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 인트로 00:21 부모님을 요양원에 모시면 불효하는 것일까? 02:45 말 잘 듣던 착한 자식, 나이 들어서 부모 외면하는 이유 06:13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거리가 필요한 이유 08:09 연락 없는 자녀 때문에 애타는 부모가 욕심 버리는 법 09:53 부모님이 여전히 미운데, 정말 단절만이 답일까요? 13:14 내 자녀에게도 상처줄까 겁나는 어른아이를 위한 조언
우리 마음속에는 어린아이들이 계속 있어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데 안 해준단 말이에요.
그런데 노년의 아버지가 나의 보살팀을 받아야 되는 상태로 되고
중년의 나는 내 인생에서 줄게 제일 많은 시기가 됐는데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요양원에 모시느냐 안 모시느냐의 문제를
효라고 하는 가치하고 결부시키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아들의 입장에서 모신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효도로 하는 명문이지만
실질적으로 힘든 것은 부인이 힘든 거예요.
그런데 부인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친부모가 아니잖아요.
부부간의 갈등이 굉장히 많이 벌어지는 소지 중에 하나가 이거예요.
그래서 저는 고령화가 됐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가 다시 옳고 그름을 판단을 해야 되는데
옛날에 부모를 자녀가 모신다고 하는 것은 고령화가 되기 이전이었어요.
그때는 당연히 부모를 자녀가 모셔야 되고
또 그때는 자녀 숫자가 많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 자녀가 감당하기에 소위 1분의 1이잖아요.
그런데 요즘에는 점차적으로 자녀가 하나 또는 둘 이렇게 되고
또 부모들은 굉장히 오래 사신단 말이에요. 고령화가 됐으니까.
이럴 때 내가 전 세대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그대로 내가 유지를 해가지고
지금도 부모를 내가 모셔야 된다라고
너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해가지고 효도가 아닌 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우리 조선시대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부모님 묘 옆에 집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했어요.
그게 이제 효도라고 하는 개념이었는데
아마 오늘날 우리 부모님들이 자기 자녀가 산소 옆에 집 짓고 3년 동안
그거 해라 하라고 요구하는 부모는 없을 거예요.
너는 네 게 있는데 왜 거기 그러고 있냐?
다들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나는 요양원에 모시는 것도 그럴 거다라고 생각을 해요.
이 시대적인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효도하는 마음은 동일한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은 변화가 일어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너무나 마음속으로 크게 잘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나는 없다고 봐요.
부모님과 같이 한 집에서 사시다가 편하게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는 거를
그걸 원하지 않는 자식은 없잖아요.
허나 그게 효라고 그거를 꼭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서는
저는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형편이 되면 그렇게 하지만 아니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도 효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 거다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다 컸다는 게 그러니까 몸이 다 컸다 이거죠.
사회적으로도 자기 일을 다 해가니까 다 컸다 이런 얘기인데요.
심리적으로는요. 다 큰 사람이 없어요.
우리 마음속에는 어린아이들이 계속 있어요.
부모에게 사랑을 받고 싶고 인정을 받고 싶은데 부모가 그걸 안 해준단 말이에요.
그러면 내가 그거를 해달라고 그랬다가 계속 거부당하잖아요.
그러면 나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데
못 받았다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그걸 주지 않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는 어린아이가
내 마음속에 계속 있어요.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안 되죠. 왜냐하면 난 아버지가 미워.
아버지 없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얘기했다면 맞잖아요.
이 자식이 내가 얼마나 널 위해서 지금 애쓰는데 이딴 소리를 한다고.
그러니까 그걸 할 수 없이 내리누르고 있어야지
그나마 아버지로부터는 관심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있다가 아버지가 노년이 되고 내가 중년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권력관계가 바뀐다는 얘기잖아요.
노년의 아버지가 나의 보살팀을 받아야 되는 상태로 되고
중년의 나는 내 인생에서 줄게 제일 많은 시기가 됐는데
어떤 느낌이 들겠어요? 이 내 속에 있는 내 내면아이가.
그때 내가 어렸을 때 제일 피로로 할 때 나한테 안 해줬던 부모.
근데 지금은 내 도움을 자꾸 달라고 하는 부모.
그렇기 때문에 중년의 자녀가 노년의 부모를 돌보는 게 심리적으로 참 싫어지는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들어가 보면 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도 있고 좀 미운 마음도 다 있어요.
근데 우리가 고마운 거는 드러내는 거고 미운 거는 억압을 하고 살아가는 것뿐인데
내가 의식적으로는 이렇지 않아야 되는데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억울하고 화가 났던 감정이 나가는 거예요.
전에 보일러 광고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며느리가 이번 겨울에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려야 되겠어요.
