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저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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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비디오 조회수·2024. 11. 30.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
1. 일본 경찰이 아닌 러시아 경찰에 체포된 이유.
2. 정면에서 이토를 쏜 것이 아니라는 점.
본 영상의 영상은 AI기반 자막프로그램 vrew의 도움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 위키백과. 나무위키. 챗지피티.
2. 한국과 중국의 안중근 의사관련 사이트.
00:00 인트로
00:05 서론
00:35 1. 시대상황
03:32 2. 이토 히로부미
04:28 3. 회담장소 하얼빈의 의미
05:43 4. 안중근 의사
07:00 5. 의거
12:55 6. 사형
13:39 아웃트로
안녕하세요 저스티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만주 시리즈 3탄으로
하울빈에서 있었던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관련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두 가지를 말씀드려 보려고 합니다.
하나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 후
왜 일본 경찰이 아닌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는지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정면에서 쏜 것이 아니라는 점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오늘 내용도 매우 재미있으니까요
좋아요부터 꾹 누르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평범한 농촌에 불과했던 하울빈이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한 것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러시아가 만저울 위에서
치치하울, 하울빈, 스위펀허에 이르는 동청 철도를 건설하고
하울빈에서 창춘을 거쳐 다렌에 이르는
남반주 철도를 건설하면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는 하울빈을 두 철도 노선에 모두 포함해서
만주에서의 전략적 유충지로 삼고자 했습니다.
1894년 청나라와 일본제국 간 청일전쟁이 있었고
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면서
청나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부동왕을 찾아 나섰던 러시아가
계속해서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프랑스, 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요동반도 장악을 막았습니다.
청나라는 그 대가로 러시아의 동청철도 건설과
남만주 철도의 부설권 운영권을 허가한 것이었죠.
반면에 일본은 자기들이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요동반도라는 전립품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보면 이때 일본이 느낀 굴욕감은
10년 후에 러일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보시는 것처럼 이미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연결이 되어 있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만주에서 철도를 또다시 건설하려고 했었던 이유는
기존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새로 부설하는 동청철도를
서로 연결해서 만주의 물류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또 동서남북으로도 연결해서 군사적인 기동도 완벽하게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만주 전체를 집어삼키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러시아는 그 중점으로 하울빈을 설정했기 때문에
그에 맞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서
러시아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하지만 1905년에 벌어진 러일 전쟁에서
영국과 유대자본의 지원을 받은 일본이
전쟁에서 예상외로 승리했고
그 결과로 포츄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창춘 이남의 남만주 철도 운영권이 일본에게 넘어갔습니다.
이로써 창춘 이남의 만주는 일본이
창춘 이북의 만주는 러시아 세력권이 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은 러시아가 추진했던 것처럼
남만주를 자신의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로 만들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 옮긴 것이죠.
따라서 러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만주쟁탈전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으로
1905년 일산의격 체결을 주도하며
대한제국의 병탄을 준비 중이던 침략의 주범이었습니다.
이것이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표적이 된 이유였는데
이토는 국내외의 정치적 이유로
1909년 6월 초대 통감직을 사임했습니다.
이후 이토는 일본제국의 원로 자격으로
외교를 통해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와 세력 조정을 논의하기 위해
하울빈을 방문했습니다.
이토를 하울빈으로 초청한 인물은
당시 러시아제국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코초프입니다.
그는 만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일본과 세력균형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그런데 이토가 하울빈에서 실제로 만난 사람은
코코초프가 아니라 러시아의 다른 구의 관계자였다는
소수설도 있음을 같이 말씀드립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회담 장소가
하울빈 역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점을 시사해줍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울빈 역은 동청철도의 핵심 요충지로
조차지 형태로 러시아가 통제하는 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일본 경찰이 아닌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된 이유입니다.
만약 하울빈 역이 아닌 창춘역에서 회담이 이루어졌다면
창춘역에 대한 경계는 일본 경찰이 담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럴 경우 안중근 의사의 이토 처단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하울빈에서 회담이 결정된 것은
안의사의 의거에 천운이 함께했다고 볼 수 있죠.
그렇다면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회담 장소를 보다 안전한 창춘이 아니라
러시아 측에 유리한 하울빈으로 양보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일본이 비록 러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여전히 국제적인 위상에서
러시아보다 우위에 서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당분간 만주에서
러시아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정세를 관찰하려 했고
그런 이유로 이토는 하울빈에 방문을 결정한 것이죠.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습니다.
17세 때인 1895년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을 보면서
반일 감정을 키웠고
1905년 을산 의각을 지켜보며 의병에 가담했습니다.
이후 그는 1907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08년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09년 2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연해주 크라스키노에서 동의단지회라는 소규모 결사대를 조직하고
왼손 약지의 마지막 마디를 끊어 대한 독립을 맹세했습니다.
1909년 9월경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 활동 중이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가 하울빈에서 러시아의 고위급 인사와
회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토의 방문 계획은 공식 외교 행사로
지역신문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는 비교적 쉽게 이토의 이동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울빈으로 떠났습니다.
연해주 일대의 재력가로 독립운동을 돕고 있던
독립운동가 최재형으로부터
이토를 처단할 권총과 탄약도 확보했습니다.
그림을 보시면 이토와 안중근 의사의 이동 경로입니다.
먼저 이토는 10월 16일날 시모노세키항을 떠나서
이틀 후인 10월 18일에 여순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난만주 철도를 타고 10월 25일에 창춘에 도착했죠.
그리고 다음날 오전 9시에 하울빈역에 도착합니다.
