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일어났지만 아직까지도 미스터리가 풀리지 않은 영국 최대의 미제 '차필드의 아이들' [사건사고]

기묘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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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아직도 이름 없이 묻혀있습니다.
#미스터리
1928년 10월 13일 새벽 5시 20분경
영국 글로스터셔주에 위치한 차필드 마을
브리스토랭 야간 우편 열차의 운전수였던 헨리 알딩턴은
평소보다 더 주의하며 열차를 몰고 있었습니다.
새벽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열차 전방의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인데요.
눈을 부릅뜨고 열차 앞의 안개를 노려보던 알딩턴은
보일러 맨이었던 프랭크 완트에게
50m 정도 떨어져 있는 신호계기판에
녹색불이 들어와 있는지 대신 확인해달라고 말하였죠.
그들은 서로 오래 일한 동료였고
그만큼 중요한 결정을 믿고 맡길 수 있었습니다.
열차에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바쁘게 석탄을 나르던 완트는
그의 말에 창문가로가 언덕 아래를 흘끗 바라보았는데요.
녹색불이 들어왔어 친구라고 말을 전한 완트는
다시 바쁘게 석탄을 삽질하기 시작했죠.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딩턴은
열차가 달리고 있는 선로 정면에서
안개를 머금고 정차해 있는 또 다른 열차를 발견합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차필드역에는
앞선 열차가 정차해 있는 상태였는데요.
알딩턴은 바로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너무도 늦어버렸죠.
조금 전 차필드역의 신호수였던 헨리 버튼은
역에 아직 열차가 정차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저 멀리 달려오고 있는 우편 열차에게 알리기 위해
빨간색의 위험 신호를 표지판에 띄웠습니다.
안개가 매우 짙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는데요.
바쁘게 석탄을 나르던 보일러맨 완트가
신호를 착각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이내 엄청난 충돌음이 적막한 새벽을 깨웠고
곧바로 거대한 불길이 치솟기 시작합니다.
우편 열차는 가스를 사용해 칸을 밝히는 방식이었는데요.
나무 객차 아래에 설치되어 있던 가스실렌더가
충돌과 함께 폭발하면서 불길이
상공 5m 높이까지 치솟아 올랐죠.
맹결한 불길은 금세 열차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때아닌 소동에 구조대가 금방 도착했고
잠에서 깬 마을 주민들도 급하게 뛰어나와
승객들의 구출을 도왔는데요.
발빠른 대처 덕에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60명의 승객들 중 16명은
결국 제때 탈출을 하지 못했죠.
시신들이 수습되고 철도 회사의 연락을 받고서
각지에서 유족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철도 회사는 타버린 오가지를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그들을 위로하며 공동 무덤을 설립하고
여기에 희생자들을 함께 묻는 것에 대한
유가족 동의를 구했는데요.
그렇게 희생자 14명에 대한 동의를 얻은 철도 회사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두 아이의 가족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죠.
열차의 3등칸에서 서로 꼭 부둥켜 하는 채로
생을 마감한 어린 소년과 소녀.
남매처럼 보이는 이들은 남아가 12살 전후
여아는 6살 무렵의 작은 아이들이었습니다.
철도 회사 관계자는 이들의 가족이 도착하면
무어라 말을 전달해야 할지 고민하며
착잡하고 비통한 마음으로 유족을 기다렸는데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부모, 친척, 지인 그 누구도
아이들을 찾으러 오지 않았죠.
이에 철도 회사는 아이들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자체적인 조사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충돌과 화재의 여파로 인해 시신은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기에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일부 유품으로 신원을 파악해보려고 했는데요.
미처 타지 않은 조각들을 맞추어
남자아이가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과
CSSS라는 이니셜이 적힌 양말을 신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죠.
하지만 손가락 마디 정도의 작은 교복 잔해로는
학교를 특정할 수 없었으며
CSSS라는 이니셜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이 불가능했습니다.
나의 인도자, 비치어라는 라틴어 격언이 적힌 배지가
추가로 발견되었지만
이것으로도 딱히 추론해 낼 수 있는 사실은 없었는데요.
유품 확인에 뒤이어 현장 조사 또한 이어졌지만
아이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는 단서는
불타버린 객차 안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죠.
그러는 사이 시간은 더 흘러
사고로부터 어느덧 3주가 지나게 됩니다.
그때까지도 아이들을 찾으러 오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요.
이에 누군가는 그들의 부모가 열차에 함께 탑승하였으나
불길로 인해 흔적도 없이 타버려
아이들만 남은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죠.
