태가 유사한 이러한 도상들이 나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선사 암각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죠. 이것은 전문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는 거죠.
선사 시대에 이런 찰갑을 이어서 만든 갑옷을 착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그리고 이런 내 몽골의 음산 암각화를 보면 신체가 없고 머리만 있는 두부상, 머리만 그려져 있는 안면도상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어요.
이런 현상은 우리의 대공리 암각화에서도 유일하게 한 부분이 나타납니다.
우리의 대공리에서는 한 부분이지만 내 몽골에서는 10개 이상의 인면상들이 마치 공중에 떠 있는 풍선 무리처럼 표현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런가 하면 이런 암각화를 보면 집단적인 축제를 하는 듯한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그림이 그려져 있고 전체적으로 선의 처리는 붉은 알료를 통일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지역이 바로 음산입니다.
보시면 우리의 한반도에서 대충 서북과 비슷한 방향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히 산맥의 흐름으로 봐서 중국의 중원 지역을 벗어나는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보면 우리의 그림과 유사성이 찾아지고 있어요.
이를테면 오른쪽은 천전이 암각화거든요.
천전이 암각화를 보면 이렇게 뿌리 달린 사슴 두 마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가지고 일부 연구자는 동물들의 어떤 화학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냐.
개체수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표현이 있는 게 아니냐라고 보는 게 대세인데 동물학의 권위를 갖고 있는 연구자들의 의견은 좀 다르더라고요.
머리를 마주하는 것이 두 동물이 친근해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라서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인문학자들이 굉장히 실수를 많이 하는 게 이런 거거든요.
실제 동물학자들의 견해랑은 전혀 다른 거죠.
만약 동물학자들의 견해가 옳다면 이 두 마리의 사슴은 서로 지금 뭔가 반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야 되나.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상태일 수 있다는 거죠.
실제 이 두 사슴이 과연 그런 건지 아니면 서로 친근해서 서로 마주하고 있는지는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거죠.
음산 암각화를 보면 우리의 경우는 동물의 얼굴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음산은 완전히 붙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적대적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죠.
동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약간 적대적일 때 많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게 과연 적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이냐는 것은 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의 감수성이랄까요.
문사철, 문학 역사 철학으로 이야기되는 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의 주된 특징이 상당히 감수성에 충만한 상태에서 자기 이론을 입론한단 말이죠.
그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틀린 것도 아닐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를 보면 동물학자 입장에서 서로 다투려고 하는 것으로 보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시 우리의 천전의 암각화에서 보면 마치 아라비아 숫자 8자랑 같은 건데 8자 형상의 무늬가 똑같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암각 도상에서 우연의 일치가 나오기는 쉬운 건 아니죠.
그렇다면 이것이 8자 형상이 어떤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냐.
우리의 경우 여기 하나 있고 여기 또 있지 않습니까.
여기도 이렇게 하나 있고 이거 연결하면 이것도 두 개인 거죠.
이게 의미하는 게 뭐냐.
앞으로 연구 과제가 되겠습니다만 하여간 천전의 암각화랑 네몽골 음산 암각화의 어떤 형상을 볼 때 유사성이 있다는 거죠.
중국의 암각화 연구자는 이 소제목을 방목화 부호 이렇게 써놨어요.
이 화라는 건 end란 뜻이거든요.
방목하는 장면과 부호란 뜻이거든요.
이 도상을 가지고 소주제를 지정한 학자도 다른 거는 동물을 방목하는 걸로 이해했고
이 8자 모양을 분명히 부호로 인식한 거죠.
중국의 암각화 학자도 이 소주제를 보면 중국의 학자도 이 8자 모양에 대해서 이렇다 할 어떤 명확한 자기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소주제를 부호라고 한 거죠.
이 중국의 학자의 견해를 우리가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학자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뭐냐면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게 가장 중대한 범죄고
그리고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을 마치 정확한 정부인 것처럼 말하는 게 또한 일종의 죄거든요.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가 잘 모르는 것은 부호라고 쓴 것이 서툴러 보이지만 솔직한 태도인 거죠.
학문을 항상 솔직하게 해야 되는 거잖습니까.
우리의 천전이 암각화도 많은 학자들이 2위 부호에 대해서 자신없어요.
일반 학자들이 자신없어하는 모습을 공격을 많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거는 옳지 않다고 볼 수가 있죠.
학자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닙니다. 연구자라고 해서.
연구자는 말 그대로 연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연구하다가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천전이 암각화에서도 이거에 대해서 아직도 고민 중이다. 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천전이의 경우에 이런 동심원이 자주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에 방송을 들으신 선생님들이 기억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조문시대, 우리로 말하면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여성인물 토호를 제가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 여성인물 토호의 가장 은밀한 부분.
그 부분을 동심원으로 처리를 한 것을 제가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조문시대의 여성인물 토호에서는 이 동심원을 여성의 생식기를 상징한 것처럼 해놨는데
지금 음산 암각화에는 이렇게 거대하게 그려놨단 말이죠.
