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진짜 어떻게 멸망했을까? 멸망을 부른 고려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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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어떻게 멸망했을까?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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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서 돋보기입니다
1392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역성 혁명을 어떤
거대한 내전이 일어나 피를 흩뿌리며
왕조를 바꾼 혁명이 아니었다며 그
의의를 인정하는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것은 분명 정치적인 사건의
연속선 있었던 것이지 확실히 다른
시대 다른 나라의 다른 국가들처럼 한
왕조가 다른 왕조로 바뀔 때 나타나는
내전이 있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대체이 성계는 어떻게 고려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것은 우리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고려를 한국의 중세시대 조선을 한국의
근세 시대라며 시대구분을 할 정도죠
단순히 왕조 바뀐 듯 보이지만 도대체
무슨 사회적 변형의 의미를 띄길래
시대구분을 하는 정도일까요 고려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바로 지배층의 정체입니다 고려의
지배층을 귀족이라 르고 조선의
지배층을 양반이라고 하죠 똑같은 거
아니냐고요 분명히 다른 지점이
있었습니다 고려의 사회를 귀족
중심적인 사회라고 하는데요 고려는
귀족의 귀족에 의한 귀족을 위한
국가였습니다 고려의 육대 왕인 성종
시절 최치원은 시험을 봐서 관리로
선발되는 과거 제도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최승로는 과거 제도를
아무나 다 볼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봤죠 오로지 신분적으로
높은 지연한 존재만이 경전 공부와
관료를 소화해낼 수 있다고 하여
최승로는 엄격한 신분제 질서를
강조하며 신분의 고착화와 세스파
주장했죠 그리하여 탄생한 제도가 음서
제도였습니다 음서를 5품 이상의 고위
관료 자손에게 심지어는 외가와 사위
집안까지 적용되어 아무런 조건 없이
관료로 등용되는 제도입니다 즉 신분과
관직을 세습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죠
쉽게 말해 낙하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고려 시대 때는 음서를 통한 관직
진출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었죠 고려 시대 만큼은 음서를
통한 관직 진출이 과거를 통한 관직
진출보다 더 사회적으로 우대받고
존경받는 일이었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음서를 통해 진출한 귀족들이 대부분
고려의 주요 요직들은 독차지 했고
고려의 모든 정치 구조도이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비단 정치 권력은 아니라 고려의
귀족들은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특혜를
누렸는데요 고려의 11대왕 문종 때에
공음전이라는 특수한 토지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고려의 가장 기본적인
토지 제도였다 전시관은 국가에 복무한
관료에게 지급해 주는 일종의 대가성이
공음전 오품 이상의 고의 관료 와 그
일가에게 지급하는 토지였다 말로 그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국가에서 지급해 주던 토지였다 셈이죠
신부는 별다른 범죄를 일으키지 않으면
세습되고 공음전도 처벌받아 박탈
당하지만 않으면 감은 대대로 세습
will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자면
고려 시대에는 운 좋게 집안만 잘
만난 태어난다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정치 사회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을
모두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귀족만이
카르텔이 형성될 수밖에 없었죠
고려에는 더 이상 신라 시대의
골품제는 없었지만 고위 귀족은
끼리끼리의 카르타를 형성하여 주류
귀족이 아닌 이상 사회의 핵심에
진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득 거리란
한번 누리면 그것을 공유하기 어려운
법 소수의 귀족이 고로의 권력을
독점했고이 권력이 더 많은 곳에
퍼지지 않도록 고로의 주요 귀족은
그들끼리 혼인을 맺거나 혹은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폐쇄적인 문벌을
형성했습니다 이게 바로 문벌 귀족이
문벌 귀족은 1170년 무신 정변에
의해 무너졌지만 무신 정권은 이러한
귀족의 무근 체제를 개혁하기다는
그대로
아니 오히려 더 심했습니다 1270년
무신 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귀족들이
부활하며 권문세족이 만들어졌는데요
권문 수적들은 원나라에 빌붙어 더더욱
권력을 공고히하고 기존 고려의 귀족
중심적인 체제를 더 고착화에
나갔습니다 원 간섭기를 통해 민생은
더 피폐해지고 사회 구조적 모순은
축적되는 과정에서 권문세족은 이러한
모순을 권력의 원천으로 삼았죠 원나라
간섭으로 원나라가 고래의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해 가던 때에도
여전히 호화로운 생활을 영의 아던
존재가 권문세족 지배층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치 사회적 권력을 이용해
힘없는 양인을 노비로 만들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불법적으로 토지를 겸병
