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위기의 연속이었던 과거 조상님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전란을 극복한 한국전쟁사 통합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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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인들은 어떻게 싸웠을까 한국사 속 전술과 무기의 변천사 통합본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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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현재
대한민국은 전쟁의 두려움 한복판에
있지는 않지만 역사적으로 한국 역시
숱한 전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전쟁과
파괴는 역사의 방향을 바꾸고 또
전쟁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가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를 거치며 전쟁의 경험도
많아지면서 전술과 무기도 변해
왔는데요 한국 전쟁사에서 우리의
전술과 군대 편재 무기 등이 어떤
변화를 거치며 진화했는지 그 변천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음악]
한국은 고대 시대부터 거대한 세
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 전쟁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삼국 시대 이전에 고조선을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면 고조선에
대해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의 군제의 대해서 알길이
없습니다 다만 중국지역 문헌에 의하면
고조선은 장군이라는 국가의 국방과
군사를 책임지는 관직은 있었다고
합니다 위만 조선 이전의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국가였던만큼
아직 철기가 없을 때라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잘 차려진 갑옷과
무기들로 무장했던 가능 성은 없어
보입니다 아마 원시적인 단계의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위만 조산 때부터
본격적으로 철기가 고조선에 유입이
됩니다 고조선에 기병대가 있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고조선과 접혀
있던 흉노족의 영향이 분명히 있었을
테고 또 중국도 그때 이미 기병대를
서서히 운영할 때였으며 아울로
고조선의 전통을 계승한 고구려에서
수준급의 기마 수를 유지했던 것을
보면 고조선이 정의 기병대를
운영했을는 몰라도이 기마에 대한 전통
보화는 분명 있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조선 멸망 후 한국은 원산국 시대를
거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강 구도의
삼국 시대로 넘어갑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여러 단계의 중앙집권화 개혁을
걸쳐 강대국으로 부상하지 새 나라
모두 시작에는 그저 부족 연맹 국가에
불과했고 점차 타부 should
그리고 타국과 싸우고 전쟁하는
과정에서 국력을 키워 가죠 철기에
대한 무기 개발도 본격화되고 국가의
규모가 커지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각
군대도 조직화합 아직 화기가 등장하기
전에는 당연하게도 검 창 활 그리고
간혹 타격 무기 등이 가장 메인이
되는 무기였습니다 우선 검의 경우
고리자루 큰 칼이라는 직도 외날검을
사용했는데 고리자루 큰 칼의 한자
명은 환두 되도로이는 고그 백지
신라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보편화되어 있던 동아시아의 공용
양식이었습니다 고리자루 큰 칼의
손잡이 고리에는 여러 장식을 새겨
넣었는데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고리자루 큰 칼에는 봉황의 머리를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고리자루 큰
칼에서 용의 머리를 새겨 놓았죠 창의
경우 찌르고 미는 용도인 모 배거나
끌어내리는 용도인과 그리고 둘을 합쳐
놓은 극으로 나입니다 창 역시 고구라
백제 신라 거의 모든 보병들이 검보다
더 많이 사용하던 무기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창병이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백제가 사용했던 창이
철겸 창이라고 대형 낮과 가까운
형태였죠 일본의 대형도 사치도 백제의
철겸 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습니다 신라나 가야의 경우
양옆으로 갈고리가 갈려진 구창 혹은
요구 창을 사용했고 또 신라는 보병들
중에서 장창을 사용하는 장창병 부대를
따로 편성해서 운영했습니다 고구려
역시 창을 사용하였는데 보병이
사용하는 창보다이 기병이 사용하는
창이 더 길었고 고구려는 부월수 아는
