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전국에 번진 민란, 정부를 향한 민초들의 반란 한국 민란사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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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란사 2부. 고려 무신정권 시기 민란 총정리
그럼 역사돋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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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역사 돋보기입니다 한국
밀란의 역사 2부입니다 지난 1부에서
다루었던 신라말 원종 에누 난에 이어
2부에서는 고려 시대를 다루고자
합니다 고려 전기에는 뚜렷한 밀란이
없었습니다 고려가 한반도로 재통일라고
신라와 다른 형태의 정치 체제를 보여
줘야 했던만큼 다양한 체제와 정책들이
시행되고 안정화돼 가는 시기였으며
특히 고려 초에는 민심을 규합하고
더군다나 긴하인 고려 거란 전쟁도
있었던만큼 고려 전기에서 중기 고려
국왕들은 민생 회복의 큰 심혈을
기울였죠 고려 전기에 밀란이 크게
없었던 건 토지 제도의 변화가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밀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이죠 농업이 경제 생활이
90% 있던 시대에는 토지제도는 곧
민생과 직결되는 가장 기본이 되고
가장 중요한 경제 구조였습니다 신라
시대의 토지는 노급이란 토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노급이란
귀족들에게 하사하는 토지로 노급
추인은 자신에게 할당된이 노급이란
토지 위해 사는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받아낼 수 있는 수조권의 권리와
백성들의 노동력까지 멋대로 증발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국가도
아닌 귀족에게 백성들은 세금을 받쳐야
했고 노동력도 바쳐야만 했죠 통일
직후 신라 사회가 안정화되어 가던
신라 중대에는 노급이 폐지되어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고 백성들은 한
시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라 중대가 혼란스러운 신라 하대로
넘어가면서 노급이 부활하였고 백성들은
다시금 귀족들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죠 지난 1부에서 다룬
원종 애노의난 역시 그렇게 누적 된
백성들의 불만이 터져 버렸던 밀란이
있습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노급이란
토지를 폐지해 버렸습니다 노급 과도한
권한 덕에 신라 하대 백성들의 불만은
하늘을 질렀고 이로 인해 각종 밀란이
있따라 일어나고 또 각 농민들은
신라의 중앙정부가 아닌 각 지방별
군벌 혹은 호족들에게 붙어 버리며
신라 사회는 해체되어 버렸잖아요 이제
신라를 대체하게 된 고려는 신라와
같은 전처를 밟을 수가 없었고 곧바로
노급 폐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나
태조 왕건은 세금 면세 및 혜택을
다양하게 주면서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을 회복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렇다면
노급 대체했던 고려시대의 토지 제도는
무엇이었을까요 고려시대 토지 제도를
전시과 합니다 5대왕 경종 7대왕
목종 11대왕 문종 때에 걸쳐 여러
계정을 통해 안정화된 고려시대의 토지
전시관은 역시 국가가 고려의 귀족
관료들에게 하사하는
토지였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수조권 있고 노동 증발은
없었습니다 노급 비하면 훨씬 자유로운
거죠 아닌게 아니라 전시과와 최종
형태로 자리를 잡은 11대왕 문종의
치세는 태평성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제도이긴 시대에
맞게 변형을 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면 고익기 마련입니다 고려의
귀족 관료들은 문벌 귀족이 되었고
이들은 토지 지배력을 점점
강화했습니다 문벌 귀족들의 정치 사회
경제적 권력 독점 현상은 점차
심해지면서 폐단이 쌓여 갔죠 결국
문벌 귀족들의 폐단에 불만을 품고
있는 고려의 군부가 천 370년
정변을 일으켜 문벌 귀족들을 쳐내고
무신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무신 정권이
수립되고 고려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고려의 군부 장교들은 서로
무신 정권을 장악하고자 끊임없이
내전을 버렸죠 문볼 귀족의 폐단이
축적되어 사회가 부패하고 있었던 것에
불만을 품으며 일으킨 무신정변 그래서
무신 정권이 들어서고 새로운 세상에
도래하리라 기대한 사람도 많았 것만
지배층들의 출신만 다를뿐 근본적인
부패함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11대왕 문종
1에 고려 토지 제도의 근간으로
자리를 잡았던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어
버렸죠 왕은 허수 아이이고 조정은
무능 아니 지역별 토지 상황과
생산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이
권력자들은 개인의 재산 늘리기에
바빴습니다 법적으로 정해진 원칙에
따라 관료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방식을
무시하고 다른 귀족의 토지등 힘없는
백성의 토지등 상관없이 권력자들은
토지를 마구잡이로 불려 나갔죠 엄격히
구분 있던 토지의 소유권과 수도권이
섞여 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귀족의
토지 예속된 백성만 피폐한 삶의 신음
해야했죠 밀란이 안 터질 래야 안
터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신
정권 중 이의민 같은 천민 출신들도
고려 최고 권력자로 거듭나는 것을
보면서 신분제 간 엄격한 질서 의식이
많이 무너진 상태이기도
했죠 우신 정권기 벌어진 첫 밀란은
176년 공주 명학소의 일어난 망이
망소의 나이였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귀족이나 지배층은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이죠 고려에는 향 부곡 소 장
