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갓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 문화 유산 이야기 전설 설화 미술 불교 | 한국불교의 아름다움 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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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걸쳐서
조선시대와 지금까지도 많은 불상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 불상 중에서 시대에 따라서 불상의 특징들이 다 다르게 나타나는데요.
예를 든다고 한다면 통일신라의 대표적 불상 하면
석구란 본전불을 보면 한눈에 감탄을 자아내게 뛰어난 작품이 됩니다.
그 불상을 보면 비례와 조화미가 완벽하게 적용되어 있는 불상인데
갑자기 고려시대가 되면 통일신라시대 때 적용되었던 비례와 조화미가 사라지고
거대한 크기, 힘을 나타내는 덩치가 큰 부처님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고려 초기에 주로 많이 만들어졌던 거석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거석불의 대표적인 불상은 논산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은진미륵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논산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있는데요.
그 크기가 18m나 됩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불상이 됩니다.
이렇게 거대한 불상이 고려초에 만들어지는데
왜 이러한 거대한 불상이 특히 고려초에 많이 유행했을까?
그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물론 상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도 대형불상들이 만들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대형불상이라고 한다면 장육불로 알려져 있습니다.
장육불이 뭐냐면 일장육척의 불상, 한 척이 대략 30cm 되는데요.
일장육척이면 16척이 됩니다.
크기를 얘기하면 약 4.8m 정도 크기인데요.
척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보통 4m에서 6m 크기를 장육불, 대형불상이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오늘 말씀드릴 이야기는 상국시대, 통일신라시대 때도
물론 대형불상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고려초, 고려전기에 들어서 많은 대형불상들,
특히 10m가 넘어가는 초대형불상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왜 그런 불상들이 만들어졌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고려시대 거석불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평소에 궁금했던 이야기 위주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먼저 고려시대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일단은 고려의 건국 이야기를 해야죠.
고려의 건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태조왕건이 후상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등장하기 직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냐면
935년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935년 되면 후상국 시대는 후백제와 고려가 열심히 전쟁도 벌이고
서로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서 많은 전투를 벌이는 상황입니다.
신라는 국력이 굉장히 약해져서
지금의 경상도 지역이 축소되어 있는 상황이고요.
그런 와중에 935년에 신라의 경순왕이
신라를 고려 태조왕건한테 가타버치는 그런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다음에 936년에는 후백제 견원이 태조왕건한테 투항하는 그런 사건이 벌어지죠.
그리고 후백제는 신검, 그 아들 신검이 왕에 올라가게 되는데
후백제 신검과 고려 태조왕건이 한반도에 운명을 놓고
936년에 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 전투를 벌이는 그 장소가 어디냐면
1, 2천, 지금의 선산 근처가 되는데요.
경상북도 선산 근처에 낙동강 지류 근처에 1, 2천에서 전투를 벌이고
그리고 이제 후퇴를 합니다.
고려 태조왕건이 크게 승리를 하고
후백제 신검군이 후퇴를 하는데 어디로 후퇴를 하게 되냐면
지금 논산 근처로 후퇴를 하게 됩니다.
후백제군 후퇴를 하자 태조왕건군이
8만 7천, 5백 명이나 되는 거대한 군대를 데리고
투격을 하게 되죠.
그래서 이제 논산에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는데
이미 후백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망이 없다.
그러면서 후백제 신검이 태조왕건한테 가서 항복을 청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항복을 청하는 장소가 어디냐면
지금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논산 개태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개태사의 위치가 태조왕건이 주둔했던
지의부가 위치했던 지역이 아닌가 이렇게 추정할 수가 있고요.
936년에 개태사가 세워졌던 그 장소에서
후백제의 항복을 받게 됨으로 해서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가 등장을 합니다.
수상국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가 등장을 하게 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그 항복을 받고 나서 고려 태조 왕건이
당시에 관청에다 특별하게 명예해서
이 자리에 개태사를 세워라 그런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936년부터 한 4년에 걸쳐서
개태사를 열심히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통일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불상이
개태사 석조 3전불 입상입니다.
개태사 석조 3전불 입상 통일을 기념해서
국가의 역량을 집중해서 만들어진 그런 불상인데
우리가 한눈에 보았을 때
잘 만들었다, 아주 아름다운 불상이다
그런 느낌이 별로 없습니다.
주먹이 굉장히 큽니다.