도끼 전문 부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국인 주무기는 활 아니겠습니까
특히 고구려 활의 성능이 당시
아시아에선 압도적이었습니다 고구려의
활을 맥궁이라고 불렀는데 우리 북방의
민족을 일컫던 예맥 쪽의 맥에서
유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맥궁
복원할 수는 없고 다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그림으로
확인이 가능한데 고그의 맥궁 길이는
짧은 편에 속하고 유난히 많이 휘어져
있는 각궁로 그만큼 탄력성이 좋
왔다는 뜻인데 사정 거리나 관통력이
어느 면에서 그 어떤 활과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력했습니다 중국집
기록 위서 있는 고구려에서 메궁이라는
좋은 활이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고구려 기마병들이
말을 타며 뒤를 돌아 활을 쏘는 배사
이름바 파르티 한 샷을 구사 있죠
삼국은 활 뿐만이 아니라 석궁 즉
세뇌도 사용했는데 쇠뇌는 신라가
유명했습니다 신라가 한창 3국 통일
전쟁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 육두품
출신의 구진천이라는 기술자가 천보노
아는 궁을 만들어냅니다 천부 누는
이름 그대로 천걸음 앞까지 날아간다는
뜻이죠 참고로 평범한 활의 평균 사전
거리는 60보 있습니다 그리고 구진
천은 연사가 가능한 석궁 만노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보노 만노 신라의
나당 전쟁 당시 신라를 승리로 이끈
전투 매소성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죠
갑옷을 보자면 삼국시대 갑옷은 철로
만든 판갑 was 찰갑의 종류가
있었습니다 판갑 쇠 부치를 하나의
통으로 만든 갑옷이 찰갑은 여러
철판들은 가죽 끈으로 연결한
갑옷입니다 고글에 찰갑을 많이
사용했고 신랄한 가야에서 판갑 썼는데
아무래도 찰갑이 탄력성 덕에 방어
성능이 더 높고 또 판갑다는 몸을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죠 현재까지
출토된 삼국시대 갑옷의 75% 가야
고분에서 출토되었습니다 기병에 대해
설명드리자면 어느 나라나 기병들을
운영하였고 기병대는 항상 정예 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히 고그의
개마무사 유명하죠 개마 무사는 중장
기병대로 말도 철제 무장화 있는데이
무장화 한 말을 개마 아고 했으며
개마 het 한 기병 부대를 개마
무사라고 불렀습니다 신라의 경우 소년
집단인 화랑도가 전쟁터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가야 멸망전에서
활약한 사다함과 황선보 전투에서
전사한 관창이 있죠 그런데 의문점은
과연 삼국시대의 군대가 상비군이
있느냐는 겁니다 고그의 개마무사 같은
특수 기병대는 아마 상비군이 있겠지만
기타 병력까지 그랬는가 하면 회의적이
고구려백제 신라보다 부족 연맹으로
시작을 했고 부족 장들은 귀족으로
편입이 되면서 세 국가 모두 물론
국왕의 직할 부대도 있었겠지만 병력의
상당 비율이 귀족들의 병력에 의지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수근의
경우도 분명 존재하기는 했습니다
고구려 관계 투자왕이 백제의수도
한성을 공격할 때 한강을 따라서
수군을 보내기도 했으며 신라가 일본
원전에 나서기도 그리고 나당 전쟁
최후에 전투였던 기벌포 전투는 신라의
시득 이끌던 신라군의 해전이 있단
말이죠 다만 수분이란 별도의 부대가
따로 있었는지 기존의 육군이 필요에
따라 그냥 배에 타서 싸웠는지 자료가
없으며 아마 후자 쪽일 가능성이
크답니다
고려 시대의 무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도 여전히 검창 활 위주였습니다
고려의 검도 똑같이 외나 직도
고리자루칼 일명 환두 도를
사용했습니다 고리자루 큰 칼에서
고리자루 칼이 된 건 뭐 다른 변화가
있는 건 아니고 칼의 도신 길이가
다소 짧아집니다 보병들은 검보다는
창을 더 보편적으로 썼거든요이
지휘관들은 양날검 단검을 사용했는데
단검 같은 양날검을 지휘관들이
상징적이고 권위적인 목적으로 차고
다녔습니다 여전히 고려도 활과 석궁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고 고려 시대 때는
연상 가능한 석궁으로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고려군은 2군 6이라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전시 문건들의 사원수와 부원수 혹은
사원수 중원소
하원수로길 하였죠 2군 6기 중앙군은
6대왕 성종때 지방군은 지방
행정구역을 정비한 현종 때에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아직 현종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거한의 1차 침입
당시에는 오로지 중앙군 싸웠고 이때
더 많은 병력의 필요성을 느껴 8대왕
현종은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한 후
지방군 동원 제자를 확립하자 지방군은
당연하게도 상비군은 아니었으며 중앙군
2군 6위의 경우 상비군이 있느냐
아니었느냐 장교들만 상비군이 있다
등등 여러 주장들이 부딪히고 있습니다
다만 북쪽 국경지대에 설치했던 행정
구역 북괴와 동계는 군사적 성격의
행정 국이 있던만큼 북괴와 동계의
군사적 요충지에 상비군을 두었습니다
상비군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한
국가가 얼마나 행정력과 중앙집권화가