됐죠 대농장이라고 불리던 검문 세족의
토지 재산은 산과 강으로 경계를 구분
지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고려의 왕도
어쩌지 못하는 권문세족을 인해 고려말
사회 경제 구조는 파탄지경에 이르렀죠
고려 후기의 여러 왕들이 그런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권문세족과 대항하였다
원나라를 뒷배로 두고 있는 권문세족에
번번이 막힐 뿐이었습니다 이걸 그나마
성공했던게 30일동안 공민왕이
있는데요 딱 원나라가 쇠퇴할
무렵이었고 공민왕은 기초를 비롯한
대표적인 권문세족들이 숙청하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공민학 마저 암살
당하고 어린 우왕이 등극하며 이인
님등 권문세족들이 다시 고려를
장악하였고 권문세족과 대항하던 정치
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성리학자들이 있죠 권문 세족만큼이나
세습할 수 있는 대농장이나 가문의
명망이 없는 이른바 중소 지주는 사회
지배층의 핵심에 진출하기 위해 뛰어난
학문적 식견을 터 내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리학을 발전시켜 나가던
성리학자 음서로 사회 주로로 진출하는
권문세족을 비판하고 과거에 우수함을
강조했습니다 국민당은 성리학의 계보를
이어가는 대학자 이색을 성균관
대사성을 임명하고 더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성리학자들의 육성하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들 있니다
하지만 공민왕이 말년에 폭군이 되고
암살 당하고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들이
다시금 권력을 장악하면서 신진사대부의
정치적 힘은 약해지고 권문세족에
언제나 픽팍 받을 뿐이었죠 그때
해성처럼 등장한 사람이 이성기
있습니다 언제나 동북면 시골 촌뜨기
귀족 사회 주루로 편입되지 못한
이성기 있지만 외구 물리치며 공을
세우고 또 최형의 총회를 받으면서
조금씩 정치적 입질을 다져 가기
시작했죠 시간이 갈수록 권문세족
이인임 등의 일파가 선을 넘으며
국정을 농담하자이를 보다못한 최영은
우왕의 승인 하에 이성계와 힘을 합쳐
이인임 등의 일파를 제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권문세족의 시대는 끝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최영 역시
권문세족이 있습니다 그저 개인적으로
청렴하고 도덕적인 권문세족이 있을
뿐이지 최영 역시 고려의 오래 묵은
귀족 사회 3월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죠
이름 등의 일파를 몰아낸 뒤 신진
사대부는 고려의 개혁을 원했으나
최영은 요동 정보를 주장했고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요동 정보를 다양했죠
하지만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해
버렸고 그대로 수도 개경으로 내려와
최영을 탄핵하고 우왕을 폐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서야 비로소 검문 세족의
시대는 끝났을까요 아직도 아니었답니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 고
최영을 몰아내는데 주도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조민수 있습니다
조민수는 최영을 탄핵한 뒤 귀족
출신도 아닌 이성계가 권력을 잡을
것을 우려해 성리학자 이색과 함께
손을 잡고 이성계가 반대했던 우왕의
아들 창왕을 다음 왕이로
추대했습니다이 때문에 신진서 대부들은
스승이었던이 새거도 멀어지죠 다만
권문세족의 끝발 예전 같지 않은 건
분명했고 조민수 역시 신진서 대부에
의해 비리 권이 걸려
탄핵되었다 폐위되고 고려 왕실 종친
중 한 사람을 공양 왕으로 추대했고
이제서야 비로소 조정 내 건문
수적들이 거의 대부분 사라졌으나
수십년간 아니 수백년간 고려의 묵은
귀족 체제가 남긴 흔적은 여전했습니다
사람을 보내버리는 수준이 아닌
근본적인 경제 개혁 즉 토지 개혁을
통해 귀족 체제를 무너뜨려야 했으나
토지 개혁의 방향성을 두고 기존
고려의 체제만 그은 유지하려고 했던
온건 신진사 대부와 고려의 체제
자체를 부정해 버리려던 급진 신진
사대로 분열되었고 그렇게 합의를 본게
1391년 시행된
과전법이란 있죠 이제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고려의 조정은 분열되었고 온건
신진사대부의 정몽주가 피살되는 급진
신진사 대보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며 고려해 멸망했습니다 이님의
제거 최형의 제거 조민수의 제거
그리고 과전법 아지 1년의 과정들은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이었습니다
동북면 시골 촌뜨기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니던 이성계 귀족 체재에서
배척 당했던 정도전 등 고려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과정은 시스템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던 아웃사이더들이 고려라는
시스템에 혜택을 받던 귀족의 체재를
부숴버리는 양상이었고 따라서 그렇게
건국된 조선에서는 귀족이란 개념을
부정하고 오로지 과거만을 숭상하고
성리학을 우대하는 양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음서 아는 제도도
유지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음서의
혜택 범위는 줄어들고 음서를 통한
관증을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 창피한
일이 되었답니다 귀족이나 양반이나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귀족에서 양반으로 전화는
오늘날의 신분 제도가 사라지고 평등한
근대 사상으로 접어드는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한
단계였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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