주먹도 크고 발도 굉장히 분할을 신은 것 같은
부처님인데
우리가 알고 있었던 통일신라 시대 때
석굴하면서 느꼈던 그런 자비와 아름다움
당당함, 역동성, 크기가 커다란
어떻게 보면 괴력이 넘치는 부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비례와 조함이를 강조하는 통일신라의
아름다운 불상을 만들려고 하면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또 새로운 통일왕조를 기념해서 만든 부처님을
그렇게 아름다운 불상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 부처님에 대해서 공부하고
논문 쓰면서 도대체 왜 이렇게 아름다운 불상이 아니라
커다란 손을 만들고 커다란 발을 만들었을까
굉장히 궁금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궁금하셨을 텐데요.
특별히 폐조한 건의 이유가 있는 거죠.
그런데 왜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냐면
바로 고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말씀드리면
1945년 일본이 미국한테 폐망을 하고
항복조인식을 미국과 일본이 하게 됩니다.
항복조인식을 하는 장소가
일본의 국회의사당도 아니고
일본의 천안공도 아니고
어디서 항복조인식을 하게 되냐면
1944년에 만든 당시 최고의 전투항
최강의 전투항 미주리오 갑판에서
항복조인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왜 항복조인식을
미주리오 갑판에서 했을까요?
그 의도는 확실히 굳이 말을 안 하더라도
그 의도를 알 수가 있는 거죠.
미국의 힘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미국의 힘이 이렇게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항복조인식하는 장소에서
일본 사람들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거기에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거와 마찬가지로
개태사 석초삼전불 입상을
커다란 주먹과 커다란 발
그리고 괴력이 넘치는
그런 4m가 넘는 커다란 불상으로 만든 이유는
물론 부처님이 자비가 넘치는
그런 것도 종교의 대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백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태조왕관의 의도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고려의 힘.
고려의 힘이 이렇게 강력하다.
특히 개태사를 만들고 나서
중궁 기념으로 만든
태조왕관에 쓴 글이 있습니다.
그 글 내용을 보면
우리 고려는 부처님의 가호로
부처님의 힘으로
바로 후상국을 통일했다.
그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우리 고려 뒤에는
아주 든든한 부처님의 백이 있다.
뭐 그런 내용을
후백제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어떤 태조왕관의
심리적인 내용이
은연중에 반영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거석불이 만들어지게 됨으로 해서
고려의 어떤 불상은
통일신라와 다른
독특한 흐름을
이제는 나가야 된다는 것을
태조왕관에 딱 제시를 하게 되는 거죠.
그 이후에 많은 불상들이
계속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그런데 고려 태조왕관이 죽고 나서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태조왕관에 많은 부인들이 있었는데
그 부인들 중에서
아주 힘이 센 세력들이
누구냐 하면
충주 유시 세력이
굉장히 큰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태조왕관과 충주 유시 사이에서도
아들들이 태어났는데
그 아들들이
나중에는 3대왕 정종
4대왕 광종이 되는
그런 아들들이
충주 유시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2대왕 해종이 즉위하자
충주 유시 세력들이
나주 5시에 아들 해종의
외촉 세력들이 힘이 약한 것을 알게 되니까
자신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싶은
그런 욕망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료에서 보면
해종과 정종과 광종 이야기가
서로 왕위를
평화롭게 이어준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역사학계에서는
피비린에 나는 형제의 난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말씀드리면
해종 같은 경우가
해종이 945년에
여러 신하들이
정종을 받들었다.
3대왕을 받들어서
즉위하게 했다고
평화적인 정권 이왕이 있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고요.
그다음에 정종에서 광종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그 상황을 보면
여기서 보면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당시에 정종이 27살
아주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는데
궁궐에 나가 있다가
갑자기
번개가 내려쳐서
천둥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천둥소리를 듣고
병이 납니다.
병이 나서 죽어요.
자기의 왕위를
자기 동생이었던
광종한테 이양했다.
이렇게 사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살 청년이
천둥 소리에 놀라워서 죽었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걸 다 믿기가 어렵죠.
아마도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요.
그 형제의 난 배경에는
호족들, 당시에 무장 세력들
아직까지는 고려가
체제가 정비되어 있지 않다 보니까
태조 왕권과 함께
후상국 통일을 위해서
싸웠던 그 호족 세력들이
해종평도 들고
정종평도 들고
4대왕 광종평도 들면서
서로 치열하게 싸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광종이 승리를 하게 됩니다.