잘 되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고려는 12세기 여진 정보를 위에
무려 17만 명이라는 별무반을
창설하였고 그 핵심은 신기군이라는
기병대였다 17만 전체가 다 상비군은
아니었지만 신기군 기병대는 아마
대다수가 상비군으로 구성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신정변이 터져 무신
정권이 수립된 것도 어쨌든 군부는
조직이 조정과 다르게 별도의 조직으로
있었다는 뜻이잖아요 고려은 삼국시대에
비해 월등하게 중앙집권화가 되어
상비군을 운영하는 행정력을 갖추기는
했지만 조선에 비해선 여전히 봉건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고려 시대 과거
시험에는 무과가 없었고 대몽 황진
기에는 최시 전권의 개인 병력이었다
삼별초의 크게 의지했으며 이성계의
기병대 또한 거의 한경도 군벌에
가까웠습니다 고려 후기에 가면 수금도
발전하는데 한반도 내부에서 전쟁이
격렬했던 삼국시대 때는 강을 이용한
전투가 많았지만 고려의 전쟁은
외세와의 전쟁이었고 또 대부분이
북방의 민족들이 수군에 대한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진 않았죠 그러다 고려
후기 외구의 침략이 잦아지자
본격적으로 수구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최영은 공민왕에게 고려군 전 병력을
수군으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하며
군함 2천 척을 만들자고 제안했죠
당시 고려 전함이 다 합쳐서 100척
내외 정도였으니 최형의 주장은
파격적이었습니다 이천초 관조는
공민왕이 부담스러워 했는데 이히와
정제 등의 주장에 따라 차라리 해전에
특화된 수군을 별도로 창설하는 권위를
받아들여 한국사 최초로 육군과
독립적인 조직으로서 수근이 양성입니다
1383년 정지장군 이끄는 4 7척의
고려 수군이 남해 안의 관음 포에서
외고 120척의 를 격파하면서 드디어
고려 수군 창설의 결실을 보였죠
고려말 외구의 잦은 침략은 수분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무기와 군사의
진화를
촉진시켰다 바로 드디어 화약이 한국
전쟁사에 도입된 거죠 화약은 일찌감치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나 그 비법을
외국에 절대 공유를 안 했습니다 평소
화약의 관심이 많던 고려 장수
최무선은 엄청난 양의 공부와 연구를
거듭하며 끝없는 시행 최고의 실험을
하고 인맥을 총동원해 중국
지인들로부터 정보를 받아내 끝끝내
화약 만드는 기술을 터득했던
1377년 고려 조장은 화기 제조를
관장하는 화통 도감을 설치해 최무선의
주도하에 화통 도감은 화포 대량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380년
고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외구 침입
당시 진포 대첩에서 최무선의 화포가
처음으로 선보여 외선 500척을
모조리 격침시켰다 다만 이때 사용했던
화포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포구에서
쏘는
대포라인 수동으로 불을 붙인 구체를
던지면 일정 시간이지나 자발적으로
폭발하는 이 원시적인 형태의 화포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조선은 문약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적어도 조선 전기
때 조선의 국방력 군사력은 매우
막강했습니다 우선 조선을 건국한 태주
이성계부터 무인 출신이잖아요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기 직전 고려 시대
당시에는 없었던 무과를 과거에
신설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무과
창설에 대해서 논의만 되다가
1402년 태중 이방원 때 비로서
처음 무과가 시행됩니다 과거의 무과는
3차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1차 시험인
초시는 전국적으로 각 도별 인구
비례를 고려해서 지방 훈련원 주제
70명과 병마절도사 주제 120명 총
190명을 뽑습니다 이차 시험은 복시
아고 해서 수도인 한양에서 이번엔
국방부 즉 병조 주관으로 190명 중
28명을 뽑습니다
법정상속으로 28명을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하네요 마지막 3차
시험인 전신은 국왕 앞에서 치르는
시험으로 2차 시험을 통과한 28명을
1등부터 28등 아지 등급을 정하는
시험입니다 당연히 높은 성적을 거둘수
좋은 보직 혹은 본인이 원하는
보직에서 근무할 수 있겠죠 무과
시험은 총 여섯 가지 영역이
있었습니다 먼저 300m 거리의
광역을 화살로 맞추는 목전 150m
거리의 광역을 화살로 맞추되 굉장히
짧은 화살을 사용해야 하는 편전
100m 같이 안 되는 거리의 광역을
화살로 맞추되 이번에는 굉장히 무거운
화살을 사용해야 하는 철전 말 위에서
화를 쏘는 기사 말 위에서 창을
휘둘러 지푸라기를 배워야 하는 기창
그리고 말 위에서 공을 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격구 등 총 여섯 가지
종목이었던 여섯 가지 종목 중네 개가
활과 관련한 시험으로 조선 시대까지도
우리 민족이 활을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가 있죠 조선 군인의
주 활은 동물의 뼈나 뿔을 섞은
각궁이 있습니다 조선의 각궁은 물소의
뿔과 민어의 부레로 섞었는데이 두
재료를 섞으면 아주 단단하고 먼 사전