이게 굉장히 공전의 히트를 쳤거든요. 우리나라에서.
근데 이게 이제 외국의 광고 경연대회에 나갔다가 이거 예산에서 떨어졌어요.
왜냐하면 미국 애들은 보일러 놔드린다는 게
이게 왜 그렇게 한국 사람들에게는 큰 심리적인 반향을 일으켜가지고
이 광고가 성공을 했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구독자 여러분들은 그 광고가 의미하는 게 뭔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 남편이 아버지 댁에 보일러 놔드리는 게 싫은 거야.
무의식적으로. 왜? 옛날에 내가 당한 게 있거든.
근데 며느리는 그걸 안 당했잖아요. 이제 들어왔으니까.
그러니까 자기 남편이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아버님 댁에 춥다고 그러는데 보일러 안 놔드리는 게.
그러니까 며느리가 있다가 이번 겨울에는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놔드리자.
이게 노인들이 또 그렇게 감동이 돼가지고 매상이 올라가는 거란 말이죠.
이 기분을 알면 왜 중년의 자녀들이 노년의 부모들에게 더 살갑게 대하지는 못하는가.
본인도 하고 싶은데 안 돼요.
또 하나는 중년이 노년이 되는 거 다 싫잖아요.
나이든 노년의 부모를 보면 누구의 미래가 보이나요?
그게 20년, 30년 뒤에 나 아니에요?
친구 어머니는 친구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니니까 내 모습은 아니고
나의 부모님은 저렇게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면 이게 나의 미래를 보는 거니까 뵙고 싶지 않죠.
자녀가 분갈을 하고 난 다음에 그 거리를 우리가 보통 얘기를 한다 그러면
서양 같은 경우에는 재미있는 속담이 있어요.
결혼하고 난 다음에 부모하고 자녀하고의 거리는 슬프가 식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제일 좋다.
그러니까 같이 사는 건 아니고 떨어져 있되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는 거리.
이렇게 보통 얘기를 하는데 논리적인 거리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아요.
같은 집에서 얼마든지 살아도 심리적인 거리는 떨어질 수 있어요.
부모하고 적당한 거리는 자녀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거리예요.
사람이 성숙하려고 그러면 탯줄을 두 번 끊어야 된다 그러잖아요.
한 번 더 어머니 몸에서 나와 가지고 몸으로 탯줄을 한 번 끊어야 되고
두 번째 탯줄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심리적으로 또 한 번 탯줄을 끊어야 된다.
이런 얘기인데 심리적으로 적당한 탯줄을 끊었다고 한다면
같은 집에 있거나 딴집에 있거나 그런 의미가 없어요.
그런데 탯줄을 끊지 못하게 되면 굉장히 문제가 되는데
그게 제일 언제 문제가 되냐면 행복한 부부생활의 문제가 돼요.
대개 이제 불행한 가족을 부부상담을 하고 오게 되면
겉으로 표현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원인이 그걸 쭉 들어가다 보게 되면
아주 결론은 동일해요.
남편이나 부인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소위 자기 원가족으로부터 독립이 안 됐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이제 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갈등을 하는 이 부부의 침대에는 여섯 명이 누워 있다는 거예요.
부부가 두 사람이 있고 남편의 원가족 둘, 부인의 아버지 어머니가 둘
서로 부부 간의 관계에 대해서 지금 계속 간섭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죽으신 다음에도 부모의 가치관이 우리가 내재화되잖아요.
그러니까 이 부모가 돌아가셔서도 자녀한테 지금 계속 간섭을 하거든요.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러니까 이거를 얼마나 떨쳐내야 되느냐는 게 심리적 독립인데
이 심리적 독립이 되면 같이 사느냐 안 사느냐는 건 그렇게 문제가 안 돼요.
아까 제가 자녀들이 심리적으로 부모하고 독립을 해야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사실 이거는 반만 얘기한 거고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돼요.
일단 분갈을 해서 나갔다면 그냥 니들끼리 지지고 볶고 니들끼리 살아라.
이게 이렇게 놔줘야 되지.
자꾸 쓸데없이 전화해가지고 어떻게 사는지 확인할 것도 없고
신혼 살림하는데 며느리한테 전화해가지고 오늘 아침에 네 남편 뭐 먹고 갔냐.
이런 거 물어볼 필요 없잖아요.
아니면 며느리가 달래지도 않는데 김치를 담아가지고선
또 본인이 굉장히 친식 시어머니라고 관리소에다 맡겨놓고 며느리한테
야 내가 갑자기 들어갑니까 당황할까 봐 관리소에 맡겨놨으니까 김치 찾아가라 뭐 이딴 거.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독립이 안 된 거야.