철하는 특수 행정 구역이 있었습니다이
중 소는 특정 물품을 제작하는 수공업
마을이었는데이 마을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세의 부담이 훨씬 컸으며 거주
이전에 자유도 없었던지라 신부는
양민이 대우는 천민에 가까웠습니다
공주의 명학 소는 그러한 마을 중
하나였고 숱을 생산하던 마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망이 망소이 과도한
세금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며 반란을
일으켰던 거죠이 시기가이 무신
정권에서 한창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반란군과 내전을 버릴
때였는데 전투가 계속 속 이어지니
무기의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렸고이
무기 생산의 필수적인 숫 사용량도
늘어나면서 공주 명확성에 대한 세금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높아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망이 망소이의 산행
병마 사라 자칭하며 공주를 공격해
함락시켰고 조유 총의 나을 진압하
느라 여력이 없던 무신 정권은 망이
망소이의 반란군을 잘 타일러서
끝내려고 했지만 망이 망소이 무신
정권의 회유를 거절하며 반란을
이어갔죠 무신정권은 정황
General 장박은 장군 등에게
3,000명의 군사를 주어 토벌하기
했습니다 거의 1년간 싸우다가 끝내
망이 망소이 항복했습니다 무신정권은
반란군을 무작정 처벌하면 후폭풍이
두려워 오히려 망이 망소이의 국고의
곡식을 나눠 주었고 명학소 일반
마을로 승격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무신정권은 반란군 수장들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고 한 달 후 곧바로 망이
망소 있는 다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망이는 이미 우리 고를 현으로
승격시켜 주고 또 수령을 누어 위험
무마하기 하였으나 곧 다시 군사를
동원해 와서 토벌하고 나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 차라리 칼날 아에서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겠고 반드시 완경에 이르고야
말겠습니다라고 했죠 그들은 충남
천안까지 진격하고 지금은 충청남도
전역을 확보합니다 무신 정권은 다시
명학소
강등시켰다 보내어 반란군을
진압했습니다 177년 6월 결국
망이가 항복하면서 반란은 끝이
[음악]
났죠
1882년에는 전주에서 관로 있던
죽동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죽동에 난
역시 인간 처우를 받지 못했던 관노이
몰락한 승려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과 결탁해 버린
반란이었다 지방관 진대가 가렴 죽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자 죽동 등 여섯 명의
관노와 불평을 품은 자들을 불러모아서
진대 6를 산중의 절로 쫓아버리고
여개의 집을 불태운 뒤 관아를
점거했습니다 무신 정권에서는 곧바로
진압군을 파견 하였는데 아무래도
관노가 주도하여 일으킨 반란 세력이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하는 건 어려웠죠
하지만 당시 반란의 원인는 꽤 쫓고
있던 안찰사 박보은 굳이 도망간 죽동
등 반란의 주도자들은 쫓지 않았고
오히려 원흉이었던 진대요 처벌하였다
[음악]
합니다
1993년에서 터 1996년까지
경상도 전역에서 김사미 효심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김사미와 효심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승려 혹은 농민으로 보고 있으며
김사미와 효심은 각각 지금의 경북
청도인구 지금의 경북 울산인 초전
지역에서 발라 을 일으켰다가 세력을
경상도 전체로 확대했습니다 김사미와
효심은 반란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신라 부흥 운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밀란 사상 최초로 명분을
가진 밀란이 있죠 이때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는 천민 출신의 이의민이
있고 진압군 총사령관은 이민의 아들
이지순 이었죠 진압군의 병력이 약하지
않았음에도 진압군은 반란군과 깨작깨작
싸울뿐 전면전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치 짜고치는 고스톱
같았죠 김사이 효심의 난이 신라
부흥운동의 기체를 표 했던 시점이 딱
진압군 반란군의 전투가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옛 신라의 수도 경주는
이의민의
고향이었던 아들 이지순 통해 김사미
효심과 내통하고 있었죠 김사미 효심이
신라 부흥운동을 내걸었던 배경엔이
의미의 사주가 있었고 진압군의
사령관이었던 이의민의 아들 이지수는
군 기미를 계속 반란군에게 흘려주고
있었습니다 반란에 성공하면 이의민을
새로운 왕으로 출제하겠다 합의도 해
놓은 상황에서이 의미는 이씨가 왕이
된다는 18자 위왕 문을 암암리에
퍼뜨렸을이 김사이 효심의 남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을 정도로 소문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의민의 견제했던 무신
정권의 또 다른 권력자들이 진압군의
사령관을 김 초구로 교체하도록 하였고
아니나 다를까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이
진압군 사령관에 빠지자마자 곧바로
김사미 효심의 나는 진압되었고 정권
기의 밀란은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이
의미는 결국 최충헌의 의해 제거되었고
새로운 무신 정권의 집권자가 된
최충헌은 권력자의 자리를 세습하기 로
하면서 최시 집권기 수립하였고
3부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역사 돋보기
있습니다 저희 역사 돋보기가 멤버십
가입을 시작했습니다 멤버십 가입을 해
주신 분들 덕분에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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