광종이 승리를 하고 나서
그다음부터 광종이 취한 행동이
사실은 이번 시간에 말씀드릴
거석불들, 큰 불상들
그 불상들이 나타나게 되는
어떤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광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광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광종은 처음에는 아주 납작업들입니다.
주변이 다 아버지,
아버지가 친구나 마찬가지였던
그런 신하들이
자기는 20대 초반에 젊은 친구인데
자신의 신하들은
아버지 친구들입니다.
그 아버지 친구들이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전쟁터에 눌렸던 역전의 용사들이
조정에 쫙 깔려 있는 거죠.
처음에는 신하의 말을 잘 듣습니다.
고려전기 신하였던 최승무가 평가한 내용을 보면
즉위한 해로부터 8년간은
청백공평하고 형벌과 표창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하 말을 잘 들었다.
이런 내용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광종은 즉위하고부터 한 8년
8년간은 사실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던 욕망은
꾹 눌러둔 채
신하 말을 잘 듣고
어디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조심만 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지만 광종은 하나하나 자기의 힘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과거제도 시행해서
자기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노비강 건법 만들어서
호족들의 무력 기반을 해체하고
그러면서 하나하나 자기의 힘을 키워가고 있는데요.
즉위하자마자 광종이 했던 대표적인 일이
바로 대보은사라고 하는 사찰을 만들게 됩니다.
대보은사를 만들고 나서
거기에 태조왕건 동상을
거기에다가 봉환을 하게 됩니다.
태조왕건 동상은
1992년에
북한에서 태조왕건 등 정비하다가
지하에서 출토가 됐습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도 전시가 됐었는데요.
현재 북한에서 흡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종이 만든 대보은사의
태조왕건의 모습을 만들어서 안치해놨는데
지금 현재 사진에서 보는 바는 나상입니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었지만
실제로 옷을 입은 형태로
대보은사에 봉환을 했었겠죠.
특징을 보면 머리에
통천관이라고 하는
황제가 착용하는 관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될 게 뭐냐면
태조왕건 동상의 얼굴입니다.
태조왕건은 66세 노인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노인으로 돌아가셨는데
태조왕건 동상의 얼굴은
20대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광종이 황제가 착용하는 통천관을 착용하고
태조왕건 동상을
젊은 청년의 얼굴로 만든 이유는
그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통천관을 착용한 이유는
태조왕건을 황제로 모심으로 해서
그 아들이었던 광종, 나도 황제다
이런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고요.
그리고 젊은 태조왕건 동상을
청년의 얼굴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마도 20대 청년이었던 광종의 얼굴도
거기에 투용되지 않았을까
우리가 이렇게 기록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 얼굴상을 보았을 때
충분히 광종의 의도를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광종 때 초대형 불상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은진미륙이라든가 대조사, 속조보살 입상이라든가
안성매산이 불상 같은 초대형 불상이 만들어지는데
우리가 답사를 가게 되면
초대형 불상 보면서
와 그냥 크다, 잘 만들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런 의문점은 가지지만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깊어갖고
부처님에 대한 종교심이 깊어서
큰 불상을 만들었나 보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내용보다
사실은 더 많은 이야기를
거대한 부처님들이 해주고 있습니다.
고려초 같은 경우는
역사 서술의 분량이 굉장히 적습니다.
외적이 친밀패해가지고
계경이 한번 불타기도 하고
사료가 많이 훼손되고
다시 써야 되기도 하면서
기록들이 많이 소략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아있는 거대한 부처님들은
그 당시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역사들을
새롭게 말해주는 굉장히 중요한
어떤 종교적인 대상일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아도
굉장히 가치 있는 그런 부처님이다
말씀드릴 수 있고
그 이야기를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광종원 대봉운사에다가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태조왕관의 권위를 한껏 높여갖고
자신의 권위를 이어받는다는
그런 어떤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광종이 했던 일들을 보면
어머니를 위해서
개성 근처에다 불일사를 만들었는데
충주에다가 숭선사라고 하는 사찰을
954년에 만들게 됩니다.
이것도 재밌습니다.
숭선사가 발굴 조사가 됐는데요.
숭선사가 어머니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충주에다가 만들어놔야 되는데
충주에서 20km 떨어져 있는
지금의 숭선마을이라는 곳에 만들어놨습니다.
왜 어머니를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충주가 고향인 충주유시의 고향이었던
충주 시내에 만들어야 되는데
지금 이제 충주에서 20km 가까이 떨어져 있는
지금의 숭선마을을 왜 만들었을까
그게 궁금한 거죠.