거래를 확보할 수 있는 우수한 활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조선 초기 군사에
대한 관심은 건국 직후부터 이어졌고
비단 무인 출신인 태조 이성기뿐
아니라 조선 전 개국을 설계한
정도전의 관심도 많이 쏠려 있었습니다
정도전은 말년에 요동 정보를
주장했을만큼 군사력 강화의 심혈을
기울였는데 정도전은 조선군의 기본적인
훈련 방식과 전시 메뉴들을 정리한
진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정도전의
진법은 방어에서 먼저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에게 선공을 유도하고
방패로 무장한 방어 부대가 적군의
공격을 막으면서 동시에 뒤에 배치되어
있는 궁병이 화살을 퍼붓는 방식이죠
군병들의 공격으로 성공을 한 적군의
대열이 흐트러지면 그때 최 후미에
대기하던 김명 를 투입시키고 하는
편제가 정도전의 진법이 있습니다
정도전의 진법 그래도 볼 수 있는게
역시 조선군은 궁병과 기병이
메인이었다 점을 알 수가 있죠 하지만
적군의 공격이 매우 강력한 나머지
반격에 실패할 수도 있잖아요이 점을
감안하여 조선군 대형은 병사들 간의
간격 그리고 분대별 간격이 굉장히
넓었습니다 한쪽이 무너져도 다른
쪽에게 피해가 많이 가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죠 또 궁병 중심의
조선군이 있기에 간격이 넓어야
궁병들이 공격이 더 자유롭고 더
위력이 강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간격이 넓은 경우 상호간의 협력도
다소 어려워진다는 한계가 있죠
정도전의 이러한 진법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살해된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태중 이방원과 세종대왕은 변계량 이게
정도전의 진법을 보완 및 강화하도록
하였죠 조선 시대부터는 냉병기 화기가
공존하던 시대였다는 특징이 있는데요
고려말 최무선이 화약을 발견한 일에
조선 시대부터 화약에 대한 개발 및
강화도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조선
전기 화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있습니다 태종대와 세종때의 최해산이
비롯한 여러 화약 및 무기 전문
가들이 화포 개발에 착수했고 조선
전기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청동으로 만든 화포를 만들어 냈습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화포가 크게네
가지 종류가 있었습니다 크기의 순서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
총통이 있었죠 네이밍은 천자문
순서입니다 가장 큰 천자 총통은
길이가 무려 1.3mm 압도적인
공격력을 자랑하며 천자 총통 있는
대장군전이라는 거의 로켓의 가까운
발사체를 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괴력이 어마어마한만큼 사용법도
까다롭고 화향 도 많이 소비되었다 쓸
수 있는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지자
총통은 길이가 1m 조금 안 됐으며
그럼에도 여전히 막강한 파괴력을
자랑했지만 지자 총통도 너무 무겁고
화약 사용량이 많아 세종 대형은 최해
산에게 더 간소화도
개량하였다 총통과 길이 약 50cm
황자 총통을 만들어 냈는데 이후로는
현자 총통과 황자 총통을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휴대하기도 상대적으로 편하고 위력도
결코 약하지 않았거든요 또 최 회사는
완구 신포 화통 같은 다양한 신무기들
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세중 대왕의
사군육진 개척 전쟁이 쉽게쉽게
일어난게 아니었던 겁니다 또 세종시기
최상과 장영실이 같이 만든 무기가 그
유명한 신기전이 신기전은 화약으로
화살을 쏜다는 아이디어에서 차아
냈는데 화약이 폭발로 장거리까지
날아가는 대형 화살인 거죠 그런데
신기전은 휴대하기도 불편하고 쏘기도
불편해서 초창기 공격용다는 신호용으로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조선 전기
군사인 무기 방면에서 크게 기여했던
왕이 유명한 밀리터리 덕후 5대왕
문종이 문종은 신기전의 위력을 더
배가시킬 방법을 생각하다가 신기전을
꽂아 넣을 수 있는 발사 틀을 만들고
그 발사 틀을 바퀴로 실어가는 화차를
생각해 낸 겁니다 그러면 휴대하기도
운반하기도 발사하기도 훨씬 용이하겠죠
그냥 발사 틀의 신기전을 꽂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발사 지점과 발사
거리까지 계산할 수 있도록 발사 틀을
위아래 각도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문종은 1451년 한
해에만 무려 700여대의 화차를
생산합니다 그리고 정도전 변계량이
내려오던 진법을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문종은 동생 수 대군과 직접 진법서
만들고 김종서 정인지 더로 자문하게
했습니다 오행의 의거에 방진 원진
곡진 직진 예진 총 다섯 가지 진법을
조선군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으로
삼았습니다 그 원칙 자체는 정도전의
진법에 크게 벗어난 곳이 아니었답니다
문종 때에 강화된 군사력은 7대왕
세조 때에 빛을 받는데요 1460년
신숙주가 두만강을 넘어 북벌을 감행