이것을 여성의 그걸로 판치를 할 수 있는 것이냐. 그거는 또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있겠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처음에 서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시원성 탐구의 진안함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데서 나타난다는 거죠.
일본에서는 조문시대의 동심원이 여성의 생식기 부분을 이렇게 표현해 놓은 것인데 음산에서는 아니다라는 거죠.
음산 지역에서는 이것을 아무리 봐도 옆에 이것이 어떤 동물로 보이고,
두 사람 옆에 거대한 동심원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이것은 여성과 직접적으로 대입하기보다는 말 그대로 동심원의 물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국내 학자 중에서 동심원을 물의 파동으로 본 분이 계세요.
그분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이거는 여울이 퍼져가는 물웅덩이 옆에 있는 동물과 두 명의 사람을 형상한 게 아닌가.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천전리 암각화를 보면 거대한 동심원이 있는데 또 다른 것은 음산 암각화에는 옆에 겨까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천전리 암각화는 동심원 옆에 겨까지가 있어요.
그러면 일본의 조문시대의 동심원이 의미하는 것과 음산 암각화에서의 동심원 그리고 우리의 천전리의 동심원이 제각각이 다르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이렇게 때문에 어떤 도상을 통해서 시원성을 살피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못된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의미죠.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이럴 때 제가 초기에 말씀 올린 것처럼 이것을 지역성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즉 뭐냐면 한반도의 선사시대 때 살았던 분들은 동심원을 단순하게 동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심원 옆에 겨까지를 형상화해서 동심원과 또 다른 연계적인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저는 특별히 그래서 우리의 울산 반구천의 대국리와 천전리 암각화의 문화적인 성격을 연속성과 복합성이라는 기조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면 음산의 경우에는 해당 연구자가 소 주제를 기우라고 써놨어요. 기우. 빌기자죠. 기원한다. 뒤에는 목적어죠. 비를 기원한다.
그래서 이 동심원은 물과 연관되기 때문에 비가 내려졌으면 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는 거죠. 굉장히 우람하게 솟구쳐 있는 사슴을 볼 수가 있는데요.
다른 짐승은 작게 그려놓고 중심적인 동물은 크게 그려놓는 이런 형태. 이런 암각화의 표현 방식이 음산의 경우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에 있어서도 유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요.
대국리의 경우에 특정한 고래는 엄청 크게 그려놓고 주변에 있는 고래는 체장, 몸집을 약간 작게 그린단 말이죠. 그리고 어떤 인물상은 얼굴을 엄청 크게 그려놓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얼굴보다 더 작은 크기로 그려놨단 말이죠.
그러니까 중심된 것을 크게 그리려는 그런 어떤 표현 방식이 선사 암각화에서 도상으로 많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우람한 뿔은 중국의 사막지대에 많이 세워져 있는 이른바 사슴 돌이라고 하는 일종의 선돌이에요. 선돌에 이렇게 음각, 경우에 따라서는 양각, 도둘세금으로도 표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과 달리 중국의 음산 지역 근처의 사막지대 같은 그런 들판에 사슴 돌이라고 하는 선돌을 세워놓고 거기다가 이렇게 우람한 뿔을 이렇게 표현해놓은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이것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연구자들이 답을 제대로 확정하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 설들이 있는데 두드러지게 객관성을 많이 확보한 의견은 아직 없습니다. 이런 경우가 암각화를 바라볼 때 연구자들을 약간 긴장시킵니다.
갑자기 선사의 내용이 나오다가 이런 게 그려져 있단 말이에요. 이건 누가 봐도 발걸이에요. 발걸이 순우리말로 발걸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등자라고 합니다. 등자라는 것은 말을 탈 때 말을 탄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설치한 기구를 발걸이 또는 등자라고 합니다.
등자의 출현은 단순한 기마가 아니라 기마 상태에서 상대방과 접전을 벌이기 위해서 고속으로 질주할 경우를 상정을 해서 설치한 물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등자의 출현은 세력 간의 집단적 갈등이 발생했음을 짐작해 하는 하나의 문화적인 요소가 됩니다.
발걸이 등자가 이렇게 쓰여있죠. 그리고 이런 것처럼 수례가 등장한다는 거죠. 이 수례의 등장을 아까 말한 것처럼 선사시기로 초곱하기로는 문제가 있는 거죠.
그런가 하면 중층 건물이 등장을 해요. 중층 건물은 문명이 발달한 고대 정도에서나 있을 법한 건축학적인 특징인데 선사함각하에 이런 게 있다는 거죠. 보면 1층, 2층, 3층, 4층, 5층, 6층 이렇게 있어요.
그런데 중국의 연구자는 이 경우는 건축물로 보지는 않았어요. 여기 보면 동물도안이라고 써놨죠. 그리고 자기도 자신 없어서 의문 부호를 붙여놨어요.
이게 동물도안이라고 할 경우에 이런 동물이 과연 어떤 동물을 의미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겉으로 봐서는 중층 건물처럼 보이는데 그럼 과연 중층 건물이 선사시대에 존재했을까?