그러니까 부모는 빨리 자식을 독립을 시킨 다음에 부모들이 할 일을 하셔야 되는데
문제는 지금 부모 되신 분들은 자식을 잘 치우는 것만이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 또 못 벗어나는 거야.
그래서 죽을 때까지 현직 어머니로 남아있고 싶은 거야.
어머니 좀 내려놓으시고 본인의 삶을 좀 사시면 이게 오히려 심리적으로 독립이 되거든요.
그리고 중요한 거는 지혜로운 분이 돼야 되는데
우리가 보통 지혜롭다 그러면 자꾸 뭘 알려주려고 하는데 지혜는 듣는 마음이거든요.
듣는 마음이라고 하는 거는 때를 아는 마음이야.
내가 이 이야기를 해줄 때가 언젠가 하는 걸 아시는 분이 지혜로운 분이에요.
그러면 언제 이걸 해주느냐 당연해요.
자식이 힘들다고 찾아온 건 해주면 되지.
그런데 그걸 갖다 앞서가지고 자꾸 시시콜콜이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게 되면 자녀들이 많이 힘들죠.
단절이 답이 될 리가 없죠.
단절한다고 단절이 되겠습니까?
그건 될 수가 없는 거니까 하겠다고 괜히 독부리고 얼굴 찡그리고 있을 필요는 없죠.
그건 될 수가 없는 거니까.
그러니까 화해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는 화해하는 방법 자체를 가르쳐준 적이 없기 때문에 화해가 안 되는 거예요.
화해라고 하는 거는 기본은 상대에 대한 인정을 해야 돼요.
이해를 해야 되거든요.
너도 자꾸 나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고 내 입장이 한 번만 돼봐.
이런 얘기를 우리가 하잖아요.
이런 것들을 하는 훈련을 조금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자녀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당했다는 것만 자꾸 생각하면 억울하잖아요.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의 입장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도 힘든 상황 속에서 자녀들을 키우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까
자녀들이 원하는 만큼 자녀에게 관심을 못 줬다는 게 인정이 되잖아요.
사랑을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것도 알아야 되고 또 부모의 입장에서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너희들 안 굶기고 해줬잖니 이것만으로 부모가 할 일을 다 했다고는 생각하면 안 되죠.
그거는 몸을 키워준 거고 마음을 키워줬어야 되는데 그거는 내가 그때 못 했는데 그때 네가 많이 섭섭했구나.
그거는 내가 미안하다 라고 이야기를 한 마디 해주면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사이가 나빠서 마음이 힘드시다 하는 이분들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할 얘기는 딱 하나예요.
고맙다는 얘기. 그리고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딱 한 마디 해주시면 돼요.
이 두 마디만 정말 진심으로 해주시게 되면 이 감정의 문제는 순식간에 해결돼요.
부부간의 예를 하나 들어서 얘기해 보면 부부가 이혼을 하기 전에 환자가 숙려 기간을 갖게 해요.
부부 상담을 받게 하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면서 폭력까지 동원돼가지고 부부 상담을 하러 온 케이스가 있었는데
저하고 만나서도 계속 서로 상대방에 대한 비난을 한 30분을 비난하고 난 다음에 좀 지쳤을 때 제가 남편한테 물어봤어요.
부인에게 진짜 듣고 싶은 얘기 딱 한 마디만 얘기해봐. 남편이 수고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이제 부인에게 제가 그 얘기 해주라고 했어요. 남편이 그 얘기 꼭 한번 듣고 싶다니까.
그때 그 부인이 못하겠다는 거예요. 이 인간이 수고한 거는 나 괴롭히는 것밖에 없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수고했다고 얘기를 하겠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부인한테 사정을 했어요. 한번 듣고 싶으니까 한 번 해줘봐. 그랬더니 부인이 나 아직 못해가지고 수고했어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근데요 그 얘기를 듣고 나왔더니 남편이 눈물을 처음 흘리는 거야. 그러니까 부인이 깜짝 놀랐어요.
그러면서 저한테 하는 얘기가 20년을 같이 살았는데 우는 거를 오늘 처음 봤대요.
그러면서 남편한테 아니 그 얘기가 그렇게 듣고 싶었어? 그랬더니 남편이 나는 그 얘기가 그렇게 듣고 싶단 말이야.
그랬더니 부인이요 제가 부탁도 안 했는데 한 번 더 해줬어요. 당신 사실 수고 많이 했지 고마워 하고 한 번 더 붙였어요.
나중에 이분도 상담 끝나고 나갈 때는 손잡고 나갔어요. 우리 감정의 문제는 애구절절히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설명하니까 감정이 안 통해요. 그냥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얘기를 나눌 수만 있으면 돼요.