조선 정부에 대행하던 여진족 부족들을
초토화 시킵니다 그리고 1367년
함경도에이 시혜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시의 진압 전이었던 말령 전투는
화차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어 조선
전기 최대의 규모의 활력 전이었죠
화차 pun 아니라 만령 전투에
사용되었던 화포 총통이 9백
자료였다 군사들이 그대로 압록각 넘어
여진족 토벌에 투입되어 2차 북벌에
큰 승리를 거두죠 세조의 2차 북벌은
명나라와 함께하는 작전이었다 명나라가
오기도 전에 조선군 단독으로 여진족을
토벌했던 전투였습니다 이처럼 세조
때의 전란이 많았고 그만큼 군대를
징발하고 동원하는 체계가 자리를
잡아야 했습니다 세조 전 까지만
해도이 체계가 다소 중근 한
방이었는데 세조는 진관 체제로 일어나
하였죠 진관 체제는 전국적으로 각
지역별 관할하는 거진 두고 각 지역별
거진 다시 해당하는 돌을 책임지는
병영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진관 체제는 지역 단위로 이루어진
군사 방어 작전이었고 하지만 조선
중계에 이르러 특히 9대왕 성종
때부터 조선이 급격하게 무역과 됩니다
이에 조선의 군동원 체제도 15대왕
명종 때에 진관 체재를 처 하고
새로운 체제 재승 방력 체제로
전환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단히 잘게
쪼개던이 거진을 몇 개로 통폐합을
시켜 버리고 지휘관들도 현장의
지휘관이 아니라 중앙에서 마땅한
사람을 파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가성비는 높일지 언정 국방력은 외적의
침입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고이는
임진열 테 큰 화를 보게 되었죠
수근의 경우 고려 말 공민왕이 이히와
정지의 제한으로 수군을 별도로 창설한
일에 조선도 수군을 육군과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은
화 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만큼 그에
맞춰서 배도 기동성은 느리 되
둔중하고 거대한 배를 제작하였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맹선이라는 배를
이용하였는데 조은 중기의 외구의
침입이 다시 많아지자 맹선 다 더 큰
크기에 더 많은 화포를 실을 수
있도록 하는 배를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5대왕 명중 때의
판옥선이 만들어집니다 기존의 맹성은
전투와 세금을 운반하는 용도로도
쓰였는데 판옥선은 오로지 전투에만
최적화된 군함이 있죠 판옥선의
사례에서도 나타나고 또 조선군의 진
법 전 투수를 보자면 조선군은
궁병들이 활 화포 기병대가
주력이었고 상대하기에는 최적화 되어
있었죠 조선 전기 조선의 상대는
대부분 여진족이 있고 여진족을
토벌하는 전술에 맞추어 조선군도
편제와 무기가 발전한 겁니다 그리고
큰 성과를 봤죠 대신 그만큼 보병들이
약점이었던 무과 시험만 봐도 도검
시험은 전혀 없죠 삼국시대의 검
고리자루 큰 칼이 고려시대에는
고리자루 칼 즉 환두로 길이가 짧아진
것처럼 조선 시대의 검 환도는 이보다
검의 길이가 더 짧아집니다 조선은
검술에 대해서 딱히 신경을 쏟지
않았던 거죠이 역시 임진한 테
조선군이 쓸려 나가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습니다 조선군은 일본군을 마치
여진족 럼 상대했던 거죠 하지만
일본군과 여진족의 전술 방식은
당연하게 더 달랐고 그 이해에 대한
차이에서 조선군이 그렇게 맥없이 당한
겁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실내에
기병대였다 1강 1대에서 대규모
여진족들이 국경을 넘어 쳐들어온
니탕개의 난 사건이 있었습니다이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장본인이 의
기병대이 전투를 기점으로 신립이
조선의 영웅이 되었죠 하지만 임진란
초기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기병대는 쓸려 나갔죠 일본군은 조총을
세운 보병 위주였고 여기에 기존의
조선군 편제와 전투 수를 맞지 않았던
겁니다 또한 조선은 임진 그한테
조총을 처음 봐서 초반엔 그렇게까지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조선은 임진란 전부터 조총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조선의 활이 조총보다 더 강하다고
판단을 했던 거죠 조총이 빠르긴
빨라도 장전 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 사이에 화를 쏘면 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하지만 임진 라로
여러 충격을 받은 조선은 곧바로 군제
개혁에 나섭니다 군지 개혁을 주도했던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 있습니다 임진란
도중 류성룡은 선조의 허락을 받아
훈련 도감이라는 새로운 부대를
신설했고 훈련 도감에 기존의 창가를
쓰는 보병과 화를 쏘는 궁병은 그들을
유지하고 조총 부대인 포병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도 총을
쏘는 부대가 등장합니다 또 기병대
있었고요 그리고 훈련 동안 병력은
직업
사실상 임진란 이후 조선 후기
조선군의 핵심이자 자존심이 바로이
훈련도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기존
조선군 편재의 조총 부대를 통해