그래서 저도 도대체 광종의 의도가 무엇일까
일단 숭선사만 놓고 보면
기록에는 어머니 충주유시를
추모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그런 기록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광종 때 또 여러 사찰들
성각들을 만드는데
그런 사찰들 성각들을 연결해 보면
광종의 의도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충주 숭선사 부근에
광종이 또 열심히 성도 만들고 사찰도 만듭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안성 봉업사
죽주요 지금 죽산 지역에 있는데요.
안성 봉업사도 만들고
거기 가까운 곳에 안성 장능리사지도 만들고요.
거기서 평택 쪽에는 또 평택 비파산성을
또 새롭게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안성 망이산성이라고 해가지고
원래 있었던 삼국시대 산성인데
그 산성을 또 수축을 합니다.
여기서 이제 우리가 답을 좀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충주 숭선사를
충주에서 떨어진 곳에 만들었나
이렇게 보면은 안성 봉업사지 일대가
그 진천 청주로 내려가는
교통로에 이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기서 이제 충주와 봉업사 가운데
이제 숭선사가 있는데요.
그 평택부터 안성과 충주를 쭉 연결해 보면은
주요 교통로 산과 중요한 산성에
광종이 새롭게 사찰도 만들고
성각도 만들게 됩니다.
지금 평택에서 안성을 거쳐
충주와 영월까지도 충주시 세력이다 보니까
지금 평택, 안성, 충주, 영월까지
한반도 중부지역을 가로지르는 곳에
새롭게 성도 만들고 사찰도 만듭니다.
왜 이렇게 광종은 이미 전쟁이 끝나고
이제 후상국 시대 전쟁도 끝나고
새로운 통일왕조가 등장했는데
전쟁이 끝난 지도 한참 되고
이제 고려의 4대 왕이 등장을 했는데
4대 왕이 등장해갖고
이미 국가 안보에는
북방의 외적들이 더 중요한
국가 안보의 위협 세력인데
지금 중부지역의 성을 만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성을 중축하고 있고요.
왜 그럴까 찾아보니까
충주 유시 세력과
당시에 왕이 쟁탈전을 벌였던 세력들이
어디냐 하면은 진천과 청주 세력들입니다.
진천과 청주 세력이 바로
지금 해종과 정종의
처가 세력들이 있었던 곳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떤 의미냐 하면은
이미 중앙정부에서는
중앙정부에서는 광종이 왕위를 잡았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해종과 정종의 세력들은
힘이 다 없어졌습니다.
굉장히 약해졌을 텐데
처가 세력의 거주지였던
진천과 청주 일대
그 일대는 여전히 강력한
지역적인 어떤 토착 세력으로서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또 진천과 청주뿐만 아니라
조금 더 연결해보면은
천안 역시 친해종 세력기라고 볼 수 있고요.
그리고 해종이 왕위에 오를 때
태종왕권이 직접
내 아들 좀 잘 봐달라고 부탁했던 사람이
박수리라고 하는 사람인데
박수리의 출신 지역이 어디냐면
당진입니다. 당진.
이렇게 보면은
평택과 안성과
충주 이남
지금의 천안과 당진과
진천과 충주 지역이
사실은 반광종 세력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광종이 어떤 일을 하게 되냐면
자신이 왕위에 처음 올랐을 때는
납작 엎드리면서
신하들의 말을 잘 듣는 것처럼
열심히 신하들 눈치를 보다가
960년을 전환 시기에
한 8년에서 10여 년 정도
열심히 자기 혼자 힘을 축적하게 되는 거죠.
노비안건법, 과거제
그러면서 자신의 세력을 모은 다음에
960년경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냐면
이제 세상을 바꾸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됩니다.
광종이 중반기쯤 돼가지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게 됩니다.
계경을 황도라고 칭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황제의 나라가 등장했다는 것을
선포하게 됩니다.
황제가 더 이상 호족의 나라가 아니라
황제의 나라라는 걸 선포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부처님이 한 분이 계십니다.
어디냐면
안성매산의 석조보살 입상입니다.
안성매산의 석조보살 입상은
안성 봉읍사지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안성매산의 석조보살 입상을 자세히 보면요.
머리에 네모난 관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네모난 관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많이 보셨죠.
은진미르게 착용하고 있는
그런 보관, 모자 같은 형태입니다.
머리에 네모난 관을 착용하고 있는
부처님이 갑자기 등장을 하게 된 거죠.
우리나라 불상의 특징 중에 하나가
부처님 머리에 착용하는 모자가 있는데요.
