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참전과 한국 독립군 부대의 투입, 중일전쟁 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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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7부. 미국의 참전과 한국 독립군 부대의 투입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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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중일전쟁
7부 있니다 1941년 중일전쟁
전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해였습니다 중국에만 국한되었던 일본의
전선이 일본이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과도 전쟁을
일으키며 전선이 태평양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은 전쟁 초기부터
길어진 보급선을 감당하기 힘들어했고
보급 문제는 일본군의 만성적인
고민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전쟁이 장기
전어를 치닫고 있으니 일본군의 중요한
기본 전략 방침 중 하나가 중국군의
보급을 어떻게든 차단시키는 것이었죠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의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당장 전쟁을 중단하라는 경고를 몇
번이나 보내지만 일본은 이미 전쟁을
일으킨 상황에서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이 여태까지 직접적으로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통해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물자 지원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은
중국으로 가는 미국의 군수 보금
루트를 차단시켜 버려야 했는데 일본이
미얀마로 가기 위해선 필리핀 거치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가로 질러야 한단
말이죠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령 미얀마는 영국령 그런데 두
국가 모두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느라
아시아의 식민지 영토까지 신경을 못
쓰고 있었고 일본 입장에선 절호의
기회였죠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
man 어찌어찌 해버리면 동남아
진출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일본이
토로 꿈꾸었던 이른바 대동화 공연권을
형성할 수가 있었죠 미국은 일본에게
보내는 경고로 철강 석유 기계 부품
등 일본으로 수출되는 자원을 중단해
버립니다 해당 자원에 대해서 선 미국
의존도가 80% 넘던 일본에서는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자원
확보 목적에서도 일본은 동남아시아가
반드시 필요했죠 이러니 일본은 더더욱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르며 태평경
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석유 보존량이 갈수록
고갈되고 있었기 때문에 할 거면 빨리
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느냐 다음 작전의 관건이 되겠죠
일본이 공격할 수 있는 곳들 후보지를
고려해봤을 때 일본이 절대 절대 공격
못 한다고 생각한 곳이 하와이의
진주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그 진주만을
공습하여 분노한 미국 정부는 진주만
공격을 받고 하루 뒤였던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발표하면서 미국도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작전은 진주만 공습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은 미국에게
제대로 된 기습의 한방을 날려 한동안
미국의 태평양 전쟁에 나서지 못하게끔
제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고 그 사이
동남아를 포함해 아시아 태평양 전체를
일본 이 속전 속결로 장악해 가는
것이 일본의 큰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과 거의 동시에 동남아
진출 직전을 전개하는데이 작전을
일본의 난방 작전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일본은 광 웨이크섬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차례대로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고작 6개월
만에 그들이 주장하는 대동화 공연권을
차지하였고 미국이 일본을 향해 선전
포고를 한 상황에서 이제 미국은 중일
전쟁에도 참전하기로 합니다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처남이자 국민당
정부의 재정부장 송주원 을 미국으로
보내 5억 달러 차관을 받아옵니다
그리고 국민 당군을 강화해 주겠다며
고문이자 미안마 전선을 담당할
사령관으로 조지프 스트레 중장을
중국으로 파견하였습니다 조지프 스트레
중장은 1자 세계대전 이후 중국
대사관에서 10년 넘게 근무한 바
있었고 심지어 중국어에도 능통했고
때문에 조지프 스트레이 적임자였다
하지만 조지프 스틸웰은 동양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인종차별
주의자였다 그하고 다혈질의 불같은
성격이라 평판이 좋지 못했습니다
모두의 우려대로 조지프 스트레이
파견된 이후 조지프 스트레가 장제스는
허구한날 다투기 일수였습니다 조지프
스트렐 UN 중국의 국민 당군을
현대화 시킨다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선 국민
당군에게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며
국민당군 지휘권을 두고 장제스와
다투었던 장제스는 그래도 자기가
국가의 수정으로 국민당군의 최고
사령관이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지프
스트레는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군부나
하나같이 무능한 주제 무슨 능력으로
군대를 지휘할 거냐고 미안한 거렸죠
미국은 조지프 스트렐 외에도 육군
항공대 소속의 공군 의용 대대를 보내
주었는데 바로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
있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전투기 커티스 p40 100대
100명의 파일럿과 200명의 지상
위원으로 구성된 규모였고 1941년
12월 10월부터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일본군 기지와 군사 시설을