보병의 위력을 강화시키며 그간
조선군의 약점을 보완하는 부대였던
겁니다 임진 애한테 조선은 비단
일본군뿐 아니라 원군으로 파병 왔던
명나라 군을 통해서도 군제 개혁에
레퍼런스를 받아들었습니다 임진란 전
명나라도자기 광이 명나라의 군제
개혁을 단행했는데 인지대란 이후
조선도 첫개강 병법서 기 기호 신서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군제 기역에
교본으로 삼았죠 기호 신서해 가장
중요하게 영향을 받은게 창을 이용하는
보병이 있죠 명나라군이 가장 잘 쓰던
창이 삼지 창인 당파 있는데 임진한
테 명나라 원군이 사용하던 당파를
보고 감명을 받고 기호 신서의 의거
당파를 보편화 시키고 또 기호 신서의
나오는 창 군대군대 철심을 박은
대나무 나뭇가지들을 마구 달아 놓은
무이 낭선 도입하였습니다 전국 군동원
체제도
소고이츠 막론하고 즉 천민부 양반까지
모든 남성들이 평시에는 자신의 생업에
종사하다가 일정 기간 훈련하고
전시에는 동원되는 체제를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재승
방력 체제에서 다시 진간 체제로
돌아가 지역 단위 방어를 채택했고이
소국군 체제도 기호 신소을 기반으로
수립한 제도였습니다 비록 상대적으로
뒤늦게 도입한 조총 부대였습니다
조선군의 조총부대 실력은
최강이었던 활 화포 총 등 원거리용
무기 활용만 그은 자신이 있었던
겁니다 15대왕 강해군 때는 비록
결과는 패전이 있지만 명나라와 연합에
누르하치와 싸운 사루 전투에서 가장
잘 싸웠던게 조선군의 조총 부대였고
16대왕 인조는 오로지 하기만을
다루는 부대 어영청 조직했던 17대왕
효종 때는 병자 호안으로 겪은 치욕을
복수하 자고 청나라 공격하자는
북벌론이 제기되었는데 비록 명분에
불과한 북벌론 이었지만 조선군의
군사력이 일시적으로 강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네덜란드인
벨트브랜드 까지 필요하고 더 발전을
하죠 비록 청나라와 싸우지는 않았지만
청나라가 러시아를 정벌하러 떠난 나선
정벌에서 조선군도 동원되었는데
러시아군이 가장 무서워하던게 조선의
조총부대 있죠 22대왕 정조도
조선군의 군사에 대한 대단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후이 나름 나쁘지
않아 보이는 조선군인 그런데 대체 왜
조선은 마지막에 그렇게 약속 국이
되어 버렸을까요 조선 시대의 군세
사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요 군사 방면은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아무리
정예병이라 한들 정치가 부패해 있는
순간 그 나라의 군대는 순식간에
오합지졸 군대가 된다는 겁니다 군대의
정해화 정말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반면 오합지졸 군대가 되는 건
한 순간이죠 동양의 전근대 왕조에서는
상비군이 있고 전시에 전국적으로
민간인들을 동원하는 것이 보통
관례입니다 상비군은 주로 수도를
지키는 중앙군이 훈련이나 전시에
동원되는 병력은 지방군 이죠 조선의
지방군은 임진란 당시 류성룡의
제한으로 소고 체재로 운영되었습니다
소국군 체제는 일정 나이대에 속하는
남성들이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훈련이나 전쟁 같은 유사시에는
동원되는 체제인데 소국군 핵심은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천민부 양반까지 모두에게 적용되었는데
이게 지체 높으신 양반들 입장에서
매우 기분이 나빴던 거죠 양반들의
병역 깊이 상은 점점 만연해져
양반들뿐 아니라 일반 양인들 소국군
편지에 응하지 않으면서 점차 천 민만
남게 됩니다 비유를 해보자면 예비군
훈련 기간에 훈련받으러 가면 죄다
천민 들밖에 없는 겁니다 이러니
소고구려 운영되지 않았으며 조선 후기
조선의 지방군 동원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즉 지방군이 없었다는 뜻이죠
따라서 조선후기 조선군은 상비군으로
운영되는 중앙군이 전부였다는 겁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선 큰 전쟁이
없었고 그저 내부 반란이 전부였던
지라 지방군은 동원 못 하고 중앙군
운영하는 것에 대해 그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니 임술
농민 풍기나 동학농민 운동 같은
대규모 내부 반란이 터졌을 때 초기
대응이 그렇게 늘 릴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긴 애초부터 지방군 동원
체제가 개판이니 그런 거대한 밀란이
생기는 거긴 하겠지만요 상비군으로
중앙군은 총 다섯 개 이른바 구형이
있었는데요 가장 먼저 창설되었다 훈련
도감은 조선 후기에 그 병력이 7천
정도 화기 전문 부들 어영청 1 6천
정도 북한 산성을 방어하던 청청은
2만 남한 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1
6,500 정도 금 이형은 3천
정도였습니다 다 합치면 약 6만 명
그러니까 조선 후기 조선군은 6만이
전부였다는 뜻이고 이마저도 기록상
수치라 실질적으로는 더 적었을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조선 후계는 북단
간의 당쟁이 극심해졌다 오군영 전부
정승과 판서의 총책임자를 맡았기
때문에 각 분당로 군영을 자기네
붕당의 병영으로 만들기 위한 쟁탈전도
심했답니다 22대왕 정조 시절 정조는
친위부대 장용영을 신설하였는데 이때
구년 가운데 수어청 병력을 전부
장용영을 통폐합 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정조사 후 정순왕후가 장용영을
