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중일전쟁의 최대 비극, 난징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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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서 돋보기입니다 중국
전쟁사 대표적인 전투를 소개해 드리는
중국 전쟁사 시리즈 14부 있니다
지난 13부 영상부터는 중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전투들을 소개해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 영상에선 신내 혁명
이후 국민당 정부가 중국 대륙을 다시
차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군벌들 간의
최대 규모 내전 중원 대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2번 14부 그래는 중일
전쟁 속 전투를 다뤄보고자 합니다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2차 세계대전의 또 다른 전역 중
하나였던 중일 전쟁에선 수많은
전투들이 치러졌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전투는 역시이 전투가
아닐까 하는데요 참혹함에 이미
다물어지지 않는 바로 난징 전투입니다
중일 전쟁 이전 중국 대륙에서 만주의
주둔 중이던 일본군 관동군이 있었고
베이징을 포함한 화북 지역의 주둔
중이던 일본군 진하 주둔군이
있었습니다 이미 중일 전쟁 이전부터
관동군과 진하 주둔군을 중심으로
중국의 화복 지역을 하나둘 점령해
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국민 당
정부에선이를 매우 불쾌히 여기고
있었죠 관동군과지나 주동 군은 화북
지역으로 만족하지 않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내륙으로 더 진입하고
싶어했습니다 즉 전쟁을 하고 싶어
했다는 뜻이죠 일본 본국에서는 중요
전쟁에 대해 심히 부담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대체 일본의 규모로 저
넓은 중국 대륙을 어떻게 장악할
것이며 장악한다고 한들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마땅한 방언이
없었거든요 괜히 전쟁을 일으켜
쓸데없는 유열 사태만 되고 국영만
낭비하는 꼴이 될 것을 우려했던
하지만 일본 본국의 입장은 관동군과
지나 주군에게 씨알도 안 막혔습니다
군국 지위에 눈이 멀어 있던 일본
군부 측은 전쟁을 이미 잠정적으로
결정을 해 놓았고 관동군과지나 주둔군
독단적으로 중일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본 본국은 군부에 휘 달리는 신세였고
중일 전쟁의 개전이는 오늘날의
베이징과 텐진이 있습니다 일본군은
금세 베이징과 텐진을 함락했다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지원군을 보내
베이징과 텐진을 탈환하게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죠 말씀드렸듯 중일
전쟁은 일본 본국 주도하에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준비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관동군과 지하주 군이 제멋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죠 그래서 일본군이 베이징과
텐진을 점령했어 그 다음 어떻게 할지
감히 안 잡혔습니다 그대로 북쪽에서
남쪽까지 내려간다 중국 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관동군과 진하 주동 군의
힘만으로 그 길어진 보급선을 감당할
수가 없단 말이죠 중국 역사 속에서
언제나 중국의 왕조들을 상대로 군사적
우의를 점했던 거란족의요 나라나
여진족의 금 나라도 중국 난방까지
내려가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중국 난방까지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했던 외세인 족은 몽골족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 뿐이었는데
몽골족과 만주족의 중국 정벌도 한
순간에 이루어진게 아니라 여러 세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단기간에 중국 난방까지 내려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고 전쟁을
부담스러워 한 일본 본국이 있으나
어쨌든 전쟁에 터져버린 상황에서
무르는 건 말이 안 되고 기왕 일어난
전쟁 어찌됐든 일본이 우위를 점마 채
끝내야 하는 건 인정하고 있었고이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던 군부 측에선
단기간에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는
건 불가능 하지만 전쟁에서이기는
방법이 꼭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할
필요가 있는 건 아니다 중국의 수도인
난징 점령하면 국민당 정부는 항복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군부 특히
그간 활약한 육군의 경쟁심을 느낀
일본 해군 주도로 중국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육군이 내려가지 말고
해군으로 곧바로 중국의 동남부를 치고
수도 난진 체크메이트 하자는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수도 난징으로 직공을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는 중국
동남부의 도시로는 상하의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그 일본군은 해군 주도로
상하이를 침공했습니다 중일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언제고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생각하고 있던 중국의 장제스는 독일
군사 고문단과 함께 일본의 전쟁
시나리오를 추측하고 있었고 독일 군사
고문단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육지를
통해 내려오는 건 부담스러우니 일본이
상하이를 통해 난징으로 집공하는
작전을 수립할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상하이의 견고한 방어 전략을
구축해 두고 있었죠 이렇게 해서
일어난 전투가 상하이 전투인데 승자는
일본 군이었다이 상하이를 점령하 데는
성공했죠 하지만 상하이에 국민당군의
방어가 견고하고 저항이 워낙 격렬해서
상하위 전투는 결코 쉬운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일본군이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까지 일본군의 예상을 깨고
무려 3개월이나 걸렸고 일본군 피해도
막심했던 후 일본군이 승리를 했음에도
일본군의 사기는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일본 본국에서는이 상태로 전쟁을
끝내면 어떨까 하는 의견도 대두
되었지만 일본 본국은 현장에 있는
일본군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현장의
일본군 사령관들은 군국주의 취하고
중독되어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친 일본군을 억지로 강행시 난징으로