어렸을 때 충분히 사랑을 내가 받고 자랐다면 내가 또 부모가 됐을 때 충분히 자녀를 사랑할 수 있는 확률이 많아지겠죠.
자기가 그걸 받고 자랐으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내가 충분히 받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또 내가 그거를 되풀이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때에서 이 불행을 막아야 된다. 그게 우리가 이런 방송도 하고 지금 그런 이유잖아요.
그래서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은 뭐냐면 내 마음속에 그거를 받지 못해서 억울했거나 이런 감정들이 표현이 돼야 돼요.
그 부정적 감정이 많이 표현이 되면 될수록 긍정적 감정이 올라와요.
사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100대 0의 문제가 아니고 항상 51대 49의 문제예요.
예를 들면 우리 부모님에게 밉다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은 좋다라는 감정이 하나도 없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좋은 감정보다는 미운 감정이 더 강하다는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49고 미운 마음이 51이라고 하면 이 미운 마음을 낮춰주면 되잖아요.
그러면 이 미운 감정을 낮춰주는 방법은 네 아버지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해해야 될 게 훈계에서 되는 게 아니고
본인이 아버지에 대해서 섭섭했던 이야기를 표현을 하게 해 줘야 돼요.
그런데 그러면 내가 가서 이제 부모님한테 이야기를 하냐? 절대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부모님은 본인이 지금 그렇게 했다는 걸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고
또 어렸을 때 나에게 섭섭하게 했던 그 아버지는 지금 연세가 들어서 내 앞에 있는 그 아버지가 아니에요.
30년 전에 내가 섭섭했던 이야기를 현재 아버지에게 하면 절대로 이 감정은 안 풀려요.
그러면 그 아버지는 어디 있어요? 그 아버지는 내 마음 속에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 속에 30년 전에 섭섭하게 했던 아버지에게 내 섭섭했던 마음을 풀어야 돼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이걸 꼭 알고 싶으실 건데요.
우리가 이제 이런 관계를 풀게 할 때 제일 많이 하는 게 소위 빈 의자 기법이라는 건데요.
빈 방에 빈 의자를 하나 갖다 놓고 거기에 쿠션이라든가 이런 걸 하나 이렇게 내 거에다 갇혀놓은 다음에
이분이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지금까지도 섭섭하게 했던 그 아버지가 여기 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있다고 생각을 하면 진짜로 있다라고 느껴지고 감정적 교류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인간 마음의 위대한 점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에게 내가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냥 이야기 하시기보다는 30년 전에 그 아버지를 내 마음 속에서 불러내야 된단 말이죠.
그래서 내가 예를 들면 아버지라고 불렀으면 아버지 또 한 번 아버지 한 세 번을 아버지 하고 부르면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올라와요.
그리고 아버지가 여기 있거든요.
그리고 이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는 거예요.
그때 내가 얼마나 화가 나고 아버지를 얼마나 그때 내가 미웠는 줄 아세요?
왜 나한테 그때 그러셨어요?
나는 그때 아버지한테 정말 사랑한다는 얘기 한마디만 듣고 싶었었는데 아버지는 왜 그때 나한테 그렇게 모질게 했어요?
이런 얘기를 다 하는 거예요.
얼마든지 해도 돼요.
이건 뭐 시간을 정해놓고 할 것도 없는 거고 계속하고 충분히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이제 그만하고.
그런데 또 생각나?
그럼 다음에 또 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하냐면 이제는 아버지가 용서가 될 때까지 그걸 계속 반복해서 하면 되는데
내가 정말로 내 마음에 있는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를 하게 되면 그렇게 오래 안 걸리고 풀려요.
그러면 현재 아버지하고의 관계가 좀 더 편해진다는 거예요.
자녀는 항상 부모가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되기를 원해요.
저희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저희 어머니가 만으로 백세시거든요.
보통 연세가 아니잖아요. 백세니까.
제 친구들이 백세가 되신 어머니가 네 옆에 계신다는 게 얼마나 복이냐 이렇게 얘기하는데 물론 그렇죠.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하는 생각을 들면 내가 딱 먼저 떠오르는 게 그러면 이제 나는 고아잖아.
그러니까 고아라는 게 우리가 주는 게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고 두렵고 하는 게 고아잖아요.
저도 이제 나이가 꽤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인데도 어머니까지 돌아가신다 그러면 내가 고아구나 하는 이런 느낌이 든단 말이죠.
그러니까 편찮으셔도 괜찮으니까 내 옆에 계셔만 주셔도 굉장히 내가 안심이 되는 이런 느낌이 듭니다.