해산하면서 수호 청도 사라졌고 따라서
세도 정치 기에는 구형만 존재했습니다
세도 정치 기에는 구형들이 전부
오로지 한 가문을 위한 부대로 전락해
버렸고 그리고 나름 정해 부대로
구성되어 있던 화기 전문 부대 어영
청도 군기가 매우 흐트러져서 어영
부영이 말이 여기서 유래했고 더불어
세도 정치에 이르면 세금제도
문란해지고 한 가운이 국고를 독점하고
있지 군납비리 등의 부정부패 마련하지
이러니 국가 재정이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어 직업 군인들로 구성된 중앙군
장교와 병사들에게 월급이 지급되지
않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그러다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옹립하는
세도 정치가 끝이 나지만 흥선대원군이
다른 개혁을 할 때 군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흥선대원군 실각 후
친정을 맡은 고종 때의 개혁을
단행합니다 고종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도 문호를 개방한 이후에 도무지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용 군형을
운영할 국가 재정이 충분하지 않차
1881년 어영청 총융청 금형을
합해서 장어영 만들고 훈련 도감과
기타 궁궐 수대를 합 해서 무의 영을
만듭니다 이렇게 중앙군은 두 개의
영으로 축소된 거죠 그럼에도이 두
개의 0조차도 운영할 재정 상태가
아니어서 여전히 월급이 지급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고종은
별기군이라는 신식 군들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일본군 장교들이 고문으로
파견되어 훈련을 총괄하고 근대식
총기들도 무장하고 월급도 잘
지급되었고 당연히 월급 못 받고
조총이나 쓰고 있는 종례 2형
군인들은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1882년 밀린 월급
준다고 받은 가만히 엔 모래가 상당
수였고 더 이상 참지 못한 9식
그린들 일으킨 군란이 바로 이모 군란
이었고요 이모 군란이 진압되면서
종래의 두 개 영이었다 무위영 장어영
해산하고 별 기군도 해산합니다 이렇게
따로따로 운영하는 것이 문제라고 여긴
조선 정부는 중앙군을 친군영이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발족하고 친 군영은
총 다섯 개의 병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이 중 전형과 후영 일본군
고문단 아래에서 일본식 훈련을 받았고
자영과 우영은 청나라군 고문단의 훈련
을 그리고 령은 전통적인 조선식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친 구형도
근대시 군대였던만큼 투입되는 재정을
여전히 조선정부는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세도 정치 이래 조선정부의 국가
재정은 만성적인 적자 재정이 있거든요
중앙군 개혁을 보면 조선정부가 확실한
개화 아을 내놓는게 아니라 그저
일본과 청나라의 입김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뭐 자꾸 축소시켰다 통폐합
시켰다가 뭐 다시 독립시켰다 이렇게
번복하는 모습을 보이니 중앙군 개편이
중군 한방이 된 겁니다 또 하나
답답한 건 조선 후기부터 문제
제기되었던 지방군 동원 제도는 아무런
조치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겁니다
1894년에 1895년 동학농민
운동을 진압하고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고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강제로 조선의 가보 개혁을 단행하여
기존 조선의 중앙군이 있던 친 군영을
해체해 버리고 수도를 방해하는
중앙군은 일본식 훈련을 받는 훈련대
미군 장교들 아래에서 미국식 훈련을
받는 시위대로 나니다 이중 훈련되는
3대 대까지 있었는데 1에서 3대대의
대대장을 모두 침입하였고 1895년
일본 낭인들이 경복 궁인 침투에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 당시 일본
낭인들을 도왔던 부대가 훈련되었습니다
그나마 미국식 훈련을 받았던 시위대가
경복궁을 사수했고 을미사변 때는
중앙군이 고는 꼴랑 두 개군 밖에
없었던 훈련대 시위대는 자기들끼리
싸웠죠 단 의미 사변 이후 일본이
국제 사회에 지탄을 받자 모르는
척하면서 고종은 의미 사변에 가담했던
훈련대 장교들을 처벌할 수 있었고
1대대 대대장과 2대대 대대장은
일본으로 도주 3대대 대대장은 처용
당했습니다 하지만 훈련된 내에서도
을미 사변을 막으려던 부대들도
있었습니다 뭐 전부 전사하지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1897년 덕수궁으로
황공하고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습니다 새로운 국가
선포에 앞서 군제 개편에도
들어가는데요 의미 사변을 겪었던
고정이었음만큼 개인의 신변 호위에
매우 민감하여 기존 조선의 중앙군을
모아 대한제국 친위대를 창설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친 이대에서 시위대는
별도의 조직을 독립시켰다 이대는 말
그대로 고종 황자와 황실을 수유하는
부대이고 시위대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부대였고 친위대 병력은 두