진근
[음악]
켰습니다 상하의 전투로 인해 전의를
상실하고 필요에 지쳐 있는 일본군의
정신 상태는 광기로 변해버립니다
병사들의 상태를 인지하던 일부 현장
사령관들은 난징 진군의 회의적이었지만
강경파들은 자기들 멋대로 상부 지시가
없어도 그냥 난징으로 향했죠이 때문에
일본군의 난징 진구는 조직적이지
못했고 진군하는 일본군은 보급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보급은
충분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는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었기에 일본군 병사들은
난지가 가는 길에 지나치는 도시들을
약탈하는 현지 조달의 방식으로 보급을
했는데 그저 단순한 약탈이 아니라
끔찍한 사육이
자행됐다 고비 풀린 사육 행위는
일본군 지휘관들조차 당황할 정도였다죠
한편 국민당 정부에서는 일본군인 수도
난징으로 오고 있다고 하자 1937년
11월 20일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기기로 합니다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는 건 옮기는 거고 문제는
난징 사수의 전력을 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장제스는 난징을 지키자는 쪽이었습니다
결국 장제스의 주장대로 난징을
어떻게든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남아서 난징 사수전투 지휘할
것인가였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감내해야만 하고 지구전으로 간다고
해도 난징을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 못했습니다 이때 옛 훈한
3의 군벌 출신이었던 탕성즈
지원하였고 장제스는 탕성즈 박수를
보내며 지휘관으로 삼았습니다 12월
3일경 일본군은 난징에 도착했습니다
투입된 일본군은 16만에 20만 명
정도 일본 육군의 사령관은 마스
이완의 해군 사용과는 하세가와
기술이었습니다 반면 난징을 지키던
국민 당구는 15만 명 정도였지만이
숫자는 부랴부랴 급하게 그리고 억지를
징병은 숫자고 실질적으로 전투다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병력은 그
절반인 7만 명 정도였습니다 12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일본군은 난징의
각 방면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난징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일본군은 폭격기를 보내 난징에 공습을
하고 있었고 난징 전투 직전까지
일본군이 폭격한 폭탄이 무려
300톤이었다고 하죠 국민당군의
탕성즈 배수의 진을 치겠다며 난징에서
다른 도시로 뒤로 빠져나갈 수 있는
다리와 배들을 전부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민간인들도 피난민이 되지
못한 채 난징에 고립되어 버렸던 거죠
12월 6일에는 장제스를 비롯해
국민당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비행기를
하고
난직거래장터
화력은 어마어마했고 난징 내부는
아비규환이었다 일본군 육군 사령과
마스의 원에는 심히 걱정됐습니다 이제
장교 지휘관들조차 자기들 병사들의 군
기강을 통제하지 못하는 정도가 되고
있었습니다 연이은 잔혹한 전쟁을
거치며 겨우 살아남은 일본군들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상태였으며 일사불란
하지 않고 각 부대별로 서로 난징으로
들어가려고 끓고 있었습니다 각 부대
사단장 대대장 중대장 등 현장
지휘관들조차 총사령관의 지시를 무시한
채 서로 난징으로 들어가기 위해
억지로 무분별하게 난징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죠 도저히 군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군율이 잡히지 않은 도적 대나
다람없는 대열의 군대였습니다 12월
10일 10만 명의 일본군이 먼저
난징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탕성즈
대전차포를 앞세워 일본군 전차를 막는
등 국민당군의 저항도 매우
격렬했고 멀지 기사 폭격을 퍼붓는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겨 집중 포화를
쏟아내고 폭격기들 지속적으로 난징
시내를 공습 폭격했습니다 독가스로
살포했습니다 탕성즈 난징을 지킬 수
없다는 걸 알고 12월 12일 탕성즈
비롯한 사령 관부터 난징을
빠져나갔습니다 고립되어 있던 국민
당군은 계속 항전하다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도주하거나 타령하는
부대들도 속출했고 그 부대들을 막는
과정에서 압사당하는 경우도 많았죠
난징의 성벽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12월 13일 난징은 완전하게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난중
전투의 결과 일본군은 약
7,000여명의 사상자가 났고 국민
당군은 2만 명이 전사하고 8만 명이
포로로 잡힙니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난중에는
8만 명의 군인과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 25만 명이 있었습니다 마스
이완은 개인 건강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 중이었고 현장 사람과는 황족
출신의 아사카 야스이 그였는데이
아사카 야스이는 황군의 병사들이
승리를 기념하고 전리품을 취하는데
누구도 통지할 수 없다며 상관이 마스
이완의 지시를 무시하고 난징에 들어온
일본군을 방목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일본군 병사들에게 난징에 남아 있는
잠재적 적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게 1937년 12월부터
1938년 2월 초까지 약 6주간
지옥의 제노사이드가 벌어지니 바로
난징 대학살이 난징 대학살에 최소
12만 명에서 최대 35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약 6에서 8만
명의 여성들이 강을 당했죠 시체
대부분은 양찌 강에 유기해 버렸습니다
일본군 장교 두 명은 누가 더 빨리
중국인의 머리 100개를 배나 시합을
했으며 일본 군인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나 내 기가
일종의 유행이었고 더 창의적인 고문
방법을 생각해내는 놀이를 하게도
했다고 합니다 난징 대학살의 참상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엔 심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서 구태어 디테일하게 다루진
않겠습니다 훗날 전쟁이 끝나고
이루어진 전범 재판에서 사실상 난진
대학사 지휘했던 아사카 야스이 19는
황족이 이유로 재판에서 배제되었고
대신 상관 마스이 이완해 사용
당합니다 난징 대학살에서 희생당한
분들을 애도하며 영상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역서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서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 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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