갓같이 쓰고 있는 모자, 보개라고 합니다.
천개 보개 이렇게 전문용어로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갓같이 생긴 모자를 쓰고 있는
부처님 같은 경우는
통일신란 시대부터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803 갓바위 부처님이죠.
803 갓바위 부처님이 모자를 쓰고 계시는데
모자의 역할은 뭐냐면
비바람으로부터 노촌에 계신 부처님이
비바람을 맞지 않게 하고자 하는
신도들의 불심이 작용한 것이다 생각하시면 되고요.
초창기에 통일신란 시대의 보개라고 불리는 갓을 보면
팔각이거나 폭이 넓은 동그란 형태의
그러면서 형식적이나마
얼굴에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게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런데 고려광종은
모자의 형태를 네모난 형태로 만들어 놓게 됩니다.
네모난 형태의 특징을 보면
황제가 착용하는 멸류관 형태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지금 안성 매산인 석조보살 입상 같은 경우는
주변의 봉업사제 발굴 형태라든가
다른 불상들과의 비교 관계를 통해 봤을 때
전문가들은 960년을 전후한 시기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을 때 만든 부처님이다
이렇게 학계에서는 알려져 있습니다.
광종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했을 때 만든 부처님이
하필이면 네모난 형태의 관을 착용하고 있다 하는 것은
바로 멸류관을 모방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고요.
즉, 이게 어떤 말이냐 하면
바로 이 부처님은 황제를 상징하는 부처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 부처님, 안성 매산인 석조보살 입상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가 중요한데요.
안성 매산인 석조보살 입상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미륵당이라고 하는 장소인데
봉업사제는 북쪽에 있는데
왜 거기다가 봉업사제 북쪽에 세웠을까
봉업사가 굉장히 중요한 사찰입니다.
봉업사는 통일신란시대 화차사라고 불렸었고요.
통일신란시대 때 경주에서 당나라로 가기 위해서는
봉업사제까지 올라오고
봉업사제에서 서쪽 평택지역으로 가서
당은포라고 하는 항구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갑니다.
또는 봉업사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당시에 경기도 북부지역에 있었던 한주지역에
치솟으러 올라가는 그런 붕비점이 되는
굉장히 중요한 사찰이 봉업사인데요.
또 고려시대에는 이 봉업사가
후백제와 고려가 전쟁을 했을 때는
일종의 병참기지 역할까지 했었던
종교적으로도 중요하고
군사적으로 중요했던 그런 사찰입니다.
고려시대는 여전히 교통노상에 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사찰인데
이 사찰 가운데에다가
그 중요한 사찰이면 사찰 가운데에다가
그 안상매산이 석조보살입상
황즉불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그런 멸류관을 착용한 부처님을 세워놔야 되는데
그 사찰에서 좀 뚝 떨어져 있는
약간 북쪽지역에 세워놨습니다.
거기에다가 굉장히 중요한
황제를 상징하는 부처님을 만들어놨죠.
왜 그랬을까 고민을 해보면
역시 교통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봉업사제를 서남쪽으로 내려가면
청주로 가는 길이 있고요.
동남쪽으로 가게 되면
충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길은
경상도에서 충주를 거쳐서
소백삼백 넘고
봉업사제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계경으로 가는 길이고요.
그리고 전라도 쪽에서
청주를 거쳐서 진천에서
남쪽에서 올라오면
바로 봉업사제 앞에서
계경으로 가는 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전남지방이라든가
경상도 지방에 올라왔던 사람들이
계경을 가기 위해서 만나는 지점이
바로 안성매산이 석조보살입상 앞이 됩니다.
계경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
지방에서 계경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다 모이는 그 장소가
바로 안성매산이 석조보살입상이
세워진 장소가 됩니다.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고
TV도 없고 신문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어떻게 알려야 되냐
이제 호족의 시대는 끝났고
황제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되는데
가장 빠른 수단은 뭐냐면
입소문입니다. 입소문.
입소문이 되니까
지금 모든 사람들이
계경에서
삼남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전라도나 경상도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갈라지는 분기점에다가
황제의 멸류관을
착용하고 있는 그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불상을 세워놓음으로 해서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호족의 시대가 끝났고
이제는 황제의 시대가 도래했다.
고려가 이제는 황제의 나라다.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그렇기 때문에
안성매산인 석조보살 입상이라고 하는
중요한 부처님을 광종이
960년경에 세워놓게 됩니다.