개 대대 17명이었다 나중에는 두 개
연대 4,000 명까지 들렸고 시위대
병력은 창설 당시 1개 연대였다
나중에 2개 연대로 드러나 병력은
5,000 명이었습니다 친위대와
시위대는 러시아 고문단의 훈련을 받고
러시아 식으로 군제가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각 주요
지방 14개 도시에 진위대 아는
지방군은 배치 시켰습니다 민간인들을
동원하는 체제가 아니라 상비군 병력을
주둔시키는 방식이었죠 지방군 전체
병력은
5600명이었고이 지방군 진의 대는
훗날 을사 조약으로 인해 우리
의병들이 일어나자이 의병들 진압하는데
투입되었고 의병들 가운덴 황제폐하의
부대인 진희와 싸울 수 없다며 해산한
부대도 있었죠 러이 전쟁 이후
중앙군이 친위대와 시위대는 러시아식
고문단의 모두 나가고 일본 휘하에
들어왔으며 1907년 정미 조약으로
결국 대한제국의 모든 군대는 감제
해산되었고 그렇다면이 해군을 보자면
조선은 경상우수영 경상 좌수영
전라우수영 전라좌수영 충청수영 이렇게
다섯 개의 해군 부대가 있었고 임진열
한때 이순신을 삼도수군 통제사로
임명하면서 터 다섯 개의 수영은
통제영의 관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종 때의 근대화가 되면서 기존의
통제형 체제를 폐지하고 근대식 해군
본부인 해방 아문 혹은 해방 영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통영에 일종의
해군 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을
설치하고 영구 고문단을 초빙했다
1894년에 1895년 청일 전쟁과
갑오개혁을 거치면서 해방 형과 통제형
학당 모두 철폐되면서 한동안 조선에는
수군 즉 해군이 없었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나서도 대한제국
해군 만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죠
1902년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해군을
창설했고 1903년 고종황제는
화물선을 군함으로 개조한 양무호
1904년 순시선이 있던 광제호
수입해 온게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함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해군 역시
1907년 대한 제국군이 해산되면서
해군도
해산되었다 대한제국군의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의병으로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군으로 활약했습니다 애당초
정식 군인이 아니었던 민간인들이
의병과 독립군으로 뛰어들었을 때
쓰지도 못하는 총기 사용법과 기본적인
전투 수를 익힐 수 있었던 건 과거에
정식 훈련을 받은 대한 지구군 장교
및 병사들이 가르쳤던 덕분이었습니다
무기의 경우 러시아 내전에서 쓰이다
벌려진 무기를 사 온다든지 중국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충당하였다 혹은
대한제국 군까지 아니더라도 대한제국의
육군 서관 학교였던 육군 무관학교
졸업생들도 일조했고 김좌진 지청천
이동이 등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출신이었고 1945년 해방 후 미군정
기관이었던 1946년 1월 조선 국방
경비대를 창설 하였는데이 부대가 오늘
날의 대한민국 국군 있니다 처음 조선
국방 경비대의 계급 명칭은 과거
대한제국군 명칭을 그대로 따랐으나 곧
오늘날의 계급 명칭으로 바꾸었죠 초선
국방 경비대에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의 광복군 그리고 일본
부대였던 관동군과 만주군 또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우던 팔로군이 일부
합류하였고 1948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조선 국방
경비대는 지금의 국군이 되었죠 국군이
창설되면서 기존의 조선 국방 경비대
예하 부대였던 조선 해양 경비대가
해군으로 독립했고 1949년 4월
만주군 출신의 신현준 중령이 초대
해군 참무 총장 손원일 제독을 설득해
해병대를 만들었으며 194 19년
9월 손원일 제독의 강력한 주도로
대한민국 해군이 실 시공일
백두산함이라는 600톤 number
구잠함 처음으로 구매하였습니다 공군은
국군 창설 당시 육군 소속이었으나
625 전쟁이 터지기 8개월 전이었던
1949년 10월 한국 광복군 출신의
최영덕 전군 그리고 당시 국회의
국방위 전문 위원이었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파일러 권기옥의 주도로
대한민국 공군이
독립하였다 항공 기로는 전투기가 전혀
없었고 훈련기와 정찰기로 22대가
끝인 찢어지게 가난한 공군이 625
한국전쟁 발발 당시 육군은 약 9
5천 해군은 해병대 포함 약
6900명 공군은 약
1900명이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 병력은 약 36만 명 해군은
해병대 포함 약 7만 명 공군은 약
6만 5,000명이랍니다 이렇게 쫙
망라해 보니 역사 속 한국군도 숱한
어려움을 뒤면 성장했죠 지금도
불철주야 나라를 지키고 있을 대한민국
국군 장병들에게 감사함을 바치며 영상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역사 돋보이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재미있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