폭격하고 중국군 기지를 폭격하라 오는
일본 항공기들을 격추하는 등 큰 공을
세웠습니다 플라잉 타이거즈 대대는
의용 대대인원 군인뿐만 민간인들도
많았고 그래서 정예부대 는
아니었습니다 율도 엉망이었죠 그러나
공중전에서 유격전을 벌리며 의외에
선전을 하였고 1942년 6월까지
적기 297대 요격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1942년
6월부터는 태평양 전쟁이 격해지면서
플라잉 타이거스 대대도 제 23 전투
비행단으로 소속되면서 태평양 전선으로
[음악]
투입되었고 중일전쟁 기간에는 일본군과
싸우는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독립군 부대들이 19
132년 상하이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던 김구의 임시 정부는
일본군의 추격과 중일 전쟁을 피해
중국 내륙 지역을 역적이 옮겨
다녔습니다 1932년 5월에서 터
1935년 11월까지는 항저우에서
1935년 11월부터 1937년
11월까지는 전장에서 1937년
11월부터 1938년 7월까지는
창사에서 1938년 7월부터
10월까지는 광저우에서 1938년
10월부터 1939년 6월까지는 류저
우에서 19 39년 5월부터
1940년 9월까지는 치장해
활동하다가 최종적으로 1940년 9월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충칭에
도착했죠 민족주의 계열 독립 정당과
단체들도 김구의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에 모여들었고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유일 여당 한국 독립당
창당하였다 국 임시 정부는 한국
독립당 산하부대 한국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창설 과정에서 장재터
중국 국민당에 적극적 도움을 받았죠
중국내 우리 한국의 독립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민족주의 계열만
있었던 건 아니었죠 공산주의 계열
독립도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세력들은
1938년 우한에서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이때는 아직 우한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이전이었던이
조선의용대의 대장은 김원봉이 있습니다
아무리 공산주의 세력이었고 우한에서
군부대를 창설했다는 건이 장제스의
지원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은
제 2차 국공 합정 와중이었다 이제스
여전히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반감이
아주 강한 시점이
한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우한에서
군부대를 창설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김원봉 덕분이었습니다 김원봉은 엄밀히
말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아나키스트
있으며 황푸 공간학교 출신인 김원봉은
장제스와 친분이 있었죠 그러다 우하은
결국 일본군에게 합력 되었고 우한에
있던 조선 의용대 밀려났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화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조선 의용대
내부에서 들 끌었죠 김원봉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원봉이 이전부터
반공주의자 장제스와 친하고 중국
공산당이 아닌 중국 국민당의 지지를
받는 형국의 불만이 많았던 최창희
김두봉 등은 무단으로 조선 의용대를
이탈해 버렸습니다 이들이 향한 곳은
중국 공산당의 근 거지 예난 이었죠
결국 조선의용대는 둘로 쪼개진 겁니다
예난 간 조선의용대는 팔로군 소속의
조선 의용군으로 편입되었고 조선인이
자 중공군 포병의 아버지라 불리는
무정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한편
김원봉과 그를 따르는 90여 명의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장제스의 회의와
협박으로 임시 정부에 편입되었던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 정분도 의결
과정을 거쳐 1942년 조선 의용대
대원들을 한국 광복군으로 받아들이기로
[음악]
했습니다 일본군이 중국 동남 해양과
내륙 일부까지 진출하긴 하였으나
이것도 무리해 가면서 진군 했기에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었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수도 충칭이 코 아이긴 했지만
국민당 정부군도 결사항전을 하고
있었고 양측이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죠 그저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방면에서 중국 남부지방까지
가는 보급로를 차단하여 국민 당군을
말려 버리겠다는 것이 작전이었는데 그
전에 먼저 일본군이 말라갈 지경이었죠
이러니 일본군의 정신 상태는 이전보다
더 피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당의
주둔 중인 일본군 사이에 초토화
작전의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저 있는
대로 죽이고 빼앗으려는 건데 군
상부에서 내려온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
살광 모조리 죽이고 둘째 소광 모조리
불태우고 셋째 창광 모조리 빼앗으려는
것이었죠 그래서 삼광 작전 혹은 신면
작전이라고 부릅니다 특히나 피해가
극심했던 곳이 허의 이성 장시성
저장성 윈난성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세력이 컸던 허의 의성은 집중 타겟이
되었죠 오랜 기간 걸쳐 이루어진 삼광
작전으로 300만 명 내외의 중국인
민간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삼광 작전을 시행한 건 보급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극단적
공포감을 만들면 중국이 전의를 상실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일본군의 끔찍한 만행에 중국인들은 더
분노했고 더 전해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삼광 특전의 지시를
내린 주모자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설이 분분하여 제대로 규명되지는
않았습니다 점점 무리수를 드는 것
같은 일본군 일본군은 이제 어떻게
무너지게 될까요 가뜩이나 어려운
전항에 일본군의 신뢰 같은 희망마저
알아서 없애버린 일본 내부의 한
빌런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야 무타 구치
레냐 보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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