고려 전기, 고려 초에
부처님들, 불상들
거석불들의 특징은
안성매산인 석조보살 입상같이
사실은 정치적 목적이
종교적 목적보다 정치적 목적이 더 강하게
강조돼서 만들어지는 그런 불상들도
존재하게 됩니다.
특히 광종 때 만들어진 불상들의
경우가 정치적 목적이
종교적 목적과 함께 정치적 목적도
굉장히 강하게 반영된
그런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예로 말씀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괴산 원풍리에 가면
괴산 원풍리 마에이블 병자상이라고 하는
마에블, 부처님이 계십니다.
괴산 원풍리 마에이블 병자상은
앉아있는 불상인데요.
두 분의 부처님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이웃하고 있습니다.
두 분의 부처님이 동시에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는
그런 형태는
불교경전 법화경 겸보탑품이라고 하는
내용에 나옵니다.
앉아있는 부처님 중에 한 분은
석가모니불, 다른 한 분은
다보불 이렇게 불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이야기하는 것도
학자에 따라서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이 불교경전
중요한 불교경전인 법화경에
영향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학자분도 계시는데요.
그런 것처럼
괴산 원풍리 마에이블 병자상도
법화경 겸보탑품에 나오는
그런 경전 내용이 반영된
이블 두 부처님이
병자 서로 같이 앉아있는
그런 상이다 해서
이블 병자상이다 이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공식명칭이 괴산 원풍리
마에이블 병자상
바위에 새겨져 있는 두 분의 부처님
이런 뜻인데요.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게 무엇이냐면
두 분의 부처님이 초대형으로
만들어졌다는 거죠. 초대형으로
두 분의 부처님이 마에 새겨져 있는데
이게 사실은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에 그렇게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부처님입니다. 그럼 이
마에이블, 이블 병자상
두 분의 부처님이 앉아있는
이러한 형태는 언제
어디서 유행했을까 보면
발해에서 크게 유행한
불상이 됩니다. 발해에서
유행한 불상이
괴산 원풍리면
소백섬맥 산줄기에 해당하는데
왜 거기에
갑자기 거대한 마에이블이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마에이블이 여기에 새겨졌을까
앉아있는 크기만 해도
4.5m고 전체
감실의 크기까지 하면
6-7m에 달하는
대형 불상인데 이러한 대형
불상이 소백섬맥
고갯길에 만들어진 거죠.
그동안에 이게 왜 이렇게 만들어졌을까
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기술이 발달해가지고
3D 스캔이라고 하는
새로운 측량 기법이 있습니다.
3D 스캔을 통해서
측량을 해보니까
마에이블 병대상 측면에
협시보살들이 또 있습니다.
그 보살의 보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이 있는데요. 그 관은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으면
보관이 잘 안보입니다. 얼굴만 윤곽만
흐릿하게 보이는데
3D 스캔을 촬영해서
보니까 머리에 착용하는
보관의 끝부분에
반짝이 같은 장식이 달려있는
화려한 보관을 착용하고 있는
그런 협시보살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협시보살의
특징을 보면
그러한 형태의 반짝이 같은
장식이 달려있는
보관을 착용하고 있는
보살상들이 주로 어디서 많이 발견되냐면
발의 환경성이라고 불렸던
중요 유적지에서
그런 부처님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블 병대상
이라고 하는 석가모니글
다버블이 함께 있는 이블 병대상도
발의에서 유행하고 협시보살이
착용하고 있는 보관도 발의에서
유행하고 있는 거죠. 저도 공부하면서
발의에서 유행하고 있던 불상이
왜 갑자기 소백선맥
첩첩산중에 나올까 궁금했습니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가
교통로와 양식 같은 것을
살펴보니까
광종 후반기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종 후반기에
소백선맥 첩첩산중에
괴산 원풍리라고 하는
좁은 교통로상에
이걸 왜 만들었을까 보면
위치가 중요합니다.
괴산 원풍리가
자리 잡은 곳은
진천이나 청주
사람들이 소백선맥을
넘어갔고 경상도 북부지역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꼭 지나가야 되는
교통의 요지가 됩니다.
교통의 요지가 되는데 거기에
고려광종이 이블 병대상을
새겨놨습니다.
지나가는 사람한테 보라는 얘기죠.
저 거대한 부처님을 봐라.
거대한 부처님을 보면서 지나가는 사람은
무엇을 느껴야 되냐.
광종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보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와 마찬가지고요.
일반적으로 교통로에 많은 부처님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지게 되는데요.