채 지피티에 따르면 당시에 철도 운행 속도가
약 40에서 50킬로 정도이고
창춘역에서 하울빈역까지는 약 28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토가 하울빈역에 도착한 것이 오전 9시였던 것을 감안하면
이토는 10월 26일 새벽 2시에서 3시 전후에 출발했던 것으로
예상해 볼 수가 있죠.
만약에 열차의 속도가 더 느렸다면
25일 늦은 밤에 출발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안중근 의사는
10월 19일 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사이트나 설명들을 보면
10월 21일 날 출발했다고 설명하는 곳이 많고요.
저도 21일 날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22일 날 수분하에 도착을 합니다.
수입번호 거기서 한의사 유경집에게 통역관을 부탁하는데
그때 유경집이 자신의 아들 18살짜리 아들 유동하를
통역관으로 대동시켜서 그렇게 3명이 기차를 타고 떠나서
22일 같은 날 도착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조도선이 합류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하얼빈역보다는 체가구역이 경비가 더 느슨할 것으로 판단하고
체가구역으로 이동해서 24일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안중근은 이토가 체가구역에서 내리지 않을 것을 대비해서
25일 날 다시 하얼빈역으로 돌아오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체가구역에서 대기한 것은 우덕순과 조도선이었고
이토가 체가구역을 그냥 지나쳐서 올라갔기 때문에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거사를 실행한 것이죠.
한편 안중근 의사는 7연발식 브라우닝 권총을 소지하고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기다렸습니다.
9시경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했고
이토는 러시아 고위이사와 약 25분간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9시 30분경 이토가 러시아 의장대의 사여를 받기 위해
자신의 수행원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습니다.
이 사진이 내렸을 때의 사진인데요.
이 사람이 2등 방문이고요.
이 사람이 코콥체프입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 수행원들이죠.
열차의 경로를 보시면 열차가 이렇게 들어오고요.
러시아 의장대와 청나라 군인 각국 대표, 일본 대표가 이렇게 서 있습니다.
그 뒤로 일본 환영단이 이렇게 있는 것이죠.
그리고 이토가 기차에서 내려서 이렇게 돌면서 사여를 받는 거고요.
이렇게 가서 돌아오는 길에 안중근 의사가 보고
이 사람이 이토구나 하고 쏴서 죽이는 겁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시면
이토가 안중근 의사의 약간 앞에 있고
안 의사는 약간 뒤에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오인하기 쉬운 부분인데요.
그림에서 나오는 것처럼 안중근 의사는
이토를 정면에서 쏜 것이 아니라
측면, 약간 측면 후방에서 쐈다는 겁니다.
그래서 안 의사가 이토를 정면에서 쏜 것처럼 묘사하는 그림은
그냥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그린 것이고
사실과는 다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보시는 그림이 비교적 정확합니다.
뒤에서 총을 쏘고 있는 안중근 의사가 보이고요.
이토가 팔쪽으로 총을 맞고 있는 모습이 보이죠?
이 2번 이토고요.
이 3번이 코콥체프입니다.
지금 그림은 KBS 신역사스페셜에서 내보낸
이토의 검시보고서인데요.
보시면 뒤쪽에서 화살표가 이렇게 되어 있죠?
여기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탄환, 탄환이 이렇게 들어갔다.
3발이 들어가서 내상을 입었다.
뭐 이런 말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스페셜에서는
측면이나 뒤쪽에서 날라와서 맞았다는 설명은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다음으로 이 그림은 서울 중구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그림인데요.
이 묘사가 좀 비교적 정확한 묘사입니다.
뒤에서 쏘고 있죠?
참고로 뮤지컬 영화 영웅에서는
비교적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토 처단 장면을 묘사했는데요.
사이드에서 쐈죠?
이번에 12월에 개봉하게 되는 하울빈에서는
이토 저격 장면을 어떻게 묘사할지
이것도 다른 관전 포인트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그림을 보시면
여기가 하울빈역에서 안 의사가 총을 쏜 곳입니다, 실제로.
그리고 여기가 이등방문이 맞은 곳이죠.
대략 5m 정도 됩니다.
이렇게 걸어가다가 총에 맞은 거죠.
총 6발을 쐈다고 하는데요.
3발이 아까 보신 것처럼 이토에게 맞았고
그리고 나머지 3발은 이토가 혹시 아닐 것을 대비해서
옆에 있던, 수행하던 다른 일본인을 쏜 것이었습니다.
보시면 안중근 격패 이등방문 사건 발생지
1909년 10월 26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글자를 몰라가지고 사전을 좀 찾아봤는데요.
칠격자에 넘어질 패자입니다.
그러니까 대충 공격해서 쓰러뜨렸다 이 정도 되는 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격패라는 말을 잘 쓰는 표현은 아니죠.
참고로 총격을 받은 인물은
이토의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를 비롯해서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이코
남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였고
그들은 모두 총격에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쓰러진 이토는 열차 안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다가
과다출혈과 장기 손상으로 사망하게 되죠.
안중근 의사는 곧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초기에는 러시아 헌병대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안중근은 위순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신분, 살해의도, 배경 등을 조사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자신의 행위는 조선 독립을 위한 정당한 행위였고
이토가 침략의 원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09년 12월 재판이 시작되었고
안중근은 명성황후 시예 등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을 나열하며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10년 2월 일본 법정은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3월 위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위거 당시 현장은 러시아 군악대의 연주가 크게 들리며
상당히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틈을 이용해 안중근 의사는 도망치려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저항도 하지 않으며 순순히 체포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의 목표는 이토 처형 그 자체보다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성을 재판 과정에서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실제로 안중근의 의거는 국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전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이듬해 조선 병탄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이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