그렇다고 해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무조건 단층집에서만 살았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오늘날 나무로 만들어진 선사시대의 유물이 거의 없죠. 썩어서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는 확인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선사시대 때 중층 건물이 있었는지는 좀 더 고민할 문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음산에서 좀 더 서쪽으로 가면 영아라는 땅에 하란산이라고 하는 산이 있는데 이 하란산에 보면 이렇게 붉은 알료로 표현이 된 인물의 집단 도상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 도상들은 특징이 뭐냐면 마치 무슨 기천문이라는 무술을 해서 기마자세처럼 이렇게 무릎을 굽힌 상태에서 양손을 막 벌리고 있단 말이죠. 이것을 가지고 의견들이 다양할 수가 있는데 어떤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환호하는 게 아니냐. 또 어떤 사람들은 집단적인 무용을 하는 게 아니냐.
마치 수레바퀴처럼 생긴 건 또 뭐냐 이거죠. 그런데 이 사람들을 보면 허리 부분 쯤에 칼을 차고 있는데 칼의 한쪽이 둥근고리에요. 우리 고대시대에 고구려 백제신라 사람들이 주로 썼다고 하는 둥근고리 긴 칼. 즉 환두대도의 형태란 말이죠.
이런 환두대도의 형태를 하고 있는 무기를 차고 있는 이 사람들이 과연 선사시대 사람일 것이냐. 선사시대로 소급하기에는 약간 의문스러운 점이 많죠.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아랫도리를 거의 걸치지 않고 있죠. 소위 원시라고 하는 사람들이 복식을 보면 아랫도리를 제대로 가리지 않은 형태가 많은데 그것은 예의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아마 더워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죠.
지금도 수렵 생활하는 부시맨들의 특징을 보면 거의 기저귀랑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그런 단순한 가리개 정도를 가지고 의복으로 여긴단 말이죠.
그들은 굉장히 더운 날씨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그런 복장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 선사시대의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거의 복식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어떤 외향을 갖추고 있고 이런 활과 같은 수렵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고
어쨌든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거죠.
부석기와 신석기에 이르기까지 수렵 생활은 굉장히 일상적인 생업 양상이었거든요.
우리가 제도권 국사교육을 받는 가운데 가장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이 뭐냐면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이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수렵을 등한시한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거에 우려를 하고 있어요.
실질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다 보면요.
가장 뚜렷한 게 뭐냐면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 확인하고 발굴해낸 유물들을 보면 농경도구보다는 수렵도구가 훨씬 많다는데 큰 의문이 있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고구학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교과서의 기술 양상은 어떻게 되었냐면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이 시작됐다고 하면서 마치 수렵을 별로 안 한 것처럼 설명하는 거란 말이죠.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를테면 각 나라마다 자기들의 문명 진전의 과정을 좀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어서
사실은 아직도 수렵 위주로 생활하고 있던 단계를 마치 수렵은 거의 그만두고 이렇게 농경 위주로만 생활했던 것처럼
자기들 민족의 선대민족이 문명을 빨리 진척시킨 것처럼 표현하고 싶은 그런 앞선 욕구의 결과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것에 대해서 별로 동의하고 싶지가 않아요.
역사는 진실을 말해야 되는 거지 민족의 얼굴을 가짜 얼굴로 그려서 가짜로 덧칠을 하게 해가지고
근거도 없는 어떤 행복감에 젖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봐요.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있어요.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꿈인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깎아먹냐.
저는 그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있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근거가 있어야 돼요.
분명히 근거가 있어야 돼요. 근거가 없는 역사는 있는 역사가 아니죠. 없는 역사죠.
선사시대에 수렵을 위주로 했다라고 하는 것이 고고학적인 발굴 양상이고 결과라면 신석기 시대에도 농경은 시작됐으나
그거는 일부에 속하는 거고 대다수는 여전히 수렵을 했다. 이렇게 표현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특히나 청동기 시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청동기 시대에 주요 유적지 발굴 보고서를 많이 관심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새로 조사된 지역에서 발간한 조사 보고서는 웬만하면 제가 많이 애써서 보려고 합니다.
특히 어느 부분을 보냐면 발굴된 유물의 성격을 저는 굉장히 많이 집중해서 보거든요.
이것이 농경용 도구가 많이 나왔는가 아니면 수렵용 도구가 많이 나왔는가.
그리고 주거지 양상은 변함이 있는가. 예를 들어서 넓이가 넓어졌는가. 기둥 자리 수가 여전히 4개인 4주식에 머물렀는가 아니면 다주식으로 바뀌었는가.
이런 거 제가 주요하게 관심 갖는 부분이 있거든요.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에 보면 여전히 유물의 발굴 양상을 보면 수렵 도구가 많아요.
특히 화살촉이 많습니다. 석촉이. 석촉이 많이 나온다는 건 여전히 생업 양상이 수렵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걸 말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