사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혼자 길 옆에 덩그러니
마의불이나 석불입상에 덩그러니
세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길위의 부처님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그런 기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 지나가는 행인의 안전을 위해서
만들었던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작은 부처님, 2, 3미터 정도 되는
작은 부처님을 세워놓으면 됩니다.
그런데 크기를 봤을 때
충주와 문경지역 사람들이 동원되어서
굉장히 많은 비용을 들여서
그 거대한 부처님을
소백산명 고객길에 하나 만들어놨습니다.
그 이유는 뭐냐 하면
이 이불병자상을
만들었던 사람들,
대개 바래사람들인데
당시 태조왕권 시기에 바래가
멸망하고 나서 많은 바래 유민들이 고려로
들어옵니다. 그 바래 유민들이
많은 곳에 정착해서 사는데 현재까지
기록에 의하면 문경지역에도
정착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를 피난해 왔던 바래가
멸망하면서 고려를 피난해 왔던
바래 유민들은 수만 명에 달합니다.
그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당시에 왕의 쟁탈전이
한참 벌어지는 시기에 어느 왕을
지지하냐에 따라서 왕의
쟁탈전의 승패가 가름대는
그런 매우 규모 있는
그런 세력이 바래 유민 세력들이
되는데 그런 바래 유민
세력들이
지금
충주, 진천 세력들이
소백산명을 넘어가기
위해서는 바래 유민이
살고 있었던
문경지역 사람들과 협조관계를
맺어야 되는데 문경지역에
살고 있었던 바래 유민들이
사실은 진천, 충주 세력이 아니라
광종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가
여기에 반영되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바래 유민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걸 어떻게
아냐 보면 여기서 가까운 괴산
가견사라는 사찰에 가면요.
괴산 가견사 석조 비로전압을
좌상에 있습니다. 고려 초에
만들어진 석조 비로전압을 좌상인데
광배 뒤에 탑이 하나에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탑이 아니라
탑 내용을 보면
무슨 비석같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불폐라고 해서
무슨 위폐같이 생긴 그런 탑을
괴산 가견사
석조 비로전압을 좌상
광배 뒤편에 새겨놨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형태의 탑은 우리나라에 없습니다.
어디에 있냐 하면
조양국탑이라고 불리는
이 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탑에
보면 이러한 모양의 탑이
조양국탑
표면에 새겨져 있는데요.
이러한 형태의 탑을
만드는 전통은 바래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연구되고 있습니다.
괴산 가견사 뒤에 있는
탑의 모양이라든가
이불 병자상 옆에 있는 보살상에 착용하고
있는 보관의 모습
그리고 이불 병자상이라고 하는
독특한 형태, 도상의 특징
이런 걸 보았을 때 바래 유민과
광종 세력의 힘을 합쳐서
진천과 청주를 비롯해서
천안지역까지 넓게
봄다고 한다면
광종과 대립되고 있었던 세력들한테
바래 유민이 나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굉장히 강하게
반영된 그런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려 후기가 되면
특히 10세기의 특징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10세기가 되면
후산극이 끝나고
태조왕관 이후부터
고려 광종대를 지나는
고려 10세기 전기, 중기, 후기 정도
시기를 보면
부처님을 만들 때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물론 부처님을 만듭니다.
종교적인 대상으로서 만들지만
다른 어떤 시대보다
당시에 정치적인 의도가
부처님 조성을 하는데
크게 강하게 반영되는 모습을
10세기 때 만들어진 불상에서
우리가 많이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주 유명한 부처님 은진미륵에서
그것 또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은진미륵은
논산 관촉사
계태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태조왕관이
후산국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논산 계태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논산 관촉사
속조 보살 입상을
고려 광종이 광종 후반기에
세우게 됩니다.
고려 광종은 왜 광종 후반기에
다른 데도 아니고 확실히 논산에다가
논산에다가
18미터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을 만들었을까
궁금하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에는
저런식의 거석불은 경기 충청지역에
지방량식이 반영된 고려전기의
지방량식의 불상이다
이렇게 그동안 알려져 왔었는데요.
사실은 지방에 세워졌다고 해서
지방량식이라고 불리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논산 관촉사 속조 보살 입상 같은 경우는
중앙정부에서
장인이 파견됩니다.
장인이 파견되고 예산도 지원되고
광종의 건립 의도가 반영됩니다.
이런 걸 보았을 때
비록 지방에 세워졌지만
중앙량식이라고 불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불상이 관촉사에 세워집니다.