하지만 경찰의 조사 과정 중 열차의 검표현이었던
해리 하이네스에게서
학교 모자를 쓴 12세 정도의 남자아이와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동행하는 어른 없이 열차를 타는 것을 보았다라는 증언이 수집되며
아이들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열차에 탔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어른의 힘 없이 먼 거리를 이동해야만 했던 아이들의 사연까지는
차마 알아낼 수가 없었는데요.
약간의 실마리를 잡은 경찰은 수사에 더욱 박차를 가했죠.
이후 아이들의 부모나 지인을 찾기 위한 신문기사, 라디오 방송이 이어졌고
배포된 공고문은 차필드 마을과 그 주변 지역 일대에 배포되었습니다.
인근의 모든 학교와 교회에는 공고문이 붙었으며
경찰들은 수사 반경을 넓혀서 아이들을 찾기 위한 탐문을 이어갔는데요.
하지만 가진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아이의 정체는 끝내 파악할 수가 없었죠.
전국적으로 관심이 불거진 차필드의 아이들은
어째서 그 누구도 아이들을 찾으러 오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다양한 가설들로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가설은 아이들은 고아였으며
위탁 보호자에 의해 양육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신탁에 접근할 수 있었던 위탁 보호자가
그들 앞으로 상속되어 있던 유산을 모두 독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건데요.
하지만 아이들이 재학 중이던 학교를 끝내 찾지 못하였기에
이러한 가설의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는 없었죠.
두 번째는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이라
두 명분의 장례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부모가
차마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불가항력적인 사고나 재난으로 인한 사망에도
그로 인한 장례비, 매장비는 가족 측에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요.
이번 참사의 경우 철도 회사에서 공동 매장지를 설립해 주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세간의 시선과 도의적 책임으로 인한 결정일 뿐
하지만 아이들을 보았다고 증언한 검표원 해리가
두 아이의 복장은 매우 부유해 보였다라고 증언하였기에
이 역시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세 번째는 아이들이 가정폭력 등의 이유로
부모로부터 도망친 아이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리로 나선 그들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혹은 누군가의 집으로 가기 위해 기차에 탑승하였으며
12살의 오빠가 6살 여동생을 챙기며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는 건데요.
그들 부모는 아이들이 열차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이미 세간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사태에
비난의 화살이 자신들을 향할까 두려워 나서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가설 또한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했습니다.
마지막 가설은 두 아이가 합법적이지 않은 로트로
입양되고 있던 아이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사고 발생 2년 전인 1926년
영국 입양법이 제정되었으며
합법적인 절차대로 입양을 진행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나 정식 로트로 입양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입양신청서의 법원 승인,
아이에게 입양이 적합한지에 대한 정부 판단,
양부모의 경제적 안정성과 도덕적 성품,
생활환경, 복지기관이나 당국의 추천서 등
당시의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굉장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이전에 널리 이루어지던 비공식 입양은
그저 구두로만 합의한 뒤
친척이나 지인에게 아이를 건네거나 사정을 설명하고
교회나 자선단체에 맡기는 시기였는데요.
여기에는 어떠한 법적인 절차도 필요하지 않았죠.
때문에 당시 아이를 입양 보내고자 했던 부모들은
이제 막 제정된 복잡한 입양법을 따르기보다는
간결한 비공식 입양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열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도
이러한 로트로 입양되던 아이들이었으며
그 과정 중 사고로 죽게 되었다는 건데요.
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비공식 입양이 명백한 불법 행위가 되었기 때문에
법적 분쟁을 피하고 싶은 어른들에 의해
아이들이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것이었죠.
차필드의 두 아이 미스터리는
가전조사에도, 다양한 가설로도,
오랜 기다림에도 결국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두 아이들은 아주 작은 관에 담겨
세인트 제임스 교회에 마련된 공동매장지에
희생자들과 함께 묻혔는데요.
다른 이들이 이름으로 적힐 때
비석의 제일 아래줄에
알려지지 않은 두 아이라고만
짤막하게 기록되었죠.
사건 발생 후 22년이 지나고
1950년대 들어서
교회에는 기이한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합니다.
매년 차필드 참사가 발생한 날이면
검고 긴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묘지를 찾아와
한참을 서럽게 흐느끼고
무덤가에 꽃을 놓고 돌아간다는 것이었는데요.
검은 드레스의 여인은
1960년 초까지 묘지를 방문했다고 하나
어느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냐고 묻지 못했죠.
그녀가 두 아이의 어머니였는지
아니면 뒤늦게 소식을 접한
친척이나 지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은
아이들의 슬픈 사연을 듣고 찾아온
누군가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불길 속에서도
서로를 꼭 끌어안고서 눈을 감은 두 아이
이름 없는 그 아이들은
백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오로지 둘이서만 남아있습니다.
기묘한 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