그러면 왜
광종은 광종 후반기에
저런 거대한 불상을 논산 관촉사에
세웠을까 우리가 고민을 해보면
진천 청주 세력과의
어떤 역학관계 그 관계를 고려한다고
한다면 광종 후반기가 되면
호적들이 굉장히 대대적으로
숙청이 됩니다. 자기가 적대시
했던 세력들도 어느 정도 눌러났는데
그렇지만 광종 후반기가 되면
권력의 피로현상이 나타납니다.
무자비한 숙청을 하게 되니까
거기에 대한 반발하는 세력들이 또 등장하게 되는 거죠.
반발하는 세력들이 등장하게 되니까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야 되는데 논산만큼
중요한 효과적인 장소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논산 관촉사 바로 옆에
논산 개태사가 있었던 거죠.
논산 개태사 석조삼전불입상
고려태조왕권이 한 4m가 넘는
불상을 세워놨는데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논산
관촉사에다가 은진미름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을
세움으로 해서
왕권이 만든 불상보다
훨씬 더 큰 불상을 만들므로 해서
나의 힘은 나의 권위는
우리 아버지 태조왕권보다
더 크다. 그러니 나에게
함부로 반란을 생각하지 말고
덤비지 말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부처님이
은혜와 지혜와
자비의 대상이 되어야 되는데
사실은 정치적인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그런 모습도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과 비슷한 게
부여대조사에도 있습니다.
부여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은
10m가 넘는데요. 이 부여대조사
석조보살입상의 건립 의도 역시
광종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은진미륵에 대해서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냐면
우리나라 고고미술사의
1세대 학자분이
계시는데 많은 연구를 하셨던
학자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은진미륵을
어떻게 평화하시냐면
3등신 비율이고 비율이 일단 안 맞다.
거대한 얼굴, 원시적인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한국 최악의 졸작이다.
이렇게 평화를 하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이 봤을 때
한국 최악의 졸작이다 하면
못생겼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고고미술사에
아주 뛰어나신 학자께서
이런 평화를 했다는 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런 입장입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평화를 하지 않습니다.
은진미륵 같은 경우 국보로 지정이 됐고요.
그런데 왜 초기
한국미술사 1세대이셨던
그 학자분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보면
석구람 본존불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무슨 말씀이냐면
석구람 본존불은
클래식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전 우리가
서양미술사 하면 그리스 조각들
얘기하는데 그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사에서
어떤 고전기라고 한다면
통일신라 석구람
석구람 본존불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통일신라 석구람 본존불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어 있는 거죠.
그러니까 그 조화 비례미
아름다움이 가득한 통일신라 석구람
본존불 보다가 고류시대
부처님 보면 왠지 못생긴 것 같고
비율도 안 맞고 덩치만 큰 것 같은
이거는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느끼는데 우리가
부처님을 바라볼 때 그렇게 보면
안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부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되냐
특히 고류시대
같이 비례와 조화미가
별로 고려되지 않은 부처님 같은 경우는
그 불상이
그 부처님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은진미륵을
석구람 본존불처럼
아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광종한테 있었다고 하더라도
광종은 그렇게 안 만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광종이
원했던 것은
개태사 석조삼전불 입상과 비교했을 때
그것보다 더 큰 힘과 권위가
불상에서 나타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본다면
당시 고려
광종 후반기를 보면
광종이 굉장히
자신한테 도전하는 세력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심지어 독살당할까봐 두려워해서
아들도 옆에 못 오게 합니다.
겉으로는 호족들을 평정하고
황제의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이 가득했던 거죠.
그런데 사람이 불안하게 되면
과장되게 되어있죠.
밤거리 걸어가다 보면
괜히 헛기침도 하고
휘파람도 불고 그런 것처럼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광종은 왜 저렇게 거대한 불상을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면
고려 광종이 느꼈던 당시에
권력에서 느껴진 불안감
그 불안감을
불상에 반영한 거죠.
그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불상에 반영된 거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광종의 불안한
자아
광종의 불안한 자아가
정말 잘 반영된 뛰어난 불상이다
우리는 저 은진미를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고려시대 불상
특히 고려 초기
10세기 때의 석불들을
살펴보게 되면
종교의 대상으로서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정치적인 상황
당시의 역사적 상황, 정치적 상황이
굉장히 강하게 밀접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상 고려시대의 불상들
특히 10세기 때 만들어진 거석불에 대해서
그 역사적 배경이라든가
조성 내용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